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신문사소개 | 기사제보
최종편집 2019.3.23 토 15:27
사회·문화
융메이(咏梅), ‘준비하고 기다리다’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3.10  01:11:2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차아나뉴스위크=동북아신문]융메이라는 이름을 가장 잘 알린 배역은 멜로드라마 ‘중국식 이혼’의 샤오리(肖莉)역이다. 융메이는 첩보극 ‘현애(悬崖)’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인정을 받아도 그녀처럼 나이가 많은 배우들은 전형적인 ‘중국식 아내’의 역할로만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배역의 스펙트럼이 좁아졌다. 이번에 그녀가 왕샤오솨이(王小帅) 감독의 새 영화 ‘지구천장(地久天长)’으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따냈을 때, 사람들은 그녀가 마침내 진정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융메이 자신은 어떤 작품에만 의존해서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적합한 배역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려 왔다.  <중국신문기자/리우윈항(刘远航)/최옥란 역      

  

   
▲ 영화 배우 융메이(咏梅), 그의 이름을 가장 잘 알린 배역은 멜로드라마 ‘중국식 이혼’의 샤오리(肖莉)역이다.

융메이와 하이칭(海清) 둘 다 학교로 뛰어간다. 이들은 이 영화에서 성격이 다른 두 엄마를 연기한다. 하이칭이 빨리 달려서 융메이가 뒤에 처졌다. 감독은 두 배우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같은 카메라에 잡을 수 없다고 주의를 주었다. 하이칭은 본능적으로 “융메이 언니, 제가 속도가 좀 빨라서 그러는데 언니도 빨리 오세요. 우리 둘 다 힘껏 뛰어 가요”하고 얘기했다. 융메이는 “내가 맡은 캐릭터는 성격상 너무 빨리 뛸 수 없는 성격이며,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너무 빨리 갈 수 없어요”라면서 카메라 감독에게 카메라 위치 조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부탁했다.

“그녀는 맡은 역할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을 해왔어요. 이는 일부만 드러났을 것 같은데요.” 하이칭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느긋하고 천천히 해나가는 편인데 그 동안 살아온 삶도 그랬어요. 서두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왔던 거죠”라고 융메이를 소개했다. 

융메이는 오랫동안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녀가 촬영팀에 합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이칭도 놀랐다. 융메이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의식적으로 자신을 조절하기 시작했고 몇 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으며 그 사이에 공백기간도 있었다. 그 동안 외부에 가장 널리 알려진 그녀의 배역은 멜로드라마 ‘중국식 이혼’의 샤오리였다. 융메이는 첩보극 ‘현애(悬崖)’에도 출연했다. 

2017년 융메이는 왕샤오솨이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처음으로 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았다. 올히 2월 ‘지구천장’이라는 제목의 이 신작은 제작을 마치고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돼 결국 융메이는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남자배우 왕징춘(王景春)과 함께 남녀 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며 중화권 영화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녀는 하이칭과 이번 영화에서 재회하였으며 ‘지구천장’에 이어 수능을 소재로 한 드라마 촬영을 함께 하게 되었다. 

융메이의 수상을 알았을 때, 하이칭은 한 국제 에어라인 비행기 안에 있었다. 비행기 안에 신호가 오자 그녀는 즉시 몇몇 드라마 주인공들의 단체 채팅창에 소식을 전했다. 이날 밤 제작진은 간단한 축하인사를 주고 받았다. 

“‘지구천장’이 가장 끌렸던 것은 역시 감정적인 것이다. 왕샤오솨이 감독의 작품은 대부분 개개인의 생명을 배려하고 사람들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길 바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사람은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감독의 주관적인 소망이다. 사회와 인간성에 대한 그런 비련이 마음에 들었다.” 융메이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폭풍

태풍이 마침내 지나갔다. 온 방이 물에 잠겨 마치 약탈당한 것 같았다. ‘지구천장’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보여준 후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견디지 못한 류야오쥔(刘耀军)과 왕리윈(王丽云) 부부가 아픔이 가득한 북방도시를 떠나 푸젠(福建) 해변 마을로 발을 내디디는 장면을 보여준다. 

