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대학교 고문 동훈 선생을 그리며

 [서울=동북아신문]김병민 교수는 2003년부터 9년간 중국 연변대학교 교장을 역임한 학자이고 교육 경영자이시다. 그는 2013년 3월에 '제17회 KBS 해외동포상' 수상자로 선정됐는데, '신채호 문학연구', '신채호 문학유고집' 등을 저술한 단재 신채호의 권위자로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로 뽑혔다. 이외, '조선문학사' 등 10여부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을 써냈으며, 연변대학교를 중국 '100대 대학교'에 진입시키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여 학계와 사회의 존경을 받고 있다...<편집자> 

▲김병민 약력 : 문학박사, 연변대학교 교수. 2003년 1월-2012년 6월 연변대학교 교장 역임. 제10기,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전국유학귀국우수인상, 국가교수연구 2등상, 길림성사회과학연구 1등상, 한국용재학술상, 한국해외동포상 등 수상. <신채호 문학연구>, <조선중세기북학파문학연구>, <조선문학사> 등 10여 부 저서 출간, 국내외 학술지에 논문과 평론 100여 편 발표, 장편 회고록 <와룡산일지>외 다수의 수필 발표.

    연변대학교에서는 개혁개방후 대학교육의 국제화를 전방위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인재양성과 과학연구, 사회봉사를 부단히 새로운 차원에로 끌어올려 대학교의 위상을 높여왔다. 대학교육의 국제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해외 기업인과 지성인들의 성원도 많이 받아왔다. 그러한 지원과 성원을 받게 된데는 리유가 있었다. 그것은 대학교가 중국정부의 따사로운 민족정책의 혜택을 받아 전례없는 발전을 가져온것과도 관련되지만 중국에서 대학교육을 통해 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조선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거니와 중국의 주류문화속에 적극 뛰여들어 문화적융합을 통해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하였기때문이다.

    연변대학교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헌신한 분들은 이루 다 헤아릴수 없다. 그중에서도 연변대학교의 유일무이한 해외고문이며 겸직교수로 있는 한국 남북평화통일연구소의 동훈(董勳)소장님은 연변대학교의 성장과 발전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고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1984년, 연변대학과의 인연

    동훈선생은 일제(日帝)강점기에 북조선의 함경남도 북청군의 농촌에서 태여나 짚신을 신고 다니며 소학교를 마쳤다. 조선이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던 때 서울에 류학, 세간에서 명문이라고 일컫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서울신문사 론설위원을 거쳐 60년대 중반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비서관이 되여 정무(政務) 사정(司正)분야의 사업을 했다. 대통령의 정책립안과 연설문, 담화문건을 작성하는 일도 했고 정부 공직자들의 부정, 부패행위를 청결하는 힘든 일들도 했다. 10년 넘게 대통령 비서직책을 다한 연후 1970년대 후반 4년동안 남북통일문제를 전담하는 “통일부”의 차관(부부장)과 남북회담실무 수석대표, 평화통일연구소 리사장을 지냈다. 박정희대통령 암살사건 이후 80년대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학에서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자기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하고 동북아의 평화터전 마련에 이바지하고자 그때부터 북경과 평양에 “길”을 열고자 하는 집념에 불탔다. 후날 조선 정부의 초청으로 평양에도 한국분으로 제일 처음 다녀왔다. 

▲ 장백산 천지에 오른 동훈선생, 연변대학교와 천지 깊이 만큼의 웅숭 깊은 인연을 맺다.
    동훈선생과 연변대학의 인연은 멀리 1984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 당시 주정부(州政府) 외사판공실에는 북경의 외교부로부터 “우호인사(友好人士)” 동훈씨가 방문할것이니 신중히 접하라는 문건이 내려왔다고 한다. 중국과 한국과는 아직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남조선 사람”인데다가 전직이 박정희대통령의 비서관과 정부의 “부부장(통일부 차관)”이기때문이였을것이다.

    동훈선생이 중국에 들어온 목적은 지난 시기 조선 독립혁명투쟁을 했던 상해, 중경과 동북 연변지역 그리고 안중근의사의 발자취를 탐색하고 특히 “조선족”사회와 연변대학을 견학하고 싶다는것이였다.
    연변대학을 방문한 동훈선생은 민족교육의 로교수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첫 요망은 도서관을 볼수 없느냐는 것이였다.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정판룡교수(부교장)는 “무스거(뭐) 감출것도 없지.”하고 안내했다고 한다. 주홍성, 남윤근, 김장욱, 최명화 등 원로교수와 외사담당책임자가 함께 배동해나섰는데 동훈선생은 도서자료를 둘러보고서는 매우 락담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동훈선생은 연변에 오기전에 할빈에 들려 안중근의사의 거사현장을 찾아다녔고 동북렬사기념관, 조선민족병원과 박물관도 방문했고 장춘시에서는 제1자동차공장, 영화촬영소, 위만황궁, 길림대학에도 초대되였다. 백두산등정은 광복이후 최초의 한국인이였기에 한국과 일본의 언론에 사진과 기사로 크게 장식되였고 그로 인하여 “조선족”이라는 호칭, 연변조선족자치주 및 연변대학의 존재가 널리 선전되기도 했다. 동훈선생은 한국 동아일보에 게제된 백두산등정기의 끝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여기 백두성산에 나 동훈… 아아 서다. 1984년 8월 28일 오후 4시 30분. 그런데 나는 왜 저쪽 길로 올라와야 하는가. 어서 모두 올라오는 날 오기를. 남북평화통일을…”

    동훈선생은 연변방문을 마치고 다시 북경을 거쳐 상해에 가서 독립운동 선각자들의 “상해임시정부” 옛터와 윤봉길(尹奉吉)의사가 일본군대장(白川義則)을 폭살한 “홍구공원” 등을 취재하고 돌아갔다.
    그후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머리기사제목으로 “한국의 전 고관이 중국방문―동훈씨”라고 썼다. 단 한사람이 중국입국비자를 받은 일이 큰 뉴스가 되고 요란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옛이야기 같다. 동훈선생과 연변대학과의 련계, 친분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그로부터 어느덧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선생은 1980년대 초반 매스컴을 통해 중국에 연변대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였고 1984년 한국 전 고위급관료로서는 처음으로 연변대학교를 방문하게 되였다. 연변대학교의 존재는 너무나 신비로웠다. 함경도 출신의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연변에 우리 민족의 대학교가 있고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니, 이 얼마나 대견스러운 일인가. 

