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申吉雨 교수


                       

 

 

 

 

  신길우(본명 신경철) 박사는 상지대 교수와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정년퇴임한 국어학자로 수십 편의 논문과 저서를 냈다. 대학시절부터 수필을 써온 수필가로 10여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출간하였고, 한국의 국정교과서인 <중학국어>와 연변대학 사범학원․인문학원의 <교재>에도 수필이 실렸다. 현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남한강문학회와 조운수필 회장 등 여러 문학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 교수가 발표한 중국 동포문인과 유적 등에 대한 글을 청하여 게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1. 묘비에 ‘詩人’이라 붙인 이유


윤동주가 1945년 2월 16일 금요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때까지 윤동주는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발표된 시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1945년 6월 14일에 세운 윤동주의 묘비에는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어째서 어떻게 하여 '시인'이라고 하였을까?

윤동주의 창작일자로는 가장 빠른 시가 18세 때인 1934년 12월 24일자로 된 3편이 있다.「초 한 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이다.

최초로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崇實活泉』제15호에 게재된「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병아리」가 연길의 <카토릭소년> 11월호에 발표되었다. 12월호옇빗자루」가, 1937년 1월호옇오줌싸개지도」가, 3월호옇무얼 먹고 사나」가, 10월호옇거짓부리」가 발표되었다.

1939년 1월 23일에는 시「遺言」이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렸다. 같은 해에 시「아우의 印象畵」와 산문「달을 쏘다」가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렸다. 동시「산울림」도 1939년에 <少年>지에 발표되었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文友> 6월호에 시「새로운 길」이 실렸다. 시「자화상」도 1941년 <文友> 6월호에 발표되었다.

사후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게재된「쉽게 씌어진 시」이다. 편집국장이던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소개문이 곁들여져 있다. 3월 13일에는「또 다른 고향」이, 7월 27일자옇소년」이 실렸다.

첫 시집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행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이 시집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유고시 31편이 실려 있다. 정병욱이 보관한 원본 19편에 12편을 더한 것이다. 1955년 2월 16일에 서거 10주년 기념으로 유고를 보충하여 증보판이 발간되었다.

1983년 10월 10일에 개정판이 나왔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1935년 <숭실활천>과 1939년 조선일보 학생란과 1941년 연전의 <문우>에 시가 실린 것이 발표된 거의 다이다. 그런데도, 묘비에는 “시인윤동주지묘”라 한 것이다.

 

▲ 서울남산문학의집에서연윤동주유적사진전(2004[1].12.7.-22.)

이에 대하여, 2003년 6월 28일 용정의 집으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윤동주의 매부인 오형범(吳瀅範)과 여동생 윤혜원(尹惠媛)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었다.

1945년 3월 6일에 윤동주를 장례한 뒤 묘비 건립을 준비하면서, 조부와 부친이 “詩人”이라 붙이기로 하였다. 윤동주의 자선육필시집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이 육필시집은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서 자선(自選) 육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제목을 단 것이었다. 이 시집을 1942년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다닐 때 모친 병환 소식을 듣고 윤동주가 여름방학에 용정에 왔을 때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이 시집은 육필로 3벌을 만들었는데 1벌을 당시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출판을 하겠다고 하였더니 시기상조라고 하였다고 하고, 또 1벌은 정병욱에게 주었다고 하였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 <육필시집>을 보았던 것을 기억하고 묘비에 “시인”이라고 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윤동주의 묘비에 “시인”이라고 한 것은 조부 윤하현(尹夏鉉)과 부친 윤영석(尹永錫)이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윤동주의 자선 육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윤동주의 시는 그 밖에도 써 놓은 시들이 더 있었다고 한다.

시집이 있으니 “시인”이라 할 수 있고, “시인”이었으니까 시집을 남긴 것이다. 당시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은 때였지만, 시집이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조부와 부친이 묘비에 “시인”이라고 붙인 것이다.


      2. 묘비에 年號 대신 西紀를 쓴 까닭

 

▲ 시인의 묘비
  윤동주는 서기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나이로는 29세이지만, 실제로는 만 27년 1개월 17일 동안을 살았다.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사망 전보를 받고 10일만에 후꾸오까 형무소로 가서 시신을 화장하여 1945년 3월 6일에 용정 동산의 교회묘지에 안장했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져 지금까지 서 있다.

