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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단편소설/박명선]귀뚜라미 울던 밤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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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4  16: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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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선 약력: 길림성 용정시 출생.1987년 연변대학 일본어학부 졸업.연변교육학원에서 6년간 일본어교원으로 근무.요꼬하마국립대학 대학원 졸업.대학시절 처녀작 시 <갈매기>를 장백산잡지에 발표.일본유학시절 칼럼 <외국사람이 본 일본>을 마이니찌신문에 발표.단편소설 <할머니의 보물>(‘문학의 강’ 신인문학상 수상)로 한국문단에 등단.수필,칼럼,르포 다수 발표.현재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 광주 거주.
1.

언제 세워진 학교이기에 나무판자를 깐 복도에선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사람들의 신발이 얼마나 닿았기에 역시 나무로 만든 계단 가운데가 옴폭하게 패어들어갔을까.
집에서 영국더기를 올려다보면 2층부터 보이는 제4중학교 청사에 들어와보긴 용이로선 처음이었다.
"구렝이다!"
3층까지 올라왔을 때 문호형님이 불시에 소리를 지르자 용이도 동네애들과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다.학교를 구경하러 왔다가 구렝이란 소리에 모두가 덴겁했던 것이다.
"형님,구렝이가 뭐요?"
"거짓말이 아니요?"
애들이 다투어 물어보자 용이네 뒷집에 살고 있는 문호형님이 숨을 몰아쉬고 나서 대답했다.
"우리 반 어느 애 누나가 이 학교에 다니는데 며칠전에 3층교실에서 수업을 보다가 큰 뱀 같은 걸 보았다고 반학생들이 떠들썩했단다.그래서 내가 거짓말이라고 여기고 오늘 와봤는데..."
"그럼 구렝이란 게 큰 뱀이란 말이요?"
"그럼 아까 진짜 구렝이를 봤단 말이요?"
"글쎄다.아까 시꺼먼 게 천정에서 벽구석으로 스르륵 기어들어가는 것 같더라.뱀 같은 게..."
문호형님의 말에 애들은 눈이 데꾼해졌다.
"와,무섭다야."
"그래 말이다.난 이제 크면 이 학교에 안다니겠다."
"나두 안다니겠다."
"나두..."
용이는 말없이 애들을 번갈아보았다.
"자,우리 여기서 놀지 말고 저 앞에 있는 부대에 가서 멋진전투놀음을 놀자.탱크도 있더라."
문호형님이 팔소매를 걷어올리더니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문호형님을 따라 4중 농구장을 지나 낮은 돌층계를 넘어서니 눈앞에 넓다란 축구장이 안겨왔다.
"이 꼴문대에서 저 부대구락부 앞 꼴문대까지 너희들이 달리기시합해라.누가 일등하면 사탕을 준다.자,준비.포우(跑.달려라)!"
소학교 축구팀에 갓 가입한 용이는 다른 애들보다 더 빨리 달렸다.
"너희들이 용이보다 한두살 더 많은데 달리기는 용이보다 못하구나."
부대구락부 앞 꼴문대에 제일 먼저 달려간 용이에게 문호형님이 웃으면서 따발사탕 한개를 건네주었다.
"와,이렇게 큰 사탕 처음 본다야."
"맛있겠다.”
“같이 먹자."
용이는 따발사탕을 이빨로깨물어 몇조각을 내서 애들에게 나눠주었다.영수는 맛있다며 우둑우둑 소리까지 내며 먹었다.
부대구락부 뒤울안에는 하얀 적삼들이 길다란 빨래줄에 널려있었고 병영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보초병처럼 꼿꼿하게 줄지어 서있었는데 부대 동쪽 나지막한 산비탈에 진흙으로 만든 탱크와 구불구불하게 판 전호가보였다.문호형님 말대로 전투놀음을 놀기엔 제격이었다.
“형님,저 나무 위에 제기가 있소.저 제기를 가지고 놀고 싶소.”
영수가 가리키는 나무를 올려다보니 제기 하나가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었다.다른 동네애들이 여기서 제기차기를 놀다가 제기가 나무에 올라간 것 같았다.
“그럼 누가 전투영화에서처럼 나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라.”
애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자 용이가 문호형님의 어깨를 딛고 올라섰다.마주오던 몇명 군대아저씨들도 애들의 장난을 보고 웃으며 지나갔다.
"아가!"
갑자기 용이의 입에서 외마디소리가 터져나왔다.문호형님이 용이를 올리려고 일어서려다가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는 통에 용이도 나무에서 미끌어떨어지면서 오른손이 뾰족한 나무가지에 긁혔던 것이다.
땅에서 일어난 용이는 손을 펼쳐보았다.
