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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단편소설/박명선]비닐우산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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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02  19:3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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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      1.

1993년10월 중순.내가 일본에 온 이튿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여덟시경.나는 시내 언덕에 자리잡은 학교로 찾아가는 큰길에서 우산을 들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박명선 약력: 길림성 용정시 출생.1987년 연변대학 일본어학부 졸업.연변교육학원에서 6년간 일본어교원으로 근무.요꼬하마국립대학 대학원 졸업.대학시절 처녀작 시 <갈매기>를 장백산잡지에 발표.일본유학시절 칼럼 <외국사람이 본 일본>을 마이니찌신문에 발표.단편소설 <할머니의 보물>(‘문학의 강’ 신인문학상 수상)로 한국문단에 등단.수필,칼럼,르포 다수 발표.현재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중국 광주 거주.
드넓은 차도에서는 거북이걸음으로 꾸물댈 것 같았던 차량들이 굴레벗은 말들처럼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자동차바퀴와 사람들의 신발에 짓밟힌 더러운 흙탕물이 튕겨올 줄 알았는데 아스팔트길에 쏟아져내리는 빗물은 파도처럼 하얀 물결을 일구며 하수구구멍으로 맑게 그리고 세차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사이에 파란 신호등으로 바뀌었다.신호등에서 울려오는 귀맛좋은 초침소리와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함께 들으며 횡단보도를 거의 건너왔을 때였다.

나의 발길에 가벼운 물체가 걸채이는 느낌이 들었다.무엇인가고 보았더니 하얀 비닐우산이었다.
경사진 아스팔트길이었고 빗바람이 불어와 우산은 펼쳐진 채로 하수구까지 밀려갔다.큰길 난간에 막혀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하수구 소용돌이 속에서 빗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혹시 앞서 가던 사람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나 살펴보았지만 저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을 놓고 있었다.

누가 버린 우산이 아니라 떨어뜨린 우산이 분명했다.
이 우산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느 행인이 주워가지 않으면 청소부의 집게에 집혀 쓰레기장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그리고 하수구구멍이 막힐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누가 자기의 우산이라고 찾으면 돌려줄 요량으로 친구 집에서 들고왔던 삼단식우산은 접어서 카바를 씌워 가방에 넣고 그 비닐우산을 들고 언덕길을 올라갔다.학교로 올라가는 언덕길 위에 두 여학생이 하얀 비닐우산 하나를 쓰고 달려가는 모습이 뒤늦게 보여왔다.

교무과에서 등록을 마치고 지도교관한테 인사를 드리려고 도서관 옆에 위치한 청사에 들어섰다.여기 출입문 옆에도 신발장처럼 보이는 우산꽂이시렁이 놓여있었다.교무과에서처럼 우산꽂이시렁에 우산을 꽂아두었다.제일 안쪽에 똑같은 비닐우산 하나가 놓여있었다.복도 저켠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도수 높은 안경을 건 한 교수님이 두 여학생에게 뭔가를 분부하고 있었다.

2층 지도교관연구실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분은 사진에서 보았던 상냥하고 인자하신 교수님이었다.일본에 온 목적이며 연구분야며 가정상황 그리고 추천한 교수님과의 인연 등을 다시 낱낱이 체크하고나서 석사과정에 입학한 남학생이 없기에 여학생이 앞으로 진학에 도움이 될 학습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지도교관에게 인사를 마치고 층계를 내려가는데 아까 복도에서 보았던 그 교수님과 두 여학생이 층계를 올라오고 있었다.나는 허리를 약간 굽혀 교수님께 인사를 올리고 옆을 스쳐지나려는 여학생을 훔쳐보았다.스물서너살 쯤 되어 보였고 왼쪽 팔소매가 약간 젖어있었다.청아한 눈빛에 청순한 여고생 같은 짧은 머리를 한 하얀 얼굴의 그녀도 나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닐우산을 들고 출입문을 나서려다가 그녀의 우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좀 기다려서 우산임자를 확인해봐야겠다는 충동이 생겼다.

빗줄기는 좀전보다 많이 수그러들었고 하늘을 쳐다보니 금세 비가 그칠 것 같았다.언덕에 위치한 학교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날렸다.나는 비닐우산을들고캠퍼스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건넬까 궁리하면서 기다렸다.
얼마 안 되어 두 여학생이 두툼한 책 한권씩 지니고 나왔다.그녀 옆 여학생이 하얀 비닐우산을 펼치려는 걸 보고 그녀에게 한발 다가가며 물었다.
"저...혹시 이 우산이 당신의 우산이 아닌지요?"
나보다 대여섯살 어렸지만 학생이라고 부르자니 실례인 것 같아 당신이라는 존칭을 사용했다.당신이라고 불러놓고 좀 쑥스러웠던지 나는 게면쩍게 웃었다.그녀는 나를 경계하는 눈빛 하나 없이 말끄러미 쳐다보는 것이었다.

"글쎄요.아까 학교언덕 아래에서 떨어뜨리긴 했지만..."
"네.바로 학교언덕 아래에서 주웠습니다.두 분이 우산 하나를 쓰고 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녀는 우산을 살펴보더니 별로 서슴치 않고 자기 우산이 맞다며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옆에 있던 여학생도 일본여성다운 덧니를 드러내며 나에게 웃어보였다.
"어느 학부 학생인가요?"
나는 인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교육학부입니다.그 쪽은요?"
"네.저도 교육학부입니다.금방 입학수속을 마친 유학생입니다."
나는 묻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아,그럼 대학원생이겠네요.한국에서 오셨어요?"
유학생이라고 하니 내가 한국에서 왔는가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교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오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가끔씩 한국어가 귀에 들려오기에 이 대학에 한국유학생이 많을 거라 짐작은 했었다.
"아닙니다.중국에서 왔습니다."
"그래요?처음 뵙겠습니다.4학년생 고하다(木幡)입니다.이쪽은 한반 친구 스즈끼 (鈴木)입니다."
"박입니다."
"박?소박하다는 박 아닌가요?한국인들 가운데 박씨 성이 많지 않아요?"
"네.중국에도 박씨 성이 많습니다."
"..."
그녀가 좀 어리둥절해하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중국 조선족입니다."
"아,그렇네요.만나서 반갑습니다.지금 수업시간이 바빠서요.그럼..."
고하다는 다시 인사를 하고 스즈끼와 얘기를 주고받으며 테니스장이 보이는 북쪽 청사로 달려갔다.하얀 비닐우산과 하얀 샤쯔가 유난히 어울려 보였다.고하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문뜩 고하다가 입었던 바지가 생각났다.아까 얼핏 보았더니 고하다는 무릎살이 약간 들여다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무릎이 왜 나왔을까?왜 구멍난 청바지를 입었을까?
일본여인들이 집에서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고 앉는다더니 그래서 바지무릎이 닳아서 구멍이라도 생긴 것일까?
헌데 그런 같지는 않아 보였다.청바지는 너무나 멀쩡했다.
그럼 혹시 가위로 성한 바지에 구멍이라도 낸 것일까?설마 통풍이 잘 되라고?이것도 유행일까?이것도 일본젊은이들의 시체멋일까?
청바지라 해도 구멍난 청바지는 처음 보는 나였다.저도 모르게 머리가 갸우뚱거려졌다.


2.

