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도 부안 시기(詩妓) 매창의 시랑이야기

 

【 조선시대 녀류시인들 시와 사랑 2 】 / 홍용암 (편저)   

                             거문고와 시를 사랑한 예기(藝妓) 매창                東風三月時,  處處落花飛;            綠綺相思曲,  江南人未歸。            삼월이라 동녘바람 불어올 때            꽃잎이 떨어지며 흩날리네            거문고 뜯으며 님 그리워 노래해도            강남으로 가신 님은 돌아오지 않아라                     ㅡ 매창 시 "봄날의 그리움(春思)"       이번에는 조선의 녀류시인이자 기생이였던 매창(梅窓, 1573년~1610년)이 중국 한무제(漢武帝)때의 풍류재사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그의 안해 탁문군(卓文君)의 러브스토리의 도구가 된 거문고에 얽힌 고사를 빌어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시를 소개한다.       매창은 봄꽃이 피고 지는 계절에 동풍이 불어오자 그리운 님을 기다린다. 자신을 남겨두고 떠난 님은 오리무중, 봄날이 다 가도록 소식조차 전해주지 않는다. 봄이 되여 꽃이 활짝 피자 해후의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야속하게도 동풍이 심술을 부려 소망을 담은 꽃이 락화되여 사방에 흩날릴 때까지 그리운 님은 나타나지 않는다. 시적화자는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그리움을 노래로 달래이지만 눈앞에 보고픈 님은 나타나지 않으니 가슴 가득한 그 정한을 옥구로 읊는다...       이 시에서 매창은 村隱(촌은) 劉希慶(류희경)과 정이 깊었으나 그가 귀경하자 소식이 끊겨 오매불망 그리움을 드러낸것이다. 특히 시구에 나오는 록기(綠綺)는 중국에서 유명한 거문고로 알려진 록기금(綠綺琴)을 줄인 말이다.       예로부터 군자가 지녀야 할 고상한 취미는 "금기서화(琴棋書畵)"라고 했다. 즉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을 말한다. 그중에서 거문고는 군자가 배워야 할 품위있는 취미가운데 우선적으로 꼽혀왔다.       중국에서는 명금(名琴)으로 소문난 "사대명금(四大名琴)"이 있었으니 제환공(齊桓公)의 "호종(號鐘)", 초장왕(楚莊王)의 "요량(繞梁)",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록기(綠綺)", 채옹(蔡邕)의 "초미(焦尾)"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은 그중 "록기"만을 간략하게 소개할가 한다.       "록기"는 상술한 매창의 시의 셋째구에 나오는 바로 그 거문고이다. 이 거문고는 한(漢)나라때 유명한 문인이였던 사마상여(司馬相如, BC179~BC117)가 연주하던 금(琴)이다. 사마상여는 원래 집안이 가난했지만 글재주가 출중했다. 양왕(梁王)이 그의 명성을 흠모해 글을 요청하자 사마상여는 “여옥부(如玉賦)”를 지어주었다. 양왕이 흡족해하며 자신이 아끼던 명금인 "록기"를 그에게 주었는데, 록기에는 “동재합정(桐梓合精)”이라고 씌여져있었으며 그 의미는 오동나무(桐)와 가래나무(梓)를 합쳐서 만든 명금이란 뜻이다. 이후 사마상여의 뛰여난 연주술과 명금이 상승효과를 내면서 그 "록기"는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어느날 사마상여가 당시 부자로 소문난 탁왕손(卓王孫)의 연회에 참석하자 좌중에서 그의 음악적 명성을 듣고 연주를 요청했다. 사마상여는 탁왕손의 딸인 탁문군(卓文君)이 출중한 미모에다가 거문고를 잘 다룬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 탁문군이 있었다. 사마상여는 “봉구황(鳳求凰, 봉이 황을 구한다는 내용)”곡을 연주하며 공개적으로 탁문군에게 구애를 했다. “봉이란 새가 천하를 돌며 제 짝인 황을 찾다가 고향에 왔는데, 방안에 있는 아름다운 한 녀성이 내 속을 상하게 하는구나. 우리 원앙이 되면 어떠리?!”. 탁문군 또한 평소 사마상여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던터라 그의 연주와 노래를 듣자 마음이 통해 함께 야밤도주하여 결혼했다.       이렇게 사마상여가 "록기"라는 거문고로 짝을 구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중국판 러브스토리로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닐것 같다.       부안(扶安)의 기생이였던 리매창(李梅窓)은 개성의 기생 황진이, 평천의 기생 운초 김부용과 더불어 거문고와 한시에 능한 조선의 명기 ㅡ "3대시기(詩妓)"로 손꼽힌다.        매창은 평소에도 거문고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옆의 지인들에게 "이후에 내가 죽으면 거문고를 함께 묻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따라 그녀는 죽은후 부안읍 남쪽 봉덕리 공동묘지에 분신처럼 아끼던 그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언덕을 지금도 "매창의 뜸"이라고 부른다.      