그런데, 윤동주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특이하고도 새로운 것이다. 당시에는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는 서기가 아닌, 연호 “康德”으로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康德”으로 되어 있다.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그런데, 어째서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호 대신 서기를 사용했을까?

이에 대하여 오형범 선생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한국 사람이지요. 더구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지 않았어요? 그러니 어떻게 일본 연호를 쓰겠습니까?”

한창 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비문은 부친의 친구인 김석관(金錫觀) 선생이 짓고 썼는데, 윤동주의 스승이었고, 명동학교의 학감을 지냈다. 그러니 그도 연호를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비문도 일정 때의 것이라 그 속내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운명하니”. 당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3. 윤동주 묘를 찾게 한 사진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시인이었는지를 몰랐다. 가족들도 1946년 윤일주에 이어, 1948년 윤혜원 부부가 월남하고, 조부와 모친은 1948년에, 조모는 1955년에, 윤광주는 1962년에, 부친도 1965년에 세상을 떠났다.

1984년 봄에 미국의 현봉학(玄鳳學) 선생이『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8월에 중국을 방문하여 연변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가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안 주어서,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하고, 내년 방문 때에는 묘소를 꼭 찾아볼 수 있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친동생인 윤일주(尹一柱) 교수가 1984년 여름에 일본에 가 있던 중,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

▲ 윤동주 시인 묘소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 12일에 연길에 도착하였는데, 연변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국의 허가를 받아 5월 14일 연변대학 권철(權哲)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李海山) 강사와 역사에 밝은 용정중학의 한생철(韓生哲) 선생과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가지고 간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왼쪽에 오형범과 윤광주, 오른쪽에 윤혜원․윤영선․윤갑주 5명이 들어 있었는데, 묘비제 “詩人尹東柱之墓”가 중앙에 뚜렷하다. 이 묘비 사진이 아니었던들 공동묘지의 수천의 묘비들을 하나하나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내고 확인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자료는 이 가족사진이었다.

1995년에 문학사상사에서 간행한 <윤동주전집 1․2>는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는데, <전집Ⅰ>에 실린 이 사진의 설명은 잘못되어 있다. 윤영선(당숙)과 오형범(매부)이 서로 바뀌어 설명되어 있다. 윤일주는 1985년 11월 28일에 작고하였다.


      4. 윤동주 墓의 정확한 위치


윤동주의 묘는 용정시 동쪽 합성리(合成里) 동산(東山)의 교회묘지 8부 능선쯤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의 위치가 글과 책에 따라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동산교회 묘지’ ‘동산 교회묘지’ ‘중앙교회 묘지’ ‘동산 중앙교회묘지’ ‘교회공동묘지’ 등으로 나온다. 실제로 ‘동산교회’와 ‘중앙교회’가 있었고, 지명으로 ‘동산’도 있었으며, 묘도 공동묘지에 있어서 혼란스럽다.

이에 대하여 1947년까지 용정에서 살았던 오형범․윤혜원 부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윤동주의 묘지 위치는 “동산에 있는 교회묘지”가 맞다. 당시 용정에는 장로교회로 중앙(中央)교회와 동산(東山)교회와 토성포(土城浦)교회가 있었다. 서부의 감리교회와 북부의 성결교회까지 모두 5개가 있었다. 1942년에 교단이 합쳐져 만주기독교단이 되었다. 당시 동산의 공동묘지는 이들 5개 교회의 공동묘지였다. 그러므로, “동산에 있는 교회공동묘지”가 맞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설치된 이후 지금까지 용정시의 동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공동묘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5. 改修된 윤동주의 새 묘소


윤동주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설치했을 때는 봉분만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1945년 6월 14일에 묘비가 세워져서, 지금까지 봉분 앞에 서 있다. 묘비는 화강암인데, 전면의 폭이 39.5㎝, 높이 100㎝이고, 측면의 폭은 17㎝, 측면 높이는 93㎝이다. 비의 머리부분을 좌우로 둥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면의 양쪽 약 5분의 1씩은 까맣게 칠하였고, 중앙의 하얀 부분에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 놓았다.

