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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한중작가포럼81-2∥작가작품특집] 허련순의 단편소설 <그 남자의 동굴>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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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11  11: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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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련순(许连顺) 약력: 필명 문현(问玄). 연변대학조선어학부 졸업, 한국광운대학 대학원 석사 수료. 제11기 연변주정치협상회 위원,연변작가협회 전부주석,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여성문인협회회장.장편소설:“바람꽃”,“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잃어버린 밤”,“중국색시”,“춤추는 꼭두”,“안개의 문”.중단편소설집:“우주의 자궁”, “사내많은 녀인”,“유혹”,“바람을 몰고 온 여인”,“그 남자의 동굴”.수상: 전국 소수민족준마상,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동북3성 금호상, 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장백산진흥문학상, 단군문학상, 민족문학상 (한문 3차), 연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장백산모두모아문학상, 민족문화발전공헌상, 18회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상, 한국한송문학상등 *단편소설 <고리>, <하수구에 돌을 던져라> 동북3성 고중교과서에 수록.*단편소설<가출풍파>동북3성 초중교재에 수록.

 

단편소설 ∥ 허련순

그 남자의 동굴

 

어디까지였던가요?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하고있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 할가요? 비, 비이야기를 하셨잖아요. 아, 그래요. 느릿느릿한 말투에 같은 말의 반복, 그런것 때문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긴 호흡의 인내가 필요하였다. 그날 비가 정말 억수로  쏟아졌지요. 왜 그리도 많이 내리던지, 내 생애에 처음으로 내린 큰 비였던 것 같습니다… 그날의 비가 나를 통채로 삼켜버린  셈이죠…그래요. 그때 이미 나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남자는 전율하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  뜨렸다. 그리고 우욱-우욱, 금방이라도 토사물을 쏟아 내려는 듯 몸을 심하게 비틀고 있었다.

왜요, 어디 아프신가요?
나의 다급한 물음에는 무관한 듯, 그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목구멍 깊숙히 신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  나는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청계천  주위는 한가로웠다. 맑은 호수가 여유  있게 흐르고 하얀 아카시아 꽃이 피여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나이가 들어보이는 한 남자가 아카시아 나무사이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기계로 가지런히 깍아주고 있었다. 붕-하는 기계음이 울릴 때마다 풀잎들이  먼지처럼 튀여 오르면서 떫은 풀냄새를 공중에 멍처럼 짙푸게 그려놓고 있었다. 풀냄새가  멍처럼 보였던 것은  아마, 그 남자의 오른쪽 팔목에 문신처럼 나 있는 푸른 기미 때문이였던 것 같다. 어릴적에 나의 왼쪽 다리에도 푸른 기미가 지도처럼 나 있었다. 고르바쵸브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기미처럼 말이다.  모욕을 시킬  때마다 엄마는 그 자리에 비누칠을 두 번씩을 하면서 . 이것은 엄마 마음의 멍이라는데 네가 하필이면 엄마의 아픔을 가지고 나온단 말이여? 하고 푸념을 하군  하였다. 그뒤부터 나는 내 몸의 푸른멍을 볼  때마다 자식의  몸에 새길 만큼 아팠던 엄마 마음의 상처는 무엇이였을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미안해요. 어디까지였던가요?
남자는 진통이 멎은 듯  흐트러진 옷 섶을 바로 잡고 있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와이샤쯔 속의 푸른 기미가 들어났다. 그것이  남자의 엄마가 그 남자에게 남겨준 상처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남자의 불행은 그 기미 때문이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운명은 육신을 닮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손금도 보고 관상도 보는것이고.

어디까지였던가요?
남자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 이야기라고 말 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만 하기로 하였다. 더 이상 비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벌써 나흘째다. 남자는 비에 대한 이야기만  시작하면 꼭 발작적인 통증을 호소하며 얘기를  중단하군 하였다. 그렇게 힘든 얘기를 꼭 할 필요가 있을가. 보아하니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도 남자는 꼭 할  얘기가 있는 듯 매일 나를 이 강역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니면 할  얘기도 없으면서 시간만 끌자는 심사인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나를 붙잡고 시간을 벌려고 늘어 질  만한 이유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 남은게 시간밖에 없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가 고심하는  남자일지는 모르지만  나의 입장은 달랐다. 한달 비자로 한국에 체류  해 있는 처지라 그 남자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되도록이면 빨리 취재를 마치고 싶었다.
이쯤, 나는 이 남자에 대한 취재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형록음기를 끄고 빽에 넣으면서 자리에서 일어 났다. 사실, 벌써부터 이 남자를 다시 만나지 말아야 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왜요? 가실려구요?
남자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보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리 눈치는 빠른지 바스락 소리에도 금방 눈치를 알아차린다.
오늘은 이만 하고 싶습니다.
사실 시작한 것도 없는데 이만 하고싶다는 말 자체도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달리 둘러  댈 이유가 없어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제 얘기, 안들어주실려구요?... 들어야 자서전을 쓰실  수 있을  거아니예요?
그의 말투에는 서운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며칠째 나한테 해준 얘기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괜히 시간만 랑비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그와 만났지만  그의 휠처어를 열심히 밀고 다니는 일밖에 없었다. 외국에 와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다. 심히 불편하고 짜증이 났고 그러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남자가 고개를 힘없이 가슴앞으로 깊게 떨어 뜨리며 뭔가에 사로잡힌 듯 혼자말처럼 나직히 말했다.
저와 함께 있어주면 안되겠어요?
덫에 걸린 새의 소리처럼  애처롭고 가냘펐다. 휠처어의 팔걸이에 올려진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그 옆에 서  있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걸가? 날 붙잡고 도대체 뭘하자고 하는 것일가? 아니 아니지. 내가 도대체 이 남자한테서 뭘 바라고 이러고 있는걸가? 이 남자한테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내가 아닌가.