아뿔사!오른손바닥 아랫부분이 뭉텅 살이 떨어져나간 게 아닌가!
하얀 속살이 들여다보이더니 삽시간에 빨간 피가 송골송골 샘물처럼 솟아나왔다.
"이걸 어쩌니?"
"현립병원에 가자면 여기서 먼데..."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애들은 어쩔 바를 몰라 쩔쩔맬 뿐이었다.위급한 상황에서는  그래도 문호형님이었다.그는 정찰병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결단성 있게 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부대 안에 꼭 병원이 있을 거다.빨리 찾아봐라!"
다행히 멀지 않은 빨간 벽돌집 1층에 위생소가 있었다.군복을 입고 쌍태머리를 한 젊은 간호원이 먼저 약솜으로상처를 소독하고 나서 조선영화 《기관사의 아들》에서 나오는 큰 낚시 같은 바늘을 용이의 손바닥에 가져다댔다.문호형님과 영수가 용이의 오른손을 붙들고 있었다.여덟바늘이나 꿰매는 동안 용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용케 참아냈다.
"장하구나."
곱상하게 생긴 군대간호원이 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얀 붕대를 손에 감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용이는 잠깐 멈춰서서 구렝이가 천정을 기어다닌다는 3층교실을 다시 올려다보았다.4중청사보다 더 높아보이는 주위의 늙은 백양나무들에서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무섭게 들려오고 떨어져내리는 나뭇잎들은 바람에 실려 열어놓은 교실창문 안으로 날아들어가고 있었다.
백양나무뿌리들이 삐죽삐죽 영국더기 아래까지 뻗어나왔는데 혹시 구렝이라는 무서운 놈도 어느 날 밤에 가만히 우리 동네에 기어들어오지 않을까.
그 날 저녁,용이는 할머니한테서 제4중학교가 옛 은진중학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렝인 웬 구렝이냐?"
잠자리에 누운 용이는 할머니가 웃으며 하시던 말씀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신문지를 바른 천정을 올려다보면서 낮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풀모자를 만들어 쓰고 탱크와 전호가 있던 곳에서 전투놀음을 놀려고 했는데...그랬더라면 손도 상하지 않았을 걸.
붕대를 감은 손이 또다시 찡찡 저려나며 아프기 시작했다.
불현듯 집 주위 어딘가에서 웬 동물이 기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찌르륵~찌르륵~
"저건 무슨 소리임까?"
"귀뚜라미라는 벌레가 우는 소리란다.귀뚜라미가 귀뚤귀뚤 하고 울면 가을이 되었다고 한단다."
"귀뚤귀뚤?..."

2.

10년이 지난 어느 날,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되어 용이는 기숙사 옆 비단공장 앞에서 문호형님을 만났다.
“형님,오랜만이요.”
“너 용이구나.”
“형님도 이 대학에 있소?”
“아니,난 재작년에 재정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건설은행에 출근한다.너 그 손 괜찮니?”
문호형님이용이의 오른손을 쥐어당겨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지금도 허물이 있긴 하지만 괜찮소.그땐 감사했소.”
“괜찮다니 시름이 놓인다.그래 할머닌?”
“형님네 연길로 이사간 후에 돌아가셨소.”
“그래?참 좋은 할머니였는데...나의 할머니가 너의 할머니를 언니라고 불렀잖아.나의 할머니도 이사와서 얼마 안돼 돌아가셨다.”
용이가 손을 상한 며칠 후,문호형님네는 연길로 이사가게 되었다.이사 가는 날,용이의 할머니와 문호형님의 할머니는 서로 두 손을 꼭 잡고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었다.이삿짐을 실은 자동차가 떠나자 두 할머니는 서로 눈굽을 훔쳤었다.
“자,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우리 생맥주나 마시며 옛말을하자.”
문호형님이 용이를 길 건너 자그마한 식품상점으로 데리고갔다.
“난 술은 처음인데...”
1980년대초,연길에는 생맥주가 흥성했다.대학가 주위의 식품상점들을 지날 때면 마른 명태를 안주로 생맥주를 마시는 대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상점주인이 크고 퍼런 비닐컵에 거품을 잔뜩 머금은 생맥주 두개를 담아들고 나왔다.
“자,마시자.전번에 어쩌다 용정에 갔다가 너의 집을 지나면서 볼라니 면목 모를 사람이 들었더구나.어디로 이사 갔나?”
“소학교를 졸업하고 1중에 다니다가 아버지가 ×××진에 전근하면서 우리도 용정을 떠났소.”
“그랬구나.아,정말,그 때 그 구렝이는 후에 어찌 됐나?”
“구렝이 말이요?”
구렝이란 말에 용이는 피씩 웃었다.
