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기의 詩學”을 중심으로-

[서울=동북아신문] 편자주:
(사)국제펜한국본부(손해일 이사장) 주최로 한글과 한글문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한글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제4회 세계한글작가대회’가 6일부터 9일까지 천년고도 경주에서 개최되었다. 본 대회는 ‘세계한글문학-민족혼의 요람’을 주제로 국내외 작가와 학자, 전문가들이 한글과 한글문학에 대한 연구와 발표를 통해 상호 교류하고 발전방향을 논하는 한글 문학의 장으로 펼쳐졌다. 석화 시인이 중국 측 대표로 참가하여 ‘중국 조선족 詩文學의 한 경향―“바라보기의 詩學”을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본 지에서는 두 번에 나누어 ‘제4회 세계한글작가대회’에서 발표한 석화 시인의 논문을 게제하려고 한다.

 
<석화(石華) 시인 약력>
중국 길림성 용정 출생. 중국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부, 한국 배재대학교 인문대학원 졸업.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주임, 월간 《연변문학》 한국 서울지사 지사장 역임.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인민출판사 편집, 문학아카데미 “해란강문학성” 지도교수.

     
 
     
 
시집: 《나의 고백》, 《꽃의 의미》, 《세월의 귀》, 시선집 《연변》 등.
문학평론집: 《시와 삶의 대화》. 《김조규시문학연구》. 《윤동주대표시 해설과 감상》 등.번역저서: 《병법36계/ 전3권》. 《중국동화선집/ 전2권》. 《갈채하는 숲/ 한중대역시집》 등. 수상: 《천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지용시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외 다수.

     
 
Ⅰ. 머리말

중국 조선족은 19세기 후반, 특히는 20세기 초엽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내에 대량의 “유이민”1)이 발생하여 수많은 파산농민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가면서 형성되었다. 지난 세기 초, “간도”로 불린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 조선족은 이주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개척과 정착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비록 중국경내에 터를 잡고 살아오면서도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갔으며 줄곧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중국 조선족문학2)은 바로 이와 같은 중국 조선족의 삶과 정서를 우리의 언어로 담은 문학이다.
중국 조선족문학은 현재 중국내 56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중국 조선족이 이뤄낸 문학으로서 사회, 정치학적 견지로 중국문학의 범주에서 연구되어야 하며 언어적 동질성과 역사, 문화적 동질성으로 한민족문학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같은 한민족으로서 동일한 언어와 고유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조선족문학과 한반도 남북한문학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 조선족문학은 우리 한민족문학의 한 부분이면서 또한 나름의 자체적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하여『중국 조선족문학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0세기초엽부터 조선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자 수많은 진보적 작가들이 망국의 설움을 안고 “간도”에 들어와 극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고장의 문인들과 더불어 자기의 창작활동을 폭넓게 벌리었는데 그들 중에는 중국에서 주요하게 생활하고 창작했거나 자기의 최후를 마친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 작가, 시인들로는 김택영, 신정, 신채호, 이육사, 윤동주 등을 들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빛나는 창작성과로 중국 조선족문학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중략- 만일 그들을 중국 조선족문학사발전과 유리시킨다면 중국 조선족문학발전의 흐름과 맥락을 서술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중국 조선족문학발전행정에 나타난 한낱 특이한 현상이라 지적해야겠다.3)

중국 조선족문학과 한반도 남북문학의 창작자들은 비록 서로 다른 국적을 갖고 있지만 동일한 우리말과 글의 사고체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민족이다. 그러므로 중국 조선족문학은 한반도 남북문학과 함께 한민족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고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에 초점을 두고 그 흐름과 문학적 경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중국 조선족문학의 형성과 특성을 살펴볼 것이며 그것이 중국 조선족시문학에 나타나고 있는 주요한 경향의 하나인 “바라보기의 詩學”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쳐볼 것이다.