그날,
나는 종로구에 있는 어느 직업소개소의 알선으로  마장동 초원 까페에서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그 남자를 만났다.  해빛이라곤 단 한번도 쪼인적이 없어보이는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테가 굵은 검정색 안경을 끼고 있었다. 소개소에서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자서선을 써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원고료 2천만원을 지불 할 수 있다는 얘기만 하였고 구체적인 계약 같은 건 만나서 당사자들끼리 합의 하라고 하였다. 꼭 집필자가 여성이여야 만 된다는 부가 조건이 께림직  했던 건 사실이지만 나로서는 굳이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2천만원의 원고료는 중국 사람인 나한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옆에는 남자보다 훨씬  덩지가 큰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깨가 넓고 등 짝이 두꺼워 바위를 엎어놓은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신경은 그 여자한테 가 있었다. 출판 계약을 여러번 해 보았지만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까다로웠다. 선입견인지는 모르지만 내 경험으로는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쉽고 편안하였다. 그래서인지, 계약 할 떄 여자가 끼이면 괜히 신경이 씌였다. 

부인일까?
남자하고 나이는 엇비슷한데 분위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염색을 많이 한 듯 유달리 검고  뻣뻣한 머리카락을  앞이마에 산검불처럼 드리워 놓았는데도  넓은  이마를 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여자로 잘못 태여 난 남자 같았다. 남자 같은 여자는 카페 안 여기 저기를 산만하게 두리벙거렸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말없이 검은 안경 넘어로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 카메라에 찍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 챘을  때와 같은 불쾌감이 통증처럼 짧게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위속에서 역류하는 음식물의 쉬고 씁쓰레한 느낌처럼 불쾌하였다.  나는  앞에 놓인 찻 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면서 남자의 시선을 피하였다. 한참후 찻 잔을 도로 탁자에 놓고 손수건으로 입가의 물기를 닦고 자세를 편안하게 고치면서 이젠 보지 않겠지, 하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남자는 여전히  내 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이런 무례라니, 하르르 얼굴이 뜨거워졌다. 물론, 자기의 자서전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을 하고 있는  것일 테지만  대 놓고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는 어딘가 모욕감이 들기도 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굳이 꼭 안경을 벗고  인사를 해야 된다는 규정 같은 건 없지만 눈속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검은  안경을 벗지 않고 무례하게 바라보는 그의 행동은 거북스러웠다. 거액을 주고 자서전을  맞기는 사람치고는 어딘가  성의가 없어보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고  싶었다. 눈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따뜻한 사람인지, 아니면 냉정한 사람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남자의 눈을 볼 수 없으니 마주 앉아 있지만 창문안에 숨어 있는 사람처럼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봉순씨!
남자가 갑자기 여자를  불렀다.  그 덩지가 큰 여자의 이름은  봉순인 모양이였다.
여자가  무표정하게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봉순씬 갔다가 나중에 내가 전화를 다시 할테니 그때  와요.
여자는 차라리 잘됐다는 듯 홀가분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남자의 자서전에 대하여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뭐야? 이 여자는 남자의 자서전 때문에 나온 게 아니였나?  그럼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굴가?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남자보다도 여자한테 더 궁금해 하고 있었다.

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자가 떠나고 나서 남자가 처음 한 말이다.
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리가? 아무리 검은 안경을 썼다하지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남자의 눈은 상대의 눈빛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나는 믿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상대의 표정에 그리 민감하고  정확히 반응  할  수 있겠는가.
 사실입니다. 눈 뜬 소경이랍니다.
남자는 침울하게 웃고  있었다. 빈틈없이 차가운 미소였다. 그것은 인생의 파멸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흔히 갖는 자학적인 냉소인  듯 치밀하고 단단하였다.
아, 그래요.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안도나 쾌감이 식욕처럼 빠르게 전신을  가르고 지나갔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등허리에   힘을 빼면서 나는 느슨하게 몸을 풀었다.  앞을 보지 못한다니 차라리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앞에서 긴장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런 심사를 알아차리기나 한듯 남자가 예민하게  내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웬지 째려보고 있는 것 같이 날카로웠다. 결국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안경  넘어의 눈은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되여 있는 감시  카메라처럼 조심스럽고 거슬렸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보지 못하는 그의 눈을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그가 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두려웠다.  그리하여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그의 눈에 대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계약서에 싸인을 하는 남자의 손은 창백했다. 손등에 튀여나온 파란 혈관이 마치 그의 육신에서  분리되고 싶은 듯 아슬하게 돌기되여  있었다. 그는 싸인볼펜을 나에게 넘겨주면서 살짝 나의 손을 스쳤다. 차갑고 딱딱한 느낌, 아픔에 절은  비릿함이  확 풍겨왔다. 앞 이가 빠졌을  때 혀로 느꼈던 그 허전하고 비릿한 핏 냄새와 비슷한 냄새라고나 할가. 남자는 계약서를 쓴 것 만으로도 힘든지 몸을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고 한참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었던 부탁이였다. 여기까지 나왔지만 실은 그가 2천만원 원고료를 준다는 약속을 지킬지 은근히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떠나기전, 남자는 양복 포케트에 손을 넣더니 수표가 들어있는 하얀 봉투를 내 앞에 쓱 밀어 놓았다.
삼백만원입니다. 계약금으로 받으시고 자서전을 다 쓰시면 약속대로 나머지를 마저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정확하고 또박또박 했다.

