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수필] 주름지는 시간 외1편

▲ 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문학의강'으로 시 등단. 현재 울산 거주
[서울=동북아신문] 방아꽃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철쭉꽃들의 발가락사이를
겨우 비집고 나왔소
숨 한오리의 천박함이라지만
온 몸의 피를 내려 땅을 감고 버텼지
세상의 살벌함이 어디
천둥 치고 벼락때리는 것 뿐이겄소?
광풍에 소나기는 어떻고 줄창
쏟아지는 장마는 또 어찌했겠소만은
다 그렇고 그렇게 견디는게 아니겄소
장미꽃 그늘에 몸을 숨기고
국화꽃잎사귀들에 무릎을 꿇고
세상이 원하는대로
뼈대없이 흔들리는 거지
그리하여
꽃밭에서도 뽑히지 않고
한줄의 희망에 매달려 있다오
장미는 시들어 그늘을 벗겨주고
나는 드디어 꽃을 피웠소
국화가 만발하여 사람들이 열광할때
누구도 모르게 씨앗을 품을거요
그리고
온 천하에 뿌리를 내릴거요
장미도 아닌 국화도 아닌
방아꽃으로 말이오
 2018.10.16   망토 쓴 여자   달도 별도 없는 밤에 여자가 망토를 쓰고 들판을 걸어간다 길이 없는 저 벌판은 동서남북도 없다들쥐들이 맨발위로 사정없이 쏘다니고가끔 메돼지가 뛰쳐나와 여자를 넘어뜨린다 망토 쓴 여자는 얼굴이 없다 망토는 여자의 가죽으로 박혀버렸고안으로 자라나는 세치혀들이 심장을 튕겨가며 노래를 부른다악다구니는 점점 크게 번져나가고뉴런들은 초침보다 더 빠르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재생한다 밤은 깊어가고여자는 타들어간다망토 쓴 여자는 죽어간다 아침해가 아무렇지도 않게 솟아 오르고시커먼 입을 벌린 망토들이먹잇감을 찾는다 2018.10.19   차가운 공기가 떨어진다집앞의 못난 음나무철 모른 바보같이 움을 피운다이제 닥쳐 올 겨울이 걱정이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죽음의 무덤속에서또다시 잉태하는 긴 시간입안이 마르고 피가 마르고바짝 비틀어진 글들이 범벅된다 살갗이 베이는 겨울이 오고시퍼렇게 얼어버린 움살랑 스치는 바람에그대로 또옥 떨어진다 태여나지 못하고 낙태만 당하는 미숙아들서재의 쓰레기통에서 밀랍이 되여가고쌓이고 쌓이고 쌓여서고물상으로 끌려간다 봄이다움이 떨어진 자리에서 새 움이 돋아나고음나무는 한층 더 굵어지고 또 더 높아 갈거다 죽음을 뚫고 나오는 소리시를 위해 죽어가는 움들의 아우성움은 죽음이다움은 생이다 2018.10.21.  [서정수필 2편]주름지는 시간   전봇대아래서 폰을 들고 쿨쩍이는 청년이 있습니다. 하염없이 울음섞인 말들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전봇대아래에서 폰을 사용하면 위험하다고 일러주기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길바닥에서 울어버리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울음 소리를 오래 들었습니다. 희미하게 사라질때까지 들었습니다. 언제 저렇게 울었던가 기억이 안납니다. 아마도 한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름지지 않으려고 풀 먹인 광목처럼 빳빳한 삶이었지요. 입김에도 금방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릴거면서 왜 그렇게 악을 쓰고 감추고 싶었던가요. 문앞에 고양이 한마리가 옹송거리고 있습니다. 태풍이 오던날, 우리집 꽃밭에서 며칠을 지내더니 이젠 식구인 냥 저의 밤퇴근을 맞이합니다. 그날, 고양이의 애처로운 울음 소리를 듣고 빈 박스를 꽃밭에 살며시 놔두었지요. 그렇게 고양이는 자기의 주름을 예쁘게 만들었나 봅니다. 고양이를 보려고 폰으로 비추다가 꽃밭의 주름잎들을 발견했습니다. 십여년을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주름잎들과의 극적인 만남이었습니다. 하나같이 자름자름한 주름들을 가진 잎들이 꽁꽁 싸맨 마음의 끈을 와그르르 풀어 헤칩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버린 인생들이 저 밑바닥에서 주름지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어도 서로서로 주름지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나오는 감탄인지 너희들도 많이 울었겠구나 하며 울먹거렸습니다.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자업자득이지만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상이 끝장난 것 처럼 끔찍한 시간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애써 감추며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들은 자신의 속물성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세상이 삭막해지고 싫어졌습니다. 