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만난 윤동주 시비

   3. 우지강변의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서울=동북아신문]  “우리는 과거에 저질러 놓은 어리석은 역사를 각인시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본 시인 윤동주를 생각하며 하늘을 우러러봅시다. ”
  2017년 10월 28일 오전 11시, 쿄토부 우지시 우지강가에서 열린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제막식에서 하야세 카즈토(早瀬和人) 목사의 제언에 따라 현장에 모인 150여 명의 시민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방금까지도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친 하늘을 우러러 사람들은 윤동주에 대한 그리움 추모의 감정을 전하였다. 윤동주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와 시민들이 비석에 새겨진 시 「새로운 길」을 낭독하고 「아리랑」을 불렀다. ……
  언젠가 인터넷뉴스에서 본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제막식의 정경이다.

  1943년의 초여름, 도시샤대학 영어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일본군의 징병을 회피하려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학우들은 그런 윤동주를 위해서 우지강가에서 야외 송별회를 열었고 거기에서 함께 송별기념 사진도 찍었다. 이 사진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는데 1990년대 중반 NHK와 KBS가 다큐멘터리를 공동제작하는 과정에서 윤동주의 학우이고 당시 함께 사진을 찍은 기타지마 마리코(北島万里子)씨의 앨범에서 발견됐다. 기타지마 씨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그 야외 송별회에서 마지막이니까 노래 한 곡 불러 달라는 학우들의 부탁을 받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이 사진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기념비 건립 운동이 벌어졌다. 2005년에 시민 단체가 결성됐고 2007년에 각계의 모금으로 비석 제작까지 마쳤지만, 장소가 없어서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시즈가와구(志津川区)에서 구유지를 제공한 덕분에 드디어 시비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앞에서 박은희 박사와 함께

  우리가 시비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파란 가을하늘 아래 맑은 강물이 흐르는 우지강, 그 강 위에 가로 걸린 핫코교(「白虹橋」) 다릿목에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높이 2 미터, 넓이 약 1.4 미터의 두 장의 화강암 판석이 원주를 받쳐 든 형상인데 판석은 윤동주와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람들을 상징하고 원주는 윤동주를 상징한다. 두 판석 전면에는 윤동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새로운 길」을 각기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 넣었다. 그 아래 토대석(土臺石)에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라고 일본어로 씌어있다.

새로운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길 새로운길

문들레가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길은 언제나 새로운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시를 읽어보면 비관보다는 미래에 대한 갈망 희망이 넘치는 것 같다. ‘새로운 길’에 대한 시인의 동경, 그것은 오늘만의 동경이 아니다. 어제는 오늘을 갈망했을 것이고 오늘은 내일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그다음 날을, 이렇게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길’을 가고 있다. 그렇게 ‘언제나 새로운길’을 가고 있으므로 희망이 있고 미래가 기대된다. 또한 ‘새로운 길’을 가는 시인의 길은 외롭지 않다. ‘문들레가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수많은 사람이 함께 가고 있다. 그리고 ‘이 길은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그렇게 온 세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바람대로 윤동주의 시는 국경을 넘어 민족을 넘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늘 지나온 길만 돌아보는, 늘 후회만 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다.
 

 

▲ 윤동주가 학우들과 마지막 야외 송별회를 했던 아마카세 현수교(天ヶ瀬つり橋)

 

  윤동주가 사진을 찍은 아마가세 현수교(天ケ瀬つり橋)는 시비로부터 약 3백 미터 떨어진 상류에 있다. 우지교 주변에서는 넓고 웅대한 흐름을 보이던 우지강이 완만하게 사행(蛇行)하다가 갑자기 강폭을 좁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아마가세 현수교가 있다. 아마가세 현수교는 1942년에 가교 되었는데 뵤도인(平等院)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경치도 좋아서 당시에도 관광지로 유명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윤동주 일행도 그래서 그곳에서 피크닉을 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1953년 9월, 태풍 13호가 우지강 제방을 무너뜨렸는데 그때 다리도 무너졌다. 그 후 다시 놓은 다리가 지금의 다리인데 노후화 때문에 1998년에 다시 개수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비록 다리는 그 다리가 아니라지만 같은 곳에 걸린 같은 이름의 다리를 바라보며 우리는 윤동주의 그 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학우들의 요청에 못 이겨 그 다리목에서 「아리랑」을 부르던 윤동주, 그의 격앙된 노랫소리가 우지강의 물결 소리를 타고 귓전에 들려오는 듯, 이곳의 산천 수목 바위 하나 나무 한 대에도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을 한탄하는 그 절절한 노랫소리가 여전히 스며있는 것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나라 잃고 집을 잃고 산산이 흩어져, 정처 없이 흘러간 이국땅에서 타향살이해야 하는 아픔이 윤동주의 노래에 실려 허공에 흩어질 때 산은 흐느끼고 물결은 통곡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별을 앞두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그는 자신이 영원히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불귀의 혼이 될 줄을 알고나 있었을까? 송별회에서 부른 노래의 여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잡혀가서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새벽이슬이 되어 돌아갔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한스러운 일이다.

