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시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허순금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시분과 부부장, 시 수십편 발표, 동포문학(4호) 신인상 수상.

 

1. 작은 웅뎅이의 고백

 

내 마음은 이미 젖을  대로 젖었다
비야, 더는 내 창을 노크하지 말거라

네가 나에게 준 고운 파문 동그란 행복을
난 차마 거절할 힘이 없단다

네가 오는 소리마저도 곱게 보듬어 안은  나는
네가 없는 날의 긴 허무와 공허속에 말라갈거다

나에게 미친 방출대신 고요함으로 있게 해줘
가슴 쥐어뜯으며 흐르는 흙탕물이 되긴 싫단다

나는 그냥 평범한 한조각 땅이고 싶단다
어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품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으로...

어느날인가 푸른 싹 하나 돋으면
그것이 내 사랑의 증표인 줄 알고
곱게곱게 쓰다듬고 가거라

제발 더 이상 나에게
미친 방출(放出)을 주지 말거라

 

2.바람

        

求道의 길위에
그렇게 많은 것은
필요하지 않아

눈에 보이는 헛된
허상들의 빈 껍데기속에
버리고 버린
숨결 하나!

너의 고향은 하늘인가
아니면 바다인가,
땅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몽실몽실 흰 구름
띄워주고
잠들지 못하는 바다를
연주하고
땅위의 모든 생명들을
춤추게 한다

흔들리는 모든 것의
뒤에 섰다가
앞서고 싶은 날엔
모든 것은 파멸의
이름으로 남음에

참회와 속죄의 마음으로
새로운  길 따라
묵묵히 수행의 길위에
다시 선다

억매이지 않고 가는
자유의 길위에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음
해탈이라며
오늘도 숙였던 머리
다시 드는
기도의 이름
바람이여

 

3. 눈을 쓸다

                 

까맣게  타는 가슴
목메이던 기다림

희미한 미소로 토해내며
한번도 기다려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한번도 아파본 적 없는 사람처럼
장대비 들고
쓱싹쓱싹
눈을 쓴다
쓸고 쓸고 또 쓴다.

비자루 지날 때마다
내 맘이 내려앉아
하얀 눈이 금새
시커멓게 변한다

올 겨울 ...

나는
무지 아팠다

 


4. 바보

 

사춘기 소녀가 숨어서
연애소설 훔쳐 보듯
콩닥콩닥 뛰는 가슴
그대를 가만히 읽는다
나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폰속의 프로필 사진만 봐도
온 세상으로 내게 다가와
봄꽃으로 웃게 하는 이

아무런 욕심이나 바램도
없다면 새빨간 거짓말
잡고 싶어도 잡을수 없는
꿈속에만 헤매이는 두 손
허겁지겁 감추면서,
아니 감출수 없으면
차라리 등뒤에 숨기련다

어디선가  분명히
목소리가 들릴것 같은 아침
스스로 붉어지는 웃음
빨간 노을속에 숨긴다
그이의 그림자 한 폭
꽃피는 정원에 숨겨놓고
날마다 가만히  포옹해본다

 

5. 장미

 

햇살 좋은 봄날
정원의 장미넝쿨
뜨거운 숨결속에
가만히 키를 높이며
담밖으로 발돋음하는구나

님이 지나는 골목길
온 몸의 신경줄 그리움으로
날카롭게 일어서는 날들에
초록의 머플러 둘러서
수줍게 감추고

타는 가슴 애끓음에
아픈 멍울멍울들
참고 참던 순정
입술을 달싹이며
화르르 붉게 쏟아내고
드디어 5월의  예쁜 신부
되는줄 알았더니

까치 우짖는 새벽
웃는듯 우는듯
얼굴은 더 붉어지고
무겁게 숙인 고개
꽃그늘속에 상념이 깊다

비에라도,
비에라도  흠뻑
젖고 싶은 날일 것 같다

▲ 장미꽃 정열, 그리고 그 정열이 풍기는 향기

 6. 9월

            

아버지가 오신다
성큼성큼 걸음도 빠르다
시원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오셔서 나를 무릎에 앉힌다

책장을 펼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신다
비가 쓴 가을 초대장이며
신나서 나눠주는 바람의 이야기며
매미가 무대에서 내리고
귀뚜라미가   아침을 노래함에
귀도 기울여 보라고 한다
배롱나무꽃이 어떻게 여름을 건너서
가을에로 왔는지
여름의 자궁에서  어떻게
가을이 태어나는지
나는 어떻게 이 세상에 왔는지
아버지는 토닥토닥  다독여주고
나는 조용히 기대서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반평생이 흘렀다
하늘가에  웃음이 걸린다
늘 너와 함께  있었다고
번쩍 들리는 세상이여

 

7. 함박눈

            

이른 겨울,
서리 찬 말들이 차창에
쏟아져 내려
나의 실신한 사랑을
흔들어 깨운다

무더기로 가슴에
쏟아져 내렸다가
결국 갈래갈래 눈물로
다시 녹아내릴것을

뒤 돌아보면
발자국소리 더욱
허전하다...