                     시기(詩妓) 매창과 시선(詩仙) 촌은의 황홀한 춘사(春事)

      탁문군같은 녀류시인 매창이 살았을적 서로 깊이 사랑한 한 련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마상여처럼 악기와 시에 능란한 촌은(村隱) 류희경(劉希慶)이다.       류희경(劉希慶, 1545년~1936년)은 자를 응길(應吉), 호를 촌은(村隱)이라 하며 본관은 강화로 조선시대의 대시인이요 유명한 학자다.       효자로 유명했고 례(禮)와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에서부터 평민들의 장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통정대부가 되였고 광해군때에는 페모상소올리기를 거부한후 은거, 후학을 가르쳤다. 지조가 굳었고 종래로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류희경을 그의 글만 보고도 남몰래 련모하는 한 녀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기생 매창이였다. 매창은 류희경의 시에 매료되여 줄곧 애독하다가 언젠가 기회만 되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기생신분인 매창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집적거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았으며 무작정 덤벼들거나 마구 앙탈을 부리는 남자들이면 그녀는 멋진 시구절로 물리쳤다.           醉客執羅衫,  羅衫隨手裂;         不惜一羅衫,  但恐恩情絶。         취한 손님 내 옷자락을 마구 잡으니         명주저고리 그 손길에 찢어졌어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님이 주신 은정까지 찢어질가 두렵노라!               ㅡ 매창 시 "술취한 손님에게(贈醉客)"       1591년 봄의 어느날, 매창은 부사 리귀(李貴)로부터 문득 촌은이 부안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그녀에게는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너무나 큰 행운이자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매창은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한적한 곳에 초막집을 짓고 거문고와 시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있었다. 매창은 즉시 부안으로 달려간다.       류희경은 닷새후 부안에 도착했다. 시와 거문고로 크게 소문나있던 매창을 대하자 류희경도 술좌석에서 매창에게 거문고와 시를 요청한다.       매창은 류희경을 만난 기쁨을 노래한다.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거문고의 음률은 40대 후반에 접어든 류희경의 가슴속을 세차게 헤집고 다닌다.            가슴에 품은 정은 차마 말도 못하지          꿈과 같고 생시같아 오늘날의 이 만남          애타는 내 마음을 강남곡에 실어보나          그 심정을 묻는 이는 한사람도 없구려!       류희경은 지긋이 눈을 감고 무릎을 탁ㅡ 치며 연해연방 탄성을 내보낸다. 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흥이 도도해진 류희경도 즉시 "계랑에게(贈癸娘)"라는 즉홍시 한수를 짓는다.           일찌기 남쪽 계랑 그 명성을 들었는데         그의 시와 노래가 서울까지 들리더라         오늘 가까이서 참모습을 대하니         신녀가 지상에 내려온듯 하구나         나에게는 신비의 선약(仙藥)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칠수 있는데         금낭속 깊이 간직한 이 묘약을         사랑하는 그대에게 아낌없이 주고싶소       계량이 계속 거문고를 타면서 화답한다.           내게도 오래된 거문고 하나 있다오         한번 타면 온갖 정감 다투어 생기는데도         세상사람들 이 곡을 아는 이 없으니         님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리다!       신비로운 선약, 금낭속에 깊이 감춰둔 그 묘약은 과연 무엇일가? 쉽게 표현하면 사랑이지만 은유를 좋아하는 천재들의 표현속에 감춰진 그 의미는 무엇일가?? 한번 타면 온갖 정감이 생기는데도 아무도 그 곡의 의미를 모르는 거문고 소리, 계량이 말하는 그 뜻은 또 구경 어떤것일가???       사랑하는 련인에게 아낌없이 줄수 있는 선약, 금낭속에 감춰둔 그 묘약을 요즘 의미로 "섹스"라고 해도 좋다. "세상사람들이 모르는 노래"를 계랑 자신의 육체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것이다. 아무에게나 헤프게 내돌리지 않은 은밀한 자신의 옥체라고 생각하면 어떠랴? 님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고싶다는것을 당신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의미로 넘겨짚어도 좋다. 아무튼 무어라 해도 다 좋다!       이날 밤, 자석처럼 서로 끌린 두사람은 원앙금침에 들었다. 당시 계랑의 나이 열아홉, 류희경은 마흔일곱... 결코 적다고 볼수 없는 28세나 되는 나이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그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에는 그 무슨 나이계선도 국계구분도 없다고 했던가...??!       드디여 일평생 지켜왔던 근엄한 선비의 지조가 일시에 무너지고 오래동안 굳게 꼭 닫혔던 계랑의 사랑의 문이 활짝 열렸다.       문풍지는 뜨겁게 달아오른 두사람의 거친 호흡에 세차게 펄럭이고 방안의 초불은 활활활 불타는 그 정열의 열기에 녹아내렸다...