이외였다.
이튼날, 남자는 나에게 어려운 제의를 하였다. 자서전이 완성되는  동안,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가까이에 있으면 자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시간을 충분히 활용  할 수 있고 교통비나 주숙비를 절약하는 차원에서도 효율적이라는 것이 남자의 이유였다. 일언지하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계약을 취소한다고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웠다.  솔직히 2천만원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자서전을 써주고 기껏 만원을 받았는데 2천만원은 인민페 16만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니, 자존심 따위로 일을 그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와 이런 방식으로 얽히는건  싫었다. 나는 그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면서 거절하는 방법을 생각하느라고 한참이나 머리를 굴렸다.
돈주고 거처를 얻어야 할거면 이왕이면 우리집에 빈방이 있는데 편리하지 않겠어요? 그는 빈방을 거론하면서 나한테 같이 있기를 원했다. 우선 나는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전 이미 거처를 정했습니다. 
아, 그래요.
남자는 말할 때마다 아, 하는 감탄사를 자주 썼다.
근데 지금 사는데는 어딘데요?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나의 잠자리에 엄청 관심이 있는 듯 싶었다.
안암동, 바로 고려대학 근처입니다.
아, 그랬군요. 고려대  근처라면 집 세가 꽤 비쌀텐데요?
보증금 없이 32만원 월셉니다.
살긴 괜찮으십니까.
 작기는  해도 침실도 있고 주방도 있고 화장실도 딸리고  있을건 다 있습니다.
아, 그래요?
안타까운 듯 두손을 맞잡고 비비는 그의 손안에서 불에 대한 나무의 욕망처럼 마른 삭정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다행히,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나의 기거문제로 자서전 계약이 무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취재를 위하여 매일  아침,  첫날 만났던 마장동 까페에 나갔고 거기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봉순이라는 여자가  휠처어에 태여가지고  오군하였다. 여자는 남자를 데려오고 데려가는 일만 하고 이야기에 끼이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까페에서 차 한잔씩 마시고 얘기를 시작  할가하면 남자는 기어이  강역을 거닐자고 한다. 한 곳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였다. 이리하여  나는 걷고 남자는 휠처어를 타고 우리는 청계천 유보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바퀴가 어디에 걸리면 내가 휠처어를 밀기도 하였다. 그도 검은 안경을 끼고 나도 검은 안경을 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군  했다. 어떤 이들은 지나간 다음에도 다시 뒤 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휠체어에서 조금 떨어져 걸었다. 남자가 짓궂게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무슨 생각을 할가요?
다정한 부부라고 생각 할 거예요.
그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를 탄 남자와 나란히 걷고 있는 검은 안경을 낀 여자를 사람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앞을 보지 못하는 부부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말도 아마 그런 생각에서 한 말인 것 같기도 하였다. 기분이 좋은건 아니였지만 상관  없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 질 것도 아니고 자서전이 끝나면 바로 이 곳을 떠나게 될 것이니깐 말이다. 나는 그저 남자가 아무말이든  되도록이면 많은 말을 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극력 꺼렸다.  그러다보니 어떤 날에는 별로 말 몇 마디 얻어 듣지 못하고 종아리가 붓도록 그냥 걷기만 하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
차츰, 그가 왜 거금을 내고 자서전을 쓸려고 하는  것일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서전을  쓸만한 애기를 들려주는 일도 없으면서 도대체 왜 자서전을 쓰겠다고 사람을 찾았는지, 실제로 자서전을 쓸 만큼 거창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며칠 째 얻어 들은 것은 젊었을 때 사고를 당하고 두눈이 실명되고 하반신도 마비되여 휠처어를 타지 않으면 걸을 수 없다는 것이 전부였다.  가족은 있는지, 그 남자 같은 여자는 누군지, 그리고 자서전을 왜 쓸려고 하는지 그런 것을 남자는 말해주지 않았다. 혹시 자서전을 핑계대고 여자를 만나고 싶은건 아닌지, 여자작가만 고집했다는  직업 소개소 원장의 말로 미루어 보면 전혀 그런 욕심이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시간만 질질 끄는 남자의 의중은 아무래도 순수하지 만은 않았다. 
 