Ⅱ. 중국 조선족문학의 형성과 특성4)

현재 중국 조선족문학에 대하여 그 성격과 특징을 규명하면서 “간도문학”5), “재만 한국문학”6), “중국 조선족문학”7), “중국 조선인문학”8), “조선족이민문학”9), “만주 조선어문학”10), “재중 조선족문학”11) 등 여러 가지로 지칭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문학은 100여년의 발전노정을 통해 한민족문학으로서의 전통과 특징을 보유하여왔으며 현실적으로는 비록 중국내 소수민족문학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지만 우리민족의 작가군체(作家群體)가 우리의 언어로 제작한 문학이라는 이유로 민족적 관점에서는 한민족문학의 범주에 포함하는 “한민족문학”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2)
중국 조선족문학이 한반도의 우리 민족문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은 “중국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인민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동족으로”서 여러 “사회역사 발전단계를 함께 경유하면서 민족문학을 찬란하게 꽃피워 왔”13)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족문학은 이와 같이 수천 년간 한반도 내에서 창출된 우리의 민족문학에 뿌리를 둔 문학으로서 19세기 후반기 특히 일제에 의한 국권찬탈이 사실화 되던 1910년대를 기점으로 차츰 중국대륙의 생활과 밀착되면서 독자적인 발전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문학은 현재까지 100여 년간 중국 동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이주와 개척, 정착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과정을 겪으면서도 본체인 한민족문학에서 유리된 적이 없으며 부동한 정도나마 그 발전의 행보를 같이 하여 왔다. 특히 1930년대로부터 40년대 중반 “8 ․ 15 광복” 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악랄한 통제와 단말마적인 탄압이 가심화되어 조선반도 전반에 “문학공백”의 암흑기14)가 형성되던 시기에 “간도”와 “만주”로 불린 중국 동북부는 우리의 민족문학이 존속할 수 있은 유일한 공간15)이 되었다.
일제가 “조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민족의식을 뿌리째 뽑아 버리며 전체 조선민족을 일거에 말살하려는 일련의 조치”16)를 취하여 우리말교육을 철폐하고 악명 높은 창씨개명을 진행하며 우리 글 신문, 잡지를 폐간시키던 1930년대 중반에서 40년대 초에 이르는 이 시기, 간도와 만주지역에서는 오히려 우리 글 문학지와 작품집들이 육속 발간되었고 따라서 이곳은 우리 민족문학이 맥을 이어가는 장소가 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서 일제 말엽 망명문단을 이룬 주요한 동인지, 시집, 창작집 또는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 가운데서 지금까지 전해진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인지《북향》: 1936년 용정에서 이주복(李周福)등이 발간해 이듬해 4호까지 펴낸 동인지.
신영철(申瑩澈)편 《재만수필선》: 프린트판으로 1939년 출간한 공동 작품집.
신영철(申瑩澈)편《싹트는 대지》: 재만조선인단편집으로 1941년 출간한 공동 작품집.
김조규(金朝奎)편 《재만조선시인선》: 연길에서 1942년에 출간한 공동 시작품집.
박팔양(朴八陽)편 《만주시인집》: 길림에서 1942년에 출간한 공동 시작품집.
안수길(安壽吉) 작 《북원》: 연길 예문당에서 1943년에 출간한 창작집.
안수길(安壽吉) 작 《북향보》: 1944년에 《만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17)

