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입국한 동포여성의 곡절 많은 인생 이야기

 저의 이름은 박련자입니다. 올해 예순이고요, 집에 장가 못간 자식이 둘이나 있습니다. 큰 아들은 운전기술 배웠지만 돈 못 벌고 있고, 작은 아들은 컴퓨터를 배워 제 밥벌이는 합니다. 처음에는 게임회사에 다니면서 한국기업과 손잡고 돈을 벌더니 지금은 큰돈은 못 벌어도 꽤 잘나고 있어요. 한국에 와서 더 배우려 맘먹고 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구요? 우리 집은 중국 길림성 교화시에 있어요. 한 3~4만 정도 조선족들이 꽤 많이 살고 있지요. 사는 게 나름이라지만, 우리 가족은 사정이 좀 어려웠어요. 그래서 한국행을 결심했었지요.

 

불행하게도 입국 전에 2만 위안 사기 당했습니다. 아들 둘이 직업이 없지, 우리 아저씨도 달마다 퇴직금 150 위안 밖에 받지 못하다보니 제가 나가 벌지 않으면 가정이 뭐가 되겠어요? 그래서 4푼 이자를 주고 5만 5천 위안 빚을 냈지요. 때가 되어 갚자고 보니 이자 돈까지 합쳐 11만 위안이 되더군요. 환장하겠지요? 그러니 한국에 와 4년 동안 헛 셈이었어요!

 

재입국 한 달 전에 다리도 쑤셔나고 허리도 아파 내내 치료하러 다녔어요. 디스크인가 봐요. 임시구급은 했지만 입국해서 일을 시작했더니 금방 덧나더군요. 지금은 가정집의 애를 보고 있는데, 애를 업고 안고 일하며 신경을 썼더니 병이 도진 것 같아요.

아, 제가 한국에 오게 된 역사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겠어요?

 

그때 제가 2만 위안 사기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누구도 돈을 꿔주지 않으려 했어요. 그러니 제가 무슨 수로 5만 5천 위안이나 장만하겠어요? 때가 되자 브로커가 수속을 맞혔으니 돈을 내놓으라 하데요. 제가 사정이야기를 하자 브로커는 펄쩍 뛰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다 하더군요. 집식구들마저 네가 벌린 일이니 네가 수습하라, 우리도 못살겠다고 나눕는 것이었어요.

 

저는 브로커한테 여권을 팔아도 좋으니 맘대로 하라며, 눈물을 삼키면서 집을 나왔어요. 자그마한 보따리 하나 끼고 외지 식당을 찾아 떠났지요. 거기에서 먹고 자며 만 시름 싹 잊고 싶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브로커한테서 전화가 왔더군요. 수속은 이미 해놓은 것이니 한국에 가 벌어서 빚을 갚으라고요! 그때는 브로커가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정작 한국에 오니 머리가 광주리만큼 커지는 것 있지요? 두 아들 장가보내야 한다, 아파트 한 채 사야 한다, 빨리 빚 갚아야 한다! 내내 그런 생각들에 쫓기다 보니 몸은 몸대로 아프고 머리는 머리대로 아파났어요.

 

울다 베게머리 흥건히 적시다 잠드는 저녁이 얼마였는지 몰라요. 술을 마시고 통곡을 해도 누가 제 신세 알아주겠어요? 그래서 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내 마음 잡아줄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 생각했어요.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저는 속으로 매일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며 제 마음을 다스려 나갔어요.

저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어요.…

 

작년에 귀국했다 이번에 재입국하게 되니 쓰라린 기억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친근해나는 느낌이 있지요? 서울은 거리도 깨끗하고 다들 예의도 있고 음식이나 뭐나 우리 민족이 살기 좋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요. 게다가 무료봉사는 분들을 보니 감동되고 가슴이 뜨거워나더군요. 가리봉 외국인병원이며 중국인을 위해 봉사하는 병원들을 두루두루 찾아가 보았지요. 교수님들이 얼마나 따뜻이 대해주든지, 음성 안 높이고 사근사근 말씀 나누고 정성 다해 치료해주고, 비록 재간은 없지만 저도 저렇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더군요. 

 

저는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건강에 문제없으면 3년까지 벌 생각입니다.

저의 둘째아들의 여자친구는 서울에 나와 있는데 둘째아들도 입국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러면 집 잡고 저희들 끼리 생활하게 하고, 이제는 다 큰애들한테 신경 끄고 진정한 자기 삶을 살아야겠지요! 귀국하면 우리 아저씨를 데리고 교회에도 다니며 마음 다해 하나님 믿고 어려운 사람들과 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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