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1970년 여름의 어느날, 하방호로 내려왔던 은주네가 연길로 돌아가게 된다는 소문이 우리 대대에 쫙 퍼졌다. 

    은주는 소학교 사학년 때 아래마을로  이사왔다.
    갸름한 얼굴에 하얀 얼굴, 머루알 같이 까만 눈을 가진 은주는 얼굴이 이쁜데다 옷까지 곱게 입었다. 선생님이 은주를 내곁에 앉혔기에 우리는 그동안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은주가 이사간다니 몹시 속상했다.
   
   누군가 은주와 가깝게 보내던 몇몇이 연길에 가서 사진 찍어 기념으로 남기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나는 아무 고려없이 그러자고 대답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온통 기쁨으로 차 있었다. 그런데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걱정이 앞섰다. (돈이 많이 들겠지? 연길까지 갔다왔다 차비 20 전, 사진값 20전, 점심값 10전, 적어도 50전은 있어야 하는데...아니, 아니야, 차비는 무슨, 소학생도 아니고 이젠 중학교 이학년인데 ....)
    
   매일 십리씩 걸으며 소학교를 다녔고 이젠 또 매일 십오리씩 걸어 공사마을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나에게 있어서 연길까지 걸어갔다 걸어 오는것은 큰 문제 아니었다.
    (그럼 차비 20전 빼면 30전만 있으면 돼.) 후-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 부지런히 집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이 돈 30전을 누구와 달라고 하지?)
그 누군가에게서 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저도 모르게 어두운 그늘이 비꼈다.
   
   우리 집은 째지게 가난한것은 아니지만 아홉 식구에 로동력이라고는 아버지와 엄마뿐이여서 일년 가정수입이 얼마 안되였다. 거기에 공부하는 학생이 넷이다보니 매일 필기장 사겠다 연필 사겠다는 소리가 그칠사이 없었다. 그때마다 엄마가 한숨 쉬는 것을 많이 보아 온 나이기에 친구들과 사진 찍으러 연길에 가겠다고 돈을 달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미 가겠다고 대답했으니 어쩌겠는가?

    다른 애들 같으면 의례 엄마한테 돈을 달라고 할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럴수 없는 리유가 있었다. 엄마가 계모였던 것이다. 세상물정 좀 알기 시작해서부터 다시 말해 엄마가 계모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눈치생활을 해 온 나다. 

   물론  계모는 나를 잘 대해 주었다. 자기가 낳은 동생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죽게 욕했지만 전처 자식인 나와 오빠만은 잘못을 저질러도 절대로 욕하지 않았다. 계모를 책속의 계모들에 비해 더없이 착하고 인자하다고 (참으로 다행이다! 저렇게 곱고 똑똑하고 부지런한 녀자가 내 계모여서....) 라고 자아위안 할때가 많았다. 그런데 어떤 때엔 계모가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조직하는 행사에 필요한 돈만 엄마하고 달라군 했다.

   나의 머리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피뜩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도리머리질 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여태껏 아버지한테 안긴 기억이 없고 아버지와 함께 논 기억도 없다. 어디 그뿐인가? 아버지는 종래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냥 엄숙한 얼굴로 하루에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어쩌다 웃는것은 막내 녀동생이 "아부제(아버지)"라고 부르며 달려가 안길 때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싫어 말하기조차 싫었다.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아버지와 돈을 달라고 한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래도 엄마와 말하자. 엄마가 기분 좋아할 때 말하면 줄거야.)

       그런데 저녁에 일밭에서 돌아온 엄마의 기색을 살피니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엄마의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고 피곤기만 력력하다. 하긴 아침 일찍부터 두벌 논김 매러 나가셨고 돌아올 때에는 돼지 풀을 한주머니 이고 오시지 않았던가?
저녁식사가 끝나자 나는 여느 때와 달리 설겆이를 도와 나섰다. 설겆이가 끝나자  엄마는  피곤하시다면서 일찍 자리를 펴고 눕는것이였다.

  나는 속이 바질바질 타 앞마당에 나갔다. 후회하기 시작했다. 공연히 가겠다고 대답해 놓고 이렇게 속탈줄이야!
   ( 래일 학교 가서 친구들과 안 가겠다고 말하지뭐.)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집에 들어와 숙제도 하지 않은  채 할머니 곁에 누웠다. 이상하게 좀체로 잠이 오지 않는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며 반겨주던 은주의 고운 얼굴이 떠오른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모르는데 함께 사진이라도 찍어 두면 얼마나 좋을가?