이와 같이 간도와 만주지역이 “거대한 허상 속에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 공간”18)으로서 당시 우리 민족문학이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숨통이었고 최후의 근거지였다는 이유를 이 시기 이 지역에서 문학 활동을 펼친 작가, 시인들이 1945년 “8 ․ 15광복” 이후 남한 문단과 북한 문단 그리고 중국 조선족문단의 형성에 중추적 작용을 하면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 이 지역 문인들 중 김조규, 박팔양, 김영팔, 현경준, 이갑기 등은 광복 후 귀국하여 북한문단의 중심에서 활약하였으며 염상섭, 손소희, 안수길, 유치환, 윤영춘, 김달진, 김진수, 박계주, 윤백남, 이종환, 곽종원, 송지영 등은 남한문단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작가동맹 시분과위원장을 지낸 북한시인 김순석을 비롯한 많은 북한 문인들과 남한의 시인, 작가들인 김규동, 문익환, 김수영, 박화목, 민영, 손창섭, 추식, 김용호, 황석영 등은 일찍 이 고장에서 태어났거나 공부한 세대들이다.19)
특히 1910년, 일제의 “을사늑약”에 의해 국권이 찬탈된 후 중국으로 망명한 신채호 등 망명지사들을 비롯하여 장편소설 《인간문제》의 작가 강경애 등 수많은 문인들이 간도와 만주 등 중국 땅에서 훌륭한 작품을 써서 남겼고 1930~40년대 우리문학의 “암흑기”에 자기의 젊은 생명을 다 바쳐 “한 줄의 시”를 써내어 찬란한 한줄기 별빛으로 우리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시인 윤동주와 심연수는 바로 이 고장이 낸 시인들이며 중국 조선족문학의 시작을 연 작가 김창걸, 김학철과 시인 이욱(이학성), 함형수는 이 고장을 지키며 문학적 삶을 마쳤다.20)
중국 조선족은 100년 남짓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민족의 문화를 계승함과 동시에 중국이란 특정된 사회적 환경에서 한족(漢族), 만족(滿族)과 기타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흡수하고 또 세계 선진국의 우수한 문화도 받아들여 한민족문화와도 구별되고 중국의 전통적 문화와도 구별되는 중국 조선족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23)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중국 조선족 문학은 그 발전과정에 대해 논자들의 관점에 따라 많은 이견24)들이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이주 초기부터 1930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한반도와 문학적 상상력이 동일한 이민문학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중국 조선족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구성원이었던 사람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문학적 상황은 한반도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문단에서 활약하던 문인들 대부분은 조선반도에서 망명해온 문학가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주된 문학적 내용은 고국과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나라 잃은 슬픔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1930년부터 1945년 광복이전까지의 문학을 두 번째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중국 조선족은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들과 공동으로 동북을 개발하고 제국주의, 봉건주의 세력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해 나아갔다. 이 시기 역시 일제에 의한 착취와 억압이 성행하던 때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항일문학, 향토문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이주민으로서의 강한 정착의식, 망향의식 등 초기의 이주민들의 생활의 애환을 토로하는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까지만 하여도 한반도의 한민족문학적인 특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세 번째 단계는 1945년 8ㆍ15해방 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될 때까지로 과도기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은 중국대륙에 거주하던 조선반도의 이주민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 대열에는 용정이나 신경을 축으로 문학활동을 하던 많은 문인들도 끼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민족문학의 자생력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중국 조선족문학은 점차 다른 형태의 문학적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였다.25) 또한 이 시기는 중국과 한반도 남과 북에서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했던 까닭에 문학적 환경도 그에 따라 변하게 되었다.
네 번째 단계는 1949년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중국 조선족 나름의 고유한 문학이 형성된 시기이다. 중국에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자 중국 조선족 대부분은 중국의 공민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중국 조선족문학은 한반도문학과는 다른 이들만의 고유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 조선족문학은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이중적 성격을 함유하고 있다. 언어와 문학적 근원에서는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갖고 있었지만 사회적 환경은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적응하면서 중국문학을 수용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중성격이라고 하여 두 가지 특성이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민 초기에는 조선반도의 문학적 특성이 주류를 이루었던 반면에 정착단계에 들어서는 중국문학의 특성이 증가되었다. 이런 현상은 "마치 시집간 딸처럼 처음에는 친정집에서 양성된 습관에서 해탈되지 못하다가 그 뒤 차차 습관 되고 마지막에는 시집의 사람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26)이다. 그러므로 중국 조선족문학은 말 그대로 중국 조선족문학이지 결코 재중조선인 문학이라거나 이민문학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중국 조선족 문학의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주요하게는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생활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 중국 조선족문학으로서의 자체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27)
이러한 배경의 중국 조선족문학은 1978년 이전까지 다분히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50년대 중기에서부터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온 사회주의적인 문학정책 탓에 중국 조선족문학은 “정치종속”, “정치복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28) 중국 조선족문학은 1990년대에 들어서 실시된 급진적인 개혁과 개방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문학경향이 서로 복잡하게 교차, 교합되면서 다원적인 문학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변화하였다.29)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들은 점차 문학본질에로의 접근을 시도하였고 작가들이 사회를 보는 관점도 다양해지고 사물을 보는 시각도 개방적이고 참신해졌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단순성, 단일성, 통일성을 많이 극복하고 복잡성, 다양성, 모순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Ⅲ. 중국 조선족시문학에 나타난 주요 특성