“구렝이가 아니라 큰 쥐였다더구만.”
“그래?하하하.”
“체육선생님들이 큰 덫을 만들어 잡았다오.잡은 쥐를 체조시간에 학생들한테 보이며 이젠 겁을 먹지 말라고했다더구만."
"그런 걸 난 또..."
"형님이 구렝이라니깐 모두가 깜짝 놀랐잖았소?"
“하하.그러 게 말이다.그건 그렇고 너 그럼 ×××진중학교에서 대학시험을 쳤겠다.아까 어느 학부란 건 알았는데 몇점 맞았나?"
"483점이요."
"헉!올해 문과 483점이면 길림대학 아니,북경대학에도 갈 수 있었잖아?"
"시험 전에 지원서를 잘못 썼소.반주임이 한해에 중등전문학교에 한두명 밖에 붙지 못하는 진중학교이기에 지망을 낮게 쓰라고 해서..."
"쯧쯧쯧.너 용정에 그냥 있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다.우리 동네에 있던 영수는 435점 맞고 장춘××대학에 갔다.영수 누나를 알지?영자도 올해 재정학교를 졸업하고 연길에 남으려고 지금 직장을 찾고 있는 중이다.”
영자는 의약공사 옆에 살고 있던용이의 친구인 영수의 누나였다.영수 누나는 용이가 영수네 집에 놀러가면 누룽지에 사탕가루도 뿌려주고 용이를 친동생처럼 대해주었다.용이가 손을 상한 날,영수를 데리고 집닭들이 낳은 달걀을 바구니에 담아들고 문안까지 왔었다.
“형님이 어떻게 영수네 집 일을 그렇게 잘 알고 있소?혹시...”
문호형님이용이를 보고 게면쩍게 웃었다.
“그래,내가 영자를 좋아한다.한동네서 살았고 또 한학교를 다니다보니...”
"그렇구만.그럼 이제는 영수 누나를 내가 어떻게 불러야 하오?"
"그것도 몰라서 물어보니?"
"그냥 누나 아니면 아주머니?형수님?하하."
국경절이 다가오던 어느 날 저녁 무렵,문호형님이 기숙사에 찾아왔다.밖에서 누가 기다린다고 하기에 기숙사 현관까지 따라나갔더니 영수 누나였다.
"용이야,오랜만이다."
"누나구만.오랜만이요."
문호형님이 옆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용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전번날에는 말하지 않았는데 우리 지금 비단공장 서쪽에 셋집을 잡고 있다.우리 돌아오는 10월3일에 결혼식을 올린다.아까 집으로 가는 길에 너한테 들린 거다.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자."
그 날 저녁,문호형님네 셋집 뒤울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귀뚜라미가 우는 건 수컷이 암컷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신호를 보내는 거란다."
취기에 우스개소리인지 문호형님의 말에 영수 누나가 옆에서 웃으며 형님에게 눈을 흘겼다.
"동생 앞에서 참..."
찌르륵~찌르륵~
귀뚤귀뚤~
용이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저 시무룩이 웃고만 있었다.

3.

그로부터 10여년이 다시 지난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아홉시가 넘어 집에 들어온 용이가 집전화기를 체크해보니 저녁 다섯시에 들어온 메세지 한통이 있었다.록음재생버튼을 누르자 한여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이야,나영수 누나다.지금 히가시가나가와(東神奈川)에 있는데 아마 내가 불법체류인 걸 알고 같이 일하는 일본인이 신고한 것 같다.아까 경찰차가 집앞 큰길에서 멈춰서더니 두 경찰이 곧바로 우리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더라.그래서 지금 무서워서전등도 켜지 못하고 있다.경찰들이 돌아간 다음에 너한테 전화하는데 나를 좀 도와주렴.너의 집에 며칠만 묵게 해주면 안되겠니?여기에 너 밖에 아는 사람이 없구나.제발 부탁한다.나의 전화번호는..."
영수 누나는 연변말씨가 아닌 서울말씨를 사용하고 있었다.
몇달 전에 중국에 있는 문호형님한테 안부전화를 했더니 한국에 갔다던 영수 누나가 지금 요꼬하마 어느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용이는 팔베개를 하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해보았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향친구의 누나이고 존경하는 형님의 부인이지만 30대 성인남녀가 어떻게 한집에서 밤을 지낸단 말인가.그것도 원룸인 작은 집에서 말이다.그렇다고 급히 도움을 청한 사람에게 모르는 척 회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아까 히가시가나가와라고 했지?그러고 보니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그럼 10시에 신꼬야스(新子安)역 동구 택시정류소에서 기다리겠소.한 정거장만 오면 되오.”
용이는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 영수 누나에게 전화를 하고 빨래감들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어둔 다음 시간을 맞춰 집문을 나섰다.