 

   
 

                        전란으로 인한 긴긴 생리별, 그후 영리별         그날부터 매창과 류희경은 마른 검불과 화약에 확ㅡ 불이 붙듯 순식간 사랑의 불이 붙어 자주 서로 아름다운 시를 주고 받으면서 로맨틱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요즘은 아무리 지식인들이라 해도 시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문화가 거의 없는데 그때는 지식인들이 시문으로 피차의 마음을 전하는것이 소통의 기본이였다.       시 한수, 글 한줄로도 오가던 사랑... 그런것이 류행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시 한수만 읊어도 사랑이 주욱 흘러내리던 그런 슬프고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충과 의를 지닌 우국지사인 류희경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상경하여 의병을 모으고 관군을 돕는다.       이때 매창이 떠나간 류희경을 그리면서 그에게 써보낸 시조는 읽을수록 가슴이 쓰리면서도 매우 아름답다.             리화우(梨花雨) 흩날릴제 울며 잡고 리별한 님          추풍락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여라!        아주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시조인데 천고의 절창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촌은의 그리움도 그에 못지 않았는바 시조를 받고 이런 시로 화답한다.                    계랑을 그리며(懷癸娘) / 류희경             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이 나의 집은 서울에 있다네           그리움 사무쳐도 만날수 없어           오동잎 떨어질 때 애간장 끓어라!       매창이 "리화우(梨花雨)"라니 류희경은 또 "오동우(梧桐雨)"란다. 두사람이 리별할 때 계절은 배꽃이 꽃비처럼 분분히 흩날리는 화창한 봄이였는데, 그새 계절은 여름을 지나 어느덧 오동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쓸쓸한 가을로 바뀌였다.      매창은 그 시를 보고 너무도 그리움에 못이겨 이튿날 남장을 하고 촌은을 찾아 떠난다. 부안에서 한양까지는 천리길, 그것도 녀자의 홀몸으로 사랑을 찾아 나선것이다. 발이 부어 터지고 피가 맺히도록 걸어서 서울에 왔으나 매창은 촌은을 만나지 못한다.        이미 촌은은 의병과 함께 전장을 누비고 있었기때문이다. 결국 매창은 간신히 지친 몸을 이끌고 허기진 사랑만 가슴에 한가득 품은채 부득불 다시 부안으로 돌아온다.        그후에도 수차나 촌은을 찾아 그렇게 나서지만 번마다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류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드바쁜 생사고비마당에서 매창을 다시 만날 경황과 여가가 없었다.        어느덧 1년, 3년, 5년, 7년, 10년... 생리별의 시간이 오래갈수록 매창은 마음에 점점 더욱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후에 씌여진 그녀의 시들은 떠난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사무치는 서러움과 슬픔, 한(恨)으로 차넘친다.            春冷補寒衣,  紗窓日照時;          低頭信手處,  珠淚滴針絲。          봄날이 차져서 겨울옷을 꿰매는데          창문으로 따스한 해빛이 비쳐드네          슬픈 고개 숙여서 옛날편지 바라보니          구슬같은 눈물 뚝뚝 바느실에 떨어지네.                     ㅡ 매창 시 "혼자만의 한(自恨)"       무정한 긴 세월이 류수같이 흘러 흘러 장장 꼬박 15년이 지난 1607년이 되여서야 35세의 매창은 63세의 로인이 된 류희경을 요행 다시 만난다. 겨우 재회한 두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두손을 꼭 부여잡았다.            相思都在不言裡,  一夜心懷白半絲;          欲知是妾相思苦;  須試金環減舊圓。          말은 하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하루밤 맘고생에도 귀밑머리 흰다오          소첩의 그 아픔과 시름을 알고프면          헐렁해진 이 손가락 금반지를 좀 보소.       다시 만난 류희경에게 매창은 "녀자의 눈물(閨怨)"이란 이 시를 준다. 얼마나 보고싶어 속을 많이 태웠으면 포동포동하던 매창의 몸이 그토록 몰라보게 수척해지고 여위여서 갈라질 때 손가락에 딱 맞추어 착용했던 금반지마저 헐렁해졌을가? 매창의 애닲은 마음이 짠하게 외닿는 시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정인(情人)은 그녀의 꺼져가는 불길을 되살려주지 못했다. 이때의 류희경은 마음만 간절할뿐 예전처럼 련인과 마음껏 자유로운 로맨스를 즐길수 있는 처지가 아니였다. 그동안 혁혁한 전공을 세워 신분상승이 된 류희경은 그만큼 또 가족을 위해 여러가지로 지켜야 할것도 너무 많아 매창을 데리고 갈 형편도 못되였다. 그런 촌은을 보면서 그녀는 절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상봉하여 꿈같한 나날을 잠간 보내다가 또 리별이 찾아와 매창과 촌은은 인차 다시 헤여진다.     그로부터 3년뒤 어느날, 매창은 갑자기 "절명시"를 남기고는 38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간다.            도원에서 맹세할 땐 신선같던 이 몸이          이다지도 처량할줄 그 누가 알았으랴          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어볼가          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가          풍진 세상 고해에는 슬픔도 많아서          홀로 새는 이 한밤이 몇해런듯 지루해라          덧없이 지는 해에 고개돌려 바라보니          구름속에 첩첩청산 눈앞을 가리우네.       매창은 기생이면서도 기생의 삶을 살지 않았다. 그녀는 최경창을 위해 끝까지 정절을 지켰다.       뒤이어 부안땅의 "매창의 뜸" 언덕에 매창의 시신이 묻혔고 나중에 그녀의 무덤을 찾은 촌은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뚝뚝뚝 떨어졌다.       그토록 사랑했던 소중한 녀인에게 행복은 얼마 주지 못하고 한평생 기나긴 기다림과 그리움, 아픔만을 한가득 안겨주며 독수공방 외로운 삶을 살다가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가게 한 자신이 너무도 한스러워 류희경은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며 통곡한다.       매창의 가여운 넋을 기리며 촌은은 다음과 같은 추모시를 남겼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섭 계랑아          홀연히 뜬구름따라 간 곳이 아득하구나          꽃다운 넋은 죽어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에 묻어주랴!    
 
