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시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리위 약력: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 출생. 중국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 석사 졸업. 한국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한국어(문학)교육 박사과정 수료. 재한동포문인협회 평론분과 副분과장. 시, 수필 다수 발표. <시향만리 문학상> 신인상 수상. '종소리 문학사' 32기 회원.

 

1. 함지

 

고향에 들어서니 텅 빈 집들이 늘어섰다
옆집 큰어머니한테서 건네받은 녹슨 열쇠뭉치
집문 대신에 헛간 문을 열어볼까나
케케묵은 사계절 냄새가 밖으로 밀려나오고
어둠 속의 헛간 귓모퉁이엔 낯익은 몸집이
벽에 기댄 채 거미줄과 먼지를 덮어쓰고 있다
다름 아닌 연륜마저 지워진 저 나무통이…

호랑이가 산을 지배하던 시절
할아버지 고향에 숲이 있었다 한다
동남쪽으로 떼를 지은 통나무들이
빠알갛게 무르익어 홍송이란 산화(山画)로
첩첩 산을 굳건히 지켰다 한다
톱의 노래에 땀을 적신 할아버지 친구들
굵은 쪽을 베어내어 속을 팠고
하나의 예술품을 반달마냥 지어냈다

가족 삼대가 그 속에 찬물을 담고
하루건너 번갈아 몸을 씻었다
막내 손자인 나도 엄마의 손길이 간지러워
몰래 노오란 오줌을 풀었던 학창시절
두만강이 흘러흘러 이젠
모판하고 비닐주머니를 깔고 농약을 풀어
모내기 할 벼 종자를 키운다
수십쌍 헥타르의 논밭에 황금물결을 일으킬
야심찬 차비를 하고 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저 함지가
남의 집 함지가...

 


2. 돌

 

수년
세월에 씻겨진
상처에는 흔적이 없다

모든 신의 창세기
그 존재의 가치를 훑어도
답 없는 의문은
적막 속에 고이 괴이고

노을 고운 저녘께
움푹 패인 상처에
빠알간 빗물이 고였음은
내일 다시 찬란할 햇빛을
기다림이다
 
수적석천(水滴石穿)
굳이 그 존재의
가치를 말하라 한다면…

 

3. 논뚝

 

조상들이 남긴 논이여
조상들의 땀방울이 절궈진 밭이여

가로세로 내뻗고 치닫은
주인 잃은 가냘픈 존재
폭염과 설한이 닥친들
아파도 쓰려도
참고 또 참느노라

고단한 발자국이 무겁게 찍힌
질벅질벅한 존재
해마다 새 풀이 돋건만
개구리의 울음소리 섧어서
두꺼비, 물오리, 뱀, 잠자리, 메뚜기마저
옛 자취를 감춰간다

넋을 부여잡은 논뚝
주인의 발걸음 기다렸건만
그네들의 영혼은 빈부격차로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로니
쑥대와 잡초가 호강성세를 부린다

삽자루와 낫으로 가꿨던
옛 헤어스타일이 그리워진다
주인의 거친 손길이 그리워진다

삽자루 등에 이고 낫 손에 쥐고
논뚝을 자유로이 거닐던
옹헤야를 줄기차게 뽑던
그네들의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다

잡초가 무성한 논뚝엔
모진 바람만 후려친다

 

 

4. 가을연가

 

잠에 취한 한 점의 별빛이
파르스름한 잎을 훔쳐본다

고뇌에 잠긴 나무 몰래 
물든 얼굴을 가린 채
봉긋한 품을 떠나
한들한들 내려앉는다

요염함에 눈을 비비며
봇물 터지듯 발산하는
한 가을밤의 별이
낙엽 쪽으로 기웃거리고 있다

별이 가을을 약속하듯
잎이 우주를 닮아가듯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서
엷은 반사가 무르익어간다 

 

▲ 오늘도 추억을 만드는 갈대의 이야기...

 

5. 갈대 

                 
호수는 부끄러움 씻는다
삶 속에 묻은 그 몇 점을...

바람의 유혹에
고요는 깨뜨려지고
파문은 어리석은
몇 줄기를 반긴다

동, 서풍의 휘파람에
못에 깊숙이 맡긴
가느다란 몸도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한 자락의 신념마저
식을 줄 모르는 욕구에
슬슬 무너져 간다

초심 앗긴 갈대가...
 

