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장경률 선생의 글은 지난 세월을 이겨온 삶의 이야기들을 아주 리얼하게 보여주는 멋이 있는 듯싶다. 중국 조선어문 표기법을 그대로 둔다...<편집자>   

▲ 장경률 약력 : 연변일보 30년 기자 생애ᆞ정치부장 논설부장/편집국장, 신문연구소 소장 역임ᆞ 현재 길림성신문잡지 심열위원 연변일보 논설위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해외고문

책상에는 <<한조자전>> 한 권이 놓여 있다. 세월의 흐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누끄므레한 두껑도 잔뜩 닿았는데 보풀이 질대로 지였다. 중간의 페지들도 숱한 손길에 다슬어서 볼품이 없는데 간혹 중간 장들도 떨어지고 해여져서 반창고나 풀로 붙여놓은 상처투성이다. 1959년 12월에 북경인쇄공장에서 제1차 인쇄를 한것인데 나의 손에 들어온 시간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장장 반세기 딱 50년이다.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세인이 다아는 동란으로 하여 1968년 고향마을로 귀향한 그해 초가을 어느날 모를 한자가 있어서 우리 마을에서 박식하기로 으뜸가는 박인하로인한테 갔더니 두틈한 자전을 내놓고 나한테 가르쳐 주는것이였다. 나는 박로인한테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다.

<<얘야 경률아, 네가 이 자전을 갖고 가거라?>> 문득 등뒤에서 박인하로인이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보니 박로인이 손에 자전을 들고서 나한테 내밀면서 부르는것이였다. 나도 귀를 의심하였다. 이처럼 두꺼운 책을 처음 대하는데다가 어지간한 집에는 없는 보물이였다. 그래서 언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데 박인하로인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나한테는 인제는 큰 용도가 없으니 네나 가져다가 열심히 보거라!>>
나는 업결에 두 손을 엉덩이에 쓱쓱 문지르고 넓쩍 받아든후 머리숙여 큰 인사를 올리고 날뜻이 뜀각질하면서 깡충깡충 뛰여서 집에 돌아왔다. 당시 나의 나이는 16세였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그해부터 2년간 펼쳐진 <<계급대오청리>>운동에서 박인하로인이 혁명을 하다가 귀순한 반혁명분자로 투쟁을 받았다. 한것은 박인하로인이 우리 민족이 연길현 지신의 명동학교와 함께 1908년에 가장 일찍 일떠세운 개산툰 정동학교 8대 교무주임이였다. 당시 한창 교편을 잡고 있는데 일제놈들의 대토벌에서 <<당조직과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급조직의 지시에 따라 집단귀순 한 것이 죄로 되였던것이다. 이 얘기는 일단 후일로 미루고…

그때는 정말 책이 없었다. <<네가지를 쓸어버리고 네가지를 수립한다>>는 운동을 거치면서 볼만한 책들은 모두 불살라 버렸던것이다. 헌데 사전류만은 공구서적인데서 요행 살아남을수 있었다. 그래서 그후부터 그 <<중조자전>>은 나의 가장 믿음직한 선생으로 되였다.

삼국연의 한 페지를 하루 읽으며

당시 내가 살던 개산툰지역에는 서점이라고는 기차역전 동남쪽켠 개산툰우전국옆에 있는 자그마한 신화서점 하나뿐이였다. 서점에 진렬한것이란 모택동저작과 8개 본보기극 등 고작 몇가지 종류. 그러다가 1970년에 들어서면서 한 책에 10전, 20전하는 <<무엇 때문에?>>, <<비 눈 우박>> 등 과학도서와 자연과학소총서  그리고 <<빛나는 길>>, <<맑은 하늘>>등 장편소설과 <<삼국연의>> <<수호전>> 등 고전명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개산툰시내에 일보러 가면 무조건 서점에 들어서 새 책이면 불문곡직하고 모두 사들였다. 돈이 없으면 꾸어서라도 사고야 직성이 풀렸다.

<<삼국연의(한문)>>를 처음 접하였을 때였다. 첫자부터 도무지 읽어내려갈수가 없었다. 1963년 소학교 5학년에 다니면서부터 그 이듬해까지 처음 병음을 배우고 1965년 초중1학년에 진학하여 1년간만 한어를 배운 것이 고작 밑천이라 나로서는 문맹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우리들이 배운 것은 간략한자(简化汉字)였는데 정자(繁体字)는 완전히 눈뜬 소경이였다. 하지만 락심하지 않고 큰맘먹고 달려들었다.

