▲ 방예금 약력: 중국 (흑룡강 오상) 방송국 1급 아나운서, 흑룡강신문, 흑룡강방송 특약기자. 2015년부터 수필 창작 시작, 흑룡강신문, 요녕신문, 송화강, 청년생활 다수 발표. 수차 KBS 한민족 방송 우수상 획득.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시낭송협회 분과장.
[서울=동북아신문]“누나, 아버지가 ‘센스쟁이’가 되셨어.”

4월 12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자식들에게 ‘센스쟁이’로 마지막 모습을 남기셨던 아버지가 연 며칠 이 못난 딸의 가슴을 저민다. 아버지는 워낙 ‘센스쟁이’가 아니셨다. 어머니에겐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남편이셨고 자식들에겐 ‘일방적 사랑’을 쏟으셔서 곧잘 자식들의 불만을 자아내던 아버지셨다. 25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뭘 먹고 싶니?” 설장을 보러 가실 채비를 하시던 아버지가 우리 세 자식들에게 물으셨다. “아빠, 향어나 잉어 사다 주세요.”, 막내 여동생이 얼른 대답했다. “물고기가 질리지도 않니? 물고기가 뭐 맛있다구?” 아버지는 이 한마디를 던지시고는 문을 나섰다. 설마 했는데 장을 보고 돌아온 아버지의 설 장 바구니엔 정말로 물고기가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간, 염통, 천엽 등 동물 내장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빠, 참 실망이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에게 쏘아 부치었다.

아버지의 일방적 사랑이 이번에는 나와 남동생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친정에 들어서니 주방에 자그마한 가마솥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연변에서 유동판매차가 왔었는데 아빠가 너희들 하나 씩 준다고 산거란다.” 자식들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행하신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원망어린 말씀이다. 아버지는 도시 생활을 하면서 전기밥솥 밥만 먹는 자식들에게 누룽지가 붙는 맛있는 가마솥 밥을 해 먹인다고 가스레인지용 가마솥을 사셨던 것이다. 아이구, 때는 내가 마침 5000여원(한화 약 100만원)을 주고 미국제 고급 솥을 세트로 산 지 며칠밖에 되지 않던 날이었다. 올케도 누가 비슷한 가마솥을 선물했다며 안 가져간다고 하였다. 결국 아버지의 가마솥 선물은 막내딸한테만 닿았다. 그 때 아버지의 못내 섭섭해 하시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마음이 한 없이 쓰리다. ‘쓰지 않더라도 받아서 집에 가져갈 걸.’

어느 날, 나의 발끈한 성격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시는 아버지 앞에서 끝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친정에 갔는데 출입문 밖에 놓여있는 매트가 다 낡아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머, 매트가 이 지경이 되었네.” 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안 방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올 때는 매트를 사오너라.” 나의 입에서는 부지불식간에 볼 멘 소리가 튀어 나갔다. “아빤 저한테 뭘 맡기셨어요?” 때는 마침 남편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내가 무척 예민해 있을 시기였다. 사실 친정집도 맏딸인 내가 사드린 거고, 또 부모님께 뭐가 필요한지 자주 여쭤보고 챙겨드리던 나였다. ‘돌발 사태’에 어정쩡해서 한참이나 할 말을 잊으시던 아버지의 만감이 교차한 듯한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일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후회로 가슴을 쥐어뜯는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은 남동생으로 하여금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도 하였다. 고3 때 여동생이 뇌하수체 종양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에 타격을 입은 남동생은 대학입시에서 예상보다 50점이나 낮은 점수를 받아 합격선에 도달하지 못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 아들을 보면서 속을 끓이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시더니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하셨다. “재호야, 연변과학기술대학에 가는 것이 어떠냐?” 설립 첫 해인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조선족 대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에서 광고를 보신 아버지가 이 대학에서 고향에 임시 설립한 학생모집 사무실에 찾아가서 대신 등록하셨던 것이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졸업한 후 남동생은 숭실대학교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아들에게 부모로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셔서인지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아주 ‘당당’하셨다. 어느 날은 아들에게 “우리 너희들한테 가서 살겠다”라고 통보하시고 그대로 곧장 시골집을 팔아버리고 북경에 있는 아들 곁으로 가셨다. 아들 곁에 가셔서는 사흘이 멀다하게 아들을 호출하셨다. “재호야, 소고기 좀 사다 주렴”, “재호야, 약 다 떨어졌다.”, “재호야, 병원 같이 가보자.”......

이러시던 아버지가 2015년 연말 집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담낭암 말기란다. 길어야 3개월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 우리는 아버지한테는 빈혈이라고 말씀드렸다. 세 자식이 함께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설을 쇠기로 하고 친정에 도착한 날, 아버지 상태를 묻는 나의 말에 남동생이 아버지가 ‘센스쟁이’가 되셨다고 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하신 후, 전혀 자식 눈치 보기가 뭔지 모르시던 아버지가 남동생 눈치를 엄청 보신단다. 모든 일을 아들과 상의하시는 건 물론 명령조가 의논조로, “해달라”가 “해줄 수 있겠니”로 바뀌셨단다.

‘센스쟁이’가 이런 뜻이었다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3개월을 무사히 넘기셨다. 그런데 이듬해 7월 중풍으로 6년간 몸져누워 계셨지만 치명적인 병은 없었던 어머니가 생각밖에 먼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센스는 더욱 ‘업그레이드’되었다. 아들의 눈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출가외인인 딸들의 눈치까지 보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아버지가 감당 못 하실까봐 아버지와 의논 끝에 당분간 막내 딸 집에 가서 계시게 하였는데, 막내 딸 집에서 한 달간 머무는 동안에도 그렇게 딸과 사위의 눈치를 보시더란다. 다시 아들 곁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아들이 그토록 모셔가려 했지만 아버지 댁에 혼자 계시기를 고집하셨다. 아마도 며느리에게 ‘민폐’가 될까봐 서였을 것이다. 정녕 못 말리는 아버지의 ‘센스’였다. 결국 남동생이 아버지 댁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냥 “센스쟁이”가 아니셨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아버지가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를 부르셨다.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 나는 평생 너희 엄마에게 훌륭한 남편이 되지 못했고 너희들에겐 훌륭한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너희 엄마와 너희들에게 많이 미안하구나. 나와 같은 배우자, 부모가 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너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항상 상대를 많이 배려하고 서로 양보하면서 화목한 가정 꾸려나가기 바란다. 항상 내가 희생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가정이 행복하니라. 그리고 엄마, 아버지가 없더라도 너희들은 3년에 한 번씩 모여라. 만나지 않으면 형제 우의가 없어지느니라.”

난 반평생을 살면서 이날처럼 아버지가 멋있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센스쟁이’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이 정말 그립고 그라워 난다!

아, 아버지!…….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