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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한중작가포럼/2019 작품특집 34] 엄장자 수필 ' 비오는 날에 무궁화에 물을 주며' 외2편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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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0  19: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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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수필로 보는, 일본에서 외롭게 문학의 성역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엄정자 작가의 내심세계... 

 

   
▲ 엄정자(厳貞子) 약력 : 1982년 1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1982년 연길시 10중 국어교사, 1983년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국어교사. 1994년 길림신문사 기자, 1997년부터 일본에 거주.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 한국어강사. 연변작가협회회원, 일본조선학회회원, 일본조선족연구학회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해외이사.  수상경력: 수필 「화산 우에서 사는 사람들」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필 『감나무에 담긴 정』 제1회 同胞文學 安民賞. 수필부문 우수상 수상. 

 

 

제1편 

 

비 오는 날에 무궁화에 물을 주며
 
 
 
9월은 일본 열도에 태풍이 많이 부는 계절이다. 그 여파로 간밤에 내리던 비가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도 그대로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빗줄기를 거슬러 하늘을 쳐다보니  희뿌연 비구름이 장막 같이 무겁게 덮여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저혈압이라서 기압이 낮은 날씨이면 답답해 나는 내 가슴이 그 무게에 눌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래서 눈을 돌려 내려다 보니 베란다 아래 작은 화원에는 푸른 나무와 잔디가 빗물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하늘이야 무슨 색깔이든 마음껏 물을 먹을 수 있다고 쭉쭉 발돋움 하며 설레고 있다.

다시 우리 집 무궁화를 보니 물줄기 당번인 남편이 엊저녁에 깜빡하고 물을 주지 않아서 흙이 바싹바싹 말라있다.

“오늘은 내가 물을 줄까? 물 마시니 좋지?”

그렇게 노란 바케스에 담긴 물을 아낌없이 쏟아주니 잠깐 사이에 시들하던 잎이 어느새 파랗게 살아난다.
밖에서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데 우리 집 무궁화는 베란다의 화분 안에 살아서 하늘이 주는 빗물을 마시지 못한다. 아무리 목이 말라 쳐다 봐도 바람에 튕겨온 빗방울 몇 개만 잎에 떨어질 뿐 마른 목을 축일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조로록 부어 주는 물로 마른 목을 달래고 있다.

다섯 종류의 무궁화가 한 화분에 자라고 있어서 물도 아침 저녁으로 많이 많이 주어야 하지만 대신 다섯 가지 모양에 다섯 가지 새깔의 꽃이 어우러져 펴있어서 특별하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오늘도 하얀색 빨간색 자주색 보라색 연분홍색의 무궁화가 활짝 피어 있어 바라보는 내 눈이 즐겁다.

자연이 주는 혜택을 마음껏 받을 수가 없어서 주는 것 만큼만 받아 마셔야 하는 배란다의 무궁화, 그래도 능력껏 활짝 피어서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화분 속의 무궁화를 바라보니 이국땅에 사는 우리 모습 같아서 애틋하고 정이 간다.

백년 전에 나라를 잃고 만주땅에 흘러 온 이주민 2세로 그래도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총을 들고 일본군대와 싸웠던 아버지는 하얀 백단심, 러시아의 허허 벌판에 고려인 2세로 태어나 아버지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우리를 낳은 어머니는 빨간 무궁화, 그리고 일본 회사에서도 뛰어난 기술과 재능으로 일본 사람들을 초월하는 멋진 엔지니어인 남편은 자주색 무궁화,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예쁜 딸 운이는 연분홍 무궁화, 일본땅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열심히 글을 쓰는 나는 보라색 무궁화, 그렇게 나무에게 이름을 정해주며 빗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거둬낸다.

되고 싶어서 이주민이 된 우리가 아니지만 정작 이주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고 보니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

남편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일본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승진할 때에도, 매일 하는 일이 에어컨 관리이고 사장님에게 회사원들의 동향이나 보고하는 무능한 일본인에게 밀려야 했고 기계이론도 제대로 이해 못한 주제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트집 잡는 일본인 기술자 때문에 목청을 높이며 싸워야 했다. 그래도 남편은 연구에 성공하여 과학기술 특허를 두 개나 따냈고 지금도 회사에서 큰 소리를 치며 일하고 있다.