 

6. 가난이 그리울 때

 

근을 뜨는 저울도
드라마 속에서나마
이유없이 등장할려나

마선으로 깁었던
신발도
들판의 거름으로 되었을라나

가마니가 젖고
난닝구가 절었던
일터엔
까치소리 찾아 올려나

 


7. 청명

 

90세 할머니는 동경성 병석에 누워계신다
60세 고모부는 발해 집에 누워계신다
우리 앞에 <이전(尔站)의 학생 CCC>이라는 현수막을 사이 두고
말없이 누워계신다 말수가 많으셨던 넷째 고모부가
힘세고 술 세고 곰 같았던 그 이름난 포수가
청명 전날에 가족을 떠나 또 다른 투박한 지역에 사냥 가셨나보다

소담한 제상 위에는 고모가 차린 나물, 이밥, 과일, 명태, 술이
영전사진 옆 두 잔(盏)의 촛불과 슬픔을 삼키고
조문객들은 나이순으로 절을 올리고 두 형은 답례한다
낮이 밝아오도록 아랫방에서는 술상과 윷놀이가 이어진다
자식들도 장가들고 생활이 펴지려하니 떠난다는
가난하고 서럽고 외로운 얘기들만 흘러나온다

슬픔도 저물어 아침 제가 찾아오고
봄비 아닌 찬비도 뒤따라 찾아왔다
넷째 고모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아들도 조카들도 친인들도 마지막 제를 지내고
셋째 고모부가 애써 눈물을 감춘다
‘잘가라- 동생아 니가 형님의 절을 받고 싶어서
먼저 떠나는 구나 거기 가서 생을 즐겁게 보내라’
우리 매부들도 이젠 둘밖에 안 남았다며
구들목에 앉아있던 둘째 고모가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차가운 비는 앞마당 야채밭 흑토에 퍼지고
고모부를 실은 차는 화장터로 향한다
90세 엄마한테 작별 인사도 드리지 못한채...

 


8. 유두절

-이육사의 <청포도>를 본따서

 

내 고장 7월은
곡식이 여물어가는 시절

이 마을 유두가 소소리 고고성을 울리고
신라의 미소가 꽃피며 달콤히 날려 와 반겨

40리 밖 경박 폭포가 가슴을 열고
줄기찬 목단강이 터전에 흘러서 오면

촌민들이 바라는 농신(農神)은 건강한 심신으로
풍년을 안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동네가 그대를 맞아 유두를 치르면
400여 호의 마음은 민족 얼에 흠뻑 취해도 좋으련

새 일대여 우리 마을 복판엔 광장에
하이얀 비석을 무지개 마냥 세워두렴

 


9. 가마니

 

버드나무 밑으로 쪽걸상이 둥그레 놓여있다
새끼에 쪼여있던 짚이 육중한 몸을 푼 채
부채형으로 가지런히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저 골목에서
지팡이를 내세운 동네 집 할멈들이
울퉁불퉁한 땅을 짚으며 그늘 밑에 모인다

주름이 고스란히 잡힌 거친 두 손으로
짚을 꼬고 틀어 일련의 향토 작으로 매듭짓는다
낮이 저물고 달이 잠 들도록 걸작마다
차곡차곡 담 둘레에 쌓인다

노인네의 숨결이 사라진 오늘에
초가 지붕위에서 밀회하다 썩어가고 있다

땀과 손때가 묻은 그 짜임새도
기계화에 손쉽게 만들어진
비닐포대에 밀린지 엊그저께다

 

10. 설매(雪梅)

 

엄동설한 골짜기 한복판에
하얀 드레스 드리우고
순결함으로 피어난 사랑은
굽이쳐오는 만물의 애욕에도
정을 띄우지 아니한다

님 저버리고 간 사랑
달이 지고 밤이 흐느껴도
뜨거운 가슴가를 맴도는
촉촉한 기다림의 향기는
순수한 마음의 빛으로
빠알갛게 피어난다

색바래져가는 눈부신 모습
지평너머 바래고
밀물처럼 안겨드는 그리움의 향기는
늘 잊혀지지 않는 진실이기를 꿈꾼다

알몸으로 주르르
흘러 적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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