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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
[글/윤운걸]연변축구팀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시절 (16)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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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6  1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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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운걸 흑룡강신문 길림성 특파원 
[서울=동북아신문]1989년 가을,필자가 연변방송국에 근무할 때였다.어느 날 보도부 체육기자인 김남룡(현 연변텔레비전 부주필)씨가 찾아와 길림축구팀이 갑급팀에서 탈락했는데 축구의 고향인 연변에서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90년도 전국축구시즌에 대비해 축구팬협회를 설립하고 조직적인 지원과 응원을 제안했다.이에 맞장구를 쳐 연변축구애호자협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회장단을 구성하다보니 회장을 필자가 맡게 됐고 상무비서장에 김남룡,상무부회장 겸 홍보담당에 남명철(현 도문시 부시장),상무부회장 겸 조직담당에 양동섭(전 연변텔레비전 기자)씨 그리고 상무부회장에 연변가무단 김동관 단장 모두 5명이 맡게 됐다.
 
    자금 후원과 응원단 구성
 
회장단은 먼저 지역 언론이 앞장서 연변축구를 살려야 한다는 취지 아래 언론사를 찾아갔다.당시 길림신문사 이송영사장을 찾아가니 적극적인 보도협조와 함께 1천 위안의 지원금을 쾌척했으며 연변일보사,연변인민출판사,중국조선족소년보사,대중과학잡지사,동북과학기술신문사 등 각 언론사들이 경제적인 후원과 함께 인력 후원에 나서 연변팀을 지원하기 위한 준비가 빨리 진척되였다.
 
한편 연변가무단악대와 연변라디오텔레비전악대가 잇따라 합세하였고 조선족 가수 유병걸씨가 악대를 지휘했다.또 응원단 수송을 위해 연길버스운수공사도 경기 때마다 버스를 무상지원하기로 했다.협회가 발족했다는 소식에 연변변경무역공사 ,연변건축공사 등 일반 기업들의 후원행렬도 이어졌다.
 
   90년도부터 경기마다 인파몰이
 
초보적인 응원단을 구성한 협회는 북,괭가리,연변축구팀만세 등의 머리띠 등 각종 응원도구를 준비하는 가하면 붓글씨 솜씨에 뛰여난 박운학,허일춘 기자 등은 표어판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는 등 준비작업이 시작됐다.특히 감동스러웠던 것은 전 연변텔레비전 주필 김희관(현 연변공공관계협회 회장),부주필 김영택씨 등 언론인들도 "축구팬"이란 머리띠를 매고 응원 대열에 합세해 질서유지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경기가 시작될 때마다 국가연주가 있었는데 협회 관악단이 유병걸씨의 지휘 아래 연주했고 연변축구팀이 승승장구를 이어갈 때는 <아리랑>,<나가자 나가자>등을 연주하면서 축구장 관람석에서는 자연스럽게 파도타기 인파물결이 일어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협회는 경기마다 득점 선수 또는 최고활약 선수들을 선정해 상금을 주는 등 선수들이 민족의사명감을 갖고 공을 찬다는 정신력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그래서 당시 최고 공격수였던 고종훈 선수는 "축구팬들의 사랑과 성원에 힘입어 민족 정신의 사명감을 갖고 푸른잔디위를 원 없이 달렸다"고 말하기도 했다.연변에는 지금도 "고종훈노래방"등 그의 이름을 딴 상점들이 많다.
 
   가는 곳마다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
 
  연변팀의 홈 경기는 가끔 용정,도문시에서 치르게 되었는데 92년 도문 경기 때였다.연길에서 3대의 버스로 출발한 응원단들이 도문시 경기장에 들어서자 도문시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영했고 열띤 응원을 벌이는 등 지역 응원단도 구성됐다. 이런 응원의 결과였을까,7월 삼복 더위에도 선수들은 3대0으로 대승을 거둬 관중들의 열띤 응원에 보답했다.경기가 끝나자 도문시 정부 차원에서 연길에서 온 200여명의 축구팬들을 위해 저녁식사를 마련하는 등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하지만 이날 저녁식사는 미리 연길에서 협회와의 예약이 돼 있어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축구팬으로서의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재미있는 뒷이야기
 
  협회 회원은 반드시 축구장에 들어갈 때 머리띠를 착용해야 했다.당시 입장료가 비싸 입장권을 구입하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입장권이 모두 팔리는 바람에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관중들은 경기장 바깥에서"귀"로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무에 올라가 경기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아마도 이런 진풍경은 연길경기장에서만 있었을 것이다.당시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가운데는 혹시 조직담당자 가운데 자신이 아는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하며 경기장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이런 사람들은 조직담당자와 눈길만 마주치면 입장이 어느 정도 가능했고 이런 일을 부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에는 없었다.
 