이때 그 <<중조자전>>이 바로 나의 선생으로 되였다. 장편소설이 내리글인데 처음에는 한 줄을 내리읽는데 한 시간, 한 페지를 보는데 하루가 걸렸다. 그렇지만 읽고 또 읽고 뜻을 모르면 반복적으로 음미하면서 독학하였다. 특히 삼국연의 서시를 암송하는데만 한달이 걸렸다. 그리고 한문과 조선문으로 된 삼국연의를 함께 보면서 대조하는데서 그 내용들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도 후에 보니 한문삼국연의가 온책이 첫 글자부터 붉은 색 잉크로 병음을 달다보니 거의 몽땅 붉은색투성이가 되였다. 헌데 고마운 것은 1970년봄부터 대대당지부에서 토론하고 내가 대대신용사 회계사업을 맡게 된것이다. 그래서 그처럼 힘겨운 체력로동을 하지 않고 대대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사무를 보게 되여 수시로 책을 펼쳐 볼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연의 상하집 두책을 처음 볼 때는 한 번 보는데 1년이 걸렸다. 헌데 다시 볼때에는 넉달이 걸리고 세번째 볼때에는 한달만에 다 보았다. 내용도 퍼그나 알수 있었고 적지 않은 시구는 암송할수 있게 되였다. 이는 내가 후에 대학교를 다니고 사회에 진출하여 신문사기자로 30년간 종사하는데 그나마 한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30여년간 목수건 두르지 않은 리유

우리 마을에는 홍춘식(후에 박춘식으로 성을 고침)이라는 문학청년이 있었다.  30대밑에 이르기까지 <<문학을 합네>>하면서 책벌례가 되다보니 혼사는 뒤전이였다. 그가 우리한테는 문학계몽선생이나 다름 없었다. 생산대 대장은 그가 우리들을 데리고 일을 하게 하였는데 쉼시간이면 우리 민족의 고전이야기며 삼국연의에서 본 재밋는 장절을 이야기하는데 때론 쉼시간을 훨씬 넘기여 대장한테서 욕먹기가 일수였다.
그때 거이 모든 집들에는 책이라고는 없었지만 그처럼 살벌한 년대에도 홍춘식은 <<책은 인간의 정신기둥이다>>고 하면서 태우지도 없애지도 않고 숨겨두었던것이다. 그것이 죄가 되여 한달간 저녘이면 사원대회에서 전문적인 비판투쟁을 받기고 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감추어둔 소설, 시, 민간이야기집들이 적지 않았다.

한번은 그의 집에서 책 한 권이 눈에 확 들어오면서 좀처럼 눈을 뗄수가 없었다. 누끄무레한 두껑에 <<청춘의 노래>>라는 제목이 강렬하게 안겨왔다.

저명한 녀류작가 양말의 명작 <<청춘의 노래>>도 당시에는 역시 독초로 비판받았지만 항간에 남아 있는것들은 청년세대들이 돌림으로 보는 인기소설이였다. 나도 처음 읽는 청년관련소설이라 책을 들자마자부터 푹 빠져들었다. 녀주인공 림도정의 지식녀성의 호매하고도 올곧고 진리를 추구하는 강렬한 자태, 남주인공 로가천의 소자산계급지식인으로서의 우유부단하고 좁쌀스러워 안탑깝게 하는 소인배성격, 지식인혁명가 강화의 투쟁정신과 사나이다운 기질 등 각자 인물형상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특히 청년혁명가들에게서 가장 남는 것이 멋스럽게 목을 감아 뒤로 넘긴 바람에 나붓기는 목수건, 일명 독도리였다. 그래서 그 걸음으로 돈을 얻어가지고 목수건을 사서 두르고다녔다. 목에 감아 뒤로 넘기고 가슴을 내밀고 다니는 것이 그처럼 도고해질수가 없었다.

사춘기에 들어선 나도 한창 멋부리기를 추구하는 때라 당시에는 모택동주석의 <<중국인민해방군은 하나의 대학교>>라는 교시를 높이 받들고 군인들을 그처럼 흠모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남녀들 불문하고 군복을 선호하고 군모, 혁띠, 등을 제일 챙길때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목도리가 더 흡인력이 있었다. 내가 이처럼 자아감각에 도취되여 있을 때 날벼락이 떨어졌다.