    연변을 찾은 선생은 두만강기슭에 서서 강 건너를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말 못할 사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부모님은 언제 어디서 타계하셨는지? 누이동생은 살아있는지? 사과의 고향인 북청의 산과 물, 그리고 소꿉시절의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끝없는 향수에 젖어 선생은 여러 날 아무 말 없이 지냈다. 

    선생은 말수는 적으나 자상한 분이였다. 훤한 이마에 약간 주름이 졌는데 안경 너머의 형형한 눈빛은 모진 세파를 이겨온 그의 깊은 경륜을 말해주는듯 싶었다. 그무렵 이미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였던 선생은 자신의 고향 북청에 대한 사랑을 이곳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연변에, 더우기는 조선족을 만들어가는 연변대학교에 쏟기로 마음을 굳혔다. 선생은 박문일교장, 정판룡 부교장과 면담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학연구를 특성으로 연구생까지 양성하고있는 연변대학교에 한국의 학술서적이 한권도 없음을 알고 우선 학술서적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때의 사연을 선생은 이렇게 회억한다.

    “1984년 8월 24일 그 당시 표현으로 ‘남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 북경을 거쳐 연변땅을 밟고 연변대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정판룡 부교장의 다정했던 모습은 늘 떠오릅니다. 그때 정교장은 매우 배짱스러운 결단으로 ‘남조선학술서적’을 받아들이겠다는 ‘협의서’를 저와 공동서명하고 1년이상 걸려서 몇천권 서적을 도서관에 채워넣었던 일도 있습니다.”

     —《정판룡문학편》출간에 부친 축하의 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학술서적지원을 하자면 우선 재단을 찾아야 했다. 선생은 대우문화재단을 찾아 연변대학교에 학술서적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간곡하게 설명을 드려 끝내 확답을 얻어냈다. 아직 중한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1980년대 중반, 랭전체제로 말미암아 여전히 사회주의중국을 적대시하던 한국에서 중국의 대학교에 무상으로 학술서적을 지원한다는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무모한 “정치적모험”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신념과 의지는 확고했다. 황차 그때는 중한수교가 되지 않아서 학술서적을 직접 중국에 보낼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때 선생은 일본에 있었다. 선생은 고육지계(苦肉之計)로 한국에서 일본, 홍콩을 거쳐 중국 연변대학교에 학술서적을  보내기로 했다. 

   선생은 당시 중국 외문출판사 중국도서수출입총회사 직원으로 일본에 체류하고있던 리인옥(李仁玉)녀사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리인옥녀사는 도문 출신으로서 연변대학교를 잘 알고있었다. 그녀는 선생을 도와 중국 도서수출입총회사를 통해 학술서적의 입경수속을 해드렸다. 꽤나 까다롭고 복잡한 도경을 거쳐야 했다. 한국에서 일본에 운송된 학술서적을 다시 홍콩으로 보내고 거기서 다시 중국 대련항까지 보내야 했다. 마침내 학술서적은 대련항에 도착했고 우리 대학교에서는 세관측과의 다방면의 교섭을 거쳐 두대의 트럭에 13,725권에 3,725종의 학술서적을 실어오게 되였다. 하여 우리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교원열람실”을 새로 만들고 지원받은 한국학 관련 학술서적들을 이미 갖고있던 조선의 학술서적들과 함께 소장할수 있게 되였다. 교수들과 연구생들은 밤에 낮을 이어가면서 한국학 관련 최신 학술서적들을 읽을수 있게 되였다. 그때만 해도 중국에서는 아직 한국학 관련 학술서적들을 볼수 없었던 형편인지라 선생의 사랑과 지혜로 조달된 학술서적들은 우리 대학교의 교수와 학술연구, 인재양성에 크게 도움이 되였다. 

    필자는 평양류학시절 인민대학습당에서 우연하게 한국의 학술서적 몇권을 보고 탐독한적 있는데 1985년 7월 귀국해서 우리 대학교 도서관에 가보니 만여권의 한국 신간도서들이 책장에 즐비하게 꽂혀있었다. 참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 정도의 학술서적이면 연구생을 양성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평양에서 저명한 문학사가 조윤제선생의 《한국문학사》, 조연현선생의 《한국현대문학사조사》와 같은 저서를 보고 마치 희귀한 자료를 얻기나 한것처럼 련일 밤을 지새우면서 통독을 했고 귀국후의 강의와 학술연구에 쓰기 위해 수백 장의 카드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연변대학교에 돌아온 후에야 내가 공연히 헛수고를 한줄 알게 되였다. 비까번쩍하는 원본들이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있었던것이다. 아무튼 최신 연구 저서와 자료들이 구전한지라 “교원열람실”은 날마다 초만원을 이루었고 늦게 온 사람들은 자리가 없어 책장이나 창턱에 기대서서 책을 읽었다. 그 무렵 우리 대학교의 적지 않은 한국학 관련 학술론문, 특히 석, 박사 학위론문들은 선생이 보내준 학술서적들이 없었더라면 아예 집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것이다. 

