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따리 장사  


연변 조선족들의 보따리 장삿속은 개방 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변경에 위치하여 북한과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보따리 무역성격인 변경무역의 확대는  소수민족지구 정치경제에서 그 지위와 역할을 과시한바 있다(왕득신, 배정호, 하권, 203).

 

중국과 한국간의 보따리 장사는 중국의 개방과 더불어 조선족이 한국을 방문하면서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약을 가지고 와서 비싸게 팔고 갈 때는 물건을 사다가 비싸게 팔아 부자가 되는 사례가 많아 조선족들은 보따리 장수로서 변신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한때 전문적인 보따리 군은 약 1 만 명이 되고 무역규모도 비록 통계에 안 잡힌다 해도 무시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연변 조선족의 보따리 장수는 한국의 서울과 인천, 그리고 중국의 위해, 청도, 천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보따리 장수는 90년 9월 수교 전부터 인천-위해간 위동 페리호가 취항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거래 종목은 와이셔츠, 넥타이, 원피스, 바지, 반바지, 티셔츠, 블라우스, 주름치마, 속옷, 신발, 구두, 스타킹, 구두, 샌달, 벨트, 매뉴큐어, 선글라스, 지갑, 멜빵, 넥타이, 의류 잡화, 생활용품 등 중저가 제품이 대종을 이루었다(심의섭, 296-297).

 

한중간의 보따리 장수는 조선족들이 주도하였으며, 활동무대도 위해, 천진, 청도, 연길 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연길에서 제일 큰 서시장에는 한국상품을 보따리 장수로부터 수합하여 연길 시민에 대한 공급 뿐만 아니라 조선피발, 러시아피발이라는 전문용품의 도매상까지 등장하였다.

 

이러한 보따리 장수는 한국상품의 중국으로의 수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인기 있는 중국산품, 예를 들면 보신재, 한약, 한약재, 참깨, 골동품 등을 비롯하여 역 보따리 무역, 나아가 밀수까지 성행하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부산 본부세관은 2억원 어치의  중국 참깨  33t을 컨테이너에 적재,수입화물인 것처럼 속여 부산항을 통해 밀반입한 국내선사 및 하역업체가 개입된 대규모 국제 참깨밀수조직을 적발했다(96. 6.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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