중학교 때 딸애는 공부성적도 내신성적도 자기보다 낮은 일본애에게 추천입시 자격을 빼앗겨야 했다. 하지만 눈물을 닦고 열심히 공부하여 정시에서 높은 성적을 따냄으로써  자기 힘으로 일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딸애 자리를 빼앗았던 일본애는 추천입시에도 떨어져서 일반 고등학교에 갔다. 그때부터 딸애는 자신의 능력을 믿게 되었고 씩씩하게 자기 인생을 만들어 가게 되었다.

갑자기 일본 땅에서 무직업자가 되고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신문사의 기자로 당당한 사회의 주역으로 살아가던 내가 한 순간에 엑스트라가 되어버리었다.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막막한 현실에서 나는 ‘나’를 잃을 뻔 하기도 하였다.

시간당 보수를 받으며 손톱이 쪼개질 정도로 자동차시트를 만들어야 했을 때, 초 스피드로 달리는 마선으로 끊임없이 자동차시트를 박아내면서 나는 ‘나’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머리 터지게 고민하였다.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 아픈 마음을 다독이며 열심히 살았더니 나에게도 길이 열려 외국어학원에서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고 국제학술회의에도 다니게 되었고 책도 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나’의 고민에 빠져 허덕일 때 나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내가 ‘나’를 찾고 마음을 여니 보이지 않던 주위 풍경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 땅에서도 수많은 동포들이 열심히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해 초에 처음으로 일본 연변대학학우회 신년회에 가보니 일본 중국을 이웃집 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멋진 건물들을 지어내는 건축가도 있었고 IT회사 언어학원 물류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자들도 있었고 가수, 화가 같은 예술인도 있었고 대학교에서 일본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들도 있었다. 마음을 여니 그제사 다양한 직업을 갖고 이러저런 일터에서 열심히들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학자들의 연구모임으로 시작된 조선족연구회가 이제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여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조선족학생들에게 논문발표를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학술지도 꾸려서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정리하여 재일조선족발전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재일조선족이라는, 역사에 없었던 우리의 이름이 재일 조선인 재일한인과 함께 재일동포의 범주에 들게 되었고 재외동포 연구에서 제외할 수 없는 거대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이제는 운동회를 열어서 몇 천 명이 모여서 즐거운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성장하였다.

이번에 조선족연구학회에서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리다: 나의 일본생활 이야기」란 테마로 글짓기 공모를 하였다. 산 설고 물 설고 낯 선 이국땅에 혈혈단신으로 떨어져 말도 모르면서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하다나니 일본인들로부터 억울하게 괄시도 받았지만 악착스레 공부하여 석사 박사가 된 유학생들, 이제는 모두들 당당히 자기 일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 진실하게 그려져 있었다. 생생한 그들의 인생담이 바로 재일조선족의 30년 역사이다.

이주민족인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는 많지 않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별로 없다.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며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10월에 학술회의로 도쿄에 가는데 우리 ‘엄씨 가문 모임’에서 환영회를 열어준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뭉쳐 사는 우리 가문의 사람들, 사진에서만 보던 얼굴들을 만나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근두근 마음이 설렌다.
올해 여름에는 혹서가 심해서 무궁화에 벌레도 끼었고 꽃도 여느해보다 많이 피지 못했었다. 그런데 몇 번 약을 치고 더위도 물러가니 무궁화가 다시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있다. 6월부터 피기 시작해서 10월까지 꾸준히 꽃을 피우는 무궁화, 해충의 침입에도 불태우는 무더위에도 꿋꿋이 살아 남은 무궁화는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또다시 잎이 자라고 꽃을 피울 것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도 마음껏 먹을 수 없고 비좁은 화분에서 비비닥거리며 자라지만 우리집 베란다의 오색 무궁화는 오늘도 빗방울을 이슬처럼 머금고 촉촉히 눈빛으로 나를 보며 웃는다.

 비 내리는 아침에 내 마음에도 꽃이 핀다.
 
 
 
제2편 

아래서 올려다보는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름
 

나는 구름을 쳐다보기 좋아한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요즘도 베란다에 서서 한참씩 구름을 쳐다본다.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두둥실 뜬 구름들이 하얀 목화송이 같이 하얀 목련 같이 바람에 흔들리다가 양떼 같이 바람 따라 흘러가는 모습은 나에게 꿈 같은 세계를 펼쳐 준다. 이런 낮 하늘의 구름도 좋지만 밤 하늘의 구름은 아름다움에 신비로움까지 더해서 더 내 마음을 끈다. 짙은 남색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 사이로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을 쳐다보노라면 그 구름 위에는 신들이 사는 별(別)세상이 있을 것 같고 지금도 신들이 즐거운 연회를 벌이고 있을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별에게 기도하게 된다. 그래서 구름을 쳐다보면 내 마음은 늘 두근두근 살랑살랑 설렌다.