당시 본인의 주동적이고 적극적인 표현도 있었겠지만 조직에서 잘봐주어서 1970년에 자동대대에서 문화혁명후에 첫 사람으로 유일하게 혼자서 공산주의청년단에 입단한것이다. 그리고 줄기차게 노력하여 1972년 봄 첫 입당지원서를 쓰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입당심사까지 간것이다. 나를 입당심사하는 날 당지부서기의 열적적인 소개로 대부분이 찬성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제 표결만 흐믓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발언하겠습니다.>> 바라보니 제일 젊은 당지부위원이였다. 그는 나의 입당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못하였는데 그 주요한 리유라면 지금 한창 목수건을  두르고 다니는데 이는 소자산계급지식분자의 전형적인 냄새로서 지금 청년들가운데서 영향이 영 나쁘다는것이다. 그래서 <<장경률이는 아직도 젊고 앞날이 창창하니 조금 더 고험을 하자>>는것이였다. 결국 그 반대의견이 채택되여 한 시기 더 고험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나의 입당은 2년이나 늦어진 1974년가을에 성사되였다.

당시  농촌청년들에게는 두가지 목표, 소위 리상이 있었는데 하나는 입당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천받아 대학에 가는것이였다. 결국은 하나의 리상인바 입당하는것도 대학을 빨리 추천받아 가기 위한 것이니 농촌을 빨리 떠나는것, 결국 목표는 하나인것이다. 헌데 입당이 늦어지니 추천받아 대학가는 기회도 놓히고 말았다. 그래서 그후 농민으로 10년 종사하면서 그냥 추천받는것과는 인연이 없게 되였다. 이것이 후회되고 한이 되고 아물수 없는 상처가 되여서 그후 멋따개라고 치부되는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후에도 근 30년동안 크림을 바르거나 향수를 치는것도 그리고 목수건을 두르는 것은 더 말할것도 없이 멋을 따는것이라 오인, 담을 쌓고 살아왔던것이다.

이불 속에서 손전지 켜고 공부

1975년이다. 우경번안풍을 배격하고 자산계급법권을 비판하는 고조속에서 농업생산일선을 강화한단다. 그래서 대대당지부에서는 나더러 대대신용사회계를 그만두고 제4대 대장사업을 겸하라는것이였다. 당시 <<돌격입당, 돌격제발>>의 바람이 불었는데 나도 입당하고 대대당지부 선전위원사업을 하는데서 무조건 조직의 결정에 복종하였다. 그래서 그 해 이른 봄부터 제4생산대 대장을 겸하고서 사원들을 이끌고 <<대채를 따라 배우고>> 대채전을 만드는 그처럼 간고한 농촌체력로동에 몰입하였다. 그러면서도 책에 기갈이 든 나머지 책읽는데 대한 집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는 개산툰서점의 책매대도 조금 풍성하여져 사 볼만한것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맑스 엥겔스회억록>>, <<레닌회상기>>, <<레닌전>>, <<로신잡문선>> 그리고 문학서적들을 골라 사서 탐독하였다. 특히 로신의 잡문들을 접하면서 로신의 정신은 물론이고 로신의 문풍도 닮으려고 애썼다. 1972부터 연변일보와 연변인민방송국에 투고하면서 글쓰기열정자로부터 신문통신원이 되였는데 이때는 한 차원 승화하여 연변일보 문예통신원, 리론통신원으로 되였다. 연변일보사 장정일, 김경석 등 분들의 지도를 받는데서 수준도 적지 않게 제고되였다.

