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수(学修)-선양(弘扬)” 생명을 인지하는 테마시리즈

[독서 안내] ​ 고통과 멀어지고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적인 수요이다. 제6의식이 주재하고, 차지하는 생명상태는 단지 감관적 세계이다. 우리들은 모두 그 속에 깊이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어서 번뇌가 많이 발생한다. 촨시법사(传喜法师)는 여러 시각으로 마음 속의 소음을 간단히 하도록 상세하게 해석하였는데, 오로지 “인심으로 회귀하여 마음 속의 긍정에너지 이 근본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효심(孝心)”은 마음 회귀를 실현하는 암호와 공개 부호간의 대체 관계이자 총 손잡이이다. ​

마음이 편안해야 천하를 구제할 수 있다. “효심, 이 보귀한 생명의 정감은~” 촨시법사는 말했다. “한 사람의 복받음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질량을 이룬다. 자신을 이롭게 하고 타인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대승 보리심을 발기하는 원인이며,개체 생명이 사회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근본이다.”, “등잔 하나는 모퉁이를 밝히지만,만개의 등은 나라를 밝힌다.” 당대인의 심령 곤경은, 혹은 촨시법사의 “효심천당”의 해독 가운데서,유·불·도 전통문화의 지혜속에서 깨우침을 받을 수 있다.

사진은 촨시법사(传喜法师)

송나라의 태재(太宰)가 공자를 만나러 가서 물었다. “당신은 성인인가요?”

공자가 말했다. “성인을,제가 어떻게 감히 하겠나이까, 나는 단지 박학다식한 사람이외다.”

태재는 물었다. “그럼 삼왕(三王)은 성인인가요?”

공자가 말했다. “삼왕은 지혜를 잘 임용하고 용감한 사람인데 성인인지는 나는 모르지요.”

태재가 또 물었다. “그럼 오제(五帝)는 성인인가?”

공자가 말했다. “오제는 인의를 잘 운용하는 사람인데,성인인지는 나도 모르지요.”

태재가 또 물었다. “그럼 삼황이라면 성인이겠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삼황은 시세에 순응 잘 하는 사람인데 성인인지는 나는 그래도 모르겠어요.”

태재는 매우 놀랐다. “그럼, 누가 성인인가요?”

공자는 안색이 즉시 엄숙해지면서 잠시 후에 말했다. “서방에는 대성인이 있는데,천하를 다스리지 않고도 태평하고,설득하지 않아도 민중은 자체로 신앙을 갖고 있으며,교화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연히 선을 지향하는데,그의 도법은 광대하여 끝이 없고,그의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며, 위대한 인격은,전혀 말로 찬미 할 수가 없는데,내가 짐작하건데 그야말로 성인외다…….”

공노부자(孔老夫子)는 부처님에 대해서는 감탄했다. 《열자·중니편(列子·仲尼篇)》에 자세하게 이 일단락의 이야기가 기제됐다. 맹자왈 “사람사이에 기피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타인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이에 분쟁의 대부분은 사상의 분기에서 온다. 타인의 스승이 되기 좋아하는 것은 한 가지 화이기에 공자는 이토록 부처님에 대해 감탄한 것이다. 이 대성인은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를 추종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그야말고 대성인이라고 할 만하다!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데, 어떠한 내면의 수양을 갖고 있고, 어떠한 생명에 대한 감흥을 갖고 있을까? 거리낄 필요가 없이, 우리들이 현재 갖고 있는 마음 상태는 일시적으로 깨닫고, 체득하기 어렵다. 똑같은 사랑과 자비이지만 우리들이 성현(圣贤)을 사유할 수 없을 때 우선 우리 신변의 부모부터 떠올리기 시작해보자.​

“모성애는 얼마나 위대한가? 자식의 조그만 효심으로 어떻게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같이 넓고 깊은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부모의 사랑은 그토록 자연적이고, 억지로 지은 것이 아니며, 바라는 것이 없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부모가 되어야만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그루의 풀이 어찌 태양의 무한한 뜨거움을 추측할 수 있을까? 만약 자주 부모의 마음을 깊이 기억한다면, 따뜻함, 안전감을 찾을 수 있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효심과 자비심은 생명의 근맥과 지점(支点)을 찾는다. 이 생명나무는 녹음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온 세상을 비호한다. 그러므로 천지 간에 여전히 긍정에너지로 가득한 것은 세상에 영원히 부모가 있고, 부모는 영원히 원망과 후회가 없이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사회의 긍정에너지의 원천이고, 또한 한 나라와 민족의 부흥, 문명이 연속되는 희망과 동력이다. ​