전철역에 도착하자 선글그라스를 걸고 여행용가방을 손에 든 사람이 용이 앞으로 다가왔다.용이는 선글라스를 벗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영수 누나였다.그녀의 얼굴에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도 만난듯 흥분과 반가움이 뒤섞여 어려있었다.
“감사하다,용이야.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은 줄 모르고 여직껏 전화도 하지 않았구나.일이 있으니 누나가 동생을 찾는구나.이게 몇년만이니?진우가 소학교에 입학한 해에 보고 다시 못봤잖어?”
진우는 문호형님과 영수 누나의 아들이었다.진우가 소학교에 입학한다는 말을 듣고 용이는 책가방을 사가지고 형님네 집에 찾아갔었다.
“그게 1991년도니깐 4년만이요.자,택시로 집에 가기요.”
용이는 왠지 가로등불빛이 환한 큰길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집까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너이 집에서 혼자 사니?"
집에 들어온 그녀가 가방을 놓고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같이 있던 한국유학생이 한국에서 부인이 와서 반년 전에다른 곳에 이사 갔소."
용이는 주인의예의를 갖춰 냉장고에서 쥬스와 소세지 등속을 꺼내 간단하게 상을 차렸다.
"좀 있다가 슈퍼에 가서 필요한 걸 더 사오겠소.형님한테서 누나 얘기를 듣긴 했는데...”
"필요한 게 없다.배도 고프지 않고.나한국에 일년반동안 있다가아는 사람을 통해 올봄에 일본에 들어왔다.일본이 한국보다 돈벌기 더 좋잖아.비자는 이미 만료됐다.헌데 애엄마는 안데려와?"
"정부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공직을 버리고 어떻게 오겠소?저...누나가 신발공장에서 일한다던데 누가 신고라도 했소?"
"응?아,형님한테 처음엔 신발공장에서 일한다고 말했지."
그녀는 쥬스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가게에 사까모도라는 관리원이 새로 왔는데 나한테 자꾸 칭얼거리던 게 엇저녁에는 가만히 집까지 뒷따라왔더라.그래서 깜짝 놀라 집에 막뛰어들어갔다.한참 지나서 문을 두드리기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그 사람이 아까 신고한 것 같다.어쩌면 저런 무서운 일본사람도 다 있니?"
"그럼 집에는 혼자 있소?"
"한국에서 같이 온 한국인친구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다른 일자리를 찾아 도꾜로 가는 바람에 지금은 나 혼자 있다."
용이는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목조건물이어서 옆집 말소리도 간간이 들려오고 아랫집에서 텔레비젼을 보는 소리까지도 낮다랗게 들려오군 한다.몇달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조용하던 집에 오늘 밤은 웬 여자가 왔을까고 소심한 이웃들에서 의심이라도 할까 봐 저으기 두려워났다.
"앞으로 어떻게 할 예산이요?"
자리에 다시 앉으며 용이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글쎄다.다른 일자리를 찾자고 한다.내일 그 친구한테 먼저 전화를 하겠는데 너도 혹시 좋은 일자리가 있는가 알아봐주렴."
"알았소.미안하지만 내일 오전에 지도교수의 강의를 들어야 하기에 난 먼저 자야겠소.냉장고에 김치도 있고 주방에 라면도 있소.그리고 누난 침대에서 자오.난 다다미에서 자겠소."
가게이름과 집주소를 묻고 싶었지만 밤도 깊어가는지라 용이는 상세한 것은 내일 물어보기로 하고 그만 자리에서 물러났다.
"페를 끼쳐서 미안하구나."
"아니요.너무 근심하지 마오.내일 점심에 다시 보기오."
용이는 이불장에서 이불과 요를 꺼내 자리를 펴고 창문을 마주하고 돌아누웠다.
창밖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의 뜨겁던 열기가 조금씩 물러가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요즘 들어밤중이면 교향악연주를 하듯이 집 주위의 풀숲에서귀뚜라미들이 울음소리 향연을 벌이고 있다.
한동안 혼자서 쥬스를 마시며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자니?"
용이는 자는 척 미동도 응대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그녀는 상 우의 쥬스통을 냉장고에 가져다 도로 넣어두고 주방전등을 켜더니 다시 돌아와 방전등을 껐다.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며 컵과 그릇 몇개를 씻고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뒤이어 채 닫지 않은 화장실에서 쏴~하고 물줄기를 내뿜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열어놓은 화장실 공기창을 통해 귀뚜라미들의 울음소리가 더 자지러지게 울려왔다.
문득 이전에 문호형님네 셋집에서 그녀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동생 앞에서 참..."