<<하, 이거 책 볼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나의 생각대로 좀 자유로울수 없을가?>>
사원들을 데리고 특히 청년들을 이끌고 두만강제방로동이나 대채전만들기에 동원되는데서 항상 시간에 딸리고 일에 쫓겼다. 그래도 새볔 3시면 일어나서 일포치를 하고 아침밥을 먹고는 또 사원들과 함께 일터에 나갔지만 쉼시간이면 남들은 잡담하거나 누워서 푹 쉬는 때면  나만은 떨어져 앉아서 책을 보았다. 가을철대채전전투를 맞으면서는 집에서 2리 떨어진 가까운 마을인것도 집단숙식을 하면서 청년들을 일터로 내몰았다. 그럴 때면 밤이면 다 깊은잠에 든 시각에 타인에게 영향줄세라 이불속에서 손전등을 켜고서 책을 보고 신문기사를 썼다.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라 시간이 없어 그렇지 체력과 정력은 그냥 넘치였다. 한 방에서 보통 4-5명이 들었는데 깊은 밤 체통좋은 학석이의 코고는 소리, 키 작지만 몸 날랜 성환이의 이가는 소리, 말단지 철국이의 잠꼬대소리, 곰이라 불리는 성구의 방귀 뀌는 소리도 싫지 않았다. 이런것들은 하나의 <<교향곡>>으로 편성되여 고요를 깨뜨리면서 들을만하였는데 그것도 <<친구>>처럼 여겨지여 혼자서 저절로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매일 밤 보통 한 시간은 기본이고 두세 시간이상 책 보고 글 쓸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튿날 새벽이면 남먼저 일어나 호각을 불고 문을 두드리면서 돌격대원들을 들볶아서 일터로 내몰았다.

레닌의 초막

<<레닌의 초막>>, 내가 이름을 단것이다. 나한테 한 때 이런 이름을 단 초막이 있었다면 혹자는 어벌도 크다거나 그렇찮으면 조금 허풍이라고 폄하할지 모르겠다. 우리 마을의 앞에는 돌봉(일명 석봉)이라는 산등성이가 가로누워 있다. 그래서 앞내가만 지나면 금방 산에 오른다. 당시는 혁명령수들의 관련 서적, 로신의 문집들을 탐독하면서 그네들을 숭배한 나머지 그들의 생활의 세부도 모방해서 따라하던 20대초반의 한창 꽃피는 시절이 였다.

레닌회상기를 읽느라면 이런 장절이 나온다. 지난 세기 10년대초 레닌은 짜리로씨야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 씨비리야로 추방당한다. 여기는 뭇산마다 천년고목이 우거지고 벌판은 일망무제한 평야가 펼쳐지는 인가가 지극히 드문 그런 고장이였다. 레닌은 이런 곳에 추방당하고도 절대 락심하거나 심리가 저조하지 않았다. 얼마후 오랜 혁명동지 엔.까.크룹쓰까야가 레닌의 편지를 받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찾아왔다. 그는 오면서 수요되는 각종 도서와 집필에 수요되는 문방구들을 한 발구 챙겨가지고 왔다. 당시 레닌은 이미 나무를 베고 키넘는 잡풀들로 이엉을 얹어 나즈막한 초막 한 채를 지어 살고있었다. 레닌은 여기서 10월혁명을 구상하고 수많은 저작들을 집필하고 우편도 한 달이 가지만 모쓰크바거나 뻬뜨로그라드에 있는 혁명동지들과 소통하였다. 비록 환경이 렬악하고 그지 없이 간고하였지만 깊은 밤에도 기름등을 켜 놓고는 글을 쓰거나 깊은 사색에 잠기면서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후에 그가 피력하였지만 오히려 이 환경이 조용하고 외세의 교란을 받지 않았기에 혼자서 고요와 고독을 즐기면서 후일을 설계하고 기흭하고 구상하는 최적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는 격언이 있다. 레닌은 이런 극심한 환경과 조건을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하게 활용한것이다.

나는 산중의 펑퍼짐한 곳을 찾아 집채 같은 바위돌옆에 초막 한 채를 지었다. 그리고 나서 자기나름대로 <<레닌의 초막>>이라고 이름을 다니 저절로도 허구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어쨌든 좋았다. 바로 산밑으로는 자동의 동네들이 옹기종기 내려다 보이고 중국조선족들이 중국에 진출하여 가장 먼저 벼농사를 하였다는 소재덕이 보이고 1908년 지신명동학교와 함께 중국조선족이 가장 먼저 일떠세운 4대 현대학교의 하나인 정동학교(지금도 나의 필명 정동은 여기서 따온것이다) 옛터가 보인다. 저멀리 동켠으로 두만강이 고즈넉히 흘러가는데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과 하넓은 천평벌이 한눈에 안겨 온다.