일본에 와서 잠시 친구 집에 머물러있기로 했다.나보다 반년 먼저 일본에 온 친구였다.학교 기숙사에 주숙하려고 기숙사에 가보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이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새벽에 들어올 지도 모르고 지친 몸으로 언덕길을 어떻게 올라오랴 싶었다.2~3만엔 쯤 하는 값싼 셋방을 시내에서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거의 되어 학교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전철역으로 가는 길 아니면 요꼬하마(横浜)역에서 전차를 갈아탈 때 출구를 나와 역전 부근에 부동산이라도 있는가 살펴봐야지.
허참, 내가 다시 학생이 되다니?서른이 되도록 학생딱지를 벗지 못하다니?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큰길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왔다.
물이라도 사마시려고 꽃가게 옆 패미리마트에 들어선 나는 그만 멈춰섰다.문 옆에 우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는데 비닐우산이 300엔이었다.보통우산은 1,000엔이었고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우산들은 2,000엔이었다.

나는 비닐우산임자였던 고하다를 떠올려보았다.아침에 친구집을 나설 때는 작은 비가 내렸기에 우산을 꺼내들지 않았지만 전차에서 내려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빗줄기는 제법 굵어졌고 빗바람도 몰아쳤다.비닐우산이 세개 팔린 것으로 보여졌다.아마 고하다가 아까 여기를 지나다가 비가 쏟아져내리니 이 패미리마트에 들려 스즈끼와 같이 비닐우산을 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00엔짜리 비닐우산이라?그래,까짓 비닐우산이야 길바닥에 떨어뜨려도 크게 아쉬울 건 없지 않겠는가?
문 옆에 오래 서 있기가 무엇했다.가게 안을 한 바퀴 돌고나서 물 한 병을 골라들고 계산대로 갔다.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일본이란 나라는 하루 절반의 시간은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는 일에 소진하지 않나 싶었다.돈을 치를 준비를 하려고 가방을 들추다가 지도교관이 전화번호를 적어준 메모지가 보여서야 학습파트너라는 여학생한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병을 들고 밖에 나오니 무엇보다도 담배생각이 간절해졌다.깔끔하게 포장한 마이르도세븐 한 갑이 220엔이었다.방금 전에 담배 한 갑을 사려다가 앞으로 300엔짜리 값싼 비닐우산이라도 갖추려고 그만 나와버렸다.나는 대롱대롱 값이 달려있는 비닐우산들을 슈퍼 창문너머로 다시 들여다보았다.
중국에서 사가지고 온 담배를 가방에서 꺼내 한 대 피우고 싶었지만 공중장소이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노임을 받기 전에는 중국담배 한 보루를 집에서만 피우리라 다짐했던 것이 생각나 그대로 패미리마트 옆 공중전화청으로 갔다.

학습파트너의 전화번호는 집전화가 아니라 핸드폰 전화번호였다.학생들도 학교에서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도 갖추고 싶어졌다.다음 주 월요일 오전 두번째 수업시간에 지도교관이 본과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강의를 하는데 석사생과 연구생들도 방청한다고 하면서 수업 전에 **청사 3층계단교실 문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면 월요일에 고하다를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구나.
전화를 마치고 보니 오늘이 수요일이었다.내일도 모레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석사과정진학 전의 연구생공부가 수월하다던 말이 실감이 났다.
나흘이라 주어진 시간내에 빨리 셋방부터 구해놓아야지.우산이고 담배고 핸드폰이고 수업이고 뭐고 셋방과 일자리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일본에 올 때 값싼 셋방에서 살면서 아무 일이나 닥치는대로 하리라 결심한 나였다.
"그럼 면접 보러 오세요.지금 어딘가요?"
"바로 가게 옆에 있습니다."
"그럼 들어오시지요."
요꼬하마역 출구를 나와 무작정 큰길을 따라 부동산이 있는가 살펴보며 걷다가 한국인이 경영해 보이는 듯한 불고기점 유리창에 <아르바이트모집>이라고 써붙힌 광고를 보고 장난 삼아 전화를 했더니 면접 보러 들어오라고 할 줄이야.

규모가 굉장히 큰 가게는 한국전통식 불고기점이었는데 점장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눈이 시원스럽고 가슴이 풍만한 젊은 일본여자였다.눈빛이 애교스러워 면접을 보면서 몇 번이나 눈길을 돌렸다.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금방 발급받은 학생증을 보더니 외국인등록증도 보여달라고 했다.외국인등록증은 아직 신청하지 않았다고 여권을 보여주려고 하자 괜찮다고 웃으며 학생증만 복사해두라고 공작새처럼 머리를 염색한 홀경리인 듯한 여성에게 상냥하게 분부했다.그리고는 홀서빙보다 먼저 주방에서 일할 수 없겠는가고 물었다.나는 쾌히 승낙했다.시급은 일본인학생들과 마찬가지로 900엔이고 시간은 오후 네시부터 저녁 열시까지 여섯시간이며 언제부터 나올 수 있는가고 다시 묻기에 오늘저녁부터라도 좋다고 했다.그랬더니 점장은 내가 도리여 미안해질 정도로 고맙다고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문밖까지 바래주는 것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일본여인들을 만나는 날인가?

일본에 온 이튿날에 일자리를 구하다니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운 일인가?!
아까 점장이 아끼야마(秋山)라고 자아소개를 했다.가을의 산.내가 일본에 온 것도 가을이고 학교도 산은 아니지만 언덕에 있지 않는가?
야릇하고 교묘한 느낌이 들었다.아끼야마가 귀인처럼 느껴졌다.
하찮은 식당 주방일을 구하고서도 왠지 저절로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렸다.
셋방을 먼저 구하자고 했는데 일자리를 먼저 구하다니?아무래나 좋았다.셋방도 이제 곧 구해질 것이리라.
인행도를 걸으면서도 자아승리감에 젖어 실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이상한 사람이지 않나 나를 흘겨볼 사람도 나를 아는 사람도 여기에는 없다.
길 옆 나무가지에 앉아있던 까마귀 몇 마리가 비에 젖어 더욱 반들반들해 보이는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깍깍 하고 내 머리 위로 날아갔다.처음 보는 일본까마귀들이다.일본에서는 까마귀를 불길의 상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까마귀는 왜 울까?》라는 일본노래가 생각났다.까마귀가 왜 우는지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바삐 걸어가는 저 정장차림인 일본인샐러리맨이나 지나가다가 뒤돌아서서 예쁜 여자들의 몸매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저 일본인아저씨나 알겠지 내가 어찌 알겠나?
다시 전철역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3.

