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 출신 영화감독과의 만남

▲ 이미옥 약력 : 중국 화룡시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학과 석·박사, 한국외국대학교 중문학과 박사후 연구원,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객원조교수.

[서울=동북아신문] When: 2014년. 12월. 20일.
 Where: 상암 MBC 근처, 조용한 카페.
 Who: 장률 감독.

 How,

  찍는 사람이 있고 찍히는 사람이 있다. 풍경이 되는 사람이 있고 그 풍경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 장률은 찍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을 찍었고 사람을 찍었으며 이야기를 찍었다. 스크린이라는 프레임 안에 그는 시간을 담고 공간을 담는다. 스크린 안에서 존재는 분명 말을 건네고 있지만 관객의 시선이 그 존재에게로 향하는 순간 ‘그 존재’는 더 이상 ‘그 존재’가 아니게 된다. 

  찍는 다는 건 그 사람을 본질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찍는 건 그 시간과 공간만의 새로운 재구성이지만, 막이 내리면 그 모든 것은 사라진다. 시간도 공간도 이야기도. 본질은 말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다 사라지고 난 다음에 있다. 아니, 그렇게 본다면 그건 애초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없다’는 것이 진리라면 진리 또한 없다.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있다고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다. ‘없다’고 하는 순간 삶의 많은 것이 무의미하게 흩어지고 욕망을 동력으로 나아가던 존재는 일순간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존재는 삶의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삶이 곧 없어질 것임을 항상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그 사실을 매 순간 의식하고 살기도 어렵다. 그러나 ‘삶’에서 가장 확고한 진실 하나는 이 모든 것은 상실되어 가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사라지고 상실되는 삶의 ‘불안’ 속에서 일관된 ‘정신’을 지켜내기란 어디 쉬운 것인가. 그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지켜내고 창조해 나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What, 

  장률, 그는 자신만의 ‘시간’이 있었다. 이것을 그는 “리듬”이라는 말로 표현을 한다. 실제로 장률 감독은 자기만의 ‘리듬’을 찾는 충분한 시간을 거쳤다. 10년 동안 그는 세속에서는 소위 ‘백수’라고 불리는 상태로 지냈다. 보통 남들은 3개월이면 버티기 어려운 ‘시간’과의 긴 동거 속에서 ‘던져진 존재’로 그는 자신만의 ‘리듬’을 찾았다.   

  “나는 좀 멍청합니다. 그래서 고집이 있지요. 고집 있다는 것은 결국 자기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리듬이 있는데 그게 꼭 자신에게 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흐름 속에만 자신을 맡기다 보면 자기 리듬도 없어지고 더 허무해 질 수 있습니다. 자기 리듬대로 가면 어딘가 뒤떨어진 것 같고 어색한 것 같고 그런 것 같지만 어쨌거나 그게 자연스러운 거지요. 자기의 리듬대로 간다는 것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마지막 결과를 자신이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바쁘고 거대하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 가는 사람이 많은데 개인리듬의 소중함은 분명 있습니다. 그걸 쉽게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포기하지 않고 고생하는 사람도 많다만 사람은 계속해서 그 갈등 속에서 살지 않을까요.”
 
  장률 감독이 말하는 ‘리듬’은 태어날 때부터 내재된 자신만의 고유한 ‘속도’와 ‘시간’과 같은 거였다. 느리더라도 자기 내면에 있는 움직임대로 나아가는 것, 무늬를 알 수 없지만 그 다양한 결을 따라가다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세상이고 ‘우주’임을 발견하는 순간과 조우하는 무수한 마디들의 장(場)이다. 그러나 그런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대인은 획일적인 ‘시간’의 틀에서 꼼짝달싹 없이 묶여 지내고 있다. 지난 반세기는 잘 묶이고 잘 견디고 잘 버티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의식의 패러다임도 이제 슬슬 바뀌고 있다. 획일적인 성공의 기준이 결코 행복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모방’의 시대도 어쩌면 끝나가고 있다. ‘내’가 ‘나’로 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진실이었으나 ‘빵’이 부족한 시대에는 자발적인 ‘자본’의 노예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충족하지 않아도 ‘빵’이 흔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느리게나마 ‘나’에 집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때이고 그러한 의식의 장이 조금씩 요동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장률 감독은 또한 영화도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친구인 영화감독과의 논쟁을 하다가 ‘우연’에 의해서 영화감독이 되었던 것처럼, ‘우연’으로 가득 찬 일상 속에 던져진 존재가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우연’적인 삶과 영화적인 ‘삶’에는 어떤 내연성과 괴리가 있을까.   

  “삶에서 느끼는 것을 영화를 만들 때에는 어떤 질감을 만들어 내는가가 중요합니다. 내 삶과 꼭 결부시켜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지요. 실생활이 더 무시무시하지요. 영화는 처음부터 각색입니다. 각색하지 않으면 질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영화들 있어요. 영화관에서 보고 나오면, 재미있게는 봤는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영화들, 영화를 보고 최소한 이래봤다. 이럴 수도 있다는 정도는 와야 하지요. 시 쓰는 것과도 같아요. 시에서 어떤 걸 묘사를 했는데 꼭 그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정서는 시의 정서인 거예요.” 

  장률 감독은 영화에서 질감과 정서를 이야기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영화이지만 그 영화에서 느끼는 공감의 밀도와 여운의 농도가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영화의 질감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가 각색하는 이야기는 그의 영화에서 이미 보여 지듯 매우 불친절하게 각색되어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만의 낯설고 익숙한 무늬가 있다. 익숙함은 침묵 속에 모두 잠겨 버리고 낯선 것만 표면 위에 올라온다. 그리고 그 듬성듬성한 ‘낯설음’의 꼭지점을 모두 모아 보았을 때 그려지는 하나의 그림 속에서 보다 크고 익숙한 세계가 서서히 입을 연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영화와도 같다. 설명을 하지 않는다. 마치, 시간을 조용히 응시하는 사람과도 같다. 그는 말을 많이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을 해도 설명되지 않을 것이며 말을 하지 않아도 설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지향하는 미학적 정체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미학은 완벽한 아름다움도 사람을 충격에 빠뜨리는 그로테스크의 미학도 아니었다. 단지 어떤 깊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체적인 무늬일 뿐이다. 그것이 분명한 깊이를 지니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 깊이에 다다르지 못해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지 분명 느낄 수 있는 건, 결국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행복한가요?”
  “글쎄요,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런데 그런 걸 모르겠어요. 별로 행복하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상을 받을 때도 영화를 홍보할 때도 다 순간일 뿐입니다. 예컨대 동창들을 만나면 ‘그때가 좋았다’ 뭐 이런 얘기 많이 하는데 저는 느낌이 없습니다. 그때는 그랬고 고민이 있었고 좋을 때도 있었고 그렇습니다. 어떤 순간도 다 지나갑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찾아오지요.”

◇ ◇ ◇

 Why,

  내가 찍은 장률 감독, 이제 그를 보내야 할 때가. 그는 사라져간다. 분명 그를 찍었으나, 그것은 장률이 아니다. 본질도 아니다. 단지 또 하나의 ‘시선’에 맺힌 어떤 ‘상’(象)일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에게도 象 하나가 소리 없이 맺히고 떨어진다. 그 모든 것이 無로 돌아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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