폭풍이 지나간 뒤 두 사람은 바깥에서 달려와 일상 생활용품인 바가지 그릇 등 이런저런 것들을 서둘러 건져 올렸다. 낡은 가족사진이 무심코 캐비닛 아래로 떠내려와 이 부부를 다시 옛 추억 속으로 끌어왔다. 역사의 상흔은 마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처럼 자식을 잃은 아픔의 형태로 나타난다. 

융메이는 왕리윈 역을 맡았다. 그녀와 배우 왕징춘은 이미 발목을 넘는 차가운 물 속에 서 있었고 몇 번 카메라에 잡히기 위해 그들은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다. 초라한 떠돌이 생활 상태는 절망감이라는 것을 가져다 주었다. “개인의 생명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었고 외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이것을 잊고 살려 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려 했고 어떤 힘으로 끝까지 가야 할 지 배우려 했다. 그녀는 또 용서하고 자신의 슬픔을 풀어주는 법도 알아야 했다. “융메이는 <중국신문주간>에 자신이 맡은 인물을 이렇게 분석했다. 

현실에서 융메이는 아이가 없다. 그녀는 그 슬픔을 대체로 이해할 수 있을 뿐, 감정의 경계에 대해서는 아직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영화에 함께 참여한 배우 리징징(李菁菁)은 자선행사에 많이 참여를 하며 아이를 먼저 보낸 가족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펴 왔다. 리징징은 융메이에게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한 어머니를 소개해줬다. 융메이는 7시간 동안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마침내 그 ‘역할의 핵심’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 아픔이 피부로 느껴지면서 그녀는 연기의 구심점을 잡아 갈 수 있었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융메이와 다른 몇몇 주연배우들이 일찍 팀에 들어와서 모두 함께 대본 리딩을 시작했다. 이야기에서 류야오쥔과 왕리윈 부부는 그 슬픈 땅을 떠나 남쪽 해변으로 가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현지 어업이 발달하여 여성들은 그물을 짤 수 있었고 융메이도 시간을 들여 전문적으로 그물짜기를 공부했다. 

융메이와 ‘지구천장’의 류쉬안(刘璇) 프로듀서는 모두 그의 연기 스타일이 왕샤오솨이 감독 영화의 이야기 표현과 잘 어울린다고 언급했다. 융메이는 심지어 그런 삶의 상태는 일부러 연기할 필요가 없는, 그녀를 그 환경에 던져 버리면 많은 움직임과 표현들이 나온다고 표현하면서 마치 농민들이 호미를 쥐고 있는 것처럼 그 역할이 손에 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첫 신에는 융메이와 왕징춘이 연기한 부부가 저녁을 먹고 아내가 물건을 정리하고 테이블을 닦고 아이의 목욕을 도와주는 장면이 연출된다. 남편은 혼자 술을 마셨고 대사가 거의 없었다. 이 장면은 심지어는 미리 리허설도 없었고 많은 연기들이 즉흥적인 것이었다. 왕샤오솨이 감독은 배우들에게 충분한 연기공간을 주었다. 이런 삶의 모습이 흐르는 동안 융메이는 왕리윈이 되었고 왕징춘은 류야오쥔이 되었다. 

서막

융메이로 개명하기 전 그녀의 이름은 선지더마(森吉德玛)였다. 몽골족인 그녀는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거주하고 있었다. ‘지구천장’에 나오는 그 북방 도시의 이름이 바오쟝(包江)인데 실제로는 바오터우(包头)이고 융메이의 집에서 가깝다. 영화에서 왕징춘이 맡은 류야오쥔은 기술노동자로 제자까지 데리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들은 쓸쓸함이 감도는 사람들로 변한다. 원래의 친한 친구는 토지 상인이 되거나 광둥(广东)에 내려가 세상을 떠돌며 생활을 해나간다. 