    그 무렵 필자 역시 “교원열람실”에 드나들면서 박사학위론문을 쓰기 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1989년 9월, 필자는 김관웅씨와 함께 자료를 수집하고 박사학위론문을 집필하기 위해 김일성종합대학교에 가서 한학기를 지냈다. 출국할 때 우리는 도서관의 사서와 얼렁뚱땅 “뒤문거래”를 해서 한국학술서적을 대출해내다 트렁크에 꽉 박아넣었다. 하지만 세관을 넘으려다가 들통이 나서 전부 몰수를 당할번 했다. 이처럼 선생이 보내주신 수십권 학술서적들은 어려운 “평양려행”까지 하게 되였다. 필자는 “교원열람실”에서 한국에서 출간된 《신채호전집》을 읽고서야 비로소 한국에서 간행한 신채호의 유고(遺稿)들은 평양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된 육필유고를 윤색하고 국한문으로 옮겨놓은것임을 알수 있었다. 따라서 신채호의 유고가 한국에 있다고 주장하는 학계의 통설을 바로잡을수 있었다. 또한 한국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널리 수렴해 평양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된 신채호유고에 근거하여 집필한 졸저 《신채호문학연구》를 진일보 수정, 보완하기도 했다. 물론 현시점에서 볼 때 여전히 수정,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그뒤에도 선생은 박문일전임교장과 한국의 “동춘항운회사”의 백성호사장과 협상하여 우리 대학교에 학술서적을 지원하고있다.  오늘날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연구센터가 중국교육부에서 선정한 인문사회과학중점연구기지로 부상한데는 선생의 선견지명과 지극한 사랑과 갈라놓을수 없다. 홍콩의 저명한 기업인 소일부(邵逸夫)선생의 후원으로 신축된 “소일부도서관”의 7층은 지금 전부 조선—한국도서자료정보센터로 만들어져 수많은 국내외 독자와 학자들의 수요에 만족을 주고있다. 대학교로 놓고 말하면 도서관은 지식과 정보의 보고(寶庫)요, 새로운 착상과 아이디어의 요람으로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연변대학교 한국학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 동훈선생의 지극한 정성과 선구적 업적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것이다. 

    후일담이 되겠지만, 당시 한국의 학술서적유치를 대담하게 도와나선 리인옥녀사는 중국 공군사령부 류충록(柳忠錄)대좌의 부인이다. 기실 류충록대좌는 필자와 한마을 출신이요, 필자의 큰형벌 되는 분이다. 필자는 리인옥녀사의 은공을 잊을수 없어  2004년 전국인민대표대회기간에 류충록대좌의 댁을 방문하고 감사의 말씀을 드린적 있다. 우리 형제들을 친동생처럼 사랑해주었던 류충록대좌, 그리고 리인옥녀사는 그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무한한 긍지와 자랑을 느꼈다. 두 내외간은 “동선생은 참 대단한 분이시지요! 대단하구말구요!” 하고 거듭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류충록대좌는 14살에 군에 입대할 때, 우리 형제들을 한집에서 키우던 큰어머님이 동구밖에까지 나가 배웅하면서 동전 50전을 주던 일도 회억하면서 필자가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가 되고 대학교 교장이 된데 대하여 아주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교장이 되여 연변대학교를 잘 꾸리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필자의 어린 시절, 류충록대좌가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사탕, 과자를 사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주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필자는 어린 시절 류충록대좌 덕분에 처음으로 사탕, 과자를 맛볼수 있었다. 잊을수 없는 옛이야기다.    
 
    명문대로 되자면 교수진 양성이 급선무
 
    명문대학교로 되자면 명교수를 확보해야 한다. 교수는 대학교의 주체이고 대학정신의 수호신(守護神)이다. 교수가 있어야 인재를 키우고 과학연구를 하고 사회를 위해 봉사할수 있다. 그러므로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하는것은 대학경영에 있어서의 최상의 전략으로 된다.  “고사출고도(高師出高徒)”라고 고명한 스승의 그늘에서 비로소 훌륭한 제자가 자라나는 법이다. 연변대학교를 찾은 동훈선생은 연변대학교의 젊은 교수들이 외국체험이 거의 없음을 알고 아주 안타깝게 생각했다.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되고있고 무한경쟁의 시대가 열리고있는데 국제적 감각과 경험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선생이 두번째로 착안한 일은 젊은 교수들을 외국의 명문대학교에 보내서 학문적인 자질을 키우고 그들의 국제적인 시야를 넓혀주는것이였다. 그때의 사정을 선생은 “선생님(정판룡)을 일본 동경으로 초청해서 후진들을 양성할 방안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놓고 새벽이 밝기까지 담론하던 때의 모습은 영원히 잊어지지 않습니다” 라고 회고한바 있다.
    선생은 매년 2명씩 젊은 학자를 선발해 일본의 명문대학교에 류학을 시키되 1명당 2만 달러의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10년 동안 20명의 젊은 학자를 선발해 외국에 류학시키는 참신한 교수양성프로젝트였다.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선생은 한국 종교계의 명망 있는 지도자인 조향록(趙香祿)목사를 찾아 연변대학교 젊은 학자들을 선발해 일본에 류학시킬 데 관한 사업의 목적과 의의를 자상히 설명했고 마침내 그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냈다. 40만 달러의 장학금, 그것은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자금이였다. 선생이 성심성의로 주선해준 덕분에 우리 대학교에서는 중년 사학자 김동화(金東和) 교수와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학자 로학해(魯學海), 권우(權宇), 림성호(林成虎), 최성일(崔成日), 김호웅(金虎雄) 등 20명을 선발해 선후로 일본의 명문인 와세다대학교, 동경외국어대학교, 쯔꾸바대학교 등 대학에 보내서 1〜2년씩 연수를 하거나 석, 박사과정을 밟게 했다. 이들은 속속 귀국해 우리 대학교의 골간교수로 성장하였고 중요한 부서의 행정보직도 두루 맡아 열과 성을 다 바치고있다. 