  92년 8월,연길경기장에서 응원을 마친 뒤 응원단 만찬장에서였다.관악단을 온몸으로 지휘해온 유병걸씨가 단번에 냉면 두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이를 옆에서 보던 나는 "형님 한 그릇 더 하시죠"라고 농담을 건네니"내가 쓩튀냐"(사투리로 게걸이라는 뜻)라고 받으면서도 또 한 그릇을 거뜬히 해치우던 그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지금도 추억으로 남는다.협회 회원이 늘어나면서 연변연극단 코미디 배우 이옥희(별명 쑤이러우)씨를 선두 지휘자로 선정했다.그가 응원단을 지휘하면서 관중들은 축구를 관람하면서도 중간 휴식 때는 재미있는 그의 연기를 즐길 수도 있었다.
 
  경기에서 연변축구팀이 승전하면 회원 만찬에는 맥주가 동이날 정도였고 패하는 날이면 안타까운 탄식으로 다음 경기를 기약했다.그리고 회장단은 축구선수들을 찾아 축하와 함께 위로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수들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
 
  이런 결과 연변축구애호자협회는 93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로부터 표창금기까지 받는 행운을 누렸다.그때 그 시절 축구팬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날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연길축구팬협회가 연변축구에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한 떨기의 꽃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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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춘
편집선생님,안녕하세요? 이런 문장은 어떻게 보내면 되나요?
(2019-03-11 17:46:03)
이강춘
헌신정신으로 살아온 10년

1980년 1월 22일, 음악교원으로 있던 나는 갑자기 건 피소변이 나가면서 아랫배가 아파 연변병원에 호송되어 수술대에 올랐다. 29세 꽃나이에《악성방광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을 줄이야.