부모는 아이의 천당이다. 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알았을 때, 이 진귀한 감정을 체험하고 관찰하여 고마운 마음이 생기고, 소중히 할 줄 알며, 효심이 생길 때, 아이의 마음은 빈도수가 바로 당장 부모의 마음과 한데 합쳐 진다. 우리들은, 효심이 가득한 현재에 부모 사랑의 해양 속에서 푹 빠져서 감사한 마음을 모른다면, 천당은 천당에 속하고, 아이는 아이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늘 습관처럼 여기는 부모님을 발견하고 감지하여야 만, 행복의 맛을 맛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모두 불성(佛性)을 갖고 있고 불자는 깨달음을 가지는데, 어느 깨우친 자는 범인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을 걷게 된다. 만약 불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육도(六道)에 빠져서 세상을 윤회하면 영원히 나올 수 없게 된다.  

현재 어떤 아이는 게임에 빠지기만 하면 헤어나 올 수 없고, 가상세계에 빠져서 부모님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여 길 잃은 아이를 끌어내오려 하지만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게임이야 말로 진실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켜 본다. 육도윤회(六道轮回)는 진실된 것인가 가상의 것인가? 육도윤회는 업의 지속이고, 업력 때문이며, 가상적인 윤회를 직면해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그 속에 빠져서 헤어나 올 수 없다. 태어나서부터 즉시 감관에 의지하는데 눈, 귀, 코, 혀가 몸과 마음이 되고, 색, 냄새, 향, 맛으로 접촉하는 방법으로 하는데 스스로 판정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확실하게 감관세계 속에 속박되어 현상의 급류파도 속에서 생사를 전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런 생명방식에 습관이 되었다.  

 
부처님은 우리들이 “눈, 귀, 코, 혀가 몸과 마음이 된다”는 혐소함에서 걸어나와서 눈을 감고, 귀는 미세한 소리에 교란되지 않으며, 생명의 깊이와 장구함을 감지하고, 생명의 고요함과 침착함을 체험하라고 한다. 심지어 사유를 하지 않고 제6의식의 분별을 정지하라고 한다. 사실상, 대뇌 의식활동은 심지어 우리들의 심층의 지혜를 방해한다. 제6의식이 주재하고, 감관의 세계를 점령하며, 생명의 진실이 아니고, 단지 생명의 작용이다. 마침 우리들이 그 속에 빠져서 본체를 잃었을 때, 원숭이의 72변에 홀리여서 번뇌가 무성하다. 진실로 돌아가서 생명의 본래의 면목을 찾으려면 또 제7, 제8의식으로 깊이 들어가서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이런 심층의 도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사람의 마음으로 회귀하라는 것이다. 인성으로 돌아가서 마음의 긍정에너지 이 근본을 회복한다.  

​그러나 불법의 수행은 단지 기술측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혜와 해탈을 얻고, 극락세계로는 어떻게 가는가는 저급 생명이 점차 정화되는 한 과정이다. 요점은 대승보리심을 발기하는데 있는데 보리심은 공(空性)보다 더 얻기 어렵다. 우리들은 늘 공을 깊어서 얻기 어려운 것으로 하는데 그러나 그는 전체 불법의 정화이고 철저한 진리이다. 만약 장기간 깊이 묻고 생각한다면 우리들의 정형화된 사유와 다르지만 일단 이해하면 매우 안정되고 견고해진다. 만약 공이 한 이지적인 수행이라고 한다면 보리심은 정감과 자비심의 배양을 중점으로 하기에 늘 깨우침을 받은 사람들이 보리심을 얘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살심(菩提心)인가? 모든 중생을 자신의 어머니로 보거나 혹은 우리들이 중생과 모자관계인 것이 곧 보살의 마음이다. 만약 ​무간지옥(无间地狱)에서 수난 당하고, 그 형용할 수 없는 극도로 된 고통을 겪는 중생이 곧 당신의 어머니라면, 만약 이런 감각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은 보살의 마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즐거울 때는 느낄 수 없으나 곤난에 처했을 때 진심을 볼 수 있다.  