뭘가?
하지만 도대체 그것이 뭔지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나의 관심사는 원고료에 있을 뿐이였다. 원고료를 받기 위하여서는 어떤 방법으로  든지 자서전은 씌여져야 하며 어떤 이유에서 든지 이 일이 중지되여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며칠후, 어떻게 하면 남자와의  취재를 순리롭게 이끌어 낼가 고심하다가 나는  질문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한테 맞겨서 말하기 싶은 대로 말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남자를 만나기 전에 집에서 질문을  꼼꼼하게 만들어가지고 나갔다. 하나 하나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면 남자는 어쩔수없이 대답 할 것이고 나는 의외의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마장동 청계천 하류을 한참 거닐다가 내가 준비해  온 첫번째 질문을 물을려고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자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요, 앞에 무궁화꽃이 피여있죠?
목소리가 다급하고 절실했다.
어디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웃거려도  무궁화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디에 무궁화 꽃이 피였습니까?
조오 - 앞에 있잖아요.!
남자가 손짓하는  쪽을 자세히 보니,  빽빽히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그 속에  여린 분홍빛 무궁화꽃이 있는 듯 없는듯 다소곳이 피여있었다. 잎새에 가리여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눈으로만 봅니까? 냄새로도 볼 수 있답니다.
아, 그렇겠네요..
나는 냄새가  빛보다 빠른 것을 처음 알았다.
여기, 정자가 있을텐데 거기서 잠깐 앉았다 갑시다.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서 그는 또 정자에 앉고 싶어하였다. 다 같이 앉아 있는 것인데 그 느낌은 다른 것일가?  그것이 어떻게 다를가를 나는 알지 못한 채 궁금해 하며 정자쪽으로 휠체어를  밀었다. 바로 무궁화꽃이 피여 있는 곳에서 얼마 안 되는 곳에 둥군 버섯 모양의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남자는 익숙한 솜씨로 천천히 휠처어를  벤치곁으로 바짝 대여 놓았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휠처의 손잡이를 짚으면서 엉덩이를 건뜩 들어 벤취에 옮겨  놓았다.  인형의 다리를 끌어 앉듯 남자가 힘없이 건등거리는 두 다리를 안으로 당겨다 놓자 마치 올방자를 튼듯 보였다. 나는 남자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재빨리 록음기부터  꺼냈다. 나는 그랬다. 되도록이면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우리는 지금 산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를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남자는 그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녹음기를 치우고 애기하면 안 됩니까?
왜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그가 내눈을 볼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때 중년의 여자들이 하르르 웃으며 지나간다. 다들 가벼운 추리닝을 입은 걸로 보아서 운동하려 나온 모양이였다. 남자가 갑자기 자기 손을 나의 손위에 얹었다. 홀씨를 다 털어낸 민들레 같이 부피가 느껴지지 않았다. 헐거웠다. 지나가던 여자들 중 한 사람이 흘끔거린다.  나는 그것이 신경이 씌였다.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고 하자 그는 도리여 꽉 잡아 챈다. 그의 손에는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남자가 결연한 의지를 선포하듯 이외로 크게 말했다. 지나가던 여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우리쪽을 뒤 돌아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어색했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 손을 놓으시고…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잡아 채 듯 말했다.
손을 잡지 않으면 말을 못 할 것 같아서요…
그는 자기 말이 타인에게 스며들지 않고 헛 된 메아리로 자신한테로 되돌아 가는 것이 두려운 듯  더욱 으스러지게  내 손을 잡았다.
사실, 제가 뭘 자서전이라도 쓸 인물이나 됩니까?
그럴줄을 알았다. 그가 자서전을 쓸 인물도 아니고 자서전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는 사람도 아니란 것을 벌써 눈치 챘고 언젠가는 이런 말을 할 것이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간절히, 아니 격렬하게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 목소리가 다소 격하게 튕겨 나갔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설마 자서전을 안 쓴단 애기는 아니죠?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요 며칠 잘 생각해 봤는데,  자서전을 안 쓸랍니다.
왜요?
뭐, 자서전이라고 쓸만한 사연이 있어야 쓰죠.
야구공이 갑자기 날아와 가슴을 치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석연치 않은 게임이었다 쉽게 일이 이루어진다 했지만 이리도 어처구니 없이  깨여지리라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발끈 했다.
지금 장난 합니까?
장난이 아닙니다.
장난이 아니라구요? 그럼 계약서는 뭡니까? 그 동안의 저의 노력은 뭐가 되구요.
계약서의 약속은 지킬겁니다. 꼭 말입니다.
무순 소린지….
나는 바보처럼 손을 잡힌 채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마치 몸속에 등불이라도 켜진  것 처럼 남자의 얼굴은  서서히 빛이 나고 있었다. 저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걸가? 얼굴에 빛을 담고서 남자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었다. 계약서의 약속은 지킨다면서 자서전은 쓰지 않는거로 하겠다고 한다. 그럼 자서전은 쓰지 않지만 원고료를 주겠다는 얘긴가.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한 두 푼도 아닌 2천만원을 그냥 준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럼 그게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되었다.
자서전은 원래부터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였습니다.
그는 후 - 큰 숨을 몰아쉬면서 그 동안의 고민을 털어내 듯 가볍게 말했다. 나는 그가 괴변을 부린다고 생각하였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왜 나를 끌어들여 한 주도 넘게 이리 저리 끌고 다녔단 말인가. 사람을 뭘로 보고…나는  놀림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미안해요. 미안한데 암튼 전 자서전을 쓰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었어요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갑자기 그의 검은 안경을 벗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안경뒤에 숨은 그의 눈이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얇지만 질긴 창호지 같은 그의 하얀 피부도 거칠게  찔러보고 싶었다. 그는 여전히 할 얘기가 많이 남은 듯  자못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는 남자가 어처구니 없었다.
이제, 이 손을 놓으시죠.
나는 조금 거칠게 말했다.
이 손을 놓으면 내가 말을 못 할 것 같아서요.
 물이 가득한  세수대야의 물을 쏟히지 않을려고 꽉 잡고 있듯이  남자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놓기만 하면 곧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그 위태로움을 간신히 내 손에 의지하여 지탱하는 듯 했다.
다 얘기 할게요. 이제 다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마음이 편해 졌습니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모두다 쏟아놓을 준비를 서서히 하는양 몸을 가다듬었다. 목을 찔륵거리면서 바튼 침을 삼키기도 하였다. 나는 초조히 그러는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이리도 뜸을 들이는 걸가?
이때,  한줄기의 바람이 발밑을 핥으며 회오리처럼 지나간다.  희미한 비 내음이 코끝을 축축하게 했다. 비가 올 모양입니다. 남자가 먼저 비 냄새를 알아차리고 서둘렀다. 그는 비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큰 비로 하여 사고를 냈던 반사적인 반응인  모양이었다. 그는 어딘가에 다급히 전화를 하였다. 금방 나에게 무언가 다 얘기 할 거라던  말은 이미 잊은 듯 하였다.  십분도 안되여 남자  같은 여자가 까만 승용차를 몰고 왔다. 여자는  말없이 남자를 안아 차 뒤자석에 내리워 놓고 휠처어는 접어서 차 뒤꽁무니에 실었다.  나는  여자의 옆 좌석에 앉았다.
이 여자는 도대체 남자와 어떤 사일가?
별로 다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남자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신체적 접촉 같은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일반 사이는 아닌듯  느껴졌다. 퍼줄맞추기를 하듯 나는 여자의 신분을 알아맞추려고 고심했다. 그러는 동안  차가  마장동 지하철 역 부근까지 왔다. 갑자기 발길 질 하듯  비 방울이 드드득 차체를 거세게 때리기 시작 했다.  누기진 비릿한 냄새가 차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남자를 처음에 보았을 때 느꼈던 그 냄새와 비슷했다. 그러고보면 남자의 냄새는 비 냄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아빠트 앞에서  차를 세우고 재빨리  차 뒷 쪽에서 휠체어를 내리웠다. 그리고 남자를 애기처럼 건뜩 들어서 휠체어에 태웠다. 가벼운 보따리를  옮기듯  여자의 움직은 건들건들하여 전혀 힘들어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게 자연스러움이 몸에 배여있었다.  왜 남자가 덩지가 큰 남자 같은 여자를 곁에 두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봉순씨, 내일은 좀 더 일찍 와줘요..
왜인지, 여자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사람처럼 머리를 수긋이 하고 자리를 떴다. 여자가 떠나자 남자는 나에게 차 한잔 하자고 했다. 나는 잠간 망설이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자서전을 그만 둔다고 한 남자의 저의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 쏟아놓는다던 그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듣고 싶기도 하였다. 남자는 휠처어를 엘리베이터 가까이에 대고 9층단추를 누르면서 말했다.
전, 혼자 삽니다.
그 여자는요?
그 여자라니요? 누구말입니까?
금방 오셨던…
아, 봉순씨요?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도우미입니다. 제가 외출 할 때마다 운전을 해줍니다.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일층에서 9층까지 올라가는 승강기의 기계음을 들으며 나는 초조했다. 내가 보게 될 남자의 집은 어떨가? 남자가 사는 모습이 궁금해서가 아니였다.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보아버리는 그런 불편하고 난감한 상황에 놓일가봐 겁이 났다.  남자가 사는 집은 이외였다. 바닥에는 종이  한 장도 널려있지  않고 모든 물건이 제 자리에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나의 입에서 흐느낌 같은 탄식이 자그만하게 흘러나갔다.  남자가 눈치 채고 물건이  제 자리에 놓여야지 함부로 놓이면 다음에 찾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철저하고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물건을 제 자리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했다.
거실의 큰 유리창으로 끄느름한 앞 뜰이 내려다  보였다. 빗 줄기가 거세게 쏟아져 내리고 나무들이 쉼없이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남자는 실내에서도 휠처어를 타고 다녔다. 다만 밖에서 타는 휠체어와 실내에서 타는 휠체어는 분리되여 있었다.  그는 휠처어를 타고  이 방 저 방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였다. 처음에는 무언가 찾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괜히  두 세 번씩 갔던데 또 가고 왔던데 또 오고 하는품이 무슨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 한없이 어둡게 이그러져 있어 즐거운 게임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똑 같은 움직임의 반복을 보면서 나는 불안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정서불안입니다.
늘 그랬어요?
비만 오면.
뭘 도와드릴가요?
남자가 잠간 망설이는 듯 싶더니 정자나무 아래서처럼 나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그의 손은 금방 물에서 건진듯  젖어 있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해야 만 살 것 같아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사시나무 떨 듯 온 몸을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많이 왔어요. 비로 가득찬 웅덩이에 하루밤 동안 혼자 누워 있었는데 아무리 불러도 누구도 오지 않더군요…그 뒤로 전 늘 혼자였어요. 남자는 비오는 날의 사고를 잊지 못 했고 비만 오면 어김없이 발작을 일으키군  하였다. 그는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남자는 매여 달리 듯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움켜 잡고 놓지 않았다. 깊은 굴속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아니 깊은 굴속에서 밖으로 나오려는 필사적인 노력인 듯 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더 안으로 옥죄여 들었다. 내가 동아줄인  듯이 말이다.

