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수필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천숙 약력: 중국 벌리현 교사 출신. 집안 심양 등지에서 사업체 운영, 재한동포문인협회 수필분과장. 수필, 시 수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작년 가을의 어느 날, 나는 재미교포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해서 그들 부부에게  “미국에서 살면 동양인들을 많이 무시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겨내셨는가”고 문의하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사모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20 여 년 전 가난한 한국에서 풍요한 미국으로 간 우리 가족은 언어도 서툴고 부족한 면도 많았지요. 하지만 이런 열등감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하고 여유로운 조상의 후예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지요. 한국보다 화려하고 풍요한 사이사이에 보이는 미국인의 이미지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피폐한 경직성이었고, 돈이 중심이었어요. 물론 지금은 많이 변했어요.”

그러자 옆에 앉았던 사장님께서 한마디 덧붙였다.   “미국인들이 동양인을 무시하는 것은 자꾸 자기 자신을 숨기려는 태도 때문이라고 하지만,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무시하는 것은 질서를 잘 지키지 않기 때문이지요.”

나는 속으로 흠칫했다. 한국인들이 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다니? 우리는 한국인들이 너무 질서를 잘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인들에 비하면 시민의식 수준차이가 많이 난다고?! 

문뜩  언젠가 TV에서 본 두 가지 화면이 떠올랐다. 
쓰레기통이 없는 일본의 공공장소. 일본인들은 모두 자각적으로 쓰레기를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가 집에 가지고 가서 분리수거를 하는 모습. 또 하나는 일본 쓰나미 때에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원물품을 받을 때 질서 있게 줄을 서서 자신의 순서를 내심하게 기다리는 장면이다.

천재지변에도 무너지지 않는 일본인들의 성숙한 서민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것은 바로 일본의 교육에서 온 것이었다. 일본은 공중도덕과 질서를 유난히 강조하는 나라이다. 일본의 아동들이 동네의 탁아시설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정돈, 정숙, 청결 등 이였다. 세 살도 안 되는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돌아와 스스로 신발을 정리하고 손을 씻고 나서 식탁에 앉아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말 한 후 식사를 한다.

올해로 한국 생활 9 년차에 접어들어 가는 나는 주위에서 성공한 중국동포들을 꽤나 봐오기도 했지만, 반면에 중국동포라고 무시한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한다. 왜 그럴까 심각하게 고민해 본적이 있는가? 한국인들의 인상 속에 우리 중국동포들은 어떤 이미지인가?! 그 답은 우리 중국동포 본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에 내재된 문화와 성격, 태도 등은 흔히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언성을 높여 지방 사투리로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눈살을 찌프린다. 또, 가래침을 함부로 뱉는다든가,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린다든가, 줄을 서는 공공장소에서 새치기를 한다든가, 하는 행위는 높은 시민의식을 가진 사회에서는 모두 무시의 대상이 된다.
  
우리 집은 광진구 건대입구 차이나타운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다 보니 집근처의 입주민들이 중국동포들이 많은 편이다. 지역 주민들이 제일 골치 앓는 것은 쓰레기문제이다. 중국동포들이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다 적발되어 벌금을 하는데도 분리수거를 깨끗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다녀 본 중국동포들이 집거해서 사는 지역에는 거의 다 그랬다.) 처음 1년 넘게 나는 빗자루를 사서 우리 집 앞 쓰레기 놓는 곳과 그 주위를 청소하는 담당을 하였다. 그리고 두꺼운 종이에 매직으로 써서 담벼락에 붙여놓았다. 

  “당신의 양심마저 버리시겠습니까?” 

그렇게 한 것은 하나는 우리 중국동포들도 청결과 공공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중국동포들이 보고 청결과 질서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변화가 없다. 지금도 검은 봉투에 분리수거하지 않은 쓰레기들을 무더기로 쌓아놓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뜨거워 난다. 

안 좋은 습관을 왜 버리지 못할 까? 사람은 노력 없이 바뀌지 않는 법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옛 습관을 고집한다면 발전성이 없다. 좋은 건 스펀지처럼 빨리 흡수를 해야 한다. 실수가 반복될 때마다 끊임없이 깨닫고 나아지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거듭된 깨달음과 노력, 훈습(薰習)이 필요하다. 