    세월이 흘러 그 당시만 해도 새파란 젊은이였던 그들이 어느새 6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였으니 참으로 세월의 무정함을 알겠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들 학자들은 동훈선생의 은정을 더더욱 잊지 못하고있다. 이들은 선생이 연변에 오시기만 하면 꼭 한자리에 모여 환영만찬을 차리고 산 설고 물 설은 일본땅에서 선생의 그늘밑에서 즐겁고 뜻 깊게 지냈던 일들을 돌이켜보곤 한다. 이들이 일본에서 어렵게 지낼 때  선생은 가끔 한자리에 불러놓고 기름진 음식을 대접해주었다. 당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기업인이나 독지가들의 힘을 빌어 자주 연회를 마련했다. 박문일교장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선생은 연변대학교학우회를 만들기도 하였고 자신의 연구실을 연변대학교학우회 활동장소로 내놓고 자신은 전세를 맡아가지고 이사를 갔다. 어찌 이뿐이랴! 절대대부분 류학생들이 모국에 한번도 다녀오지 못한것을 알고 9박10일 모국견학의 기회까지 만들어주었다. 중한수교 전인 1990년 10월의 일이다. 연변대학교 류학생들은 모국땅을 밟고 흥분을 금치 못했고 “한강의 기적”을 쌓아올린 모국을 두고 경이로움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은 류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열심히 학문을 연찬해가지고 중국에 돌아가 모범적인 중국공민으로 되여줄것을, 특히 연변대학교의 도약과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1995년 20명의 젊은 학자들을 일본에 류학시키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필자는 박문일 교장과 함께 감사패를 만들어가지고 한국으로 가서 선생의 안내로 조향록목사를 례방하였다. 80고령을 바라보는 조향록목사는 자택에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박문일교장이 드리는 감사패를 받으면서  “이렇게 신경을 쓰실 일이 아닌데요. 나는 다만 동차관님의 부탁을 따랐을 뿐입니다. 연변대학교가 우리 민족의 대학이라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연변대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늘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조향록목사의 고매한 민족애와 겸허한 인격에 고개가 숙여졌고 우리 대학교에 대한 사명감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였다. 그 날 동훈선생은 별로 말씀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조용한 미소를 짓고있는 선생의 얼굴을 통해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그 무엇을 읽을수 있었다. 물이 깊으면 조용한 법, 오늘도 필자는 그 때 그 뜻 깊은 장면을 되새기면서 한 지성인의 “무위(無爲), 무명(無名)”의 정신적인 경지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민족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사랑, 큰일을 도와주고도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하해(河海)같은 흉금과 겸허한 자세는 우리 후학들이 영원히 따라 배워야 할바라고 생각한다.

    20명의 연변대학교 젊은 학자들을 일본에 류학시키는 일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 력사적인 중한수교가 이루어졌다. 동훈선생은 오매에도 그리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선생은 한국의 태창회사와 교섭해가지고 1억 원의 지원금을 받아 10명의 연변대학교 중진학자들을 한국에 파견하는 기획을 추진했다. 우리 대학교에서는 림진호(林鎭虎), 황건(黃健) 등 중진교수들을 한국에 방문학자로 파견했다. 

   뿐만 아니라 동훈선생은 한국에 류학하고있는 연변대학교 출신의 류학생들을 위해 해마다 수학려행(修學旅行)의 기회를 마련했다. 연변대학교 출신 류학생들은 선생의 덕분에 남북분단의 아픔을 느낄수 있는 해변도시 속초(束草)에 가볼수 있었고 “한강의 기적”을 피부로 느낄수 있는 포항제철 등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들을 견학할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선생은 명절이 되면 연회를 베풀어가지고 젊은 류학생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고 향수를 달랬다. 선생은 술상에 앉으면 좌중의 분위기에 맞게 나이가 든 선생들과는 가끔 롱담도 주고받았고 육담풀이도 했다. 여기서는 밝힐수 없지만,  “견(犬)놈들의 줄 당기기” 라는 육담을 들으면 모두들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하지만 선생 자신은 조용히 미소를 짓거나 아예 엄숙한 자세로 먼 산만 쳐다보았다. 빼어난 유머감각을 지닌 분이라 하겠다. 이처럼 선생은 깊은 사랑과 유머러스한 성격을 가졌기에 일본과 한국을 다녀온 연변대학교 학자들은 입을 모아 선생을 칭송하고있고 선생을 인생의 스승으로, 가문의 큰어른처럼 따르고있다.    

    선생은 류학생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지만 학업에 대한 요구만은 아주 높았다. 기실 동훈선생은 대통령의 사정비서관으로서 강력하게 법치주의(法治主義) 리상을 실천한 경력이 있는것만큼 호수처럼 조용하고 깊은 일면이 있는가 하면 바위같이 단호한 의지와 추상같은 위엄을 내재한 일면도 갖고있었다. 그야말로 인자하면서도 엄격한 사부(師父)와 같은 분이였다. 선생은 류학생들에게 외국에 온 이상 반드시 명문대학교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였고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만 정신을 파는 친구들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류학생들은 선생의 눈치를 보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가 심히 괴로웠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중국의 형편이 어려웠는지라 한푼이라도 벌어야 칼라 텔레비죤이라도 사가지고 귀국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재미나는 추억으로 되였으니 그러한 속사정을 동훈선생도 십분 리해해주리라 생각한다. 

▲ 동훈선생은 "민족대학교의 교문은 반드시 민족적 특색을 갖추어야 하고 가급적이면 기품이 있고 웅장해야 한다"라며 교문신축을 적극 도와 나섰다.  