여전히 잔뜩 흐린 오후였다.
알람을 맞춰놓고 좀 자려고 누웠는데도 좀처럼 흥분이 가셔지지 않으며 잠이 오지 않았다.그만 일어나서 화르륵 창문을 열었다.축축한 공기가 집안으로 들어왔다.하늘에서는 회색구름이 흘러가고 있었고 앞집 마당에 있는 이름 모를 과일나무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에 맺혔던 빗물이 낙엽 위에 툭툭 소리내며 떨어졌다.길 옆 쓰레기상자는 깨끗하게 비어졌는데 까마귀 몇 마리가 땅에 내려앉아 뭔가를 부지런히 쪼아먹고 있었다.이전엔 까마귀라는 새를 증오하였는데 오늘은 왠지 이상하리만치 과자부스러기라도 있으면 던져주고 싶은 마음이다.
《까마귀는 왜 울까?》라는 노래를 다시 흥얼거리며 책상에 쪽지를 써놓고 일찌감치 집문을 나섰다.
"일찍 나오셨네요."
아끼야마점장이 반색하며 맞아주었다.
"그럼 먼저 탈의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대청에 손님상이 한 상 있었고 주방을 지나며 보니 흰 주방복을 입은 대여섯명 일본인들이 분주하게 돌아치고 있었다.탈의실은 창고 옆에 있었다.아끼야마가 남자탈의실까지 들어와서 카운터에서 들고온 하얀 주방복과 까만 바지를 건네주며 롯카를 알려주었다.12번 롯카에 나의 성씨가 씌어있었다.
"주방에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팬티바람에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주방에서 기다리는 줄로 알았던 아끼야마가 문 옆에 서 있었다.
엇!혹시 내가 옷을 벗는 걸 보지 않았을까?
"싸이즈를 몰라서요.바지가 좀 커보이네요.내일 좀 작은 싸이즈로 바꿔드릴께요."
아끼야마가 웃으며 나의 바지 앞섶을 손으로 당겨보며 말했다.손이 거기에 거의 닿을 번했다.
주방장은 쉰살이 넘어보이는 이시이 (石井)라는 남자였고 주방보조도 모두 남자들이었다.설거지도 남자들이 하는가?그럼 내가 아낙네들처럼 설거지를 해야 하는가?주방에서는 모두 장화를 신어야 했다.장화를 바꿔신은 나에게 주방장의 지시를 따르라고 말하고 아끼야마는 그제야 대청으로 나갔다.
팔자형 콧수염을 기른 이시이주방장의 말투는 거칠었다.
불고기 철판을 닦아내는 일이 나에게 차려졌다.

펄펄 끓어넘치는 큰 가마에 시꺼멓게 탄 철판들을 넣어 소독한 후 꺼내서 철사로 깨끗이 닦아낸 다음 옆 가마에 넣어 재소독해서 기름칠을 먹여 철판전용시렁에 올려놓는 일이었다.전기로 물을 끓이는 가마 옆에 철판들이 어지럽게 쌓여져있었다.지금 대청에 한 상 밖에 없는데 웬 철판들이 이렇게 많을까?내가 온다고 점심의 철판들을 닦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아끼야마점장님께서도 알고 계실까?
뜨거운 가마 옆에서 처음 해보는 일을 하다나니 반시간도 안 되어 그만 땀벌창이 되고 말았다.주방장이 옆에서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한참 하다가 그만 손맥이 풀려 화장실에 갔다오겠다고 일어섰다.주방장은 머리를 끄덕였다.화장실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니 아직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찬물에 세수를 하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겨우 5시를 좀 넘겼다.가게 출입문으로는 손님들이 육속 찾아들어오고 있었다.

주방에 다른 한 사람이 와 있었다.스물둬살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약하고 키 큰 남자였다.나는 그에게 웃어보이고 다시 가마 옆에 앉았다.그러는 나를 그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주방장이 그에게 오늘은 야채를 다듬고 설거지를 하는 일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아끼야마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박상이 이 일을 해요?"
나는 주방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네.히구찌(樋口)와 바꿔해봐야죠.주방일은 모두가 익숙해야 하고 서로 협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경스러운 태도로 그럴 듯하게 말하는 주방장이었다.아끼야마가 뒤에서 다시 말했다.
"내일 모레 준비는 다 되었겠지요?아,그리고 박상,모레는 점심 열한시부터 나와줄 수 있겠어요?"
모레는 큰 예약이라도 있는 것인가?나는 일어서려다가 그러겠다고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갖가지 모양의 크고작은 그릇들이며 철판들이 주방으로 가득 날라져왔다.몇 명 남녀대학생들이 서로 웃으며 나르고 있었다.삽시간에 나의 눈앞에 철판이 산더미처럼 쌓여졌다.설거지는 두 사람이나 하고 있었다.히구찌가 나한테로 다가와 일손을 도우려고 하자 주방장이 그를 불러세웠다.

아까는 협력이라고 했지?흥!나 혼자서라도 할 수 있다.아무튼 열시가 되면 나는 다 하든 못 하든 일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니깐!그러면서도 일손은 늦추려고 하지 않았다.
"식사시간!"
둬시간이 지나서 주방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근이며 풋고추며 여러가지 야채들을 넣어서 볶은 색상이 고운 비빔밥이 주방탁상에 올라왔다.
"박상도 빨리 와서 식사하세요."
다들 나를 부르는데 주방장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집에서 먹고 왔습니다."
나는 주방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주방장과 얼굴을 맞대고 같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철판은 쉴새없이 들어왔다.이젠 일도 점점 손에 익어갔다.100장은 몰라도 6,70장 철판은 나의 손에서 깨끗하게 닦아지고 손님상으로 나갔으리라.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휴식!"
이번에도 주방장이 소리를 질렀다.마침 나의 일도 끝났다.벽시계바늘은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청소를 하는 사람들 곁에서 호프잔을 쳐들고 내가 일을 끝내자마자 휴식이라고 소리를 지른 주방장을 나는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대청에서도 종업원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자고 보니 손바닥은 소고기육회처럼 발가스름해졌고 손마디는 몇 군데가 하얗게 껍질까지 벗겨져있었다.
집에서 물걸레질 한번 하지 않은 내가 오늘은 애들처럼 물장난을 심하게도 했군.저녁을 굶어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군.
종업원들이 하나 둘씩 아끼야마에게 인사를 하고 출입문을 나섰다.
탈의실로 가려고 카운터를 지나다가 아끼야마와 마주쳤다.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면 안 돼요.일이 힘들잖아요?"
"괜찮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퇴근할 때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같은 길입니다."
"아닙니다.절로 가겠습니다."
밖에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다.한참 역으로 걸어가는데 아끼야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서 타요."
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볼까 두려워 나는 얼른 차에 올랐다.고급스럽고 널찍한 토요타차였다.일본에서는 차량들이 좌측통행이라더니 핸들이 오른쪽에 있었다.
"쯔루미(鶴見)역 동구 쪽이라고 했죠?"
"네."
"우리 어디 가서 술 한잔 하며 얘기를 할까요?"
"미안합니다.친구에게 열한시 전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요?친구와 같이 있으면 불편하시겠네요."
"그렇잖아도 셋방을 구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제가 구해드릴까요?부동산을 하는 친구가 있거던요."
아끼야마가 나를 쳐다보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머,그 손 보세요.고무장갑 주지 않던가요?"
"괜찮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내가 저도 모르게 자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아끼야마가 눈치를 챘던 것이다.무척 안쓰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럼 오늘은 피곤할테니 일찍 들어가 쉬세요.모레 저녁으로 약속해주세요."
나는 거절할 래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쯔루미역 동구 앞 큰길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집앞까지 모셔다주겠다는 아끼야마를 극구 만류하고 차에서 내렸다.


4.

집 부근 슈퍼에서 사가지고 온 맥주를 친구와 같이 마시며 모레 저녁에는 회식이 있어 많이 늦어질 거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친구가 가게에 대해 물어보자 주방장의 얘기만 꺼냈다.일본에 와서는 많이 참아야 한다며 성격이 나쁜 나를 친구가 근심조로 타일렀다.맥주 두 컵을 마시니 소르르 피곤기가 몰려왔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아끼야마가 자꾸 머릿 속에 떠올랐다.