차츰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증세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왜 계약을 어길려고하느냐고 따질만한 상황은  아닌 듯 싶었다. 차라리 이쯤해서 끝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계약금으로 받은 3백만원만 되  돌리면 아쉽지만 모든 일은 없었던  일처럼 깨긋이 끝날 것이다. 남자는  휠체어에 등을 깊게 말고  힘없이 까부러져 있었다. 잠이 든 모양이였다. 집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한  마리의 달팽이를 보는 것 같았다. 커다란 아빠트안에 있는 남자의 집은 오히려 휠체어이고 아빠트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거대한 괴물인 듯 했다. 나는 거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끝으로  도장을 찍듯 살금살금 출입문 쪽으로 가는데 휠체어가 움직이는 소리가 삐익 거렸다. 
왜요? 가시게요?
남자의 목소리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처럼 처연하게 들려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늦었어요. 지금 나가지 않으면 지하철을 놓치게 될 것 같아서요.
웬지 나는 죄를 짓고 도망가다 들킨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구차한 변명처럼 들렸다.  죄의식이라니? 이건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분명히 그한테 내가 빚 진건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 나는 그한테서 떠나는 것을 미안해 하고 있었다. 
이미 지하철은 끊겼어요.
남자는 휠체어에서 몸을 던지듯 철썩 땅바닥에 굴러내렸다.
 제발, 가지말아주세요…혼자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요…
그는 금방 톱으로 짤라낸  한토막의 나무처럼 내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비에 젖은 토밥 냄새가 풍기는 듯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막연히 서 있었다. 남자의 말에 놀란 것은 아니였다. 앞에 놓인 현실이 딱하고 안타까울  뿐이였다. 이 남자와 함께 빨아 헹굴 어떤 끈적한 현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를  외면하고 싶은 내  마음 한편에 벌써 또 하나의 다른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음에 놀라웠다. 이러다  남자의 시간에 애매하게 섞여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굴레에  함께 갇힐가봐 두려웠다. 남자는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줄줄 기여서 출입문께로 바삐 가더니 나의 구두를  신발장에 가지런히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신발장 문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밀어내고 신발장 문을 열 수 없었다.