참,친동생도 아닌 동생 친구 집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다니.원룸이기에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소리가 다 들리는 줄 알 텐데 문이나 꼭 닫으면 좋지 않은가.집주인이 자더라도.
이윽하여 샤워하는 소리도 들려왔다.열려진 문틈 사이로 뜨거운 김이 방안으로 새어나왔다.
에잇!
용이는 이불을 머리까지 끄당겨 쓰고 중국에 있는 형님이 시름놓을 수 있을까 속으로 뇌까렸다.
오늘은 오전에 학교에서 지도교수한테 바칠 레포트를 작성하느라 바빴고 오후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인지 소르르 잠이 몰려왔다.
찌르륵~찌르륵~
귀뚤귀뚤~
저 귀뚜라미들은 언제면 울음을 그치려나.

4.

이튿날 아침,창밖이 훤해지자 용이는 눈을 번쩍 떴다.반사적으로 침대 쪽에 머리를 돌린 순간,저도 모르게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보라색 팬티와 핑크색 브레지어차림에 허연 허벅다리를 이불 밖으로 드러내놓은 그녀의 몸뚱아리가 눈에 띄었다.본의 아니게 그만 그녀의 반나체를 본 용이는 흠칫 놀라 다시 돌아누웠다.괜스레 가슴이 후두둑 뛰기까지 했다.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어떻게 저럴 수가.마치 내가 침대에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처럼.저 여자 원체 저런 여자였던가?
별안간 심상치 않은 예감이 뇌리를 쳐왔다.
저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내가 왜서 불법체류자인 저 여자를 집에 데려왔을까.이웃들에서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엇저녁에수업이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금요일인 오늘은 수업이 없었다.배가 슬슬 아파나기 시작했다.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어쩐담?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소리에 그녀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방으로 들어오기 민망하지 않을까.시계를 보니 6시가 거의 되었다.전차 시발시간도 거의 되어왔다.그래,차라리 전철역 화장실에 들렸다가 전차를 타고 학교로 가자.학교로 가는 길에 캔커피를 사가지고 캠퍼스 벤취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보자.그리고 오후1시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깐 점심때가 거의 되면 집으로 돌아오자.
용이는 가만히 일어나 샤워도 하지 않고 웃옷과 가방을 챙겨가지고 살며시 집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하요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
은행 여직원인 아래집 기무라가 예쁜 강아지를 데리고 아침산보를 나왔다가 큰길에 나선 용이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하요고자이마스."
용이도 맞인사를 하고 바삐 스쳐지나려는데 기무라가 다시 말을 건네왔다.
"오늘은 학교에 일찍 나가네요."
"네.요즘 좀 바빠서요.그럼..."
용이는 전철역을 향해 반달음을 놓았다.집 화장실을 두고 이른아침에 전철역 화장실에 가다니?집주인이 제집 화장실에도 시름놓고 앉아있지 못하다니이게 웬 일이야.
저건 또 뭐야.
점심때가 되어 집부근 골목에 들어서서 2층 베란다를 올려다 보니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던 적삼 두벌과 바지 그리고 팬티가 빨래줄에 널려있었다.
"아침 일찍 나갔더구나.장국을 끓여놓았다.일본 된장은 맛없어도 간장이 맛있기에 장국에 간장을 조금 넣었다.나 지금 친구를 만나러 신쥬꾸(新宿)에 가야 한다.저녁에 올지 안올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서자 그녀는 나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아,정말.너의 집주소와 휴대폰번호를 여기다 적어달라.일단 저 가방은 여기에 두고 간다."
집문을 나가면서 그녀는 휴대폰과 수첩을 핸드백 안에 넣고 용이에게 생긋 웃어보였다.그녀는 오늘따라 심플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곱게 꾸민 곱슬곱슬한 파마머리에 30대 중반 여인으로선 꽤나 이쁘장하다고 곁눈질해보는 남자들도 많으리라 생각하며 용이는 문밖까지 그녀를 바래주었다.
다다미 우에 펴놓았던 이부자리는 이불장에 정연하게 얹혀져있었다.침대에 걸터앉은 용이는 열려진 여행용가방 안에 눈길이 갔다.옷가지와 화장품들 사이에 대한민국여권이 들어있었다.
웬 한국여권일까?
호기심에 여권을 꺼내 펼쳐보았더니 그녀의 사진이 박혀있었다.
아니,한국국적은 언제 취득한 걸까?
층계를 올라오는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오자 용이는 여권을 도로 가방에 넣어두고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황망히 문을 떼고 들어와 잽싸게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여권을 핸드백에 넣어가지고 나왔다.
"무슨 급한 일 있소?"
"물건을 두고가서...저녁에 몇시 들어오니?"
"아홉시 좀 넘어서."
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층계를 다시 내려갔다.