1. 고국상실의 서러움
문학작품에서 고향상실에 대한 의식은 보편적인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의식 내면에 본원적 근거의 상실에 대한 회귀의 원초적 상상력이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조선족시문학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특성이 바로 본원적 근거의 상실에 따른 동경의식이다. 중국 조선족의 삶은 유랑자의 삶과도 비슷하다. 그들은 불우했던 우리 역사의 희생자들일지도 모른다. 민족과 국가가 다른 이중적 삶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조선족인 까닭이다. 조선족시문학에의 동경의식은 시를 형성하는 주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동경의식은 본원적 근거지의 잃음과 원래의 것에 대한 되돌아봄의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다. 근원적인 대상, 즉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표출되는 이미지이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추구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 단절의 폭과 강도가 심해질수록 그리움의 정서는 더욱 짙어지며 그 대상에 닿으려는 의지도 그만큼 더욱 강렬해 진다.
19세기말의 이재민들은 주로 함경도 지역에 거주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이은 큰 가뭄에 낟알 한 알 수확하지 못하자 먹을 것을 찾아 만주지역으로 오게 되었다. 이들의 행렬이 많아지자 청나라는 “월강죄”31)를 만들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민들은 무서운 “월강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화전을 일구고 겨우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나라를 잃고 유랑자의 길에 들어선 한 사내의 아픈 마음을 김조규 시인(金朝奎, 1914.1.20~1990.12.3)은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안개 짙은 밤
나는 그늘진 나의 청춘을 안고
북행열차에 실려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노라
산 속을 기여
해안을 달음질쳐
북관 천리

차창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한폭 생활의 축도런가
행복은 문 어구에도 없고
불행만 꽉 차 숨이 막힌다

차창을 적시는 가을 찬비는
울며 따라서던
어머니 눈물이냐?
마지막 넘던 집문턱
울바자에 맺혔던 밤이슬이냐?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잃었으니
어느 구석엔들 웃음이 있으리요
빈 젖을 파고드는 애기의 울음을
어머닌들 무엇으로 멈춘단 말인가
그런데 욕설로 무찌르는 이방말…

차바퀴소리 요란한걸 보니
두만강 다리를 건너는 가부다
벌써 대지는 얼어
북만에 눈발이 섰다는데
홑적삼 로즈레로 이제
대륙의 칼바람을 어이 견뎌낼 것인가

오라는 글발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밤과 밤을 거듭한
추방의 막막한 나그네길

나는 내가 내리는 이곳
북행열차는 끝닿는 줄 알았는데
아,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북행열차는 더 큰 불행과 슬픔을 싣고
어덴가 자꾸 떠나고 있어라

― 1940년 조양천에서

― 시 “북행열차” 전문32)

김조규 시인은 북행열차에 올라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는 한 조선의 젊은이를 그리고 있다. 그의 청춘은 출구가 없는 “그늘진 청춘”이며, “행복은 문 어구에도 없고/ 불행만 꽉 차 숨이 막”히는 현실뿐이다. 그럼에도 “오라는 글발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북만으로 무작정 달려가는 떠도는 청춘이다. “대륙의 칼바람” 속에서 그의 앞길은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추방의 막막한 나그네길” 이다. 그리고 이 길은 “더 큰 불행과 슬픔을 싣고” 그저 “어덴가, 자꾸 떠나”는 미지의 행로이다. 고국을 상실하고 타국으로 향하는 떠도는 자에게 희망보다는 서글픔의 현실만이 존재하고 있다. 어머니의 빈 젖을 문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자 이방인은 욕설로 반응한다. “욕설로 무찌르는 이방말”은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비정한 현실상황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시인의 다른 시 “3등 대합실”에서 “쪼막발 이방의 아가씨가”라고 표현된다. “욕설의 이방말”이나 “쪼막발 이방 아가씨”는 떠도는 자의 서글픔을 더 한층 고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인은 “눈물의 북쪽 만리 아하하/ 쫓기우는 족속이여… 언제 닥칠지 모를/ 그 무서운 폭압의 채찍이 내리기전/ 나도 어데든지 떠나야 할 것 아닌가” 라고 하면서 사냥꾼에 내몰려 막다른 곳에 이른 가련한 짐승처럼 항상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서글퍼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고국과 고향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차가운 눈바람이 몰아치는 이 광막한 북에까지 와서도 오갈 곳 없이 도망갈 궁리만 해야 하는 이 가련하고 허탈한 상황은 나의 근원을 빼앗아 간 자들에 대한 한없는 저주와 원한을 낳게 하며, 이것은 또한 반대로 새로운 세상, 밝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무한한 크기로 바라보게 한다.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한 형태인 “바라보기의 시학”은 고국과 고향에 대한 상실의식에서부터 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실의식은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서 기인 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들은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근원적인 공간에서 이탈되는 비애를 표현하면서도 그곳으로 회귀하고 싶은 의지도 보이고 있다. 당시에 발표된 대부분의 시들의 내용은 이처럼 고향과 고국의 상실 및 회귀의 염원을 담고 있다. 잃어버린 고향,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을 그리면서 하염없이 상실의 저편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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