하얀,
밤이였다. 남자의 빈방에서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멀건히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충집에서 비치는 불빛이 집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 아빠트는 내가 사고를 당한 대가로 받은 집이예요. 그러니깐 내 두 다리와, 두 눈과 바꾼거지요. 남자의 그 말을 듣지 않았어도  이곳에서 나는 편히  잠들  수 있었을지 모른다.  방안의 천장이며 창턱이며 옷장위이며 지어 누워있는 침대에까지 남자의 눈과 다리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  종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잡 생각을 쫓으려고 백을 거꾸로 세고 무궁화꽃이 피였습니다를 백번도 넘게 외워보아도 소용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얗게 날을 새며 다섯시 반에 출발하는 새벽 첫 지하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만 되면 소리없이 이곳을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맞은 쪽 남자의 방에서 기척이 들렸다.  방문이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어 옷섶이 살살 이끌리 듯 조심스러운  휠체어 소리가 내 방 문앞으로 스륵스륵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나는 귀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잔뜩 긴장되여 숨을 죽이고 나는 문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발, 이것이 환각이라고 말 할 수 있기를 나는 빌었다. 하지만 기어이 찰칵, 도어가 비틀리는 쇠붙이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아, 이런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라니, 이제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 올  것이다.  반토막으로 잘린  나무 토막이 눈앞에 서있다. 눕지 않고 서있는 나무토막이 나의 침대가로 움찔움찔 움직여 오고  있었다. 나무토막이 도대체 뭘 어쩔려고… 아까, 그 신발장 문을 열지 못한 것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리고 우악! 토를 하고 싶어 미칠 것 같다.  그지없이  비참하고 참담하다.  서서히 나는 한마리 곤충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무속을 파먹던  하얀 애벌레로 말이다.
찰칵! 쇠소리가 난뒤, 이윽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바튼 침을 삼켰다.    아찔한 시간이 힘들게 지난후,  다시 찰칵하는 쇠소리의 마찰음이 날카롭게 들렸다. 그것은  비틀어졌던 도어가 다시 제자리에 놓이는 소리였다. 그리고 발끝으로 저며 디디듯 조심스러운 휠체어의 움직임이  출입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휠체어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듯 가볍게 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신발장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갈려고 신발장을 여는걸가? 하지만 출입문소리가 들리지 않는것으로 보아 밖으로 나가는 건 같지 않았다. 망설이는 듯한 고요가 지난 한참후, 휠체어는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내면서 다시 주방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주방쪽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딸까닥 딸까닥 자그만하게 들려왔다. 물소리가 나고 이어 가스불 켜는 소리도 들리고 얼마 안되여 물이 끓는 소리가 부지직 거리더니, 구수한 멸치  국물  냄새가 문틈으로 기여 들어와 어느새  위를 어르만지고 있었다.   짙은 멸치국 냄새를 맡으며  나는 살풋이 잠이 들었다.