  또 친구들의 성난 얼굴도 떠오른다. 왜 간다고 하고 안 가냐고?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고 거짓말쟁이라고 놀려 줄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무서워 났다. ( 안돼! 연길로 가야 해! 래일 말하자. 아직 하루가 있는데.)
    이튿날은 토요일이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절반은 달음박질 했다. 해가 지기전에 마을 서쪽에 있는 버들 방천에 가서 버들 버섯을 캐오려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열흘 전에 버섯을 캐오니 할머니가 감자와 버섯을 함께 넣고 찌개를 끓였는데 온 집 식구 특히 엄마가 제일 기뻐하시며 많이 드시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인지 버들 방천을 샅샅이 훑었지만 나는 버섯은커녕 버섯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서운한 마음으로  빈 광주리를 들고 집에 돌아오니 남동생이 도랑물에 가 물고기를 잡는다고 흰대복을 적셔 엄마한테 야단맞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나는 또 엄마와 연길 가는 일을 말하지 못했다. 온 밤 자지 못하고 끙끙 랭가슴 앓았다.
일요일 아침, 애들과 약속한 시간이 거의 왔다.  온 집 식구들이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밥상 두개에 나눠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남자들은 남쪽상에 녀자들은 북쪽상에 둥그렇게 앉아 말도 없이 식사했다.

    나는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몇 숟가락 뜨네 하다가 일어나 물뽐뿌 있는데로 가 물독을 들여다 보았다. 물이 절반 밖에 없었다. 나는 뽐뿌를 잣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말하면 혹시 주지 않을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벽시계를 쳐다보니 이제는 반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관건적인 시간이 왔다.
  "엄마, 내 오늘 연길 마다매(큰어머니)네 집에 가 옥수수 국수 바꿔 오람두?"
   나는  끝내 용기를 내어 전 날 저녁 잠을 설치며 생각해 낸 연길 갈 리유를 말했다. 엄마가 가끔씩 입쌀을 이고 연길 마다매(큰어머니)네 집에 가서 옥수수 국수를 바꿔오던 생각이 나 혹시나 통하지 않을가하고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물은 것이다. 온 집 식구들이 밥술을 들고 내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국수 --아직 있어. 바꿔 올 때 안 됐다."
   엄마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맥이 탁 풀렸다. 실망한 나머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뚝 떨구고 뽐뿌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 무슨 일 있니? 왜 연길 가려고 하니?"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구세주가 나타난 것 같아 얼결에 "아래마을 은주가 이사가 동미(친구)들이 사진 찍으러 연길 가자 했쓰꾸마." 라고 실토하고 말았다.
  생각밖으로 아버지가 인츰 일어서시더니 벽에 걸려있는 웃옷 호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란 눈길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 이걸 가지고 가거라." 아버지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보니 불그스레한 오십전 짜리 지페 한장과 넉량 짜리 량표 한장이였다. 나는 너무도 기뻐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인사할 생각은 더구나 못하고...(언녕 아버지와 말할것을, 내가 왜 그렇게 깜짤랐지?)
  허나 기쁨도 잠깐...

   내가 얼른 옷을 갈아 입고 떠나려고 웃방에 들어서서 미닫이를 닫고 웃옷을 벗는데
"뭐라니? 다시 말해!" 하는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고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섬겨 줍소."하는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 얘들도 줍소. 왜 그애만 줌둥.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뒤이어 "우당탕 탕"하는 소리가 들리고 ....
    나는 벗던 웃옷을 다시 주어 입고 잽싸게 미닫이를 열었다. 미처 상상도 못할 정경이 눈에 확 안겨와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두손으로 엄마의 멱살을 잡아쥐고 마구 흔들어 대면서 " 내가 어쩌다 걔한테 돈을 한번 줬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 됐니? "라고 소리 지르는데 부릅뜬 두눈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 두손은 어찌나 꽉 잡아 쥐였는지 엄마는 꺽꺽 거릴 뿐 아무 대답도 못한다.
    " 이보게 아애비, 말로 하오. 말로... 이 손 좀 놓소." 할머니가 울면서 아버지의 왼손을 잡아 당기고 있는데 두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했다. 오빠도 " 아부제, 이 손 놓읍소. 제발 이 손 놓읍소." 하면서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땅바닥을 보니 밥상의 그릇과 음식들이 떨어져 어수선하게 널려있고...너무나도 갑작스레 발생한 일이라 겁에 질린 동생들이 한켠에 몰아서서 부들부들 떨면서 어쩔바를 모르고...