    민족대학의 교문, 그리고 한없는 사랑의 힘
  
    동훈선생은 연변대학교를 깊이 사랑했고 연변대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민해주셨다. 일단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모든 심혈을 다 쏟으셨다. 이미 우리 대학교를 위해 너무도 많은 일을 해오셨으니 짬 나는대로 연변에 와서 대접이나 받았으면 좋으련만 선생은 여전히 우리 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로심초사(勞心焦思)하고 계신다. 하지만 선생은 자신이 해놓은 일을 두고 털끝만치도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오로지 남을 도와주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것,  여기서 우리는 한 지성인의 아름다운 정신적 경지를 보게 된다. 서푼짜리 일은 말할수록 거품처럼 사라지고 큰일은 말하지 않아도 세상사람들이 알게 되는것이 력사의 변증법이다.

    1990년 초반 연변대학교를 찾은 동훈선생은 박문일교장과 깊이 상론한 끝에 교문(正門)을 신축(新築)하기로 하였다. 민족대학교의 교문은 반드시 민족적 특색을 갖추어야 하고 가급적이면 기품이 있고 웅장해야 한다고 선생은 생각했다. 선생은 연변과 인연이 있는 북청사람들과 북청장학회를 찾아 지원금 15만 달러를 받아가지고 교문을 일떠세웠다. 이리하여 연변대학교 교문은 네번째로 탈바꿈하게 되였고 명실공히 지방 명문대의 민족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얼굴”의 구실을 하게 되였다. 작가이며 교수인 류연산(柳燃山)씨는 《연변대학산책》이란 책에서 우리 대학교 교문을 두고 이렇게 쓰고있다.
    “중국의 그 어디에서도 볼수 없는 조선문 간판이 당신이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하고 무심한 당신의 마음을 유심한 눈길로 바꾸기에는 너무나 충분한 매력을 갖는다.  

    교문을 마주하고 선 당신이 만약 건축예술에 대한 지식을 갖고있다면 무엇보다도 색채조화를 통해 조선민족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하늘색 옆에 빨간색, 빨간색 옆에 노란색으로 조화를 이루는것은 조선족의 전통적 미의 체현이다. …당신의 눈앞에 우뚝 솟은 연변대학교 정문은 찬란하고 자유로운 학문의 광장인 대학으로, 아름답고 독특한 문화를 가진 조선족의 모습을 안겨준다. 중국땅에 뿌리박고 조선족의 전통문화를 머리에 떠이고 중국과 조선민족의 문화의 조화로써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다원일체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해가는 조선족의 참신한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교문에 조선문 간판과 나란히 걸려있는 한문 간판은 1964년 연변대학교를 시찰해주신, 모택동의 가장 친밀한 전우이고 개국원수이며 전국인민대표대회 전 상무위원장을 지냈던 주덕(朱德) 위원장께서 일필휘지로 써주신 제사의 글씨체로 본떠서 만들었는데 그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필체는 서예가들이 보아도 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것은 중국의 현명한 민족정책을 상징하는 점이라 하겠다. 오직 중국에만 있을수 있는 조선민족의 대학교가 아닌가?! 하기에 류연산씨는 이 한문 간판은 “중국공산당이 없다면 연변대학교의 오늘이 없음을 강조하는 메시지이다” 라고 쓰기도 했다. 

    1995년 교문락성식에 즈음하여 후원자들은 다음과 같은 축시를 지어 보내오기도 했다.
  
     땀과 피가 스며있는 력사의 터전
     백두언덕의 높고 푸른 기상
     학문과 지성의 전당
     후계만대를 배양하는 인재의 산실
     오오! 연변의 민족대학 연변대학교
     여기 교문을 들어오며 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보람과 영광이 있으라.
    예로부터 교육, 문예, 장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고을 북청군 사람들과 북청장학회는 우의와 성금을 엮어 여기에 대문을 세워 만대에 길이 크나큰 성취 있기를 축원하노라.
   
    풍부한 문화적의미를 지니고 우뚝 일어선 연변대학교 교문, 이 교문에는 우리 대학교에 대한 북청사람들과 북청장학회의 깊은 애정과 함께 중국의 민족정책에 대한 그들의 감사의 마음도 깃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참된 민족애를 가져야만 자민족의 한계를 넘어 중국인민 나아가서 전반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수 있기때문이다. 아무튼 곱게 단청(丹靑)을 입히고 구만리장천을 날아예는 대붕(大鵬)처럼 좌우로 푸르른 추녀를 한껏 펼친 연변대학교의 교문, 이 교문을 지날 때마다 선생의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의지가 넘치는 눈빛을 떠올리게 된다.     

    연변대학교에 대한 선생의 사랑과 지원은 결코 여기서 끝난것이 아니다. 2004년에 있은 일이다. 우리 대학교에서는 민속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모금운동을 펼쳤다. 우리는 한국 동찬기업 김창묵회장이 한화 10억원을 지원해주기를 바랐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필자는 한국에 갔다. 필자는 동훈선생을 모시고 김창묵회장을 례방했다. 그 자리에서 동훈선생은 연변대학교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했다. 이어서 선생과 필자는 김회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두대의 승용차에 분승(分乘)해가지고 강원도 홍천에 가서 김창묵 회장의 고향에 조성한 독립기념마을을 돌아보았다. 동훈선생은 필자에게 김창묵회장에게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한다는것까지 자상히 가르쳐주었다. 