어른들이 이렇게 하는데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아이들은 교육을 하지 않아도 어른들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내가 알기로는 어느 정도 알려진 재한동포단체가 60 여개가 된다고 한다. 이런 저런 방면에서 성과가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기초질서 지키기 프로그램들을 내와 철같이 실행하는 단체는 많지 않다. 어른들도 반드시 이 방면의 교육이 필요하다.

 동포들이 집거해 사는 대림역 근처에서는 일부 중국동포단체들이 가끔씩 나와서 띠를 띠고 쓰레기 줍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만으로 부족하다. 개개인이 자각적이어야 한다. 이 사회에 잘 적응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각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공공의 선(善)을 위해 개인의 욕구를 자제할 줄 알며,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권리의 주장보다는 의무의 이행을 앞세우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미국에 가 있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우리 중국동포들은 거기에 가서도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호주에서도, 캐나다에서도...

지금은 글로벌 시대인 만큼 나라에 국한 되지 않고 세계로 견문을 넓혀야 할 때다.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공중도덕과 질서를 지켜야 만이 어디를 가도 무시를 당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다. 열심히 살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지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중국동포의 이미지는 중국동포 매 한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부터라도 ‘나 하나만이라도 잘 지키겠다는 마음, 누가 보지 않아도 항상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누가 신을까? 예쁜 구두가 남길 미래의 추억...

2. 갈색 구두가 준 교훈

 

1년 전, 나는 롯데백화점에서 꽤나 비싸게 주고 갈색구두 한 켤레를 구입하였다. 디자인도 특이하고 예뻤기 때문에 나는 그 구두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솔로 잘 닦아서 신발장에 넣어두었다가 나들이 할 때만 꺼내서 신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구두가 ‘스타일’ 때문에 외출을 무지하게 피곤하게 할 줄이야! 처음에는 구두라서 조금 불편하겠지, 하고 참고 견디었는데 점점 발가락까지 변형되어 갔다. 상황이 심각함을 받아들이자 나는 비로소 아쉬운 데로 그 구두를 버렸다. 발가락은 정형외과를 찾아 한동안의 교정을 거쳐서야 겨우 제 위치대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발에 미안한 감이 들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열심히 발을 예쁘게 씻어주고 로션을 발라주며 나를 위해 노고를 아까지 않은 발을 칭찬하군 했다.

구두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혹은 그 속에서 느끼는 나 자신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내 몸과 지구란 이름의 세상을 잇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하고, 내가 걸어 온 길을 뒤 돌아 보게 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갈색 구두를 버리면서 나는 이 구두에 대한 욕망처럼, 오직 나 자신을 위하여 혹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준 일은 없었는지를 돌아보게 됐다.

나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오직 돈과 권력과 명예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모습들이 가슴 아프다. 결국은 후회와 반성으로 눈물을 짜면서도, 달려가는 과정 속에서는 욕망 외에 아무런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가 신고 달리는 구두가 발에 맞는지 안 맞는지 아픈지 편한지조차 무감각이다. 그저 자기가 추구하는 스타일과 멋에만 신경을 쓴다.

내가 아는 강남에 있는 한 엄마의 이야기다. 그 엄마도 많은 강남엄마들처럼  아들의 미래를 위하여, 다섯 살짜리 아들을 영어유치원으로 보냈다. 매일 유치원에 갈 때마다 애는 선생님이 무섭다며 떼를 썼지만, 영어에 대한 엄마의 집착을 꺾을 수가 없었다. 애는 매일 떠밀리다시피 유치원버스에 실려 보내지군 했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영어실력을 보면서 엄마는 무척이나 흐뭇해하였다. 나중에는 엄마를 고맙게 생각할거라며, 그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버려진 갈색 구두가 떠오른다. 엄마의 욕심은 어쩌면 오직 멋진 스타일만 추구하던 구두에 대한 나의 욕심 같이 보였다. 그리고 어린 아들애를 보면 자연히 내 발을 내려 다 보게 된다. 상처를 받았던 발의 아픔을 떠올린다.