 

▲ 윤동주가 학우들과 찍은 마지막 사진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후쿠오카에서는 윤동주가 옥사한 형무소 자리에서 매년 2월 16일 전후에 추모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매달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도 개최하고 있다. 또 도쿄에서는 릿쿄 대학 졸업생을 중심으로 매년 추도식과 강연회, 시 낭송 같은 기념행사를 하고 있으며 제일 먼저 시비를 건립한 ‘윤동주 추모회’와 ‘도시샤대학 코리아 동창회’는 매년 윤동주가 옥사한 2월 16일에 시비 앞에서 헌화의식과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윤동주를 잊지 않고 있다.
 
  윤동주의 시는 일본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 제의를 한 사람이 이바라키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이다. 이바라키 노리코는 한국어를 배우게 되면서 윤동주의 시를 접하게 되었는데 한국어를 배우게 된 계기가 남편의 죽음이었다. 사랑하던 남편이 죽고 극도의 실의에 빠졌던 그녀는 1976년 4월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으로의 회귀의 시작이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시를 읽으면서 한국의 시는〈삶>과 절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윤동주의 시는 더욱 그녀를 매료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윤동주의 사진을 보고 반해서 그의 시를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윤동주의 외모가 어딘가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윤동주의 외모가 그녀의 이상형이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사진을 보면 참 청결한 미청년이지만 결코 담백한 인상이 아니다. 흔하지 않은 얼굴이다. / 사실 내가 윤동주의 시를 읽기 시작한 계기는 그의 사진이었다. 이런 늠름한 청년이 어떤 시를 쓸까 하는 흥미, 말하자면 참으로 불순한 동기였다./ 대학생다운 지적인 분위기, 오염 한 점 없는 젊은 얼굴, 내가 어렸을 적 우러러본 대학생은 이런 사람들이 많았구나 하는 애틋한 감정이었다. 인상이 더없이 선명하고 강렬했다.” (「윤동주」에서)

  계기가 무엇이었든지 일본 시단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의 에세이 「윤동주(尹東柱)」는 그녀의 에세이집  『한글에로의 여행』(『 ハ ン グ ル へ の 旅』 1986)에 수록되었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空と風と星と詩」)로 바뀌어 치쿠마서방(筑摩書房)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신편현대문』(『新編現代文』1990)에 실리게 된다. 이 작업을 주도한 이는 치쿠마서방의 당시 편집장이었던 노가미 다츠히코(野上龍彦)였다.

  그는 이바라키 노리코의 「윤동주」가 가지는 교육적 가치를 주목하여, 교과서 수록을 위해 문부성과 끈질기게 교섭을 진행하여서,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1989년 일본 문부성의 허가를 받아냈다.

 

▲ 일본 국어교과서에 오른 에세이 <윤동주>의 작가 이바라키 노리코(茨木のりこ)

 

  이 교과서는 1990년부터 교육현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판을 거듭하여 2015년 현재는 교과서명이 『정선현대문B』(『精選現代文B』)로 바뀌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이바라키 노리코의 에세이는 내용이 점차 축소되어 가는 변화를 겪게 된다.

 『한글에로의 여행』에 수록되어 있었던 「윤동주」는, 1990년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空と風と星と詩」)로 바뀌어 교과서에 수록되는 과정에서, 「또다른 고향」이 삭제되었다. 2015년 판에서는 타치하라 미치조 (立原道造)의 「잠의 유혹」(「眠りの誘ひ」)과 윤동주의 「돌아와 보는 밤」을 비교한 내용이 다시 삭제되었다.

  이렇듯이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 점점 축소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윤동주를 사랑하고 그의 시를 읽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는 우리 마음속의 영원한 별이 된 것이다. 그의 시는 사람들에게 그의 젊은 생명을 앗아간 그런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평화롭고 밝은 시대를 만들어가도록, 그런 ‘새로운 길’을 밝혀주는 별빛이 되었다.

  어느덧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박은희 박사의 건의대로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 건너편의 길로 에돌아가기로 했다.

  산기슭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있는 큰길을 따라 달리면서 돌아다 보니 빨갛고 파랗게 단풍이 든 산을 배경으로 우지강을 가로 지난 아마카세 현수교가 무지개같이 석양빛에 반짝인다. 파란 하늘 아래 바람이 스친다. 바람 따라 「아리랑」의 노랫가락이 귓전에 스며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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