아끼야마가 왜서 처음 보는 중국유학생인 나를 이렇게 친절하게 대할까?이혼한 여자일까?탈의실에서의 행동을 봐선 남편이 있더라도 욕구불만인 여자인 것 같기도 했다.아니면 내가 조선족이라고?한국전통식 불고기점을 운영하고 있는 걸 보면 아끼야마의 부모 중 어느 한 분이 재일한국인일까?
모레 저녁에는 내 생애에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올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낮게 켜놓은 티비에서 내일도 흐리고 가끔씩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고했다.비가 내린다는 말에 오전에 만났던 고하다와 비닐우산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던 금요일이었다.
어제는 사타구니에 딱 들어붙은 바지를 입었더니 불편함도 있었지만 앉을 때마다 바지가 터지면 어쩌랴 여간 조마조마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아끼야마에게 다시 바꿔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오늘 점심에는 한국여행단체팀의 예약이 있었다.아끼야마가 나를 홀서빙으로 나서라고 했다.대청종업원의 복장으로 갈아입으니 바지가 편하여 좋았다.만약 한국손님들이 웃웃에 달린 명찰을 보고 물어보면 한국어로 대답해도 좋다는 아끼야마의 말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를 점심부터 나오라고 했을까?
한국손님들은 나이가 지긋한 한국 어느 지방에서 여행을 나오신 분들 같아 보였다.모두들 나의 존재는 의식하지 못한 듯 명찰도 살펴볼 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가끔씩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지만 가이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며 일이 있으면 부르겠다고 했다.
한시간 쯤 되어 손님들이 가게를 나갈 때 아끼야마가 웃음 띤 얼굴로 손님들에게 한국어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발음도 아주 정확했다.가이드에게 봉투를 넘겨주며 큰길까지 같이 나가면서도 한국어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한국어를 잘 하시네요."
가게로 들어오면서 나는 아끼야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조금은 할 줄 알아요.자,식사하러 갑시다."
오늘은 아끼야마가 주방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40대 가정주부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점심시간에 가게에 나와 설거지를 돕는 아줌마인 듯했다.주방장은 창고를 점검해야 한다며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철판을 닦는 일을 계속 해야 했다.바지는 모두 까만 바지였기에 웃옷만 갈아입었다.
가게에 한국손님들이 찾아오고 한국어를 아는 걸 보면 아끼야마의 부모 중 어느 한 분이 재일한국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철판을 닦으며 생각하다가 주방장이 들어오기에 그만 생각을 집어치웠다.저녁에도 예약상이 있어 모두들 자기 일에 분망했다.주방장이 설거지를 하는 아줌마한테로 다가갔다.열심히 일하는가 살펴보며 옆을 스쳐지날 줄 알았는데 멈춰서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아줌마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아줌마는 몸을 피하면서도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닦던 철판을 들었다가 바닥에 쾅 하고 내리뜨렸다.
"뭐야?"
주방장이 나를 보고 큰소리를 질렀다.
나는 모르는 체 철판을 계속 닦았다.
한참 지나서 시간이 되었는지 그 아줌마는 일손을 놓고 나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주방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주방을 나갔다.
오늘도 어느덧 퇴근시간이 다 되었다.
아끼야마와의 약속이 있기에 주방장이 주방을 나간 후에도 호스로 바닥 구석구석에 물을 뿌리며 늦장을 부렸다.
탈의실에 들어서려는데 여직껏 뭘 하고 있었는지 주방장이 뒤늦게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롯카 안에 벗어두었던 바지와 가랭이가 조금 젖은 바지를 벗어 잘 개어서 가방 안에 넣었다.
"가방 안의 것이 뭔가?"
내가 문을 나서려고 하자 주방장이 다짜고짜로 물었다.
"바지가 더러워져서 집에 가서 씻어가지고 오려구요."
나는 아니꼬운 눈길로 주방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근데 왜 바지가 두개인가?"
"점심에 홀에 나가지 않았습니까?그 바지를 입고 철판을 닦았습니다."
"그래?앞으론 바꿔입는 걸 명심해."
내가 응대를 하지 않자 주방장이 나를 다시 째려보았다.나도 눈에 힘을 주어 주방장을 노려보았다.남자탈의실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다.
"수고했어."
낌새가 좋지 않아 보였던지 주방장이 바삐 문을 나섰다.탈의실을 나가는 주방장의 뒤통수에 주먹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옆칸 여자탈의실에서 두 여대생이 나오며 '수고했어요'하고 나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지나갔다.
대청의 전등불은 대부분이 꺼져있었다.아끼야마가 카운터에서 명세서를 보고 있었다.내가 옆을 지나자 낮은 소리로 말했다.
"큰길에서 기다려요."
나는 밖에 나와 천천히 걸었다.심상치 않은 예감이 뇌리를 감돌고 있었다.


5.

한참 달리다가 어딘지 모를 레스토랑 앞에서 아끼야마가 차를 멈춰세웠다.열시가 넘었는데 가게에는 아직도 손님들이 있었다.자리에 앉은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괜찮아요?차운전이 있지 않아요?"
"차는 두면 되지요.오늘 기분이 좋네요.아참,중국에 있는 부인과 아들은 일본에 언제 데려오나요?"
아끼야마의 물음에 나는 아내와 네살난 아들을 생각해보았다.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지금은 생각하지 않습니다.헌데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지요?"
맥주를 따르며 내가 묻자 그녀는 비밀이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한테서 배웠어요.사실은 어머니가 재일2세이거던요.어머니도 성이 박씨였는데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아버지 성씨를 따랐지요.아버지는 일본인이고 퇴직한 후부터 불고기점을 운영했는데 장사가 잘 되었어요.그러니 이젠 십년도 넘네요.저도 요꼬하마국대 경제학부를 나와 사쿠라은행에 취직했다가 작년부터 불고기점을 맡아보고 있어요.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요."
"결혼은 하셨겠지요?"
나는 바투 물었다.
"아직 결혼 전이예요.명년이면 서른여덟이 돼요.박상과 여덟살 차이네요."
결혼 전이라니 뜻밖이었다.
아끼야마가 한숨을 내쉬고나서 맥주 한 컵을 쪽 마시더니 두 손으로 빈 컵을 내게 내밀었다.
"어머니와 같은 박씨이고 저의 모교에 유학 오신 박상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어요.중국에서 일본어교원을 하셨다지요?한국엔 갔다오셨어요?전 어머니와 같이 여러번 갔다왔어요."
"네.금년 봄에 아버지와 같이 처음 갔다왔습니다."
"중국에서도 한국에 갈 수 있어요?한국에 친척이 있어요?"
"네."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다 보니 벌써 여러 병이나 마셨다.
"저...한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뭔데요?"
드디여 정체를 들어내보이려나?
"저의 가게에서 오랫동안,아주 오랫동안 일해줄 수 있어요?그러면 박상한테 잘 해드릴께요."
이런 일이었구나.
이런 일을 가지고 난 또...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말 속에 다른 뜻이 있어 보였다.
"생각해볼께요."
"그러세요.전 애도 없구 형제도 없구 남자도 없어요.앞으로 불고기점을 같이 운영해나갈 남자가 필요하거던요.전 그 남자한테 모든 걸 다 줄 수 있어요."
"인젠 열두시가 넘었습니다.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마시지요."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시계를 보며 말했다.
"전차도 인젠 끊겼어요."
옆의 손님들이 보는 것 같아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끼야마가 약간 비칠거리며 계산대로 가는 걸 막지 않았다.
"집까지 모셔다드리지요."
밖에 나오니 마침 지나가는 빈 택시 한 대가 보였다.나는 급히 손을 들었다.
"아니요.저기에 호텔이 보이지 않나요?"
길 건너 거무스레한 빌딩 속에 어슴푸레한 간판이 보였다.
러브호텔?
"그럼,호텔에서 쉬고 가세요."
아끼야마는 나를 놓칠세라 제법 나의 팔짱까지 끼고 호텔로 들어갔다.이런 곳에 들어오자면 이렇게 애인처럼 다정스럽게 보여야 하는가?