 
                                 매창의 묘와 시비, 시집과 매창기념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성황산 서림공원 입구에 매창의 시심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매창시비(梅窓詩碑)>>가 있다.       이 시비는 1974년 4월 27일 매창기념사업회에서 다시 세운것이다.       시비의 주인공 매창은 선조 6년 1573년 전북 부안현 아전 리탕종(李湯從)의 소실에게서 태여났다. 계유년(선조 6년)에 태여났다고 해서 계생(癸生), 계랑(癸娘)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본명은 향금(香今)이고 자는 천향(天香)이며 호가 매창, 계랑(癸·桂娘), 계생(癸·桂生)이다.       일찍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으며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 기생이 되였다. 아마도 어머니가 기생이 아니였나 싶다.       매창은 전북 부안(扶安)에서 시조와 한시, 가무와 거문고, 가야금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명기로서 "개성3절"(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인 명기 황진이와 더불어 또한 "부안3절(扶安三絶)"(리매창, 류희경, 직소폭포)로도 불리운다.       그녀는 생전에 당대의 문사들인 류희경(劉希慶), 허균(許筠), 리귀(李貴) 등과도 깊은 교류를 맺고 지냈다고 한다.       매창의 시작품은 지금까지 도합 58수가 전해오는데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있는 그대로 읊고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데에 있다. 또한 녀성적 정서가 잘 표현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의 시들중 "가을의 사색(秋思)", "봄날의 원망(春怨)", "견회(遣懷)", "술취한 손님에게(贈醉客)", "부안의 회고(扶安懷古)", "스스로 한탄하노라(自恨)" 등이 비교적 유명하다.       조선시대 녀자들은 보통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매창은 시로서 그 문명을 널리 날렸기에 이름과 자(字), 호(號)까지 가진 기생이였다.       그녀가 죽은지 45년이 지나(1655년) 후세사람들이 그 무덤에 비석을 세웠고 그후 또 13년이 흐른뒤(1668년) 매창의 시 수십편을 모아서 고을의 사람들이 목판을 깎아 <<매창집(梅窓集)>>이라 이름짓고 린근 사찰 개암사에서 시집을 간행했다.       전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일개 녀인, 그것도 화류계에 몸을 담았던 녀성의 글을 사찰에서 신성시하여 단행본으로 발간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이 시집이 나오자 삽시간 너무 많은 주문이 몰려들어와 발행처인 그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이 날 정도였다.       그후 긴 세월이 흘러 흘러 1917년, 부안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그녀의 무덤에 높이 4척의 비석을 세웠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사람들이 매창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시조계의 대부 가람 리병기(李秉岐)선생은 매창의 무덤앞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 가건만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은 헐리지 않는다        리화우(梨花雨) 부르다 거문고 비껴두고        등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하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 흐르는듯 하구나!        비단적삼 손에 잡혀 몇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는다...        매창의 묘는 부안읍의 사람들이 돌보기 전에는 그 산을 오르내리는 나무군들이 돌아가면서 벌초도 하고 가토도 해주면서 돌봤다고 한다.       또 류랑극단과 가극단이 부안에서 공연할 때는 의례히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신명나게 놀면서 이 선배대시인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그녀의 묘는 1983년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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