멸치 국물은 시원하고 구수했다. 밤새 자지못해 가라앉았던 육신이 보시시 털고 일어나는 듯 산뜻하고 가뿐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끓였는데 국물이 이렇게 시원한가요? 비린내도 전혀 안나는군요! 나는 다소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러는 내 목소리가 조금 수다스럽게 들렸다. 둘만의 공간에서의 침묵을  견딜 수 없어서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것을 남자도 눈치를 채는 듯 입가에 가늘게 미소를 띄었다. 
멸치 국물은 손이 적게 가면 맛이 금새 달라지죠…. 적당히 끓이다가 비린내 땜에 멜치를 건져내야 해요…. 그 시간을 잘 맞추는것이 관건이죠.
남자는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당히라면 대개 얼마동안을 얘기하시는거죠?
아, 저는 시간을 두고 애기한게 아닙니다… 국물이 울어나면서 풍기는 향을 맡아보고 맞추는거죠.
그는 보지 못하지만 냄새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음식은 그렇다치고 상대의 마음속은 어떻게 꿰뚫어 보는지. 냄새를 맡는 것도 아니고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게 궁금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알아내죠? 냄새도 맡을 수 없을텐데…
아, 그건 가만히 앉아서 마주 보면 다 보입니다.
눈을 감고도 다 보인다구요?
예!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게 있지요..
나는 눈을 감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보이는데요!
하하하. 눈으로 볼려고 하지말고 마음으로 읽어야죠.
오래간만에 그가 소리내여 웃었다. 가슴을 적시는 듯 그의 목소리는 물기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모든  것은 물과 연관되여 있는 듯 했다. 냄새도 목소리도 그리고 마음에도 깊이 물기가 차 있었다.
오늘 점심엔 제가 당귀와 감초를  듬뿍 넣고 백숙을 끓여 줄게요. 그  동안  제가  너무 피곤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있고…
그건….
거절하지 마세요.
남자가 단호하게 나의 말을 짤랐다. 나는 조금씩 그한테 끌려들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지난밤의  궁금증이 되살아  났다.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으면 그 시간에 자지 않고 남자의 기척을 엿듣고 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인데 틀림없이 남자가 어색해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도 괜찮을 듯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웬지, 하루 밤을 자고나니, 남자가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남자는 전날과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다.
새벽에  자다 말고  신발장문을 열어보시는 것 같았는데 왜 그러셨어요?
오, 그거요?  알고 있었군요..
그는 쑥스럽게  웃으면서 휠체어를 움직여 싱크대 있는 쪽으로 다가  갔다. 대답을 피하고 싶은 모양이였다. 그는 헛 손짓  하나 없이  정확히 수도 꼭지를 열고 흐르는 물에 빈 그릇을 씻었다. 그의 움직임은  외워든 것처럼 가지런하고  거침없었다.
제가 설거질을 할게요.
나는 그의 손에서 채 씻기지 않은 그릇을 가로채면서 다그쳤다.
저한테 말 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니요, 얘기 하지 못 할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럼, 왜 대답하지 못하는가요?
사실, 자다가 문뜩 허작가님이 집으로 가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작가님 방문을 열고 확인을 하려다가 오해하실가 봐 신발장의 신이 있나 확인 해 본겁니다.
아연함속에서 헤아리기 힘든 긴 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밤새 느꼈던 혐오감과 두려움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었다. 얼굴에  벌레가 기여가는 듯 간질거렸다. 

남자가,
식사를 마치고   나에게 말했다.
작가님은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수없이 이 안경을 벗기고 싶었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몸으로 보았죠. 전 온 몸이 눈이랍니다. 
몸으로 느낀다는 얘긴  것 같았다.
벗기지 않아도 스스로 벗었습니다. 자, 보세요. 이것이 저의 원 모습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안경을 벗었다. 나는 잠깐 할 말을 잊고 안경을 벗은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반듯하고 굵은 눈섭이 약간 꺼져들어간 듯한 그의 눈을 더욱 깊어 보이게 하였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망울은  보이지 않았다. 아, 저도몰래 잇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갔다. 검은 안경속 뒤는 철저히 비여 있었다. 빛도, 빛이 타다 남은 잿더미도 아무것도 없이 헐렁하게 비여  있었다. 가을의 빈 들녘을 보는 듯한 쓸쓸함이 해일처럼 마음을 쓸어뜨렸다. 어쩔 수 없이 보아버린 검은 안경속의 그 공허함과 허전함, 그것은 남자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하나의  타인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차라리  안경을  쓰는것이,  적어도 나한테는  남자의 원모습인  듯 익숙했고  자연스러웠다. 그리하여  나는 빠르게 말했다.
안경을 쓰세요!
아니, 오늘은 안쓰고 싶습니다. 안경을 쓰지 않고 작가님과 애기 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다.  남자가 눈망울이 없는 눈을 숨뻑거렸다. 나는 그 눈을 바라 볼 수 없었다. 마주 본다면 결례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시선을 깔고 고개를 숙였다.
자서전을 쓰지 않으신다면서 무슨 할  얘기가 있겠어요.
자서전과는 상관없이 작가님한테 꼭 드릴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아무 의욕도 느끼지 못했다.  자서전과 상관없으면 어떤 얘기도 나한테는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간절하게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비,
그날, 비만 오지 않았더라도 내가 지하철 공사장의 웅덩이속에 처 박히는 일은  없었겠죠… 발밑이 유달히 미끄럽더군요. 조심해야지, 하는 순간에 내 발은 벌써 허공을 딛고 있었습니다. 깊은 굴속으로 추락을 하면서 나는 쏴- 하는 차거운 바람 소리를 들었어요. 아니, 파도소리였던 것 같기도해요. 누구는 그게 죽음의 소리였을거라고 하더군요.  깊고깊은 굴속으로 한정없이 빠져드는 듯한 아득함, 그리고 육신이 부서지는 듯한 자지러움과 아찔함, 그 굴속은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 만큼이나 길고 어둡고 습하고 후줄근했어요….두려웠어요.  빛이란 사라질 때, 그리도 야박하게 흔적도 없이 말끔히 자신의 존재를 거둬 가더군요. 절대적인 어둠, 이게 죽음이라는거구나….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서서히 의식을 놓아버렸지요. …