생각 밖으로 러브호텔은 체크인이 간단했다.방키를 가지고 2층에 올라가 방을 찾아 들어서니 이인용침대 옆에 커다란 거울이 가로놓여있었다.마치 섹스신이라도 서로 감상하라는 듯이 보였다.
아끼야마가 욕실로 들어갔다.뒤이어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난 나는 도적고양이마냥 호텔방을 가만히 나와 발볌발볌 층계를 내려왔다.카운터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콧등에 안경을 걸고 신문을 읽던 경비아저씨가 아는체 모르는체 앉아있더니 내가 혼자서 호텔문을 나서려고 하자 다급히 뒤쫓아왔다.
"저...미안합니다.그 여성분은요?"
문득 이전에 읽었던 어느 일본추리소설에서의 러브호텔살인사건이 떠올랐다.
괜히 의심받을 일은 하지도 말아야지.
"쥬스라도 좀 사가지고 들어가려고요."
"냉장고 안에도 있는데요.자판기는 호텔 옆에 있습니다."
경비아저씨는 자판기까지 따라와서 내가 쥬스 두개를 뽑아가지고 층계를 다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카운터에 들어가 앉았다.
레몬쥬스를 사들고 방에 다시 들어온 나를 보자 아끼야마는 실망 속에서 헤여나온 듯 웃으며 나에게 안겼다.나의 손에서 쥬스가 떨어졌다.금방 샤워를 끝낸 아끼야마의 몸에서 향긋한 체취가 풍겨왔다.
”씻고 오세요.”
아끼야마가 나의 목에서 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욕실에 들어간 나는 마치 절벽 위에 서있는 사람처럼 눈앞이 아찔해났다.스스로 눈이 감겨졌다.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주체하며 샤워기를 틀었다.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져내려 그나마 긴장했던 탕개를 풀어주었다.
후―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였다.하지만 이 시각이 너무나도 돌연스럽게 들이닥친 감이 들었다.
그래,남자라면…
샤워를 마쳤다.샤워를 마쳤지만 선뜻 방으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망설이던 끝에 욕실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이 문을 열면,이 문이 열리면 나는 곧 다른 남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6.

나는 넋 잃은 사람처럼 욕실문 밖에 서 있었다.
환각이였나?
아끼야마는 없었다.
나는 소파에 가서 풀썩 주저앉았다.탁자에 레몬쥬스 두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아끼야마가 마셨을 쥬스를 흔들어보았다.절반도 마시지 않은 걸 보아 급한 일이 있어 밖에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그걸 사러 갔을까?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저녁은 주방장이 눈꼴 사나와 먹지도 않았고 레스토랑에서는 부실하게 맥주만 마셨더니 배가 고팠다.소파 옆 앉은뱅이 냉장고를 열어보았다.캔맥주 두개와 쥬스며 물병들이 들어있었다.쥬스나 물을 마시랴 싶어 맥주 하나를 꺼내 딱 소리나게 땄다.
맥주를 치켜들고 낯선 손님을 내려다보는 천정을 체념한 듯 올려다 보았다.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다시 새어나왔다.
아끼야마가 왜서 방을 나갔을까?나처럼 뺑소니 치고 싶었을까?아니면 그런 나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었을까?
에잇,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닌가?

그 일을 마치면 근심거리라도 생기지 않았을까?그리고 그녀의 덫에 걸려 앞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되지 않았을까?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생각해보니 자신이 무시 당하고 조롱 받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이럴 때는 슬퍼져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만 욕설이 튕겨나오고 말았다.
괘씸한 여자.갈보 같은 여자!
전화가 걸려온 건 그 때였다.
들고 있던 캔맥주를 탁자에 올려놓으려는데 옆의 전화기가 손님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낮다랗게 울렸다.나는 대번에 누군지 알아차렸다.카운터 경비아저씨가 아니고 아끼야마일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수화기를 손에 들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박상.지금 택시로 급히 아버지집으로 가는 길이예요.카운터에 얘기했어요.남자손님도 인츰 내려올 것이라고..."
그랬다.아끼야마였다.
"무슨 일 생겼어?이 밤중에..."
말이 곱지 않게 나갔다.전화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쓰러졌대요."
"?..."
그런 일이었구나.
헌데 하필이면 이 때에 아버지가 쓰러지다니?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지.암,아버지가 무사해야 할 텐데...
방금 전까지도 꼿꼿해졌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나는 아랫도리를 가리운 목욕타올이 바닥에 떨어진 줄도 몰랐다.급히 당겨 앞을 가려놓고 지지대를 잃은 오이처럼 다시 소파에 허탈하게 너부려졌다.침대 옆 거울 속에 웬 멍청한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마주보고 있었다.
바보 같은 남자.
정신 있는 놈인가?

정신 있는 놈이라면 3,000엔을 내고 러브호텔에 들어와 아무 노릇도 못하고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단 말인가?3,000엔이면 값싼 닭고기라도 푸짐히 살 수 있지 않는가?그러면 이런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집에서 닭탕을 끓여 뜨끈한 국물이라도 마실 수 있지 않는가?그리고 3,000엔이면 비닐우산은 열개라도 살 수 있지 않는가?
문득 이틀 전의 비닐우산이 다시 생각났다.나는 하수구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던 우산이 마치 지금의 자신이라는 착각 속으로 빠져들었다.나 또한 버려져도, 다시 찾지 않아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진 않을까?
그 우산을 줍지 않았더라도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괜스레 죄없는 고하다마저도 밉살스러워났다.
그럼 그 때 그 우산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했단 말인가?경찰서에라도 가져다 바쳐야 했단 말인가?전선주에 우산 찾는 광고라도 써붙혀야 했단 말인가?
나는 그만 벌떡 일어나 아끼야마가 마셨던 쥬스를 욕실에 들고가서 변기에 쏟아넣었다.들들하고 시큼한 냄새가 풍겨왔다.변기의 물을 콱 내리고나니 직성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빈 캔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고 그제야 옷을 챙겨입었다.방안에 들어가 탁자 위의 레몬쥬스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메뉴에 써놓은 맥주값 300엔을 되물고 호텔문을 쾅 닫고 나와버렸다.
밖에 나와 다시 생각해보니 레몬쥬스 두개 값을 빼고도 오늘은 3,300엔이나 써버렸다.아까는 비닐우산 열개라고 생각했는데 열한개가 된 셈이었다.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겨놓으려는데 호주머니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은전 몇개가 철썩철썩 살을 부딪치는 소리가 귀찮게 들려왔다.
에라잇,택시라도 타자.
오늘 밤에 아무 것도 타지 못하면 너무 분통하지 않는가?일본에 와서 지금까지 택시도 타보지 못했지 않는가?
택시 한 대가 골목에서 기어나왔다.취객처럼 손을 휘휘 내저어 멈춰세웠다.차 뒷문을 열려는데 문이 자동으로 열려졌다.
엇!하마트면 실례를 할 번했군.
허구픈 실소를 던지고 차안에 들어가 반사적으로 문손잡이를 쥐여당기려는데 문이 또 자동으로 닫겨졌다.
또 실례를 할 번했군.
일본택시도 나를 비웃는가?
“쯔루미역 동구까지 부탁합니다.”
택시는 어두운 골목을 나와 가로등불빛이 환한 거리를 내달렸다.새벽 1시를 넘은 거리에는 나를 또다시 놀리는 듯 노란 시그널을 뱅글뱅글 괘씸하게 돌려대는 청소차 한 대가 벌써부터 바라나와 길바닥을 핥고 있었다.