     "아부제(아버지), 내 연길으 아이 가겠으꾸마.  내 안가믄 되재임두. 제발, 제발 엄마를 때리지 맙소. " 울먹거리며 겨우 말을 마친 나는 돈과 량표를 확 던지고 왕왕 울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오른손을 놓더니 주먹을 쥐고 엄마의 얼굴을 향해 힘껏 내리쳤는데 오빠가 제때에 막아섰기에 주먹은 다행히 오빠의 잔등에 떨어졌다.
"아가--"하는 오빠의 비명소리에 아버지는 그만 손을 놓고 물러섰다...

  할머니가 얼른 엄마를 밀고 함께 웃방으로 들어가 미닫이를 닫아 버렸다. 오빠가 나를 흘겨보며 아버지를 부엌 마루쪽으로 밀어갔다.
    웃방에서 "지지(늘) 잘하다 어때(어째) 오늘은 이래우?"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이어 엄마의 울음섞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매, 나두 모르겠쓰꾸마, 어째서 그렇게 소리쳤는지 흑-흑...그렇다고 이렇게 흑-흑- 애들 앞에서 나를 때림두 흑-흑..."
     바로 이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렸왔다. 나는 친구들이 집에 들어와 이 광경을 볼가봐 벌떡 일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썩썩 닦는데 눈물은 어쩐지 그치지 않았다. 

" 너 웬일이야? " 눈물 범벅이 된 나의 얼굴을 본 은주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급히 물었다.
다른 애들도 놀란 눈길로 쳐다 보는 것이였다.
   "응, 나 ?  배 아파, 너무 아파 이렇게 눈물이 자꾸 난다."
  " 미안해, 약속 못지켜서. 너희들만 가!" 라고 말하고는 홱 돌아섰다. 그러고는 크게 소리쳤다."너네 빨리 가!"
  "야, 많이 아픈 모양이다.""나두 리질 해봤어. 진짜 쎄구 아프다." "야, 시간이 늦겠다. 우리 빨리 가자."
    친구들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나는 돌아서서 그들이 간 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고운 옷을 입고 멀리 사라지는 친구들을 보노라니 뜨거운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뚜벅,뚜벅..."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가 집에서 나와 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와서 걸음을 멈춘 아버지는 두손으로 나의 어깨를 붙잡고 측은한 눈길로 한창 바라보셨다. 무슨 말을 할듯 입을 실룩거리던 아버지는 결국 한마디도 못하셨다. 나는 서러움이 북받쳐 저도 모르게 "아부제---"라고 부르며 와락 안겼다. 아버지는 두손으로 나를 가볍게 다독이시다가  천천히 돌아서 가시는 것이였다. 순간, 나는 아버지의 눈가에 뭔가가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맥없이 걸어가는 아버지, 어쩐지 아버지의 어깨가 조금씩 들먹이고 있었다.
  (아, 아버지가 울고 있구나. 아버지가! 아버지도 분명히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
    