    그 후 연변대학교에 민속박물관을 짓는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우리는 김창묵회장을 연변에 초청하였다. 그때도 동훈선생은 몸소 연변대학교를 찾아왔다. 워낙 다른 급한 일이 있어 오지 않기로 하였으나 일의 성사여부가 못내 근심스러워 급히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것이다.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학생들은 김창묵회장 일행을 위해 특별히 다채로운 공연을 펼쳐보였다. 우리 민족의 멋들어진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면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동훈선생은 내내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치곤 하였다. 그 정경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노라니 필자 역시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름할수 없는 그 무엇이 필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공연장을 나올 때 선생은 한동안이나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하더니 마침내 “참으로 눈물 없이는 볼수가 없군요. 너무나 자랑스럽고 감격스럽습니다.” 라고 했다. 연변대학교의  젊은 학생들과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동훈선생의 뜨거운 사랑을 읽고도 남음이 있었다. 김창묵회장님도 깊은 감명을 받았고 나중엔 한화 10억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 연변대학교 민속박물관 축성사업을 적극 추진한 동훈선생(왼쪽 첫번째 사람, 네번째 사람은 저자 김병민 교장이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정성이 지극하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우리 대학교 민속박물관 축성사업은 교직원과 동문들, 그리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많은 자금을 모을수 있었다. 나중에는 우리 대학교 과학기술대학 설립자이며 총장인 김진경박사가 선뜻 나서서 주체건물 축성공사를 전부 도맡아버리는 바람에 민속박물관 축성공사는 순풍에 돛 단듯이 진척될수 있었다. 지금 민속박물관 골조공사를 바야흐로 끝내고 이어 실내 장식을 완성한다면 올해 안으로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건물이 우리 대학교 캠퍼스에 우뚝 서게 될것이다. 인테리어를 위한 정부의 지원자금 400만도 속속 유치해서 자금은 기본상 마련한 상황이다. 아무튼 민속박물관을 축성하기 위해 중국과 한국 사이를 동분서주하면서 로고를 아끼지 않은 동훈선생, 우리는 천금보다 소중한 선생의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

    선생의 연변대학교사랑은 학술지원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학문은 반드시 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중한친선에 도움이 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학문에 있어서 학자들은 자기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수 있다. 그러나 편견은 금물이다. 편견으로 나라와 나라간의 모순과 충돌을 초래해서는 안된다는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하기에 선생은 중한 학계에서 민감한 사안을 두고 허심탄회하게 교류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였고 그것을 묵묵히 추진하였다. 그는 두만강지역의 합작과 개발에 관한 연구는 새로운 동아시아시대를 열어 가는데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과제로 된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대한 지원 루트를 탐색하던중 절강성에 진출한 일본기업 청강재주식회사(清钢材株式会社)의 호시노세시(星野清士)사장을 설득해 학술지원에 나서게 했고 자신도 3천 달러를 내놓아 동북아연구원의 학술연구를 도와 나섰다. 물론 연변대학교 동문인 전경(田景)교수도 동훈선생을 보필해 일본의 기업인들을  우리 대학교에 안내해 협의를 맺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역시 고마운 일이다. 동북아연구원에서는 이러한 지원을 받아가지고 이미 《동북진흥과 동북아지역경제합작》(박승헌, 김강일, 리옥진, 리종림, 림금숙 등),《동북아정치구조와 중한일경제합작》(김강일, 장걸 등)과 같은 프로젝트를 성과적으로 완성해 학계와 사회의 이목을 끌었는데 이러한 학술성과는 두만강지역의 합작과 개발의 좋은 안내서로 되고있다.  

▲ 잔디밭에 앉아 연변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큰 그림 그리고 있는 동훈선생(오른쪽 세 번째) 과 김병민 교장(왼쪽 두 번째).
   올해도 선생은 조선족교육연구에 한화 2000만원을 지원해주기 위해 열심히 뛰고있다. 선생이 기대하는 연변대학교 학술연구는 인류의 보편주의와 합리주의에 립각한 선진적인 사상과 리념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는 정계를 떠난 후 남북통일연구에 혼신의 열과 성을 쏟았고 실제적인 사업도 많이 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필자가 할수 있는 범위가 아니지만, 그 정신적 경지만은 응당 높이 평가해야 할것이다. 

    이밖에도 동훈선생은 연변대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명문 대학교와의 실질적이고 다양한 교류를 위하여 로고를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친히 박문일교장과 필자를 서울대학교에 안내하여 상호 교류관계를 성사시켜주었다. 하여 서울대학교 김종운, 리수성, 정운찬 등 총장들은 취임후의 첫 대외방문코스로 연변대학교를 찾아와 두 대학교간의 협력관계를 강화하였으며 학부과정과 석, 박사과정을 통한 청년교사의 양성, 협력프로젝트를 통한 과학연구, 전문학술도서의 지원, 연구교수의 초빙 등 사업을 통해 연변대학교의 발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소신(所信) 있는 인격자, 그리고 사랑과 의리
  
    앞에서 동훈선생은 일찍 12년 동안이나 대통령비서관을 지냈고 후에는 통일부 차관을 지냈다고 이야기한바 있다. 차관으로 부임하는 비서관에게 대통령은 “청와대 근무 12년간의 로고와 그간 업적을 높이 치하합니다. 앞으로도 방가(邦家)를 위하여 위국대성 있기를 기원하며 더욱 건투를 비는 바입니다.” 라는 친필 서한을 써준바 있다.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대통령을 회억하는 글에서 동훈선생은 “나는 방가라고 쓰신 뜻을 깊이 새기며 산다.”고 쓰고있다. “방가”란 “나라, 국가”라는 뜻인데 여기서 그의 뜨거운 애국충정을 여실히 볼수 있다. 선생은 바로 이러한 열렬한 애국사상을 가지고있기에 평생 남북통일위업에 헌신할수 있었을것이다. 필자는 선생을 뵐 때마다 그의 표정과 언어표현에서 분단의 비애를 읽을수 있었고 민족과 국가의 운명과 미래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느낄수 있었다. 애국충정, 민족사랑은 선생으로 하여금 소신 있는 인격자로, 사랑과 의리를 지키는 분으로 되게 한것 같다. 

    2004년이면 선생이 고희(古稀)를 맞이하게 되므로 필자는 연변대학교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진갑잔치를 차려드리자고 제의한바 있다. 하지만 선생은 한사코 사양했다.
    “저는 평생 생일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뜨신것도 모르는 불효자가 무슨 면목으로 생일을 쇤단 말입니까?”
    너무나 애통한 사연인지라 더는 말을 건넬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미안해 생각한 끝에 족자 한폭에 모든 연대인들의 진정을 담아 선물하는수밖에 없었다. “董道不豫传万古,勳老有嘉秉千秋(一行正道는 万古의 가르침이요, 一身功德은 千秋의 자랑이로다.)” 소신있는 인격자로서 평생을 사랑과 나눔으로 점철한 선생의 일생을 함축한 글귀라 하겠다.