나는 늘 직관적으로 표시한다. 보살심=공+큰자비심, 이다고. 속세의 도리에서 모든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은 모두 자신의 부모를 위한다는데 이런 마음은 극도로 광대하여 자연히 닭, 오리, 돼지, 개 등도 포함된다. 불교의 연구와 학습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은 철저히 개방되어야 하고 우리들의 견해와 지혜의 높이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행위공덕의 크고 작음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같은 한 가지 행위에서 다른 동기, 다른 지혜가 산생되는 효과는 하늘과 땅과 같은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의 회귀를 위해서 보살심은 한 구절의 불호(佛号)를 염두에 두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만 번의 공덕을 염두에 두는 것보다 더 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보살심을 발기할 수 있을까? 사람의 자식으로서 우리는 부모의 은혜를 억념하고, ​은혜를 알고, 은혜에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기초에서 다시 대승보살심을 발기할 수 있다. 소위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말은 불교에서는 보살심을 발기하는 그 순간이며, 이것은 범인에서 성인으로 되는 전환점이다! 이런 초심에 의거해야만 우리의 생명의 행위, 헌신하는 사업은 지지점을 찾는데, 이것은 불교와 유교가 서로 융화를 이루는 것이고, 중화의 대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발아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결과이다. 불교는 이로부터 중국전통문화의 갈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모성애는 얼마나 위대한가? 자식의 조그만 효심으로 어떻게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같이 넓고 깊은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3촌되는 풀이 어떻게 무한한 봄날의 햇빛을 생각할 수 있을까? 《부모은중난보경(父母恩重难报经)》에서 부처는 말했다. “자식을 얻어, 고통을 삼키고 기쁨을 토하며, 안고 양육하고, 깨끗하게 씻지 못하고, 피곤을 마다하지 않으며, 추위와 더위를 참고, 마른 곳에 자식을 눕히고, 습한 곳에 엄마가 자고, 3년 동안 엄마의 흰 피를 마신다.” 마찬가지로 《오분률(五分律)》에서 부처는 또 말했다. “사람의 100년동안, 오른 어깨는 아버지를 지고, 왼쪽 어깨에는 어머니를 지고, 대소변이 편리하고, 극세에 진기하며, 의복을 주고 공양을 하지만 잠시라도 그 은혜를 보답할 수 없다.” 

 
그러나 부처의 제자는 불법을 운용할 수 있다. ​“모성애는 얼마나 위대한가? 자식의 조그만 효심으로 어떻게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같이 넓고 깊은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삼보(三宝)는 원만한 것이고, 처지가 특수하고 우월하여, 조그마한 풀의 마음이라고 해도 부처의 지도에 따르고 우리들의 몸과 마음으로 불법을 이행한다면 현세의 부모에게 보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조상 내지 대대손손 부모의 은혜에도 모두 보답 가능하다. 오로지 삼보를 지지점으로 하면 더 큰 은혜에도 보답할 수 있는데 이것이 지렛대원리 이다.  

​《법화경(法华经)》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약 사람이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여 탑묘(塔庙)에 들어서면 남쪽은 부처가 없고 모두 불도를 이루었다.” 일단 삼보를 대경(对境)하고, 흐리멍텅한 상황에서라도 한 마디 아미타불을 하면 당신과 불연을 맺을 수 있다. “아이가 장난 칠 때라도 모래로 불탑을 쌓는데, 만약 여러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 어린애의 희론제조도 부처가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작고, 유한한 생명을 무한하고, 원만한 삼보 행렬에 투입하는 것을 능숙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인민일보》 해외판에 전에 인용하여 말한 《금융시보》 소식에 따르면 “중국에는 점점 더 많은 부유한 사람들과 명인이 불교를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후룬백부(胡润百富)순위가 표시하는바 중국에는 3분의 1에 가까운 최고급 부호들이 자칭 불교신도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은 불교의 인도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어느 두 명의 기업가가 담화를 나눌 때 그들은 모두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부모도 모두 불교를 학습하고 불교를 믿는다. 그리고 우리들이 재부로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매년 설을 쇨 때 나는 전 촌의 노인에게 훙보우( 红包)를 준다. 촌에 70세 이상의 노인은, 내가 전부 부양한다…….” 