웬간한 여자 아니구나.아니,무서운 여자로구나.
용이는 습관적으로 침대에 가서 누웠다.지그시 눈을 감고 있노라니중국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서시장 부근 저축소에서 몇년간 근무하다가 아들 진우가 소학교에 입학한 후 청도 어느 한국기업 통역으로 연길을 떠난 그녀였다.그녀가 청도에 가기 전 어느 여름날 밤,백화상점 동쪽 어느 양꼬치점에서 영수와 함께 맥주를 마시다가 한국인으로 보이는 멋진 남자와 함께 백마강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면바로 알아보았다.영수는 누나인 줄 모르고 있었기에 이튿날 저녁에 문호형님한테 다른 일로 전화하는 척 하다가 형수님은 요새 잘 보내는가고 전화를 바꿔달라 했더니 청도에서 온 한국사장부부와 오늘도 저녁식사하러 나갔다며 엇저녁에는 새벽 세시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청도에 있다가 한국에 간지 불과 2년도 안되어 한국국적을 취득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침대에서 짙은 향수냄새가 풍겨오기에 그만 일어나려다가 용이는 여행용가방 안을 다시들여다보았다.
저건 무슨 약통인가?
엇!피임약?!
이 녀자가?...
저녁에 아르바이트가 끝나서 집에 돌아오니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다.용이는 먼저 샤워부터 했다.예전의 생활패턴으로 되돌아온듯 기분이 상쾌해졌다.샤워를 끝내고 팬티바람에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마시던 용이는 그녀가 불쑥 집에 뛰어들어올 것 같아 급히 청바지와 적삼을 다시 주어입고 이불장에서 이불과 요를 꺼내 자리를 펴고 누웠다.
전번주부터 매일저녁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를 보려고 텔레비젼을 켰지만 엇저녁에 보지 못해서인지 주인공 남성이 집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울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만 텔레비젼과 방전등을 꺼버리고 현관전등만 켜놓았다.
토요일인내일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다.내일 한학급에 다니는 몇명 일본인 학생들과 전번에 갔던 신쥬꾸 볼링장에서 먼저 볼링시합을 하고 진 팀에서 저녁식사값을치르기로 며칠전에 약속했다.
그녀가 오늘 신쥬꾸에 간다고 하더니 지금 신쥬꾸에서 뭘 하고 있을까?
찌르륵~찌르륵~
귀뚤귀뚤~
창밖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또다시 울려왔다.

5.

얼마나 잤는지 용이는 문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그녀였다.다다미 우에 벗어놓은 손목시계 야광으로 새벽 1시가 넘었음을 알수 있었다.이 시간대면 전차는 진작 끊겼을 터인데 어떻게 집까지 왔을까?
그녀는 방에 들어와 살며시 용이한테 다가와서 용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용이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핸드백과 휴대폰을 침대에 올려놓고 옷을 벗더니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 진동음이 울려왔다.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화를 받았다.
"집에 들어왔어.별일 없으니 근심 말어."
아마 그 한국인 친구라는 여자와 밤늦게까지 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작은 방이라 이불 안에서 주고받는 말소리는 지장없이 들려왔다.
"그래?요며칠은 괜찮아.8천엔이면 콘돔 아니고 안에 해도 돼.그럼 내일 오전부터 정식으로 손님들을 맞을게."
뭐라?!
저 여자가 풍속점에서 일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그럼 히가시가나가와에 있는 집에서 다녔다던 가게도 풍속점과 관련된 그러루한 가게가 아닐까?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어난 용이는 그녀가 먼저 집을 나가기를 기다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가만히 그녀의 뒤를 밟아볼까?아니야,사람들로 붐비는 신쥬꾸에서 미행한다는 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야.그녀가 가부끼쬬에 있다고 해도 그 수두룩한 풍속점들에서 어느 가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그리고 알아내선 또 어쩐단 말인가?
그러다가 오랜만에 문호형님한테 다시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이는 충전기에서 휴대폰을 뽑아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났구나.잘 잤어?"
그녀가 이불 속에서 용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제는 몇시에 들어왔소?"
"친구와 술을 마시다나니 새벽에 들어왔다."
술냄새도 나지 않았는데 술은 웬 술인가.
"갔던 일은 어떻게 됐소?"
"오늘 오전부터 신쥬꾸에 있는 라면집에서 일하게 되었다.그 친구가 소개했다."
"형님한테 좋은 소식을 알리오.나 슈퍼에 갔다올게."
용이는 가방에서 돈지갑을 꺼내가지고 집문을 나왔다.
참 뻔뻔스런 여자로군.라면집에서 일하게 되였다구?가부끼쬬(歌舞伎町) 풍속점이 아니고 라면집?