이것은 융메이 부친의 인생 경력과 흡사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목축업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반장이었지만 가정성분(가정의 사회 계급적 관계)이 좋지 않아 평생 지도자로 발탁될 수 없었다. 졸업 후 국유 건설회사에 배속되어 전기공으로 일하게 되었고 자주 야외에 나가 전봇대를 세우는 작업을 했고 살 곳이 없으면 텐트를 치고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융메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능력으로 전력 엔지니어가 됐고 제자도 많이 데리고 다녔다. 그들은 환난을 함께 하며 황야에서 온 천지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시대의 흐름은 가장 견고했던 것들을 휩쓸어 버렸다. 십수 년을 함께 지낸 많은 제자와 형제들이 잇달아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바깥세상으로 나갔다. 융메이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벌어야 할 돈도 벌고, 벌지 말아야 할 돈도 벌었다. 하지만 융메이 부친이 보기에는 이런 것들이 옳지 않은 행위였다. 그는 적당하게 조절하지 못하면 그것은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느꼈다. 나중에 가서 그 제자들과 형제들은 융메이의 집에 다시는 오지 못할 정도로 욕을 먹었다. 임종 시 그의 곁에는 집안 식구 빼고는 아무도 없었으며 거의 외톨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풍족하게 해줄 능력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런 삶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초연한 자세로 마지막까지 살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누구에게든 이 모든 선택이 옳았음을 믿게 했고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융메이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친은 그녀에게 최근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 자주 물어봤다. 음악에 대한 흥미도 가정환경과 관련이 있다. 어렸을 때 융메이의 집에는 카세트 테이프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녀는 덩리쥔(邓丽君)과 수루이(苏芮), 치친(齐秦)의 음악을 들었고 클래식 음악도 들었다. 융메이의 어머니는 노래책을 가지고 있었고 악기를 몇 개 다룰 줄 알았으며 즐거울 때 한 곡조 부르곤 했다. ‘지구천장’에서도 역시 음악이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되었다. 영화 속에는 홍콩, 대만 노래가 줄줄이 흘러나왔고 심지어 어두운 불빛 아래 무도회도 펼쳐진다. 이는 욕망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시절, 외치고 다녔던 구호와 표어의 뒷면에서 즐거움을 탐색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조명이다. 

1987년, 융메이는 베이징 대외경제무역대학 기업관리 전공에 입학했다. 같은 해에 헤이바오(黑豹) 밴드가 결성되었다. 이듬해 당차오(唐朝) 밴드도 결성되었다. 융메이는 그때 록 음악을 접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녀는 차이친과 추이졘(崔健)밖에 몰랐다. 주변에서 베이징에도 그런 음악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융메이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하면서 믿지 못했다. 당시 헤이바오와 탕차오는 아직 앨범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로큰롤 그룹과 접촉이 있는 친구가 그들의 공연과 파티를 보러 융메이를 데리고 갔다. 베이징에는 이런 행사가 처음엔 외교아파트 클럽에만 있었다. 매번 공연이 있을 때마다 매니아층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모두들 서둘러 현장에 모여 음악을 즐겼다. 이후 헤이바오 밴드의 건반수 롼수(栾树)가 융메이의 남자친구가 되었으며 둘은 결혼에 골인했다. 

융메이는 <중국신문주간>에 “자유와 사랑 등 순수한 것들에 대해 다들 강한 감지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또 그렇게 개성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나도 이런 부류에 속하고 리듬과 에너지가 넘치는 것을 좋아하는데 최소한 이들 음악의 진정한 감상자였다”고 말했다. 

감지력, 이것은 나중에 융메이가 연기에 대한 이해를 묘사할 때 자주 언급했던 키워드이기도 하다. 90년대에 들어와 융메이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헤이바오 밴드는 첫 앨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밴드는 ‘Don’t break my heart’라는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 배우를 모집했는데 누군가의 소개를 받고 융메이도 참여했다. 그녀는 거의 처음으로 카메라를 마주했다. 촬영할 때도 그녀는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감독은 그녀에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어가거나 벽에 기대고 있으라고 주문했다. “엎드려 있으라고 하면 그렇게 했고 뒤돌아 보라고 주문하면 시키는 대로만 했다. 그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했던 것 같다.” 

졸업 후 융메이도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광둥으로 남하하여 한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여가시간에 광고를 찍었다. 1995년 융메이는 9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던 그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자인 MC 쉬거후이(许戈辉)의 작업실로 출근했다. 제작팀에서 연락이 오면 쉬거후이는 융메이를 추천했다. 그때 찍었던 드라마가 ‘무윈더난런(牧云的男人)’이었다. 이듬해 융메이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문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때를 기다리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2년까지 융메이는 4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대부분 드라마를 찍었다. 이런 캐릭터들 사이에서 융메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꿔왔다. 