7.
오후 4시.가게에 나와보니 카운터에는 공작새머리 홀경리가 처음 공원에 나온 공작새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있었다.씻어가지고 온 바지를 갈아입고 대청에 나와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끼야마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가?
순간,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끼야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제 이 가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혹시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진 않을까?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다.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 끙끙거리다가 레스토랑에서 아끼야마가 수첩에 적어주던 핸드폰전화번호가 생각났다.
퇴근하면 꼭 전화를 해야지.
여덟시가 거의 되어 주방장이 전화를 받으러 대청에 나갔다가 늙은 고릴라처럼 어슬렁어슬렁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그만 퇴근하고 내일 점심 열한시에 출근하라."
아끼야마의 지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아끼야마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좀전에 집에 들어왔어요.제가 가게에 전화했어요.지금 가와사끼(川崎)역까지 와주실래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나한테서 전화가 걸려오리라고 믿었던 아끼야마였을 것이다.
"알겠습니다.지금 곧바로 가겠습니다."
공중전화청에서 전화를 마친 나는 전철역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가와사끼역은 쯔루미 다음 역이었다.요꼬하마에서는 네 정거장만 가면 되는 거리였다.
동구 택시정류소 앞에서 아끼야마가 하얀 비닐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아끼야마는 나의 어깨에 살며시 얼굴을 가져다댔다.왠지 어제밤과는 달리 측은하고 비애스러운 생각이 들었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끼야마는 호화롭고 멋진 고급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앞으로 가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겠지요?"
"네.관심해주셔서 고마워요.가게를 넘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모든 서류들이 저의 이름으로 되어있고 누구의 경제지원도 받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아요."
안도의 숨이 나왔다.아까부터 주방장이 혹시 나쁜 심보를 품고 있지 않나 은근히 근심하고 있었다.
"며칠 후면 인사변동도 있을 거예요.자, 우리 위스키나 마십시다."
아끼야마가 위스키 한 병을 들고 나왔다.넓다란 거실에 놓여있는 푹신한 소파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이 집은 작년에 내가 가게를 맡을 때 아버지가 선물로 사준 거예요."
그녀의 눈시울이 젖어들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온 남자는 아버지 외에 지금까지 박상 밖에 없어요."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처음 마시는 위스키는 술향은 좋았지만 빈속에 마시기엔 너무나도 독했다.알싸한 위스키향이 입안에서 맴돌고 속은 타들어갈 듯이 뜨거워났다.술잔이 또 채워졌다.그녀가 이런 독한 술을 어떻게 마시랴 싶었다.
"그만 마셔요.이러다 취하겠어요."
"괜찮아요.오늘은 취하고 싶네요.어제는 미안했어요."
아끼야마의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내가 지금 이 여자한테 미안해지려 하고 있지 않는가?
"자,우리 원샷해요."
아끼야마가 다가앉아 나의 목에 팔을 감았다.물컹한 젖가슴이 팔꿈치에 닿았다.전기에라도 붙은듯 흠칫 놀랐다.그녀가 나와 술잔을 부딪치고 물 먹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뒤로 젖혔다.나도 다 마시자 술잔을 놓고 와락 나의 목을 껴안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혀가 나의 입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침범자를 밀쳐내려다가 악을 쓰며 달려드는 이 일본여자의 솜씨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나의 웃웃 단추를 하나하나 벗기고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차츰차츰 아래로 더듬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녀의 손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릴 즈음,나는 그녀를 일으켰다.
눈앞에 먹이감을 붙잡아놓은 맹수처럼 당장 그녀를 뜯어먹고 싶은 강렬한 식욕이 불끈 살아났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약간 흐트러져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었다.그녀의 얼굴에서는 철판을 소독하는 가마처럼 뜨거운 열기가 확확 뿜겨나왔다.
"점장님,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언제까지일 지는 몰라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럼 언젠가는 그만둔단 말이예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끼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네.그럴 수도 있습니다.중국에 가정이 있으니깐요."
아끼야마는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다시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다.
그래.오늘은 취하도록 마셔보자.
술병을 빼앗아 그녀의 술잔에 절반 따르고 나의 술잔에는 그득하게 채웠다.
"일본남자들은 결혼 후에도 풍속점을 드나들거 던요.일본에서는 여자들이 불쌍할 뿐이지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아끼야마는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어요?일본남자들 중에도 좋은 남자들이 많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제 좋은 일본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아끼야마의 술잔에 나의 술잔을 가볍게 부딪쳤다.그러는 나를 곱게 흘겨보고 그녀가 웃으며 조금 마시자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워버렸다.나의 웃웃 단추를 도로 채워주고 그녀가 다시 술을 따랐다.
"일본에 정착할 생각은 없어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저의 가게는 요꼬하마에서 손꼽히는 불고기점이예요.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어요.명년에는 지점도 몇개 두려고 해요.박상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도 많아요."
내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아끼야마도 잠깐 침묵을 지켰다.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친구집에 있기 불편하면 여기에 와 있으세요."
"아닙니다.지금 여러 부동산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보니 아버지를 잃은 아끼야마를 위안할 대신 아까부터 냉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갈마들었다.그러다가 점장인 그녀의 환심을 사려거나 그녀의 요구를 전부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속으로 뇌까렸다.
아끼야마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부동산을 하는 친구한테 문의해 볼게요."
"감사합니다.오늘은 피곤하실테니 일찍 주무세요.내일 점심에 다시 뵙겠습니다."
내가 일어서자 아끼야마가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한참 후에야 손을 내려놓았다.
"그래요.오늘은 이만 해요.이 비닐우산을 가지고 가세요.아까 여동생이 저를 데려다주고 잠깐 앉아있다가 집으로 가면서 두고간 거예요."
"여동생이 있어요?"
"네.작은 이모의 둘째 딸이예요.국대 교육학부 4학년생이예요."
엘리베이트에서 내려 1층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몸이 휘청거렸다.
위스키 몇 잔 마시고 내가 취했나?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휘파람소리처럼 들리고 주위의 모든 것이 실루엣처럼 보였다.아파트의 전등불빛들이 간사하게 유혹하는 골목 모퉁이를 겨우 빠져나와 큰길 인행도에 들어섰다.
머리에서 빗방울이 굴러떨어지기에 비닐우산을 펼쳐들었다.
방금 전에 아끼야마가 뭐라 했더라?
아,맞다.이 비닐우산이 교육학부 4학년생인 작은 이모의 둘째 딸의 우산이라고 했지 않았나?
그럼 아끼야마의 이모사촌 여동생이 혹시 한국인들 가운데 박씨 성이 많지 않은가고 묻던 그 비닐우산임자였던 고하다가 아닐까?
그럼 이 비닐우산이?...

 8.

