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리안 드림  

조선족의 한국친척방문 초기에는 선물 겸 노자돈 마련으로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한약 보신재이다. 그것이 규모가 커지면서 일약 한국방문과 한약재 보따리 장사는 일확천금의 기회로 등장하게 된다

.1)  그들의 일터는 다양하였는데 여자들은 주로 식당에서, 남자들은 월급제보다는 숙식이 제공되고 임금이 높은 막노동일을 선호하였다. 그들은 한약을 판 돈으로 귀국 후에 새집을 마련하거나 혼수 비용 등 긴요하게 사용하였으며, 규모가 커진 경우에는 장사 밑천으로 사용하였다.

2)  초기 진출에서 주 요인이었던 한약이 가짜시비와 유해물질 논쟁이 시작되면서 한약장수는 시들어지고 대신 보따리 장수, 취업, 결혼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선족 동포들의 코리안 드림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 기회의 땅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불법취업과 산업재해피해, 밀입국과 사기 등 범죄화되는 경우도 있어서 결코 약속의 땅이 아닌 배신의 땅, 원망의 땅으로 남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었다.

2. 한약장사  


90년대초 연변과 한국과의 교류는 보따리 장수가 촉매역할을 하였다. 초기 한국의 초청 방문 시에 조선족들이 선물이나 용돈마련을 위해 가지고 들어온 한약들이 한국에서 폭팔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한약장수로 발전하게 된다. 한약의 약효에 대한 기대와 보신 심리와 더불어 중국동포에 대한 예우적 인정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조선족들이 가져오는 한약은 폭발적인 수요가 나타나게 된다.

 

그들은 서울역 지하도 등에 삼삼오오 모여서

3)  한약을 팔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구하는 요령, 임금수준, 기거장소 등 노동에 대한 정보교환, 불법체류에 대한 정보교환 등을 위한 만남의 광장으로 활용하고 오리엔테이션을 받기도 한다. 일단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하면 한약 좌판이 형성되었고 행상들의 길이는 무려 200 미터에 이르렀다.

 

4)  91년부터 93년까지만 하여도 서울역과 더불어 덕수궁 앞과 파고다 공원 등이 약령시라 할 정도로 교포 한약상들이 붐비었으나 94년부터 시들기 시작하였고 서울역 지하도에서 한약좌판이 간혹 있을 뿐이다. 한약상들의 활동은 서울을 벗어나 92년부터는 성남의  모란시장으로 확장되었고 호황기인 93년에는 100여명이 훨씬 넘는 한약장수들이 붐비었다

.

5) 거래되는 한약 및 보신재들은 해구신, 건신구, 정력제, 우황청심원, 녹각, 무좀약, 위장약, 간장약, 의약재, 염주, 도장 등이고 하루 수입은 5-10만원 정도이었다.  그들은 수입 금지된  웅담, 사향, 우황, 백사, 녹용, 산삼 등 보신재를 팔아 2-5배의 이윤을 남긴다. 특히 사향, 우황, 백사, 녹용 등 수입 금지된 한약재의 불법거래로6)  폭리를 취하기도 하지만7) 국내 한약 유통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국내 한약재 생산자에 대해 타격을 미치었다.

 

그들은 단속요원을 피하여 서울역 대우빌딩 부근인 양동이나 남대문 시장 부근, 염천교 뒷골목, 청파동 뒷골목에 사글세를 살면서 연변마을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연변마을은 약 80여개의 여인숙으로 형성되었다.  2-3층 짜리 건물에 10여개의 방이 달린 사글세방들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월 10만원의 사글세방에 2-3명이 동거하거나 사정이 어려우면 하루에 8000원씩 내면서 살았다. 그들은 돈도 부족하고 불법체류 자에 대한 단속도 피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는 방은 이부자리와 취사용 버너가 전부 2평 남짓한 여인숙이다.

 

한약재의 거래가 왕성해지자 초기의 동포애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사기를 당하거나 가짜나 유해물질이 함유되어 있고 아편밀수나 약재 처분 문제로 친척간 불화를 겪기도 하고 외화를 지참하고 출국할 때 적발 당하는 부작용이 나타나는 등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