매일 체온이 40도를 오르내리고 통증을 참다 못해 헛소리를 치다가는 혼수상태에 빠지군 했다. 나의 생명은 꺼져가는 불씨와도 같았다. 수술한지 1주일이 지난 후 수술실을 뽑자니 응당 아물어야 할 수술자리에서 고름이 왈칵 터져 나왔고 곪아터진 피부를 칼로 도려내야 했다.
마취제를 쓰지 않으면 수술자리가 빨리 아문다는 말을 들은 나는 마취제를 쓰지 않고 대수술을 두번이나 했다. 6개월 만에 수술자리가 겨우 아물자 나는 아내한테 업혀 천진시공안병원에서 한달 동안 화학치료를 받았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지고 체중이 32킬로그램으로 줄었으며 이제 남은 시간이 석달 밖에 안된다는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때 나는 수술자리가 아물지 않아 통증이 심해 맞은 강통정(强痛定)주사에 은이 박혀 하루라도 주사를 맞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황이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온 몸에 진땀이 줄줄 나고 견딜 수가 없어 닥치는대로 부셔버리고 했다.
병원에서는 하는 수 없이 나를 철침대에 꽁꽁 묶어놓고 누구도 들어 오지 못하게 했고 나는 발광하다 맥이 빠져 쓰러지군 했다. 석달 동안의 치료를 거쳐 나는 기적적으로 약중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사회를 위해 보람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젊어서는 앓음 자랑만 하다보니 사회를 위해 뭘 좀 하려고 해도 몸이 허락되지 않았다. 2009년부터 나는 <<로년세계>>, <<흑룡강신문>>, <<연변로인의 벗>>신문 등 아홉개 신문잡지사의 특약기자로 활약하면서 문명가정,모범며느리, 모범시어머니 등 선진사적과 왕청현 아홉개 향진, 세개 가두 노인협회의 사적을 글로 써서 제때에 편집부에 제공하군 하였다.
2014년 3월 15일, 나는 자식들이 한국이나 연해도시로 돈벌이를 떠나고 모래알처럼 산산히 흩어져 고독하게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 노인들을 대상해 28명의 학원들로 현에 <<가야하노래교실>>을 꾸렸다. 정작 노래교실을 마련하고 보니 활동 장소와 음향 설비가 없는 것이 제일 큰 난제였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푼두푼 모아 두었던 1만 1200원을 가지고 연길에 가서 전자풍금과 음향설비를 사다 셋집에서 노래교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노래교실이 섰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마작에 푹 빠졌던 노인들,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던 노인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비좁은 활동실에 학원들이 많아지자 학원들이 한달에 25원씩 내는 회비로는 일년에 9천원씩 내는 집세도 부족했다. 거기에다 설명절이나 하향 공연에 드는 식사비,차비 외에도 교실에서 쓰는 전기세, 물세, 관리비 등은 1년에 평균 만원씩 들었다. 2015년 6월에 노래교실이 <<가야하예술단>>으로 개칭되면서 학원은 92명으로 늘어나 월, 수, 금 오전에는 여덟시반부터 열시까지 노래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한시부터 세시반까지 전자풍금을 배웠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예술단은 연변에서는 물론 국가급 언론에도 실려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예술단 합창조는 해마다 혁명열사기념비, 소왕청 항일근거지를 찾아 항일가요를 불러 학원들이 오늘 날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도록 이끌어 주었다.
올해 85세인 김련순 학원은 일주일에 세번 있는 노래공부 시간을 기다리는게 너무나도 지겹다면서 손꼽아 노래공부 시간을 기다린다고 한다. 올해 62세에 나는 리연화 학원도 우울증으로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친구의 소개로 예술단에 와서 4년째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우울증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올해 69세에 나는 김태수 노인도 마작에 재미를 붙여 밤낮이 따로없이 마작판에서 허송세월을 보냈는데 예술단에 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니 인젠 마작을 진짜 멀리하게 되였다면서 기뻐하고 있다.
왕청현 가야하예술단에서는 “좋은 사람, 좋은 일들”이 우후죽순마냥 나타나고 있다.“일체는 예술단을 위하고 일체는 학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좋은 기풍이 예술단 내에서 형성되고 있다. 부단장 전선금은 해마다 예술단에 5천원 이상 기부하고 김련순, 전해옥,림금화,정화분,김해옥,리순덕 등 학원들도 해마다 천원이상 기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26명의 학원들이 각각 500원씩 기부하고 어떤 회원은 자기집을 무료로 제공해 협회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어떤 회원들은 많지 않은 퇴직금을 한푼 두푼 모아 예술단에 후원하고 있다. 예술단에서도 학원들이 앓거나 갑자기 돌아 가면 병문안과 후사를 책임지고 처리해 주었다. 그리고 학원들마다 <<로년세계>>,<<로인의 벗>>신문을 한부씩 주문하게 하여 정신 식량을 마련해 주었다. 한 회원은 세상을 뜨면서 자식에게 유언을 남겨 협회에 2천원을 기부해 큰 감동을 주었다. 일부 신체가 불편한 학원은 지팽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협회 활동에 참가하고 있고 자녀들을 동원하여 물심양면으로 협회를 도와주고 있다. 나도 선후로 <<왕청본보기>>,<<연변본보기>>,<<길림성우수지원자>>등 영예를 받아 안았다.
아담하고 정결한 활동실에 모여 이같이 사회대가정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면서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여생을 보람있게 보내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나도 온몸에 힘이 솟구쳐 10년동안에 개인일로 청가를 맡은 적이 하루도 없이 만출근을 보장하고 있지만 힘든 줄 모르고 있다. 병마로 '사형판결'을 받았던 내가 지금까지 건강하고 온 몸에 활기가 차넘치는데는 예술단 학원들의 다함없는 지지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살아도 유감없이 보람있게 살고 싶다.
학원들은 익숙하고 또 정든 가야하예술단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전자풍금도 연주하면서 오래오래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한다. 학원들은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면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제일 큰 희망이라고 한다. 아마 자식을 둔 천하 모든 부모님들의 똑 같은 마음일 것이다.

길림성왕청현신문보도센터 /특약기자 / 리강춘

(2019-03-05 2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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