그 아들애는 다른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실컷  뛰놀고 싶었다. 영어공부도 어렵고 영어를 엄하게 가르치는 선생님도 너무 무섭고 싫었다. 애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곤 했다. 아픈 날들이 쌓이고 쌓여도 말을 하지 못했던 나의 발가락처럼 어린애의 가슴에는 분노만 쌓여 갔었다. 그래도 어디에다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애들과 비교하면서 마음에 채찍질을 할 뿐이었다. 오히려 일정한 영어실력을 갖추자 일곱 살 되는 애를 사립학교에 조기입학 시켰다. 아들애는 애들과 잘 휩쓸리지도 않고 말도 잘 하지 않았다. 쌓이고 쌓인 분노는 언젠가는 어디에 분출되기 마련이다. 애들이 놀린다고 다른 애들의 학용품을 몰래 갖다 버리거나 책에다 낙서를 해놓기까지 하였다. 영어는 다른 애들보다 잘 하는 편이었지만, 같은 학급의 애들은 그 애를 이상한 애라며 왕따를 시켰다.

그렇게 힘든 1년이 지났다. 아들애는 숙제를 할 때마다 짜증을 부렸고 엄마가 공부를 시키려고 하면 매일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슬슬 피해 다녔다. 그 애의 사정을 잘 아는  어느 친구의 엄마가 한마디 충고해주었다. 자기네 아들도 경험했던 일이라며 심리의사를 찾아가보라고.

의사선생님은 심리진찰을 하시더니 엄마더러 전학을 시키거나 휴학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상처로 인해 아이에게 심리적 장애가 점점 더 커질 수 있다고, 그러면서 아이에게 편안한 환경과 대화를 많이 시도할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발가락이 변형된 다음에야 예쁜 구두를 버린 것처럼 애 엄마는 의사선생님의 충고를 들은 후에서야 욕심을 내려놓고 아들을 다른 학교로, 제 나이에 맞는 학년으로 전학을 시켰다. 근 2년 동안, 옛날에 애를 대하던 태도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애가 재미를 느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시도해보았다. 담임선생님과 학부모의 협조와 노력 하에 아이는 점차 심리적 안정을 찾아갔다.

엄마의 욕심 때문에 아이는 그 어린 마음에 몇 년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 왔었다. 말로는 진로교육을 실시한다고 그러지만 엄마들이 자식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과실이었다. 엄마는 오직 다른 애들보다 앞서가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계속 위로만 올라가려고 하였다. 구두의 디자인에만 집착하는 대한 여자들처럼.

이 대목에서 나는 문뜩 원불교교무님이 고구려 유적지에 있는 오녀봉을 오르면서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몸에 난 상처는 병원 가서 치료 받으면 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병원에 가도 잘 치유 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대로 받아들여 할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건 버리면서 마음의 치유를 거쳐야 나을 수 있다."
행복의 진정한 의미는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우선 마음이 행복해야 육체도 행복한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이.

별로 낡지도 않은 채 버려진 갈색구두는 나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었다. 나의 갈색구두처럼 아무리 비싸고 디자인이 좋다고 해도 ‘스타일’에 밀려 발이 홀대를 받는다면 그 것은 건강과 행복을 해치는 처사라는 것을, 눈에 아무리 예쁘고 욕심이 나고 갖고 싶고,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게 진정 탐욕이었다면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한다. 

설사 디자인이 그리 예쁘지 않다고 해도 내 발을 편하게 하고 최선을 다해 이리저리 뛰어 온 나 자신과 함께 고락을 같이할 수 있다면, 그런 행복 징표를 지닐 수 있는 거라면, 우린 그런 구두를 선택하고 그런 구두와 함께 가는 길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구두의 진정한 의미는 로망보다 우선은 겸손이고 마음의 배려이고 사랑이지 않을까?

나는 저도 모르게 구두 안의 발가락이 꼼실거리는 것을 느끼고 미소했다.

 

▲ 굴러가는 세월을 붙잡고...