용이는 조용한 길목 모퉁이에 와서 중국에 전화를 걸었다.
"형수님한테서는 전화가 자주 오오?"
"일본서 바삐 보내는 사람이 어떻게 자주 전화가 오겠나?아,정말.전번주 일요일에 용정에 있는 고모집에 갔다가 진우를 데리고 부대구락부에 올라가봤다.네가 손을 상했던 그 나무를 보니 네가 다시 생각나더구나."
"그랬구만.4중에서 구렝이는 나오지 않았소?"
"하하.시간이 안돼서 부대울안만 진우를 구경시키고 그만 돌아왔다.진우가 요즘 엄마 목소리를 무척 듣고 싶어한다.그리고 장모님의 병세가 위급해졌다.사실 말이지 진우 엄마가 거의 두달이나 련락이 없다.그 약한 몸에 신발공장에서 일한다던데 어디 아프지 않는지,앓지나 않는지 근심스럽구나.전화번호를 알려주면 네가 전화해보고 오늘 저녁 다시 나한테 알려주겠나?"
문호형님이 알려준 전화번호는 휴대폰번호가 아니라 지역번호가 요꼬하마인 집전화번호였다.
집에 들어오자 그녀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침대 우에는 벗어놓은 것인지 바꿔입을 것인지를 알고도 싶지 않은 브레지어와 팬티가 놓여있었다.용이는 여행용가방 안에 그것들을 마구 집어넣고 가방을 출입문 쪽에 팽개치듯 던져버렸다.그리고는 돈지갑에서 5천엔 지페 한장과 천엔 지페 석장을 꺼내 들었다.
이윽하여 목욕타올로 몸을 감싼 그녀가 얼굴이 발그레해서 방에 들어왔다.
"어머,너 이렇게 빨리 왔구나.이걸 어쩌나.금방 샤워했는데...아니,침대 우에 있던 내..."
"저기에 있소."
용이가 가리키는 출입문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대번에 낯색이 변했다.
"용이야.너 웬 일이야?"
용이는 지페 넉장을 침대 위에 확 날려보냈다.
"8천엔이면 노비는 되겠구만."
"뭐?너 혹시 밤에 나의 전화를..."
"어머니 병세가 위급한다는 것도 모르는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소?"
"너 아까 밖에서 형님한테 전화했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오.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소."
"용이야.그럼 사실대로 말해줄게.나 한국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형님 몰래 위조서류를 만들어가지고 청도 사장과 결혼했지만 한국에 와서 시집살이에 시달리고...그 집에서 탈출하려고 같이 일하던 친구와 일본에 온 거다.형님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녀가 두 손을 내밀어 용이의 팔을 잡았다.순간,목욕타올이 다다미 우에 흘러내렸다.
"듣고 싶지 않소."
용이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가방과 웃옷을 가지고 홱 돌아서서 집문을 나왔다.
어디 형님 한사람한테만 미안한 일인가.여기 일본어학교에 유학을 온 조선족 여학생들을 보라.동생이나 조카벌 되는 그애들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는 모습을 보면 부끄럽지 않는가.풍속점에서 일한다는 자체가 창피스럽지도 않는가.그리고 부모님과 어린 자식한테도 미안하지 않는가?
저도 모르게 전철역까지 걸어나온 용이는 고반(交番-역전경찰서)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지금 경찰서에 들어가 신고하면 그녀는 당장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히거나 강제출국 당할 수도 있다.
강제출국?
그럼 그녀는 어느 나라로 가야 하는가.한국여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경찰서 앞에 서있던 용이는 역사로 발길을 돌렸다.계단을 올라가는데 가방에 넣은 휴대폰이 울렸다.그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용이는 호주머니에서 정기권을 꺼내 개찰구 쪽으로 걸어갔다.
오후 3시에 학급 친구들과 볼링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기에 직접 신쥬꾸로 가자.기노구니야(紀伊国屋)서점에서 요즘 새로 나온 소설책 한권을 사가지고 부근 찻집에서 차나 마시며 약속시간까지 소설이나 읽어보자.
전차에 앉은 용이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보았다.음성메세지 도착을 알리는 빨간 불이 쉼없이 반짝거렸다.
"용이야.오전 내로 너의 집에서 나갈 테니 경찰에 신고는 하지 말라.아까 형님한테 전화했다.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부탁하고 싶다.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은 형님한테 절대 비밀로 지켜달라."
그녀의 목소리는 전차 안의 안내방송과 잡음에 뒤섞여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소리처럼 귀찮게 들려왔다.

6.

도꾜 신쥬꾸.일본이라면 도꾜,도꾜라면 신쥬꾸라고 한다.