​생각해보라. 만약 당신이 재물신이라면 이런 사람이 부자가 되게 베풀지 않겠는가? 나는 듣고 매우 감동되어서 참지 못하고 감탄하였다. “작은 재부는 근면에 의거하고, 중등의 재부는 모략에 근거하며, 큰 재부는 덕행에 근거한다”고. 만약 사회연구를 한다면 발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익숙한 일부 부자들의 명언을 보면 그들은 왕왕 교묘한 수단(기회를 틈타)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착실하게 처세한다. 그들은 재부를 창조하는 지렛대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는 도덕 모범이다. 그들의 인생추구에서 만약 한마디 계시의 말을 듣는 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같은 도리일 것이다.  

고통과 멀어지고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적인 수요이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생명의 한 가지 방향이다. 이 셰계에 대해서 만약 충분한 인지를 가진다면 당신은 자연히 생명의 선택을 내릴 것이고, 더 이상 명성이나 이익에 귀의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결정적인 선택이다. 목표를 정하고 광명을 따라서 간다.—부처는 우리들 인생의 본보기이다. 법은 우리들이 실천하는 도로이다. 승보(僧宝)는 우리 수행의 반려자이다.—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은 우리들이 불교수행의 근본 보증이다. 짧은 인생에서 생명의 최종 성과를 이룩하고, 3계6도의 속박을 벗어던지는 것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 모든 것은 ​“부모의 은혜를 염두에 두다”—이 초심에 기초한다. ​“부모의 은혜를 념두에 두다”는, 불교수행에서 인천승상(人天增上)이라고 하는데, 제1층이며 효심이 있는 사람은 늘 부모천당의 찬란한 빛 속에서 혜택을 입는다. “부모는 유형의 천지이다. 천지는 무형의 부모이다.” 천지는 살아 있는 것을 아껴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 품덕을 갖고 있어 모든 생명은 천지 사이에서 자란다. 만약 이기적인 말로 왕왕 천지의 은혜를 무시하고, 천지조화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이 생명은 천지를 뒷등지며, 천지에 스스로 자멸한다. 천지시공과 격리되는 것은 천지에 용납되지 않고, 천지에 용납되지 않는 것은 지옥의 방식이다. 때문에 육도윤회는 바깥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왜서 수행을 해야 하는가? 수행은 우리들의 불성을 회복한다. 은혜가 있는 부모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모두 부모로 보면 이런 양호한 생명특질이 있는 사람은 몸이 하나의 순수하고 양기 있는 생명으로 높여진다. 하나의 양광 계수(阳光系数)가 극히 높은 생명은 매일 천당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당신이라면 자신이 천당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천당도 완성한다.  

나는 당신의 즐거움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수련, 업그레이드 된 후의 이성적인 선택이다. 만약 자신의 본능적인 수요를 제1위에 놓으면 ​탐욕스러운 치매(贪瞋痴)가 생긴다. 그 탐욕스러운 치매는 지옥으로 향하는 고속철도와 다름이 없는데 소위 “천당 길은 당신은 가지 않고, 지옥문은 스스로 와서 던진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부모를 등지고, 천지를 등지면 자연히 한 가지 지옥방식에 처해진다. 만약 나의 수요로 그의 수요를 추측해내고,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리며 타인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면 당신의 생명가치는 충분히 드러난다. 단지 자신과 타인의 즐거움의 원천이 당신 생명의 장엄함이 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이기적이고 협소함을 타파할 수 있다. 이기적인 것과 이기적이지 않는 것은 일념의 사이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즐거움은 이타에서 오고, 모든 고통은 이기심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암묵리에 서로 마음이 통한다. 수행은 오묘한 것이다. 노자가 “곡즉전(曲则全)”을 이야기 할 때 조금 빙 둘러서 했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심신 인격은 건전하고 완미하다는 것은 불법이 우리 매개인에 관해서의 기본정신이다.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제어하고, 자세하게 사유하며, 개수하고, 조그마한 조정을 거치면 운명은 당장 변한다.  