그렇게 구름을 좋아하다 나니 비행기를 탈 때면 구름을 보려고 창문 옆 좌석을 고르게 된다. 이번에도 중국여행을 가면서 창문 옆에 앉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창 밖을 내다보니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아래에 하얀 구름덩어리들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뭉쳤다 흩어졌다 하면서 몽환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역시 구름 위 세계는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한참 바라다 보노라니 점차 마음 한쪽으로부터 공허함이 가느다란 연기같이 피어 올랐다. 바라보고 바라봐도 그렇게 신비롭게 느껴지던 구름세계에는 구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는 깃옷을 날리며 날아다니는 선녀도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신선들도 손오공이 훔쳐먹었다는 불로불사하는 천도복숭아가 자라는 서왕모의 반도원(蟠桃園)도 없었다. 그곳은 완연한 무(無)의 세계였다.

처음 아는 사실도 아니고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허무해지는 마음에 시선을 아래로 돌렸더니 구름 아래 사이사이 보이는 푸른 바다, 녹색 산봉우리, 알락달락한 집들이 너무 예쁘게 보이는 것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지는 듯 했다.

그렇게 구름 사이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세상이란 것이 참 위에서 보기하고 아래서 보기가 다르고 밖에서 보기하고 안에서 보기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서 올려다볼 때는 구름 위의 세상이 신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올라와보니 거기에는 텅 빈 하늘만 있었고 내가 사는 세상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는데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 세상도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햇빛이 눈부시고 벚꽃이 피는 계절의 한자락을 잡고....

어쩌면 일본에 오기 전에 꿈꾸던 일본은 내가 올려다보던 그런 구름 위의 세상이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우리보다 몇 십 년은 앞선 선진국가에서 자기 집이 있고 자가용 자동차가 있고 현대화된 가전제품을 다 갖추고 여유롭게 사는 일본사람들이 참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일본에서 20년을 살아 보니 일본은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니었다. 유엔에서 발표한 일본사람들의 행복지수도 157개 나라 중에서 53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3년 전에 석사 졸업과 함께 대학교 연구센터에 취직해서 박사공부와 연구소 일을 병행하게 된 딸애가 연구소 젊은 연구원들과 같이 센터장을 파워하라스멘트(권력을 이용하여 괴롭히는 것)로 고소한 일이 있다. 센터장이 연구원들에게 밤 11시가 넘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쩍하면 금요일에 업무지시를 내려서 토요일 일요일도 일하게 만들었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불러다가 한 시간 두 시간씩 큰 소리로 꾸짖기 일수였다고 한다.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곤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연구원들이 참다못해 연맹으로 고소장을 올리게 된 것이다.

결국 센터장은 파면되고 연구소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딸애는 여전히 바쁘다. 5분단위로 시간을 계산하여 전철 시간을 맞추느라 느긋이 아침 먹을 시간도 없어서 머리 말리는 사이사이 집어먹을 수 있게 앞에 샐러드와 수프를 놓아주어야 하고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위병을 달고 사는데도 약 먹을 시간도 없어서 바삐 바삐 신발을 꿰는 딸애 입에 위약을 넣어주고 인삼정액을 떠먹인다. 그렇게 부랴부랴 나가서는 밤 늦게까지 일하다가 막차를 타고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돌아오는데 그 모습이 가엾고 애처로워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지금 센터장은 선임의 전철(前轍)을 경계해서인지 친절해서 마음만은 좀 편하다고 한다.