JR신쥬꾸역으로 몰려드는 전차 안에는 여자들의 엉뎅이를 만지작거리거나 불룩한 바지춤을 고의적으로 여자들의 몸에 가져다대는 치한들도 많다.
동구 출구를 나와 대형전자가게를 지나면 도꾜에서 제일 큰 기노구니야서점이 있고 가부끼쬬에 들어가면 시간과 요금간판을 내건 별의별 풍속점들이 공작새가 제깃을 자랑하듯 알록달록한 불빛을 서로 뽐내고 있다.
볼링장은 가부끼쬬에 있는 극장 남쪽 빌딩 3층에 있었다.시합을 마치고 부근에 있는 일식점에서 식사값을 치르고 밖에 나오니 일곱시가 되었다.
한학급 학생들과 헤어진 용이는 올 때와 다른 방향으로 신쥬꾸역에 가려고 맞은켠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언젠가 한국유학생들과 같이 한국에서 온 할머니가 경영하는 라면집에 왔다간 기억이 떠올라서였다.그 라면집 맞은켠에도 풍속점들이 있었다.이제 저 골목에 이르러 왼쪽으로 굽어들면 라면집이 보인다.라면집을 지나 계속 앞으로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 한참 걸어가다가 다시 큰길을 건너 좀더 가면 신쥬꾸역 동구에 도착한다.
골목을 굽어들었을 때,어느 한 풍속점에서 두 여인이 나오더니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걸어갔다.용이는 머리를 염색한 여인과 그 옆에서 걸어가는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를 한 여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둬걸음도 걷지 못하고 용이는 지뢰를 밟은듯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였다.
오전부터 가게에 나간다더니 이젠 퇴근인가.아니면 손님이 있으면 접대하고 없으면 밖에 나와도 되는 것인가?
그녀들은 불빛이 환한 빌딩 아래에 세워놓은 차한테로 다가갔다.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여인은 그녀와 나이가 비슷해보였다.그녀가 말하던 한국친구 같아 보였다.이윽하여 그녀가 앉은 차는 씽하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비록 그녀의 뒤를 밟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가부끼쬬 풍속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제 형님한테 어떻게 전화를 할까.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그리고 말한대로 집을 나갔을까?
전차에서 내려 집까지 거의 왔을 때 슈퍼 쪽으로 가려던 기무라가 용이를 보고 다가왔다.
"박상.오전에 박상 집에서 한 예쁜 여자가 가방을 들고 나오더니 길옆에 세워놓은 차에 앉아 가더군요.그 여자 누구세요?"
"아,도꾜에 있는 친구 누나입니다.휴일이라 김치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요?난 또 박상의 여친인가 했어요."
"아닙니다."
집에 들어온 용이는 침대시트며 베개수건이며 화장실 목욕타올들을 벗겨서 한데 뭉쳐가지고 길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내다던졌다.그리고는 슈퍼에 들려 타올 몇개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진우엄마한테서 오전에 전화가 왔더라.토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이제 또 공장에 일하러 나간다더라.당분간은 중국에 못온다고 하니 섭섭하더구나.그래도 네가 전화를 한 덕분에 오랜만에 진우엄마 목소리도 들었다."
"미안하오.난 전화를 하지 않았소."
"그래?그럼 진우엄마가 우리가 보고 싶어 오늘 전화를 한 게구나.헌데 너 지금 어디기에 귀뚜라미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나?"
"집이요.귀뚜라미 맞소."
"허허.일본에도 귀뚜라미가 있나?"
진우가 콜록콜록 기침을 깇는 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왔다.
"진우 아프오?"
"감기에 걸렸는지 요새는 밥도 잘 안먹는다.애들은 엄마가 있어야 하는데...언제면 이 전투놀음이 끝나겠는지."
"그럼 후에 다시 전화하겠소."
전화를 끊고 용이는 창가에 멍하니 서있었다.전투놀음이라는 형님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오르며 오른손을 펼쳐보았다.수십년이 지났어도 여덟바늘을 꿰맸던 자리는 지금도 상처로 남아있다.하지만 이제 문호형님한테는 이보다 엄청 더 큰 마음의 상처가 깊게 남게 될 것이리라.비록 지금까지 형님은 모르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부탁하고 싶다.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은 형님한테 절대 비밀로 지켜달라."
형님은 지금도 그녀가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찌르륵~찌르륵~
귀뚤귀뚤~
오늘밤 저 귀뚜라미들의 울음소리는 왜서 여느 때와는 달리 이다지도 구슬프게 들려오는가.

<연변문학>2019년4월호

박명선 프로필:
길림성 용정시 출생.1987년 연변대학 일본어학부 졸업.수필,단편소설 다수 발표.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회원.현재 중국 광주 거주.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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