연기 인생의 초창기에 융메이는 몇몇 시대 청년의 역할을 맡았다. 1999년 예징(叶京)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꿈이 시작되는 곳’에서 융메이는 신핑핑(辛平平) 역을 맡았는데 그 역할도 대원자제(大院子弟, 어려서부터 여러 군인가족 아이들과 함께 한 마당에서 자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의 역할이었다. 시대라는 빙판에서 이상과 사랑이 교차되면서 흘러간다. 그러다 그녀는 잠시 실의에 빠져 외빈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지내고 수렁에 빠져 공안국에 끌려가기도 했다. 2003년에 찍은 반부패 드라마 ‘충성위사(忠诚卫士)’에서 그녀는 탐관의 ‘딸’로, 조폭회사 사장의 ‘여동생’ 역할로 나온다. 명랑해 보이는 해변 도시는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뤄가고 있다. 시대는 빠르게 발전되고 있지만 인간성은 어둡게 변해간다. 

‘꿈이 시작되는 곳’은 융메이의 개인적인 연예인 삶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다. 당시 촬영팀은 전체 분위기도 좋았고 다들 열정이 넘쳤다. 특히 푸뱌오(傅彪)는 극중 신평평의 오빠인 신헤이즈(辛黑子) 역을 맡았으며 극 외에도 융메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두 사람은 늘 함께 수다를 떨며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는데 푸뱌오의 배역에 대한 이해와 연기에 대한 열정이 그녀를 감동시켰다. 

이후 융메이의 이미지는 더 많은 작품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게 되었고 자주 ‘아내’ 역할을 맡았다. 2004년 히트작 ‘중국식 이혼’에서는 남편에게 배신당하면서도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지식여성 쇼리의 역할을 소화했다. 이듬해에 방영된 ‘결혼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서는 국영공장의 실직 근로자 역할로 현실에 녹초가 된 인생의 길목에서 스스로 이혼을 택한 여인의 배역을 맡았다. 2006년에 방영된 가족윤리 드라마인 ‘효자’에서 그녀는 현숙한 중국 며느리의 모습이었다. 2011년에 방송된 ‘자녀의 전쟁’에서는 둘째 딸로 나와 가정과 감정의 변두리에서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하는 책임감 있는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이들 드라마에서 결혼생활과 감정관계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역사주제는 이미 TV에서 사라졌고, 캐릭터들은 변혁의 물결에 휩쓸려 현실이라는 모래사장으로 옮겨졌다. 초조함과 욕망은 어떤 사회의 징조로 떠올랐고 나아가 시대병리로서 자주 거론되는 키워드가 됐다. 스크린 속 융메이는 종종 강인하고 지적인 유형의 기질을 부여 받은 동양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 전형적인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유명 MC 왕한(汪涵)은 그런 말을 한적이 있다. 하이칭이 중국의 좋은 며느리 형상이라면 융메이는 중국의 좋은 마누라 형상이다. 융메이도 반전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데 그 역할을 따내기가 참 어렵다고 토로했다.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비슷한 역할이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유명세와 더불어 융메이에게도 여러 루머들이 따랐다. ‘중국식 이혼’이 인기를 끌면서 샤오리 역은 그녀에게 폭넓은 인지도를 안겨주었고 다양한 유혹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는 ‘GQ’와의 인터뷰에서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내면의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고 말하며 이는 사람을 삼켜버릴 수 있는 위험요소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후 그는 휴대전화를 착신 전환으로 설정하고 15년간 문자 메시지로만 외부와 연락을 취해왔다. 

자리를 뜨다(离席)

융메이는 제작진의 단체 행사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하이칭과 호흡을 맞췄던 2008년 ‘어디가 내 집인가’부터 이번에 찍은 ‘지구천장’까지, 또 두 사람은 수능 드라마 ‘소환희(小欢喜)’에서 다시 만났다. 하이칭은 융메이와 돈독한 우정을 유지해가고 있다. 하이칭이 생각하고 있는 융메이는 배우의 모습보다는 철학자 같고 평소 조용한 모습의 소유자이다. “마치 촬영팀에 이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몇 번이고 불러서야 겨우 한 번 합석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다른 장소에서는 융메이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겨울에는 독서회에 나가 아성(阿城) 문집 ‘어디서나 바람이 분다’에 나오는 글을 읽는다. 융메이는 독서를 좋아하는데 ‘지구천장’을 찍을 때에는 수잔 산타거의 ‘질병의 은유’를 읽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외부와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드라마를 많이 찍게 되면서 그녀도 경계심이 생겼다. 환경이 변하고 분위기도 바뀌면서 그녀도 변하고 있었다. 물결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녀는 영화 출연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꿈이 시작된 곳’을 찍을 때 예징 감독은 펑샤오강(冯小刚) 감독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2003년 펑샤오강 감독의 영화 ‘핸드폰’에서 융메이는 작은 역할을 맡았다. 2009년 펑샤오강은 ‘당산대지진’을 찍었고 영화에서 융메이는 방덩(方登)과 방다(方达)의 고모 역을 맡았다. 