나는 오후 일이 끝나기 바쁘게 책을 옆구리에 끼고는 여기 산중에 오른다. 저녘녘의 고요가 깃든 산마루의 초막은 비록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당시에는 나만의 공간이 되기에는 족하였다. 맘껏 책을 보고 글을 쓰고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였다. 소리높이 시도 랑송하고 꼬리끼의 명작 <<해연의 노래>>를 격정높이 랑독도 하였다. 그때는 영화 <<10월의 레닌>>, <<레닌의 1918년>> 등 쏘련영화가 한창 방영될 때라 혁명령수들의 본을 따 손을 내젖고 머리도 거뜩 쳐들고 산아래 보이는것들이 모두 청중이라 가설하고 도도한 연설도 한바타 해재겼다.(그 덕이라고 할가, 1980년 봄 연변대학제1회웅변경연에서 2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도 서북켠에 소소리 높이 솟은 형제봉을 불태우는 저녘노을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다. 입당을 하고 대대당지부선전위원사업을 하였지만 내가 입단시키고 지어 입당시킨 후배들이 대학을 가고 대도시로 추천받아 갔어도 나만은 의연히 그대로 7-8년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경률이는 앞날이 창창한데 고향에 뿌리를 박고 고향건설에 청춘을이바지 하라니.>>나의 심사를 알아치린 대대주요책임자들이 나한테 사상공작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네들은 자기동생이나 친척이나 지기들의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도시에 추천해 보내면서도 말이다. 이처럼 10년이 흐르니 미칠것만 같았다. 때론 그지없이 비감해지기도 하였다. 이때 한 단락의 좌우명이 나를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벋히게 하였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 반드시 먼저 그의 심지를 괴롭히고 그 근골을 고생시키고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육체를 곤핍케 하고 그가 하는 일이 다 어지럽게끔 한다.>> 나도 그때는 언제 어디서 이 명언을 접하였는지는 모랐다. 그리고 나같이 졸렬한 인간한테 그 무슨 하늘이 맡기는 큰 임무가 있으련만 어쨌든 한낱 민초에 지나지 않는 무지렁이 같은 이 <<촌놈>>이 지탱하는데도 큰 힘이 되였다. 후에 안것이지만 맹자의 <<고자하편>>에 나오는 명언인데 당시 공자 맹자를 맹렬하게 비판할 때라 나도 그때는 몰랐었다.

맹자의 그 말이 2년후에 령험을 보였다.
1977년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면서 수천수만의 수험생들이 불시에 아무런 복습도 할사이 없이 대학입시에 응시해야 하였다. 본인도 초중 1학년수준으로 응시하자고 하니 막연하기만 하였다. 그것도 대대에서 한창 정당을 하면서 시간을 사흘밖에 주지 않았다.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시험장에 나갈수 밖에 없었다. 당시 개산툰지역에서 600여명이 대학입시에 참가하였는데 정작 대학본과에 붙은 수험생은 4명뿐이였다. 그해 대학입학점수선이 180점인데 본인은 생각밖으로 220점을 맞고 연변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가장 큰 몫을 한 것이 어문, 어문성적이 95점으로 절반넘어 차지하였다.
<<성공은 항상 준비하는 자에게 속한다>>는 격언이 맞는가 보다. 그렇다. 세상은 평소에 부지런히 기량을 닦고 항상 지식을 탐구하면서 노력한 인간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책기갈이 든 년대에도 그처럼 밭머리에서, 깊은 밤 이불속에서, <<레닌의 초막>>에서 닦고갈고 쌓은 자질이 빛을 발한것이다. 말이 그른데 없다. <<준비된 자는 언제든지 때가 되면 그 뜻을 이루게 된다>>고 말이다.

명작도 읽어야 책,  읽지 않으면 장식품

책은 읽기 위하여 사고 빌려오고 지어는 훔쳐 오면서 구하는이다. 그렇지만 지난 사책을 펼쳐 보면 책기갈이 들었을 때는 그처럼 책을 찾고 새로운 책을 얻기만 하면 그처럼 열심히 탐독하던 것이 출세한후에 그렇지 못한 사례들이 많고도 많다.

청조때의 저명한 학자 원목은 젊어서 가정이 째지게 가난하였다. 그래서 학구열망은 하늘을 찌를듯하였지만 돈이 없어서 책을 살수 없었다. 그래도 독서열은 식지 않고 도처에 다니면서 책을 빌려보았다. 때론 좋은 책이 있는 집에 가서 일해 주고는 품값은 받지 않고 그 대신에 그 주인집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책들을 다 탐독하고야 집에 왔다. 그래서 학식이 풍부하고 재질이 넘치여 명성이 드르르한 대학자로 되였다. 그는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그젯날 가난했던 시기의 소원을 푸는 심정이랄가 좋은 책, 명작만 보면 사들였다. 그래서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숱한 장서를 하였지만 오히려 잔뜩 게을러지여 독서하지 않은데서 둔재가 되였다고 한다.