얼마 전, 대기업에 취직한지 일년도 안 되는 20대 여사원이 끊임없이 강요당하는 잔업에 지쳐서 자살하고 말았는데 부모가 그 기업을 고소함으로써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키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사람들의 선망을 받아야 할 그녀인데 과부하적인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매일매일 녹초가 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일본사람들, 그들을 보면 살기 위해서 일한다기 보다는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피곤에 절어 돌아오는 남편과 딸애를 보고 있으면 선진국가인 일본이 겉 모습만 화려한 개미지옥으로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고향의 친구들이 올리는 SNS에서 엿보이는 그들의 일상은 여유가 넘치고 즐거움이 넘치는 것 같다. 옛날에는 많이 빈곤했었는데 지금은 다들 자기 집이 있고 나라에서 원래의 월급에 대등한 연금을 주고 있고 의료보험도 따라주니 노후가 걱정이 안 되고 그래서 겨울에는 스키장에 여름에는 바다에, 요즘은 온천오락장이 유행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실내 수영복사진들이 난무한다. 물론 그 행렬에는 우리 언니와 친구들이 빠질 수 없다. 작년에 대학교 동창들이 동창회마저 온천오락장에서 했을 정도이니, 반백이 지난 그들이 화려한 수영복을 차려 입고 멋진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따라서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SNS라는 ‘구름’ 사이로 보면 그렇게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그들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면 다 그들 나름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우리 언니만 보아도 또래 친구들보다는 젊고 예쁜데다가 조선무용을 프로 급으로 추고 가야금도 배우고 있어서 지금도 가끔 무대에 서고 있다. 거기에다 아들은 상해에서 성공해서 잘 살고 있고 손자까지 보아서 그래서 주위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다. 그런 언니에게서 어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어째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어제 밤엔 잠도 안 오고. 이럴 땐 누워있더라도 린이 아버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20여 년 동안 형부의 병 시발을 해야 했던 언니, 그 동안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고서도 외로울 때는 돌아가신 형부 생각이 먼저 나는 모양이다. 바라보면 늘 그 자리에 누워계시던 형부가 돌아가시고 외아들은 먼 곳에 있으니 저녁에 혼자서 집에 들어설 때, 몸이 아픈데 물 떠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때,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언니는 한 밤중에 대청소를 한다고 한다. 바닥에 걸레질 하면서 여기저기 먼지를 닦으면서 그렇게 외로움을 쫓아낸다고 한다. 그런 언니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바다 건너 멀리에서 살고 있으니 그저 “힘내세요. 파이팅!”하고 외쳐줄 수 밖에 없다.

인생은 어쩌면 빛 좋은 개살구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결혼은 현실이고 무덤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면서도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해서 애를 쓴다. 핑크색 낭만에 젖은 연애시절에는 결혼생활도 사랑이 넘치고 행복이 넘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고 그러면 끊임없이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피곤이 쌓이고, 아이 우유 값 기저귀 값 교육비 때문에 돈이 딸려서, 네 탓 내 탓 서로를 원망하게 된다. 내가 꿈꾸던 결혼생활은 이게 아닌데, 꿈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우울증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

문학하는 사람들만 보아도 그러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글 몇 편 발표하고 소설가 시인 수필가 평론가라는 불리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 같지만 자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컴퓨터 앞에서 뼈를 깎아 글을 쓰는 그들을 본다면 부럽다는 말이 쉽게 못 나올 것이다. 연재라도 하게 되면 기한을 맞추기 위해서 샤워할 시간도 없어서 봉두난발을 하고 하루 종일 혼자서 글을 써야 하고 문단의 파벌 싸움에 끼어서 새우등 터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저 우아하기만 한 직업이 아니다.

구름 위에서 본 세상은 적막하고 허무했고 구름 아래서 본 세상은 힘들고 구질구질했다. 그것이 현실이라 해도 사람은 주어진 인생을 외면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인생에는 정답도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헛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뜬 구름 잡듯 헛꿈만 꾸면서 현실을 도피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도 밀려나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현실이 중요하다 해서 너무 눈앞 이익만 챙긴다면 그 인생에는 비전이 없을 것이다.

삭막하고 따분한 일본사회이지만 내일은 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잠 잘 시간도 없이 바쁜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서 딸애 앞에는 더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요즘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서 새 노동법도 논의되고 있다고 하니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쉬워지지 않겠는가?

외로움을 타기도 하지만 언니에게는 아들 며느리가 있고 손자도 있고 나도 있다. 아직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열심히 조선무용도 배우고 가야금도 치면서 친구도 만들어가며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어찌 외로운 인생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매일매일 아침마다 “파이팅!”을 외쳐줄 것이니 언니도 힘내서 씩씩하게 살길 바란다.

올해 나는 딸애를 결혼시킬 것이다. 아무리 결혼이 현실이라 ‘무덤’이라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사랑하고 결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좀 짜증이 나고 힘들더라도 가족이 있어서 힘이 생기고 외롭지 않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작가의 인생이 외롭고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써낸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가는 길이 힘들고 외로워도 그래서 뿌듯함이 더 커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구름을 쳐다보기 좋아하는 것은 꿈을 꾸는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땅에서 올려다본 구름세계가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만들고 다른 별에 갈 것을 꿈꾼다. 구름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세계가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다시 인간세상에서 살아갈 힘이 생긴다.