그러므로 “효”, 이 진귀한 생명 정감은 즉 자기이리타(自利利他)가 발기한 대승보살심의 원인이며, 역시 개체 생명이 사회에 발을 붙이고 생존하는 근본이다. 한 사람은 공인 지혜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충분한 효심을 가져야 한다. 효심은 한 사람의 복받은 일뿐만 아니라 기타 생명의 질량을 결정한다. 효심이 충만한 사람은 즉시 천당에서 살수가 있다. ​​

“모성애는 얼마나 위대한가? 자식의 조그만 효심으로 어떻게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같이 넓고 깊은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단지 윤회를 중단해야만이 진정으로 부모에게 보답할 수 있다. 이런 생명의 내재적인 풍경은 극히 장관인 것이다. 부모에 대한 이런 감각은 만약 잘 찾는다면, 불교가 왜서 세상사이에 보존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부처의 심경을 이해하고 성인을 앙모하고 현인을 앙모하며 해탈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다시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자연히 공명이 생길 것이다. ​

“우는 참대가 죽순을 낳는다(哭竹生笋)”, “얼음에 엎드려 잉어를 구한다(卧冰求鲤)”라는 감미로운 효심을 계승해 나간다. 나아가서 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하는 충신, 충성을 다하여 국가에 보답하는 악비, 세 번이나 문앞을 지나나 들어서지 않는 대우, 천하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자신의 어른들을 부양할 때 기타 자신과 관계가 없는 노인을 잊지 않는 것은, 모두 효의 승화이다. 더 나아가서 보리심의 발기이다. 즉 모든 중생은 모두 과거의 부모, 중생을 구제, 수행성불은 효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효”의 3층차이다. ​

《맹자》는 늘 말했다. “천하의 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기본은 집에 있으며, 집의 기본은 자신에 있다.” 역대 성철(圣哲)이 제창하는바, 효도는 이미 깊이 중화대지에 뿌리를 내려 입신 양덕의 본(立身养德之本)이 되었다. 집은 나라의 기초이고, 나라는 집의 연장이며, 중국인의 정신보계에서 개인의 전도와 국가의 운명은 같은 빈도로 진동한다. 친지에 효를 하고 노인을 공경하며, 가문을 빛내고 나아가서 세상과 인민을 구제하고, 세상을 보좌하며, 애국심과 책임담당을 지고, 장대한 강과 하천이 끊임없이 흐르듯이 중화민족의 정신 도통(道统)이 흘러서 중화민족의 아들딸의 정신적인 집의 정원을 촉촉하게 한다.  

효심천당은 단지 효의 한 가지 정감이나 부모의 은덕을 진술하기 끝이 없다. 부처가 총결하는 어머니의 은덕은 역시 다 노래할 수 없다. 우리가 자세하게 현재에 혜택받고 있는 행복속에서 음미하고, 생각한다. 이것은 매개인의 마음의 양분이고 사회, 국가 나아가서 인류가 모두 학습을 수요하는 생명 내포이다.  

생명의 성장은 대체할 수 없다. 불교를 배우면 이런 정감이 생기지만 친지와 친구들은 있을 수 없다. 날로 새로워지는 현대과학기술은 아무리 어떻게 눈부시고 사람을 매혹시켜도 도구일 뿐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은 여전히 희노애락이 있고, 여전히 생노병사하는데, 불교는 사람들을 도와서 생명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 

<촨시법사 약력>

촨시법사 1967년 상하이 출생. 1994년 오공(悟公)상인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스승은 청밍양(承明旸)대스님 등 여러 고승이고, 찬도(禅道) 대스승의 계승을 받아 워이양중(沩仰宗) 제10대 계승인이 되었으며, 자세히 불법을 연구하고, 교리에 통달하였다. 2004년에 동남아시아로부터 시작하여 요청에 응하여 유럽 미국 각국에 가서 법을 전하여 중국전통문화가 세계로 나아가는 탐색자로 되었다.

생명티비(生命电视台)의 강연담당법사이고, 《유럽신보(欧洲新报)》, 미국《신보(新报)》, 《치루주보(齐鲁周刊)》등 국내외 여러 신문사의 “불교학 특별란(佛学专栏)”의 작가이다. 법사는 시대의 맥락과 긴밀히 연결하여 5000여년 동안 길게 이어진 중화문명과 접속하여 불교의 시각으로 중국전통문화의 당대가치를 강연하며 “도”로 생명의 경계를 업그레이드 시키고, 인류자아의식의 위기를 돌파하며, 문화가 다시 건립되는 노드(节点)에서 “도”는 인류운명공동체가 공동으로 갖고 있는 재부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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