타인,
또 하나의 타인이 나와 함께 굴속에 있었어요.. 굴속에 떨어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빛이라곤 없는 캄캄한 굴속에 누워 있더군요. 쏴쏴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만 들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여기가 어딘가 싶어 손으로 주위를 더듬는데 바로 나의 코앞에  물큰 하고 손에 닿는 것이 있어서 자세히 만져보니  사람의 다리더군요. 나 말고도 또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굴속에 있었구나 싶어서  얼마나 반갑고 위로가 되던지, 두려움이 조금 가시더군요.. 네놈도 나만큼 재수없고 한심한 놈이구나 싶어서 그놈을 건드렸죠. 여보세요! 정신차려요.. 우리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이 곳을 나가야 돼요. 안 그러면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요…이보세요. 내말 안 들려요?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 사람은 꼼짝 하지 않더군요. 죽었나? 나는 그가 숨이 있나  없나 확인을 할려고 머리 쪽을 더듬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상반신이 없더라구요. 금새 머리카락이 쭈빗 일어서더군요. 상반신이 잘린 그 사람의 하신이 나의 코앞에 있는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의 하반신을 밀어내고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단 생각으로 이를 사려물고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내몸은 천근만근 되는 듯 도무지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윗 몸은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데 아래 도리가 꼼짝도 안 하는거예요. 그래서 내  다리가 어떻게 되였나  위로부터 아래를 더듬기  시작했는데 나의 다리가 바로  내가 붙잡고 흔들던 그 다리더군요.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다리가 바로 내 코앞에 접혀져 있었어요. 나의 허리가 부러지면서 상신과 하신이 접혀진  거였어요. 하신은 이미 마비되여 감각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타인인  줄 착각 한거구요.  이미 몸 따로 다리 따로 두 동강이 된 나를 보고 나는 다시 까무러쳤지요. 얼마나 지났는지…깨여나 보니 굴밖에  작은 정구가 반짝반짝 하는게 희미하게 보이더군요. 내  눈에는 그게 너무 울어서 벌겋게 피진 엄마의 눈처럼 보이더군요.
엄마! 엄마! 나좀  살려주세요…
그렇게 소리치며 나는 꾸역꾸역 울었습니다.  울다가 까물어치고 다시 깨여나고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했지요. 차라리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훨씬 편했 던  같아요. 깨여나면 뼈가 부러진 통증도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더 참을 수가 없더군요. 줄기차게 내리는 빗물이 굴속에 고여서 감각을 잃은 두  다리는 이미 물속에 잠겨져  있었고 벽쪽에 기대여 있는 윗 몸도 빗물속에 잠기는건 시간 문제였죠. 굴밖에서는 사람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다만 빗속을 가르며  거칠게 지나가는 차 소리만 외롭게 들려오더군요. 차 소리가 들릴  때마다 혼신을 다하여 소리 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지만 차는 그냥 지나가더군요. 물론 들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 때 만큼 차 소리가 그렇게 야속하고 저주로울  수가  없더군요.... 투닥투닥,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빗물은 점점 고여서 턱밑을 넘어서 입속으로 흘러들기 시작했어요. 조금만 있으면   곧 익사체가 될 것인데 나는 빗물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내 나이를 떠 올렸어요. 열 아흡을 갓 넘은 스무 살,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 나는 하르르 복사꽃이 피여나는  고향의 언덕에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뒤,
나의  삶은 공사장의  웅덩이 속에 비 물처럼 고여 있었어요. 비 방울처럼  늘 혼자서 그 웅덩이 속에 갇혀서 빗소리만 나면 그 때의 동굴속의 환각에서 허우적거렸죠. 육신이 끊임없이 굴 속으로 빠져들어가 깊은 어둠속에 갇히는가  하면  입속으로 코와 눈, 귀속으로 흙물이 흘러들어가는 숨막히는 환각에 빠지기도 하고  허리가 부러져서 두 동강이 난 다리와 몸뚱이가 따로 걸어다니는 공포스런 환각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 날의 기억은 그 뒤의 나의 삶을 한 순간도 놓아주지 않더군요.  아마 그 고통이 두려워서, 그 처절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자서전을 생각했 던  같아요. 혹시 나의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면 그 기억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나에게 자서전이란 건 그런 의미였어요. 일종 타인과의 대화방식 같은 거 말입니다.
 그런데 왜 생각을 바꾸셨어요?
아, 그건…
남자는 잠깐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 보았다.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잠깐  망설이는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타인과의 대화가  아니라 오래 동안 가두어 두었던  내 안의 나의 목소리를 끌어내고 싶어했다는 것을 비로서 알게 되였습니다. 부끄러운 애기지만…작가님의 손을 통하여 내 안의 온기를 느꼈고  내  가슴속의 두군거리는 나의 소리를 들었고  짜릿한 인간의 즐거움도 느끼게 된거죠. 잃어버렸던 내 안의 내 모습을 만나게  된셈이죠. 이제부턴  아픈 기억의 동굴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하늘 냄새가 났다. 사람의 얼굴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때 그의 얼굴에서 하늘  냄새가 나는 법이다. 나는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남자는 자신의 과거를 나한테 들려줌으로서 자신의 동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그의 동굴속에 서서히  갇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아닌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바보같이 왜 그런 순간에 웃어버렸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남자도 따라 웃었다. 그러면서 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늘 잡아 오던 손을 잡듯 스스럼 없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언제 또 오실겁니까?
나는 당황했다. 또  온다고 약속한 일도 없고 와야 할 일도 없는데  남자는  내가 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자신이  또 와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나는 그가 왜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지 더욱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온다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저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이 희미한 웃음이 그 남자의 나머지  삶을  잘 견디게 할 수도 있고 남자가 다시 자기의 동굴에 갇히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내가 집을 나올 때 남자는 뒤에서 오래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발자취를 듣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떠나가는 나의 발자취를 들으면서 내가 다시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를 점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 든 나는 상관이 없었다. 다만 남자가 부디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랬다.

또,
낮게 떠 있었다. 지금부터 남자는 비에 대한 어두운 빛을 거두어 내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 할 테지만 나는 비가 올  때마다 그 남자를 떠 올리게 될 것이고 그 남자가  갇혀살았던 동굴속에  한동안 갇혀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 남자의  동굴에서  벗어나게 될것이리라.


도라지 2007년 3기에 게재
민족문학 (한문)2008년 1기에 게재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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