3. 힘들어도 이겨나가는 세월

 

나는 예전에 호텔식당을 운영하기 전에는 회사생활이 꽤나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한국으로 수출하는 산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하는 것도 힘들었고, 판매회사나 물류회사와 자주 충돌하는 것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한 산지를 찾아 가는 길은 장시간 열차와 버스를 이용해야 했기에 힘들었다. 때로는 밤차로, 새벽차로 움직일 때면 얼마나 더 먹고 살겠다고 이렇게 극성을 부리나 싶기도 했다. 특히 동북에서 겨울에 밤차나 새벽차를 탈 때는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등산복 속에 쟈켓 하나라도 더 껴입고 차 시간을 기다리는 그 심정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호텔식당을 운영했던 이후로는 그 운영보다 더 힘든 일을 겪지 못했다.

같은 중국이지만 지역문화가 다르기에 첫 시작부터 엄청 힘들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수속을 거쳐야 할 부서가 16 개나 되었다. 위생국, 공상국, 세무국, 환경보호국, 전력청, 수도관리처, 외사처( 변경도시라서 外事科를 거쳐야 했다.) 파출소 ...... 하여튼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업자등록증이 나온 이튿날부터 여기저기서 찾아 왔다. 인맥관계가 없이는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음을 인지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하던 걸 인수해서 했던 호텔은 시설이 엉망이어서 보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전기시설부터 시작하여 난방시설이며 냉방시설, 화장실이며, 침대며, 침대보, 커튼, 주방시설과 주방도구...... 이 모든 것들은 예상한바가 아니었지만 상상을 훨씬 초월하였다.

 그래도 인테리어는 한국 업체에 맡겨서 그만하면 순리로운 편이었지만, 자질구레한 보수는 현지 중국인에게 맡겼더니 하루에도 몇 번을 싸워야 하는지 일하는 것보다 더 맥이 빠졌다. 업주와 상의도 없이 자기네 생각대로 해놓고는 고치라고 하면 까다롭다고 투덜대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한번은 결제를 제시간에 안 해줬다고 숱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으름장을 놓으며 난동을 피워 대서 속상했던 적도 있다. 다행히 국세청에 있는 조선족과장님이 나서서 조회를 했기에 일이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 고마운 조선족과장님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지금도 이런 말을 하군 한다. 식당을 운영해본 사람은 그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다고. 그 만큼 식당운영이란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일을 다 겪기 때문이다.

호텔방은 관광계절인 5월부터 10월 사이에만 했기에 그리 힘든 일은 없었지만, 일요일도 없이 했던 식당은 정말 사람의 애간장을 태웠다. 손님이 없을 땐 없어서 속상하고 많을 땐 많아서 힘들었다. 결혼식이나 연회가 있는 날에는 새벽 3시부터 밤 11시까지 온 하루 앉아 있을 시간도 없이 분망히 보내야 했다. 시장을 직접 보며 채소를 구입해서 많이 들고 다닌 탓인지 한번은 어깨가 너무 아파서 팔을 들 수가 없었다. 일주일동안 병원 다니며 치료를 받아서야 겨우 나았다. 또 한 번은 독 감기에 걸렸는데 편안히 누워서 앓을 수도 없었다. 링거를 맞고 곧바로 식당으로 향해야 했었다.

그렇게 고생을 했건만 사업은 애쓴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2년 6 개월 만에 결국 접게 되었다. 비록 경영에서 성공은 못했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인간관계며, 이 사회의 실정이며, 운영체제와 방식들, 그리고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법...

그 후 나는 한국에 입국해서 고시원생활부터 시작했고, 식당알바도 하군 했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 자세와 태도는 아마도 힘들었던 그 시기를 힘듦의 기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는 한국생활에서 힘들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예전에 힘들었던 그 시기가 오늘날 나에게 보상을 주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피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 언제가 되든 꼭 보상을 준다.

가장 힘들었을 때를 기준으로 삼고 있으면 그 척도로 극복해낼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긴다. 극한의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강한 삶의 욕구와 의지가 생기게 된다.

지금도 나는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그 때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고  희망을 가지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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