    
      오늘의 단평

            허인

    수기의 가장 큰 매력은 곧바로 그 진실성이다 . 최영숙씨의 (아버지의 눈물)(수정본)을 읽고 사내인 내가 주책도 없이 한동안 흐르는 눈물을 멈출수가 없었다. 왜서 이러한 결과가 가능했을가? 마치 동녘에서 어슴푸레 떠오르는 달빛같은 추억속에 어둠같은 간장물을 풀어 놓은듯한 그 씁쓰름함ㅡ특히 엽전잔주 그 오십전에 얽힌 거의 운명적인 고백ㅡ즉 친구 은이가 연길 시내로 이사가게 되여서부터 한 가정의 확실한 구성원이였지만 항상 눈치 보며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야만 했던 작자의 존재는 ㅡ사실적으로 계모라는 그 살갑고도 알뜰한 존재와ㅡ 평소 엄숙하기만 하셨던 아버지라는 이미지 그 사이에서ㅡ줄곧 체념과 욕망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었던것 같다. 한 소녀의 그러한 소신한 행각들을 두눈에 훤히 보이는듯이 이야기로 펼쳐 놓은ㅡ 티없이 맑고 순수한 소녀의 동그란 심리 묘사는 말 그대로 전률이 아닐수가 없었으며 읽는동안 독자들로 하여금 저도몰래 눈물을 훔치게 한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 버섯 따러 갔다가 실패,  공연히 물 펌프를 잣으며 눈치를 살펴야 했던 어느 소녀의 조그마한 모습에서는 독자들의 마음은 스릴이 있는 긴장감을 넘어서서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리고 쓰리다 못해 제대로 알알해 나게 하는듯 하다.

   또한 수기의 가장 큰 특성은 시간 지정이며 사건의 발로, 경과 , 그리고 크라이막스인것 같다. /1970년 여름의 어느날, 하방호로 내려왔던 은주네가 연길로 돌아가게 된다는 소문이 우리 대대에 쫙 퍼졌다./로 시작되여 사진 한장이라도 남기고픈 소녀의 간절한 바램이 스토리에 스토리를 불러들여 결국 화산의 폭발같은  

가정싸움에서 아버지의 눈물을 견인해 내여 ( 아버지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로 결말을 맺은 이 수기는 인생에 대한 한차례의 회억대비이며 자성의 목소리이며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 그리움 자체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온통 기쁨으로 차 있었다. 그런데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걱정이 앞섰다. (돈이 많이 들겠지? 연길까지 갔다왔다 차비 20 전, 사진값 20전, 점심값 10전, 적어도 50전은 있어야 하는데...아니, 아니야, 차비는 무슨, 소학생도 아니고 이젠 중학교 이학년인데 ....)

     매일 십리씩 걸으며 소학교를 다녔고 이젠 또 매일 십오리씩 걸어 공사마을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나에게 있어서 연길까지 걸어갔다 걸어 오는것은 큰 문제 아니었다.
    (그럼 차비 20전 빼면 30전만 있으면 돼.) 후-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 부지런히 집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이 돈 30전을 누구와 달라고 하지?)

그 누군가에게서 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저도 모르게 어두운 그늘이 비꼈다. / 에서 볼수 있는것은 그야말로 기복이 심한 소녀의 흥과 멋, 그리고 불안한 심리묘사이다. 만약 여기서 그쳤다면 이 수기는 그냥동년의 추억으로 읽어도 좋음직한 그런 수필에 그치고 말았을것이다.허나 작자는 독자들의 예리한 감성을 한꺼번에 콩 터쳐 눈물바다를 아룰수 있는 핵폭탄까지 제대로 준비하여 공명감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독자들에게 알려 주는듯 하다.

/일요일 아침, 나는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몇 숟가락 뜨네 하다가 일어나 물뽐뿌 있는데로 가 물독을 들여다 보았다. 물이 절반 밖에 없었다. 나는 뽐뿌를 잣기 시작했다. /에서 부터 시작하여/ (아, 아버지가 울고 있구나. 아버지가! 아버지도 분명히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는 그야말로 핵중의 핵이요 굉음같은 크나 큰 폭발이 아닐수가 없다.

  솔직히 너무 오래만에 글 다운 글을 읽게 되여 눈물을 적잖게 흘렸다. 최영숙님은 별로 말이 없으신 분인데 글 재주가 아주 뛰여난것 같다. 어느새 가을도 막바지에 다달은 이 계절, 좋은 글에 감동할수 있어 필자는 오늘 하루 너무나도 행복하다.좋은 글은 이래서 읽을 맛이 있고 독보적이며 살아 온 경력만큼 저 자신의 인생을 되 돌아 보게끔 하는 마력이 있는듯 하다. 최영숙님은 문단에 아직 알려지질 않은 초학자인줄로 안다. 초학자인 분이 이 정도의 글을 쓸수 있다는데에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최영숙님 화이팅. 앞으로 좋은 글 더 많이 쓰내세요. 계속 주목하여 지켜볼것을 약속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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