    선생은 아주 겸허한 분이고 자신에게 아주 엄격한 분이지만 동료나 후배들에게는 지극한 인간애와 의리로 대했다. 연변대학교의 김동화교수가 중병으로 병석에 누웠을 때도 3천 달러의 치료비를 마련해 보내주었고 항일투사이며 철학자인 주홍성(朱紅星)교수가 타계한 후 친히 릉원을 찾아 제주(祭酒)를 붓고 묵념을 하기도 했다. 어찌 이뿐이랴. 정판룡교수가 중병으로 입원했을 때는 불원천리 북경으로 찾아가 문병했고 정판룡교수의 문집출판기념식을 위해 값진 축사를 보내주었으며 그분이 세상을 뜨자 조전(弔電)을 보내오기도 했다. 

    “몇해전인가 북경 해방군병원에 문병을 갔다가 헤여지면서 곧 나아서 나갈터이니 옛날처럼 술 좀 취하자고 했는데 자주 만날수 없었고 오늘같은 모임에는 꼭 참석해야 하는데 가지 못하고 이렇게 “글”을 써보내오니 널리 리해하시고 꼭 연변에 갈터인즉 그때 늘 하던 ‘민족장래’이야기를 계속 합시다.”
    이는 정판룡교수 문집출판기념식에 보내온 축사의 글귀이다. 얼마나 진솔하고 소박한가. 하지만 이 짧은 글귀에는 평생의 친구이며 동지였던 정판룡교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정의(情義)가 맥맥히 흐르고있다. 

   필자 역시 연변대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후 동훈선생의 도움과 지지를 많이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사랑과 배려를 많이 받았다. 서울로 갈 때마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오셔서 필자는 송구스러워서 몸둘바를 몰랐다. 필자가 서울에 가면 선생은 고위급 관료며 기업가들이며 행정자치단체장들을 소개해 주느라고 늘 바삐 보냈다. 하지만 선생은 호텔에서는 절대 음식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언제나 수수한 밥집에서 식사를 하였다. 필자 역시 연길의 자그마한 돌솥밥집, 오리탕집, 비빔밥집, 죽집 같은 데서 손님을 대접하거나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즐긴다. 돈을 적게 쓰기에 서로 부담이 없고 서민적인 생활을 누릴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 교장이 체신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사실 이는 동훈선생에게서 배운것이다. 

    동훈선생과의 사이에 영원히 잊을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필자의 건강에 대한 선생의 지극한 관심이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섬약한 체질이여서 병을 달고 오늘까지 살아온다. 필자는 일찍 평양류학시절에 밤을 패가며 공부하다가 식물신경기능성장애라는 병을 얻어 늘 실면과 심률(心律) 불균형증상으로 고통을 겪고있었다. 한때 치료를 받아 좀 나아진것 같았지만 교장으로 부임한 후 재발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5년에는 여러가지 병이 겹쳐서 심한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마음속으로는 당장이라도 모든것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바다가에 가서 료양(療養)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다. 게다가 대학교의 경영난을 해결하기 위해 북경으로, 장춘으로 정신없이 뛰여다녀야 했다. 날마다 수면제를 복용하니 낮에는 눈앞이 어지럽고 몸이 휘청거려져서 그야말로 죽을 맛이였다. 그래서 날마다 수영을 견지하면서 하루하루 억지로 견뎌내고있었다. 속된 말로 돈을 도둑질한 적도 없고 남을 해친 적도 없이 선량하게 살려고 했으나 수시로 엄습하는 불안감은 필자를 너무나도 괴롭혔다. 그렇다고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을데도 없었다. 그때 박문일교장이 눈치를 채고 가끔 전화를 주었고 사업압력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라고 하면서 2개월간의 정양(靜養)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참으로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2005년 8월, 두달간 병마와 싸우고 나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캠퍼스확장공사 자금지원요청 용건을 가지고 북경에 출장을 갔었다. 그때 마침 동훈선생도 북경에 와계셨다. 필자는 선생을 모시고 식사를 할 자신심마저 생기지 않아 일단 전화로 인사만 올리기로 했으나 선생은 식사는 그만두고라도 꼭 만나보자고 하였다. 필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북경호텔로 찾아가서 커피숍에서 선생을 뵈었다. 선생은 필자의 신체상황과 고충을 환히 알고있었다. 선생은 청와대시절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겪었던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자상히 회고하면서 “큰일을 하자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라고 일깨워주었다. 필자는 분명 큰일을 하면서 큰 압력을 받아낼 재목이 아닌데 교장이라는 중책을 떠메다보니 이런 곤욕을 치른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궁한 가정에서 태여나 섬약한 체질을 가지고 살아왔으나 귀인들을 많이 만나 칭찬만 받고 비판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것, 교장이란 책임때문에 세상은 둥근데 나만 “모가 나게” 살다가 결국 고독(孤獨)이라는 고배(苦杯)를 마시게 된것, 이 모든것이 오늘의 “병약한 나”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고 이 모든 고충을 그날 선생에게 속임없이 털어놓았다. 선생은 때로는 엄숙한 표정으로, 때로는 미소어린 표정으로 필자의 두서없는 말을 들어주더니 해결대안을 내놓는것이였다. 필자의 일생에서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였다.  선생의 체험담을 통해 필자는 병을 정신적으로 이겨낼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였다. 

    어찌 이뿐이랴. 선생은 필자의 건강을 념려해 만날 때마다 서울에 와서 전면적인 검진(檢診)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욕심 같아서는 돈을 팔더라도 검진을 받고싶었으나 젊은 사람의 례의가 아닌것 같아서 번마다 좋은 말로 사양하였다. 그러나 끝내 동훈선생의 “포로”가 될줄이야!

