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왕따”가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되면서, 일진과 왕따, 두개의 극단적인 부류로 한 움큼의 사람들을 구분 짓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에 보면, 일진은 그만의 성장과정에서의 정서적인 아픔이 있고, 왕따 또한 그만의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계로 정의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때에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꼭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아니고, 아픈 사람이라고 꼭 울고 사는 것은 아닌 법이다. 

 

성희롱예방교육을 회사에서 의무적으로 실시하면서, 팀 교육 담당자로서 동료들에게 어떻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를 참 많이 고민 했었다. 가해자들은 묘한 행동의 패턴을 가진다. 

 

손이나 팔을 터치해보고, 아무도 뭐라고 안하네, 싶으면 허벅지를 만져보고, 또 아무도 뭐라고 안하면, 다른 곳을 시도해보고 심지어 “폭행”이라고 하는 행동들을 야금야금 수위를 높여가면서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묵인”이라는 큰 조력자가 동기부여를 하게 되고, 그런 “묵인”의 행위자는 보통 제3자, 즉 방관자가 된다. 

 

방관자는 지위와 신분을 불문하고, 그 단 한번의 방관적 제스처로, 그리고 그러한 방관자들의 집합으로 한 명의 범죄자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피해자를 양산하기도 한다. 

 

세상의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아무 책임도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런 결과를 막을 수 있는 수많은 우연을 무심코 비켜나가는 사람들 또한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고리타분한, 사소한 매너와 배려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장 나의 아이 또한,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으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방관자의 입장이 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하나의 상황에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자세에서 그 아이의 선택의 과정에 있어서 어떻게 응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가 잊지 말고 고민해야 하는 사항임을 논하고 싶은 것이다. 

 

나쁜 사람 여러명이 아니라, 관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만들어 가고 써간다. 

요즘처럼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그 관심 없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분노를 심어주는 방법으로 그들의 선택을 유도하려고 하는 것이 마침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정의감과 성실함, 만족감 이런 것보다 관심 없었던 것에 관심을 쉽게 가지는 방법은 두려움과 불안인 편이다.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이고 지금 어디쯤 있고, 누가 살고 있으며 나 또한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대부분 사람은 고민하지 않고 산다.당장 월요일부터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고마운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대기업 시총이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끝없는 찌라시가 생성되고 있고, 전파되고 있다. 관심 없는 사람들을 관심 가지게 하고 목소리를 내게 하는 가장 무식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불안 조장이니까. 그래서 매각설이 이리도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정치인에게 너무 고마운 존재가 아마 북한이었을 것이다.내부적인 불화를 외부의 “공동의 적”에고 돌리는 것은 과거5천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쉽고 효과적으로 써먹었던 정치적 책략이고,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이름지어 권력자를 양산하는 이런 형태가 과거의 그 어떤 정치와도 딱히 다를 바는 없으니까. “우리의 주적”이라는 표현을 한국에서 듣고 이 정도로1차원 적인 노력 없는 얄팍함에 좀 놀라긴 했었지만, 그때의 초보 한국 거주자인 나에게,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알량한 기대가 지금보다는 더 있었었나 보다. 

 

원하는 미래의 모양을 품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중국 언론에서 어떤 사람이 구타를 당하고 있는데, 빙 둘러싸서 보기만 할 뿐 그 누구도 나서 주지 않는다는 보도를 수차례 봤다. 혹여 그 가해자가 나에게 해코지 하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피자와 방관자가 일부 차이점도 있지만 또한 공통점도 있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라도 남을 도와주는 그런 정의로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정의로운 사회를 진심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도 해서는 안되는 멍청한 짓이다. 희망 사항과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항을 구분 짓지 못한다면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해도, 그냥 멍청한 헛짓일 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다만, 그 어떤 아픔을 겪은 가해자에게, 나는 너의 아픔을 보고 알고 있었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라는 표현은 도덕적인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당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뿐이다. 

 

누가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가. 

정녕 나는 누구와 “우리”란 말인가.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말라고, 그리고 가해자나 피해자가 눈에 보일 때, 모른 척 하지 않을 정도의 삶의 용기는 가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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