구름이 있어서 하늘은 아름답다. 가끔은 구름을 쳐다볼 수 있어서 숨이 나오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구름을 쳐다보고 있다.

푸르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간다.
 
 
 
제3편 

외로운섬
 
 
 
˝아, 짜쯩나!˝

학교 문을 나서는 내 입에서 신경질이 섞인 한숨이 터져 나온다. 교과서연수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확 풀고 싶은데, 그래서 누군가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폭풍수다를 떨고 싶은 데, 만날만한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핸드폰 번호를 쭉 위로 밀어보아도 마땅한 이름이 안 뜬다. 별수 없어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전철에 오르고 말았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그림같이 예쁜 연분홍 사쿠라가 내 마음에는 그늘진 회색으로 투영된다. 생각해 보니 내 옆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 도쿄에 겨우 한 명 있기는 하지만 춥다고 먼 산의 나무로 불 땔 수는 없으니… 늘 수업 때문에 바쁘고, 집에 있을 땐 남편과 딸애가 있고, 혼자 있을 때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나니 별로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오늘 같이 빡 돌아서 마음에 쌓인 것을 쏟아내고 싶을 때면 나는 나에게 만날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시리다. 둘러보니 어느샌가 나는 홀로 남은 외로운 섬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풍요한 일본 땅, 깨끗하고 편리하고 안전하고 서비스가 완벽하고… 그래서 살기 좋은 곳, 딱 한 가지 부족하다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들 수 없다는 것, 가족과는 달리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원래 타인과는 일정한 거리를 보지하면서 사는 일본사람들, 지어 텔레비전 바라이어트 프로그램에서‘친우’(親友)가 없어서 고민하는 여배우에게 심리학자들은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이 편하다고, 너무 가까우면 싸움이 나니까 친구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어드바이스 한다.

이렇게 서로 거리를 두는 일본사람들이지만 또 외톨이가 되는 것은 병적으로 싫어한다.
무리에 속하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하니까.

4월은 일본에서 모든 대학교가 신입생을 받아들이는 계절인데 1:1의 인간관계가 두려운 신입생들은 ‘라인’ 이라는 이 현대 네트워크 커뮤니티에서 친구를 찾아서 먼저 인사를 하고 다음 약속을 잡고 서로 만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개학할 때가 되면 이미 여러 무리가 만들어 지다나니 학교가 시작하고 나서야 뒤늦게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들어갈 곳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클래스의 왕따-외톨이가 되어 밥도 혼자 먹어야 하고 학교도 혼자 다녀야 한다. 꿈꾸던 핑크빛 대학생활은 물 건너 간 것이다.

자기 일본사람들끼리도 그러하니 우리같은 외국인이 그 무리에 낀다는 것은 꿩무리에 낀 닭같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내가 만나는 일본 사람들이라야 학교 스태프나 학생들, 학회에서 만나는 일본인 교수들 이 전부이다. 1년에 한번씩 10월 첫 토요일이면 조선학회의 학술회에 가는데 일본에 와서 조선고전문학이나 근대문학에 대한 연구발표를 듣는다는 것이 특이한 체험이기도 하고 3자인 일본교수들의 지론을 듣는 것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물위에 뜬 기름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똑같이 논문발표를 하고 다 같이 친목회 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듣도 보도 못한 조선족문학을 논하는 나의 논문도, 배 짱 두둑이 발표를 하는 나도 그들에게는 이방인의 이색적인 모습일 뿐이다. 만나면 반갑고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사사로이 만날 친분은 쌓을 수 없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태프는 아무리 친절해도 딱 스태프로만, 학생 들은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 해도 딱 학생으로만, 그만한 거리에서 만날 뿐이다. 페스북, 라 인, 카카오토크, 이런 네트워크 안에서는 ‘친구’ 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친구가 될 수 없는 그들이다.

그러니 오늘 같이 딱 속을 풀고 싶을 때에 만날만한 사람 하나 없어서 이렇게 전철에 앉아서 디아스포라민족의 비극이라 신세타령만 하고 있는 나이다. 더 웃기는 것은 다 같은 외국인 신세인 한국어선생님들 사이에서도 나는 외톨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한국에서 온 일본인과 결혼한 한국인 아니면 재일한인이고 조선족은 딱 나 하나뿐인지라 내가 아무리 국제학술회에 초청받아 한국을 들락거리며 논문을 발표해도 아무리 내가 한글로 수필집, 평론집을 내도, 본토박이 한국인들 눈에는 내가 한국어를 좀 잘 하는 이방인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교과서 연수를 해도 트레이너 선생님이  “우리 한국 언어습관에는 …”  이렇게 지적하기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반감이 확 일어난다. 한국어니까 한국인들의 의견을 많이 존중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생기는 불편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옛날에 내가 딸애의 진학문제 때문에 조선학회의 오카야먀 교수님에게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이 ˝일본사회에서는 반드시 자기의 무리가 있어야 해요. 같이 자라고 같이 공부했고 같이 일할 수 있는 그런 그룹 속에서 살아야만 생존하기 쉬워요.˝라고 조언하셨다.