원목의 교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상 적지 않은 이들이 장원급제하고 벼슬에 오르기전에는 지극히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책을 가장 진귀한 재산으로 삼고 독서를 정신생활의 기본으로 하였지만 일단 공명을 이룩하고는 그와 정반대로 된 사례는 고금중외에 적지 않다.

책이 귀하던 지난 세기 70년대나 80년대 나도 서점가에 들러서 새 책만 있으면 돈을 꾸어서라도 샀다. 그런데 후에 점차 책이 많아지기 시작하고 나의 하는 일들도 번망해지니 산 책들을 깊숙이 보관해 두었는데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일수였다. 이처럼 사다 보니 때론 두번 혹은 지어 세번까지 샀는데 후에 도서정리를 하면서 발견하고는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 오늘날 저의 집에 장서가 5만여권에 달하지만 그중 진정 읽은 것은 10%가 되나마나 하다. 정작 시간도 정력도 따라주지 않으니 어쩔수 없고 많이 게을러진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책은 사는것보다 빌려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생겼나 보다.

명작도 샀다면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 가치를 살리고 효과성을 높일수 있는것이다. 아무리 고금중외의 명작이라도 책장만 지키다가 없어진다면 한낱 종이뭉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진렬해 놓았다면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책을 사고 명작을 모으는데 열중하면서도 그와 더불어 부지런히 읽어서 자기것으로 자신이 소유한 정신적재부로 만드는 작업도 몹시 절실하다.

책기갈이 들었던 세월의 얘기도 인제는 옛말이다. 반백년이 지난 오늘날 지식이 폭발하고 과학이 비약하면서 책도 너무 넘쳐나서 홍수를 이루나 다름이 없다. 책도 종이책으로부터 전자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든지 책은 의연히 인류진보의 사닥다리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등척이 지난 세기 50년대에 토파하였듯이 책기갈이 들었던 세월은 더 말할것도 없고 책홍수가 넘치는 오늘날에도 <<자기의 책이든 빌려 온 책이든 책이 있으면 빨리 읽어라!>>고 권장한다.

 

 

제2편

동전 한 잎
 

도시의 큰 백화점 입구에 거지 한 명이 구걸하고 있었다.
백발의 로인인데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흰머리도 한껏 헝크러져 있어 지난 밤도 길거리나 어느 골목에 누워잔것 같았다. 그래도 미소는 잃지 않고 두 손을 내밀며 구걸하였다.

문뜩 한 댓살쯤 되여 보이는 예쁜 녀자애 하나가 다가 오더니 고사리손을 내밀고 동전 한 잎을 내밀었다. 거지는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며 받았다. 그것도 잠간, 어른들이 먼곳에서 볼라니 거지가 아이의 손에 무언가 쥐여주는것이였다. 아이는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면서 엄마한테 달려갔다. 그 엄마도 아이가 내민것을 받는 순간 깜작 놀랐다. 글세 아이의 손에 동전 두 잎이 쥐여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엄마가 거지한테 말하였다. <<우리 애가 드린것이 동전 한 잎인데 거기에 한 잎을 보태여 되돌려 주었군요. 이러면 안되지요.>>

그러자 거지가 말하였다.<<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주세요. 아이에게 누군가를 도우면 자신이 준것보다 더 많은걸 돌려 받는다는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동전 한 잎도 몹시 아쉬운 그였지만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해맑은 어린아이앞에서는 어른이고 싶었던 거지이다.