웃음도 없어지고 딱딱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주름지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행동이었죠. 살만한 값어치가 없다며 끝까지 위선으로 가자는 짓거리었습니다. 그건 자살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살고 싶었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허위와 가식에 매장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 많이 힘들어요. 그냥 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위로의 따뜻한 말에 행복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것은 주름을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행복을 꾸미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름은 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없이 솔직하게 나를 사랑하는 깊은 주름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도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주름을 새기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주름을 만드는 소중한 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시간들입니다. 그냥 경계를 벗어 던지고 믿음으로 가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2018.10.25 단풍 단풍이 부른다. 꼬물대는 잠을 깨운다. 터더덩 하고 옆집의 시한부아줌마를 불러 대문밖으로 나간다. "허엄!" 하고 웃집의 택시할아버지도 불러 나가자 할머니도 "기다려요!" 하면서 따라 나간다. 뒤늦게 등산차림을 하고 나도 나선다. 울안이 조용하다. 밤새 끙끙대던 고양이들도 단풍이 불러갔나보다. 단풍이 익어가는 소리가 온 마을을 채운다.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무화과나무, 복숭아나무들이 가을바람과 속삭이자 왕벚꽃나무, 은행나무, 층층이나무, 느릅나무, 메타세콰이들도 뒤질세라 술렁댄다. 단풍의 부름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하늘마저 높이높이 떠밀어 올린다.  단풍의 내음이 코끝을 간지린다. 허억! 목구멍으로 꿀러덩 넘어가고 온 몸의 모세혈관들을 긴장케 한다. 씽씽 자전거 페달을 밟고 산으로 달린다. 숨돌릴새 없이 헐떡이며 오르자 산은 벌써 달아올라 절정이다. 그대로 훌러덩 온 몸을 내던지고 사처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안아준다. 등산화아래서 낙엽들이 깨지며 아우성대고 투두둑 투두둑 단풍들이 추락한다.  툭! 빨간 단풍 한 잎이 어깨에 떨어졌다. 한 삶이 끝나는 소리가 무겁게 다가온다. 손에 받쳐들고 오~래 바라본다. 그렇게 이쁜 단풍이 처참한 상처로 찢어지고 긁히고 얼룩얼룩한 흉한 모습이다. 그 황홀한 진풍경을 빚어낸 예술의 바탕에는 처절한 삶들이 녹아있다. 아무리 그렇다 하지만 아름다웠다지만 떨어진다. 산을 내려오는데 뒤에서 앞에서 옆에서 가까운데서 먼데서 단풍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비소리처럼 들린다.  단풍들은 떨어진다. 엽집의 시한부아줌마의 일력장도 찢겨나간다. 웃집의 택시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알콩당콩한 하루도 사라져 간다. 나의 오늘도 툭! 땅으로 떨어진다. 령물인 고양이도 막지 못한다. 해도 떨어지고 달도 떨어지고 별들도 떨어진다. 빨간색이든 노란색이든 말라비틀어져 흉물스럽든간에 다 떨어진다. 인생이 너무 길어서 깔끔하게 살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그 순간에 떨어진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단풍처럼 떨어진다. 남은 날들을 거침없이 태우고 미련 없이 추락한다. 생의 마지막 사랑이여~ 201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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