한동안 융메이는 편집도 배우고 싶어했다. 평소에도 영상을 찍으며 웨이보에 올리는 취미가 있었는데 이런 소재들을 한데 묶었을 때 표현된 의미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녀는 이 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편집도 배우들의 연기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2013년 융메이의 모친이 돌아갔고 이듬해 부친도 세상을 떠났다. 병석에 누워있을 때 부친은 여전히 낙천적이었고 스스로 침대 옆에 기계 장치를 만들었다. 누워서 담배를 피울 때는 연기를 내보내야 하는데 장치만 움직이면 창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디자인을 했다. 부모가 잇따라 떠나자 융메이는 한동안 생사의 고통을 견디지 못했다. 그 후, 그녀는 삶의 리듬을 좀 늦춰가려고 대본을 적게 받았다. 

2013년쯤 왕샤오솨이 감독은 우이산(武夷山)에 들어가 폐관을 하며 ‘침입자’의 대본에 몰두하였고 한가할 때는 TV를 보았다. 당시 TV에서는 융메이가 출연한 첩보극 ‘현애’가 방영되었고 그녀의 연기는 왕샤오솨이 감독과 프로듀서 류쉬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에 융메이는 초대 중국드라마감독공작위원회 표창대회인 ‘우수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 개봉된 영화 ‘자객 섭은랑(刺客聂隐娘)’에서 융메이의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는 극중에서 출중한 연기를 선보여 제16회 중화권 영화미디어대상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나중에 ‘자객 섭은랑’을 보러 갔는데 융메이의 연기가 굉장히 기억에 남았다. ‘지구천장’의 류쉬안 프로듀서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극중에서 그녀는 이 영화가 특히 돋보일 만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2017년 ‘지구천장’의 대본을 받은 융메이는 읽고 나서부터 자극을 받아 곧바로 러브콜을 수락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많은 사람들은 마침내 실력 있는 배우가 인정을 받고 주목을 받았다고 말했다. 융메이 자신은 각각의 장르와 캐릭터들은 그 나름의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중년기에 접어든 여배우는 이를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현상들에 대해 그녀는 공감할 수 없었고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고, 연기자로서 당장은 충분한 시장 공간을 찾기 힘들지 모르지만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녀는 이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편집]본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대림칼럼①/이동렬] 대림(大林)은 한창 문학 리모델링 중
2
[한중작가포럼/문학작품특집58]석화의 시 '밥 한술에 절 한번' 외 11수
3
'3‧1절'기념, '제1회 한민족재한동포위민전국대회' 천안독립기념관에서
4
조선족 삶을 기록한 류은규 교수의 ‘잊혀진 흔적’ 사진전 개최
5
[글/윤운걸] “니가 남을 도왔을 때 백사장에 새겨라,남이 너를 도와줄 때 돌에 새겨라”
6
[한중작가포럼/문학작품 특집57]홍연숙 시인의 '부다라궁 돌담속에 핀 민들레꽃' 등 외11수
7
[글/홍영밀러] '카와우 섬'에서의 휴가
8
박홍영 총재 온양향교 춘기석전대제 봉행
9
[한중문학포럼/칼럼편59]채영춘 칼럼 '민족동화론' 외7편
10
[포토뉴스]중국동포단체 시민단체연합 주최, ‘3·1운동 100주년 기념 문화축제’성료
신문사소개구독문의광고후원회원/시민기자가입기사제보제안/제휴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50-824]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2동 1024-21 | 대표전화 : 02-836-1789 | FAX : 02-836-0789
등록번호 113-22-14710  |  대표이사 이동열 |  E-mail : pys048@hanmail.net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동열
Copyright © 2004 동북아신문.∥dbanews.com의 모든 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