이로부터 어릴 때 로인들에게서 전해들은 “담치기”미담이 떠오른다. 먼 옛날에도 우리 겨레들은 해마다 초봄부터 앞만 보고 일에 쫓기다나니 세밑이 되여야 비로소 한 해를 돌아보고 이웃도 살펴보는 여유를 갖게 되였다. 그때면 동네 어르신들은 아이들을 시켜 풍물을 치며 집집이 돌아다니게 한다. 그러면 집집마다 나름대로 쌀자루를 풀어내주는데 이를 모아 로인만 사는 집이나 중병에 시달리는 집안, 가난한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담너머로 곡식자루를 던져주고 간다. 누가 이런 곡식자루를 주고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알아도 모른체하였다. 가난한 이웃들이 추운 겨울과 설명절에 배를 곯지 않게 보살피는 이웃정이였다. 이로부터 시간이 지난후 그젯날 가난했던 이웃들도 도움을 받아 춰서게 되였다. 그러면 그네들도 그젯날 이웃들이 했던것처럼 가난하거나 곤경에 처한 이웃들에게 그 은혜를 배로 갚았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이처럼 재래로 전해 내려 온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도우면 즐거움도 배가 된다는 소박하지만 철리가 깊은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이 많고도 많다.

일전에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 한 자선가가 거금을 해당 부문에 전하여 대학입학생중 빈곤한 학생들을 부조해줄것을 바랐다는 소식이 매체에 실렸다. 청화대학 입학생을 비롯한 대학입학생 다섯명이 등록자금을 해결하는데 큰 보탬이 된것이다. 물론 자선가는 이름도 주소도 밝히지 않고 흔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 뉴스를 시청하면서 순간 뜨거운 그 무엇이 용솟음쳐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불우이웃돕기활동이 수시로 펼쳐지고있다.  회사에서, 단위에서, 기관에서, 무릇 집단이 형성된 그런 곳이면 당연지사로 여겨지고있다. 얼마 입지도 않은 새옷을 내여놓거나 넉넉치 못한 살림에서도 수백원이나 의연하는 아름다운 행동을 수시로 보게 된다. 이렇게 모여진 물자나 성금은 그자리로 도움이 필요한 가정에 전달된다. 참여자들의 진심이 푹 배이고 받는이들도 소박한 기쁨을 느끼는 이런 값진 자선활동은 언제나 광범한 호응을 받는다.

자고로 “베푸는자는 받는자보다 복하다”는 격언이 전통미덕으로 전해내려왔다. 무릇 베푼다고 하면 우선 남을 위하여 그 무엇을 하였다는 즉 다시 말하면 곤경에 처하였거나 원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다는데서 오는 만족감에 자기도취되기에 자기절로 즐거움을 금치 못한다는 얘기다. 받은자는 물론이고 베푼자도 그 순간 한갈래의 따사로운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름을 감지하게 되는것이다.

이웃간에 서로 물건이나 돈으로 도와주고 자기 힘을 보태면서 어려움을 풀어주고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하면서 조그마한 편리라도 도모해주는것은 전통적인 거의 본능에 가까운 아름다운 거동이였다. 물론 이는 선행의 일종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널리 일반화하고있는 자선사업과는 많이 다르다. 오늘날의 자선은 서로 모르지만 조직적인 활동을 통하여 그 무슨 바람도 없이 체계적으로 소리없이 펼쳐지는것이다. 여기서 자선활동참가자들은 그 무엇도 바라는것이 없다. 오직 그 이름모를 상대자가 자극을 받지 않으면서도 어려움을 헤쳐나가기만 바랄뿐이다.

"적선지가,필유여경(积善之家,必有余庆)" 이란 속담이 있다. 동양인들이 가문마다 좌우명으로 삼던 격언인바 그 참뜻인즉 선행을 많이 하면 그 가문에 경사가 남는다는것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재래로 선량한 마음으로 덕을 많이 쌓는것을 숭상하고 선행하여왔다.

우리는 자선사업을 펼치면서 선량함을 보이고 덕을 쌓으라고 선전하면 흔히 그 무슨 거창한 일을 펼치고 남 보기에도 감복할만큼한 거동을 보이는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인데 실제는 자그마한 일들이 큰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사소한 일, 자그마한 거동에서도 그 마음을 읽을수 있으면 되는것이다. 우리 신문의 사회면에는 거의 모든 기마다 불우이웃을 돕거나 빈곤학생을 위해 의연한다든가 혹은 무료봉사활동을 펼치는 감동적인 기사가 실린다. 그 형식도 다양하여 거지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사랑은 꽃과 같이 아름답고 보석같이 고귀하다고 시인들은 읊조린다. 이런 사랑은 받는 사랑인것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것이며 준다는것은 언제나 헌신과 희생을 동반한다. 이제 곧 2019년 음력설이라 황금돼지의 해를 맞으면서 <<동전 한 잎>>과 <<담치기>>를 화제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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