 

8. 섬

            

많고 많은 인해중
작디작은 점일망정
네 시선을
네 마음을
훔칠수 있음에
행복이었단다

내 가슴엔
바람이 일고
꽃이 피고
새들의 노래로 넘쳤지

언제부터인가
네 눈길도
네 마음도
멀어져가고
물빛 그리움속에 갇힌
죄수가 되였단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묵묵히 섬이 되어가는 일
망망대해속에
잊혀지지 않으려
조그마한 얼굴 쳐들고
몸부림치는 일
조각조각  모래알로
부서지는 아픔속에
흰 돛단 배 기다리는 일

오늘도 출렁임속에
또 하루를 버텼다

 

9. 엄지의 추억

                          

그녀의 바다는 엄지 발가락에
바른 패디큐어에서  시작됐다
파란 물결과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는듯한 금빛 모래

처음에 파란 색으로 칠하고
다음은 금빛 펄로 칠하고
그다음은 무색으로 코팅한
엄지의 추억은 지워질 줄 몰랐다

헤염을 칠 줄 모르는 그녀가
나만  믿어하는 아찔한 손길에
몸을 맡겨 물고기가 되던 그 순간
바다도 그녀의 것
그도 그녀의 것,
이 세상 전부가 그녀의 것이었다

여름, 가을을 지나면서
잘라져나간 발톱의 크기만큼
그녀의 바다는 점점 작아졌고

마침내는  겨울비가 오는 소설에
소설속의 이야기 같았던 마지막
한단락마저 뭉텅 잘라내고나니
그녀는  푸른 바다를 잃었다

하얀 낮달이 창백한그녀의  뭍은
저 멀리 밀물이 밀려올 소리에
고요히,고요히 숨죽이고 귀를 강군다

다시 한번 바다라는  이름으로
푸르고싶은 욕망만이
바다보다 더 진하게 출렁이는데
썰물이 빠진 뭍엔  하얀 소금밭이
많고많은 눈물의 밤만을 저장했단다

 

10. 꿈
      


아지랑이처럼 곱고
몽롱한 아름다움이
뼈대를 척척 갖추더니
높고 웅장한 탑되어
하늘을 찌르며 선다

나는 화려한 드레스에
짙은 색조화장 마치고
비장한 표정의 여왕 되어
치맛단 잡고 문을 연다

날아가는 시간이
펼쳐놓은 깃털,
그 하나하나의
황금계단을
차거운 맨발로
올라야만 한다

두 주먹 꼬옥 쥐고
외줄타는 이 되어본다
괄약근 조이고
숨소리마저 죽인다

앞만 보고 가야 한다
기왕에 시작한 걸음
철탑끝에 찔린
해님사냥 포기할 수 없다

해를 삼키련다
입 크게 벌려
꼴깍 삼키련다
푸른 이끼 자라는
가슴속 구석구석
흐드러지게
꽃피울 그날 위해서

 

11. 귀

        

비가 내리는 날에는
가슴속 밑바닥에
말라 비틀어 쓰러져있던
참나무 퀭한 눈동자가
유들유들한 귀를 낳는다
온 몸이 귀가 되어 소생한다
무슨 목소리인가를 가려 듣고픈
간절함이
리모콘이 되어 나를 조종한다
차거운 새벽 이슬에 젖듯
손에 잡히지 않는 오색무지개
추억속에 젖어
너의 체취 말캉말캉한 웃음을 만져본다

푹 젖어있는 귀
텀벙텀벙 눈물이라도
떨굴 것 같은데
기다리는 너의 목소리는
내 옆에서도
폰속에서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 언제까지 이 귀 열어둬야 하느냐

귀가 까맣게 탄다

 

12. 말

                     

수많은 말들이 뒤엉켜 
한마리 말이 되어
히히힝 표효한다

앞발 성큼 들었을 때
작은 가슴속에 박은 뒷발
지축을 흔드는 소리

고삐가 짧아 안타깝게
가슴속만 맴도는 말

대천세계 뛰쳐나갈
힘찬 몸부림이
겨드랑이 밑에 나래를 단다

말 한마리 풀려나가고
비어지는 마구간
고요를 거부하는
또 다른 말의 산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