이튿날 점심.아끼야마는 별다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가게에 나온 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니 시름이 놓였다.오늘도 홀서빙에 나서라고 하면서 내일은 가게의 휴일이고 시간이 있는가고 물었다.내일 오전에 학교에 가야 한다고 대답하자 학교가 끝나면 부동산에 가보자고 했다.
부동산을 하는 친구한테 벌써 련락을 했을까?
점심이 지나서 대청이 조용해지자 아까야마가 카운터 안으로 나를 불러들였다.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가게의 근황과 금후의 지점설립계획 등에 대해 말하고 다음 주말에는 여러 회사,상사의 사장들과 회식을 할 예정이라면서 앞으로 접촉기회가 많을 사람들이기에 회식에 꼭 참가해달라는 것이었다.
주방장은 웬 일인지 오후 늦게야 가게에 들어섰다.
저녁 여섯시가 되자 대청에 알바생들이 많아졌다.나는 주방에 가서 히구찌를 도와 철판을 닦아야겠다고 아끼야마에게 말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했다.창고 옆을 지나는데 탈의실 안에서 '이걸 놔요.'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황급히 탈의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방장이 한 여대생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왜서 탈의실에서 늦게 나가는가 했더니 이 놈이 이 수작을 부리려고 했구나.
나는 여대생의 손을 잡아당기고 주먹으로 주방장의 가슴팍을 강타해놓았다.그렇잖아도 아니곱게 보아왔던 주방장이었다.주방장이 뒤로 둬걸음 비틀거리다가 벽구석에 가서 나동그라졌다.다가가서 발로 마구 짓밟아 뭉개놓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경찰을 부를까?"
정작 으름장을 놓고 보니 경찰을 어떻게 부르는지 아직 모르고 있는 나였다.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나를 보고 주방장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며 손을 싹싹 빌었다.나는 그 여대생에게 앞으로 혼자서 탈의실에 들어오지 말라는 부탁을 남기고 남자갱의실에 들어섰다.
"점장님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십시요.비밀을 꼭 지켜주십시요."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나의 뒤를 따라나오며 주방장이 존경어로 몇번이나 나에게 간청했다.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주방장 이 놈이 그래도 아끼야마를 두려워하고 있구나,가게에서 잘리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흡족해났다.
여덟시도 안 되어 주방장은 집에 일이 있어 먼저 가겠다고 주방을 나갔다.
오늘은 열시 전에 일을 마쳤다.내일은 휴일이여서인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벽시계를 쳐다보며 퇴근할 시간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모두들 퇴근하시지요."

아끼야마가 고양이처럼 작은 주방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도 퇴근길에 아끼야마가 차를 몰고 뒷따라오지 않을까 저어되어 길 건너 인행도를 걸었다.아니나다를까 좀 지나 아끼야마의 차가 천천히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한참 가던 차가 멈춰섰다가 다시 후진하고 있었다.나는 길 옆 공중전화청에서 전화를 했다.
"오늘은 피곤해서 택시로 역까지 왔습니다."
"그래요?내일 부동산에 같이 가봐요.학교가 끝나면 인차 전화해요.돈 근심은 하지 마세요."
무슨 뜻인지 알만 했다.요 며칠은 오전시간을 이용하여 서너집 부동산중개회사에 가보았다.친구 말대로 사례금이며 보증금이며 반년 혹 일년 방세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튿날 월요일도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다.
아침 일찍 비닐우산을 들고 학교로 갔다.고하다도 만나고 싶었고 수업 전에 학교 기숙사에 들려 재확인도 해보고 싶었다.
기숙사는 불편한 점은 있지만 부동산처럼 사례금이요,보증금이요 하는 쓰잘데없는 비용은 면제였고 값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며칠 전에 만났던 기숙사관리원이 나를 데리고 1층 5호실로 갔다.이인용으로 된 작은 기숙사 안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머리가 좀 긴 남학생이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오상준입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이말저말 주고받았다.어쩌면 나와 상준이는 같은 교육학부 연구생이었고 나이도 동갑이고 생일도 같은 달이었다.날짜는 내가 사흘 앞섰을 뿐이었다.
"그럼 우리 서로 친구처럼 말을 놓읍시다."
삼일내로 입거여부를 결정하겠다고 관리원에게 말하고 상준이와 같이 계단교실을 찾아갔다.가는 길에 상준이가 자랑이라도 하듯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너 핸드폰 갖고 있구나."
"응.아르바이트를 한 첫 노임으로 산 거야."
"지금 어디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선배들의 소개로 학교에서 멀지 않은 사진관에서 일하고 있어."
나는 짐짓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척 물었다.
"그래?나도 빨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은데 그 사진관에 소개해줄 수 없겠어?"
"그럼 사장한테 물어볼게."
계단교실 앞에서 상준의 소개로 학습파트너 이가라시(五十嵐)를 만나고 셋은 교실에 들어가 앉았다.학생들 속에 고하다도 와있는가 좌석을 둘러보다가 여학생들을 곁눈질해보는 것 같아 이가라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지도교관이 무엇을 강의하는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아끼야마가 소개한 집에 들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가?친구의 부인이 이달말에 일본에 온다고 하니 친구집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차라리 상준이와 같이 기숙사에 주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수업이 끝나자 지도교관이 석사생들과 연구생들을 불러놓고 간단한 회의를 소집했다.자아소개를 하고 금후의 진학예정 등에 대해 각자 발언했다.이번 주는 목요일 오전에 지도교관연구실에 한번 다녀가고 도서관에서 이가라시를 만나 참고서적들을 추천 받으면 되었다.
밖에 나와 지도교관과 이가라시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상준이에게 부탁했다.
"그 사진관 아르바이트를 잊지 말고 꼭 알아봐줘."
"알았어.근데 조건이 있어."
상준이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데?"
"나와 같이 기숙사에 있으면..."
"자―식!그래,며칠 기다려.나 오늘 일이 있어 먼저 간다.일자리를 소개하면 술 한잔 살게."
"내일 낮에 전화해봐."
학교에서 내려오면서야 고하다가 다시 생각났다.
오늘 고하다도 만나지 못했는데 비닐우산을 괜히 들고왔지 않나?

 

9.