    2007년 8월 필자는 인하대학교 BK사업단에서 개최하는 학술세미나에 참가한 후 서울에서 박문일교장과 합류해 동훈선생과 함께 자금유치행사를 벌리기로 했다. 그런데 동훈선생은 박문일교장과 필자가 서울대학교 부설병원 건강검진센터에 가서 검진을 받도록 모든 수속을 해놓았고 이번 기회에는 반드시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필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복종”하는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동훈선생은 식사도 마다하고 친히 호텔까지 나와 우리를 건강검진센터까지 안내했고 검진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검진을 마친 후 비용만은 필자가 물겠다고 했더니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그려.” 라고 하는지라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젊은 놈이 칠순이 넘는 어른의 안내로, 그것도 “무료검진”을 받았다는것은 너무나도 죄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상세한 건강검진결과와 치료건의는 한달뒤에 받기로 했다. 좌우간 여러가지 병은 가지고있되 아직 큰 병은 없다는 결론이 나와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은 살다가 죽기 마련인데 왜 병을 이처럼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 단 한번만 주어지는 생명이기때문일가? 

    아무튼 필자는 오늘도 서울에서 본의 아니게 받은 건강검진을 잊을수 없다. 필자의 건강에 대한 동훈선생의 관심은 나 한사람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겠지만 연변대학교의 건강한 발전과 찬란한 비전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에 필자는 선생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우리 대학교의 경영에 혼신의 정열을 다 바쳐야 함을 잘 알고있다.    

    경서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은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여 자신을 일으키고 어질지 않은 사람은 몸을 망치면서 재물을 쌓는다.”고 했다. 동훈선생은 대통령의 신변에서 중책을 맡고 일을 보았고 일국(一國)의 차관까지 지낸 분이지만 평생 전세집에서 살고있다. 청렴결백과 무사봉공, 이는 동훈선생의 드팀없는 신조(信條)이다.  선생 자신은 돈이 없지만 돈 있는 이들을 설득해 돈을 의롭게 사용하게 했고 연변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모든 심혈을 쏟았다. 선생을 잘 아는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선생은 자신이나 자식들을 위해 재물을 모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선생은 우리와 만날 때마다 “돈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 일이 한스럽다.”고 하면서 연변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자금을 유치할수 없음을 두고 원통해 했다. 

    아마 오늘도 동훈선생은 서울에서 연변대학교의 경영난을 해결해주기 위해 사색과 발걸음을 멈추시지 않고있을것이다. 필자가 경영난으로 괴로운것은 사실이지만 동훈선생에게 더는 부담을 드릴수 없어 만날 때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이미 주신 도움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합니다. 이젠 동고문님은 연변대학교의 대접만 받으면 됩니다.” 라고 말씀을 드린다. 그러면 선생은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공연히 오가며 페단만 끼쳐서 미안합니다.” 라고 말머리를 돌리곤 했다. 

▲ 왼쪽부터, 김병민 교장, 동훈선생 등 순이다.

    우리 대학교에서는 해마다 수십명의 겸직교수, 객원교수를 초빙해 국제화의 발걸음을 다그치고있다. 필자는 정녕 연변대학교와 인연을 맺은 국내외 모든 이들이 모두 동훈선생처럼 연변대학교의 발전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힘을 모아 밀고나간다면 정부차원의 자랑스러운 민족정책의 배려속에서 연변대학교의 앞날은 반드시 밝은 미래로 이어지리라 확신한다. 연변대학교에 대한 동훈선생의 사랑과 배려는 력사와 더불어 연변대학교 캠퍼스의 푸른 소나무처럼 영원할것이다. 

    동훈선생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유독 촬영만을 무척 즐긴다. 선생은 연변의 변천사를 사진에 담아 앞으로 연변에 기증하겠노라고 박문일전임교장과 약속한적 있다. 동훈선생과 박문일전임교장은 거의 30년동안 의기투합되는 지기로서 늘쌍 연변대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인재유치, 자금조달 등에 대하여 협의하고 계시면서 분망히 보내시고있다. 연변대학교, 그리고 연변의 산과 들, 도시와 향진들이 끊임없이 변하고있음을 선생은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모든 변화는 선생의 사진작품속에 고스란히 담겨져있을것이다. 베풀기만 하고 받을줄을 모르는 동훈선생에게 《연변사진전》만은 마련해 드려야 도리라고 생각한다. 장장 30년간 지속된 동훈선생과의 인연을 기념해 동훈선생 사진전만은 선물로 드리고싶다.  아니, 동훈선생이 연변대학교에 남기는 선물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력사의 변혁과 함께 달려온 우리 모두의 발자취에는 민족의 리상과 희망, 땀과 지혜, 그리고 아름다운 정서와 률동이 고여있다. 그리고 선생의 푸르른 신념과 고매한 인격, 사랑과 의리가 력력히 찍혀있다. 선생의 사진전을 마련하고 그 소중한 사진들을 우리 민속박물관에 영원히 보존해둘 그날의 행운과 기쁨을 기대해본다.

   동훈 고문님, 이젠 좀 연변에 오셔서 산천경개를 돌아보며 다문 한학기라도 푹 쉬시옵소서! 

         2010년 <장백산> 10호

[부록]

2018년  12월 30일 오전 2시 15분,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사진)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유족으로 아내 정정자씨, 아들 동헌(대한간호협회 근무), 딸 동설아·동영아씨가 있다. 동 전 차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1963년부터 취임 후 4년 가까이 연설문을 썼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는 박 전 대통령의 전역사도 동 전 차관이 썼다. 대통령정무비서관 사정비서관을 역임했고, 1975년부터 5년간 통일원 차관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정자 씨, 자녀 헌 설아 영아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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