확실히 그러했다. 딸애도 중학교 때는 그 섭리를 몰랐기에, 거기에다 외국인이었기에 클래스에서 주류를 이루는 애들 무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가을운동대회를 한다기에 예쁜 도시락을 싸가지고 찾아갔더니 딸애가 앉은 주위만 쌩하니 찬 기운이 감돌았다. 말을 거는 아이도 없었고 웃어주는 아이도 없었고 응원해주는 아이들도 없었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운동종목 정할 때 딸애가 다른 애들이 하라는 8백미터 달리기를 거절하고 자기가 잘하는 넓이뛰기를 하겠다고 한 일이 집단무시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딸애가 조용히 있을 때는 존재를 묵인했지만 무리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자기 주장을 세우자 집단을 거스르는 튀는 행위라 여겨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일을 교훈으로 2학년에 올라오며 딸애는 자기 사람을 만들고 학생회 선거운동에 후보로 나섰다. 아침마다 전교를 돌면서 선거연설을 하였고 매니저를 앞세우고 전교학생들 앞에서 공약을 선포하였다. 하여 전교학생투표에서 반수 이상의 표를 따내어 끝내 학생회위원으로 당선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우수한 애들로 자기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그룹이 그대로 나고야대학에 들어가서 지금도 좋은 만남을 가지고 있다.  ‘외로운 섬’이 되지 않기 위해 딸애는 그렇게 자기의  ‘나라’를 세웠다.
돌이켜 보니 중국에 있을 때도 한국에 갔을 때도 일본에 사는 지금도, 나는 늘 ‘이방인’이고 그래서‘외로운 섬’ 이었다’ .

그래도 중국에서는 이주민족의 운명을 타고 태어나서 같이 자라고 일하던 친구들이 있어서 덜 외로웠었는데 일본에는 주위에 같은 처지의 친구가 없으니 나의 감정을 공유하고 머리 끄덕여줄 사람이 없다.그래서 일년에 한 두번 가는 도쿄행이 참 좋다. 그립던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 수 있어서.

이번 설에 20년 만에 처음 연길에 가서 설을 쇠었다. 친척들이 모여앉아 웃고 떠들고 대학 친구들을 만나서 옛날이야기를 하다보니 1년 동안 할 말을 다 하고 온 느낌이다. 모두들 워이신(微信)을 하기에 나도 따라서 다운로드하고 친구 찾기를 클릭하니 눈익은 이름들이 주르르 떠오른다. 대학동창들,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 작가 친구들, 그들의 이름을 보고 반가워서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그들은 여전히 모여서 스키장으로 온천으로 산으로… 부지런히 놀러 다니며 즐기고 있었다.

나에게도 옛날에는 기분이 조금만 안 좋아도 “좀 나와 줘!”하고 전화하면 하던 일도 팽개치고 달려 나와 주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가슴 시리게 외로워도 부를만한 사람이 없다. 흔들리는 전철에 앉아 친구들의 홈페이지를 찾아다니며 사진구경을 하노라니 그 시절이 그리워 마음이 젖어든다.

그래도 딸애는 나와 달리 자기의 ‘나라’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으니 얼마나 대견한가. 딸애 세대가 있는데 나의 작은‘섬’ 쯤이야 대단할 것 없지 않겠는가.친구들과 바베큐 하면서 활짝 웃는 딸애의 사진을 보노라니 마음속의 외로움이 스르르 스러진다.

󰡒˝다음 역은 오카자키입니다. 내리실 분들은 왼쪽 문으로 내려주십시오.” 󰡓 아나운서의 알림에 내다보니 전철이 천천히 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까 카나야마 역에서 남편에게 마중오라고 전화했던지라 지금쯤 그이는 엘리베이터 옆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 오늘 저녁은 남편하고 와인이라도 한잔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멀리 바다건너에 있는 친구에게 마지막 토크를 날린다.

˝어이, 친구 저녁에 뭐 먹어?”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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