아끼야마를 만난 곳은 조용한 차집이었다.차탁에 사진 몇 장과 열쇠 하나가 놓여있었다.
"어머니를 보러 갔다가 친구한테 들려 먼저 사진을 가지고 왔어요.어느 집이 마음에 드는가 보세요.마음에 들면 인차 친구한테 가서 수속하면 돼요."
눈이 휘둥그래졌다.8,9만엔씩이나 하는 집들이었다.
"미안합니다.학교 기숙사에 주숙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결정이라도 내린 듯이 아끼야마에게 말했다.
"돈 근심은 하지 말라고 했지 않아요.학교 기숙사에 주숙할거면 저의 집에 와있으세요.집열쇠예요."
아끼야마가 차탁의 열쇠를 나한테 밀어놓으며 말했다.
"성의를 받아들일 수 없어 미안합니다."
"왜 이래요?저를 믿지 못하겠어요?"
"그런게 아니라..."
"알고 있어요.그러니깐 제가 도와드리는거죠.그럼 좀 더 싼 걸로 바꿔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할께요."
"아닙니다.기숙사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나는 기숙사에 주숙하기로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 우산 돌려드립니다."
나는 비닐우산을 아끼야마에게 건네주었다.
비닐우산을 보던 아끼야마가 불시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말했다.
"아,깜빡 잊을 번했네요.저의 여동생하고 셋이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약속했어요.여동생이 벌써 와있을 지도 모르겠네요.박상과 한 학교이니 편하리라 생각했어요.집은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얘기해요.자,빨리 가요."
더 이상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럼...그렇게 하지요."
나의 짐작대로 차이나타운 어느 중화료리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끼야마의 여동생은 고하다였다.
고하다와 반갑게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서로 아는 사이인가고 묻는 아끼야마에게 고하다가 며칠 전에 있었던 비닐우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끼야마가 웃으며 비닐우산을 고하다에게 돌려주었다.학교에서 혹시 고하다를 만나면 이 비닐우산임자를 알아맞춰보라고 우스개소리로 물어보려고 생각했다.고하다가 모르겠다고 하면 아끼야마의 이름을 말해줘야 하지 않나 하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었다.
셋은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그녀들은 훈둔(馄饨)을,나는 짜장면을 시켰다.내가 불고기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하다도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불고기점에서 일하겠다며 아끼야마에게 청을 들었다.티비에서 인기여탤렌트가 연하인 야구선수와 결혼하는 뉴스를 부러운 듯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아끼야마는 그저 머리만 끄덕여 보였다.
고하다가 오도카니 앉아 아끼야마와 나를 신기하게 번갈아보며 자꾸 웃고만 있었다.머쓱해진 나는 어색한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훈둔을 가리키며 물었다.
"완딴면이라는 완딴, 중국어로 무슨 뜻인지 알아요?"
"모르겠는데요.무슨 뜻이죠?"
내가 웃으며 해석하자 그녀들도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가다가나로 훈둔(馄饨)발음을 완딴(完蛋)으로 메뉴에 써넣었던 것이다.
요리점을 나오면서 오후에 수업이 있어 나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아끼야마에게 인사를 하고 고하다와 같이 학교로 가는 전차를 탔다.
큰길 횡단보도를 지나기 전에 있던 패미리마트가 눈앞에 보여왔을 때였다.
고하다가 무엇을 사겠다며 어느 한 가게에 들렸다.나는 혼자서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고하다가 나의 뒤를 따라왔다.같이 횡단보도를 건너 학교언덕길을 올라가려다가 그녀의 손에 비닐우산이 들려있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우산은?"
"어마나,아까 그 가게에 두고나왔네요."
"내가 가서 가져올게요.가게이름이 뭔가요?
"괜찮아요.좀 아는 가게예요."
"그 가게를 알아요?"
"음...어머니와 친척이 되는 분이 하는 가게예요.”
“어머니와 친척인가요?”
“네.친척이지만 들려본 지 오래 되었어요.어머니가 큰 이모부의 부고를 알려드리라고 해서요.아침에는 스즈끼가 있어 들리지 않았어요."
"그럼...그 분이 한국인이겠네요."
"..."
고하다가 머뭇거리며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허,그러고 보니 그 비닐우산을 몇 번이나 잃어버릴 번했네."
내가 웃으며 화제를 돌리자 고하다도 호호 하고 따라 웃었다.
드디어 기숙사입거수속을 마쳤다.
기숙사에 찾아들어온 나를 보고 상준이는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같이 일하던 알바생이 엇저녁에 그만두었기에 문제없을 거라며 저녁에 사진관 사장한테 물어보겠다고 선뜻 나섰다.내일 오전에 짐들을 챙겨 다시 오겠다고 상준이에게 말하고 나는 학교에서 내려왔다.
횡단보도를 건너 문뜩 아끼야마가 친구에게 다시 부탁하겠다던 말이 생각나 공중전화청을 찾아갔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궁리하다가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번호판을 눌렀다.
"꼭 기숙사에 들어야 되는군요.성격하고는..."
"미안합니다.그리고 미리 말씀 드립니다.가게와 거리가 멀기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지 모르겠습니다.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박상,왜 이래요?박상..."
아끼야마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전화였다.
전화를 놓고 나는 그 자리에 굳어진듯 서 있었다.마치 절규하는 듯한 아끼야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전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전철역으로 가면서 나는 일본에 와서 한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머릿 속에 떠올려보았다.
고하다와 비닐우산,아끼야마와 불고기점에서의 아르바이트,주방장 놈이 설거지를 하는 아줌마와 그 여대생에게 보여준 추잡한 성추행,그리고 러브호텔과 아끼야마집에서의 유치하고 아슬아슬했던 스릴들이 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까부터 내릴 듯 내리지 않을 듯 갈피를 잡을 수 없던 하늘에서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르게 그만 패미리마트를 지나온 나는 비닐우산을 사야겠다고 뒤돌아섰다.
패미리마트를 향해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받쳐입은 소녀가 책가방을 달랑거리며 어느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하얀 저고리 까만 치마!
나는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 번 했다.
소녀가 들어간 가게에 가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말린 물고기류들을 파는 간소한 간물점이었는데 가게 안에 작은 살림방이 있었다.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칠십세를 훨씬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밖에 내다놓은 상자들을 안으로 걷어들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빵이 있네라."
할아버지가 소녀에게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어가 아니라 우리 말이었다.
나는 가게로 한발 다가섰다.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행인들을 위해 밖에 놓은 것인지 갖가지 모양의 우산들이 출입문 밖에 가지런히 세워져있었다.제일 앞에 하얀 비닐우산 하나가 있었다.
나는 비닐우산을 들고 할아버지에게 일본어로 물었다.
"미안합니다.이 비닐우산 얼마인가요?"
할아버지가 돌아서서 나를 보고 웃으시며 말했다.
"허허.값이야 뭘요.쓰고 가셨다가 여기를 지날 때 놓아두시면 되겠수다."
나는 패미리마트에서 사려고 했던 100엔짜리 은전 세개를 가방에서 꺼내 상자 위에 올려놓고 우리 말로 말했다.
"감사합니다.중국에서 온 조선족 유학생입니다."
한참 가다가 뒤돌아보니 그 할아버지가 소녀의 손목을 잡고 웃으시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비닐우산을 펼쳐들었다.
이 비닐우산임자가 누구인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10.

며칠 후,고하다가 찾아왔다.
기숙사 현관 앞에서 아끼야마점장의 부탁을 받고 왔다며 나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그러면서 언니가 지금 학교 정문에서 기다린다는 것이었다.마지막으로 언니를 한번 만이라도 만나달라는 고하다의 말을 무시하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기숙사에 들어가 비닐우산을 들고 나왔다.
나는 그 날 그 가게에서 찾아왔다고 비닐우산을 고하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그 할아버지를 만나면 꼭 문안을 드려달라고 했더니 고하다는 가벼운 미소를 남기고 돌아서서 맥없이 걸어갔다.
봉투 안에는 편지 한장과 다섯날 월급이 들어있었다.

―박상.이 봉투에 노임을 넣어드리는 것을 용서하세요.더 많이 넣어드리고 싶지만 프라이드가 높은 박상한테서 되돌려받을까 생각되어 제대로 결제했습니다.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중국에서 오신 박상한테 친근감을 가지게 되고 박상을 가까이에 두고 싶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박씨 남자들은 모두 프라이드가 높은가 봅니다.
어머니의 오빠가 국대 부근에서 살고 계시는데 지금도 박씨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친척 사이에 내왕이 적어진 이유는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그 분을 다시 찾아뵙고 박상과 고하다와 같이 식사라도 하려 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럽네요.
그리고...작년까지는 아버지가 저의 생일을 축하해주셨는데 올해는 케이크를 함께 먹을 남자 한 분도 없네요.
편지가 길어진 것 같네요.
일본에서 순리롭기를 바랍니다.
―헤이세이(平成)5년10월23일   아끼야마리에(秋山理恵)

요 며칠 사이는 그래도 햇빛이 따스하게 비쳐와 몸과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었는데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는가 싶더니 또다시 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만 기숙사에 들어가려다가 나는 웃옷을 벗어쓰고 학교 정문으로 가보았다.
아버지가 일본인이어서 일본인으로 된 두 여자가 비닐우산을 함께 쓰고 정문을 나가는 모습이 멀리서 보여왔다...

<연변문학>2018년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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