비신의 왼쪽 중앙에 세로로 “一九四五年六月十四日”이라 새기고, 그 아래에는 우측부터 “海史 金錫觀 撰並書” “弟 一柱 / 光柱 謹竪”라고 새겼다. 후면과 우측면에는 한문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뒷면은 22자 8행, 우측면은 22자 3행이 음각되어 있다. 글씨들은 모두 검정색이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에 거주하는 현봉학 선생이 주동이 된 미중한인우호협회(美中韓人友好協會)가 연증(捐贈)하고,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을 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20여㎝ 높이로 둥글게 시멘트로 둘러놓았다. 그 밖으로 낮게 폭 20여㎝쯤 띄어서 10㎝ 정도 두께로 둥글게 시멘트로 테를 두르고, 그 사이는 흙으로 판판하게 메워 놓았다.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옮겨 세웠다.

새로 묘비 앞에다 오석(烏石)으로 상석을 설치하였는데,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오석 판을 네 측면과 상면을 맞추어 놓은 것이다. 전면에는 큰 글씨로 “龍井中學校修繕”, 그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一九八八. 六月”이라 새겼다. 우측면에는 위쪽에 “龍井中學校同窓會”, 아래쪽에 “美國中國韓人友好協會捐贈”이라 새겼다.

첫 번째 개수는 43년만에 이루어진 것인데, 봉분 밑을 시멘트로 둥글게 테를 두른 것과 오석판을 이용하여 상석을 설치한 것이 새로운 점이었다.

윤동주 묘소를 두 번째로 개수한 것은 2003년이다. 호주 시드니에서 살고 있는 오형범․윤혜원 여동생 부부가 15년만에 다시 개수하면서 두어 달에 걸친 공사로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재개수를 하면서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모두 걷어냈다. 그런 뒤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4m가 되는 곳에 사각형으로 골을 파고, 대리석 판을 둘러 세웠다. 그 안 16평방미터는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묘비는 봉분 앞에다 세우고, 이어서 오석의 석상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 석상의 크기는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 정도이다. 상석의 왼쪽에는 “龍井中學校修繕 1988. 6.”이라 새기고, 오른쪽에는 “美中韓人友好協會捐贈”이라 새겼다. 대리석 테두리 앞쪽에는 가로 300㎝, 세로 150㎝ 정도를 화강암으로 네모지게 테를 두른 계절(階節)을 만들어 놓았다. 이 계절의 테두리 화강암은 여동생 부부가 2004년 여름에 다시 대리석 판으로 바꾸어 둘렀다. 송몽규 묘의 계절 화강암도 이때 똑같이 대리석으로 바꾸었다.

봉분의 4m의 사각 대리석 테두리 왼쪽 구석 위에는 오석으로 개수비(改修碑)를 세웠다. 개수비는 가로 60㎝, 높이 40㎝ 정도인데, 앞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다.


    詩人의

祖父 尹夏鉉 1875. 2. 1. (음)~1948.  9. 4.(양)

祖母 南信弼 1886.         ~1955.

父   尹永錫 1895. 6. 11.(음)~1965.  4. 20.(양)

母   金  龍 1891. 8. 29.(음)~1948.  9. 26.(양)

  弟   光柱 1933. 5. 15.(양)~1962. 11. 30.(양)


     이 동산 어딘가에 잠들어 계시지만

   오늘날 묘소를 찾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누이 惠媛, 조카 仁石, 仁河, 卿 새김

                 2003. 7. 15.


      6. 윤동주의 本家와 두 生家


윤동주가 태어나서 자란 本家는 용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길 오른쪽 명동촌(明東村)에 있다. 뒤에 용정으로 이사가고 한번 옮겨서, 살았던 곳은 모두 3곳이다. 명동의 본가는 1983년에 철거되었는데 1994년에 복원되었고, 용정의 생가 두 곳은 집터만 확인된다.

1985년에 오오무라 마스오가 명동촌 본가를 찾았을 때에는, 건물은 없어지고 집터는 담배밭이었다. 파헤쳐진 초석이 무더기로 쌓였고, 콘크리트로 된 부엌바닥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4년에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현봉학이 찾아갔을 때 돌무더기에서 기왓장 하나를 가져왔는데, 이것을 연세대학의 박창해 교수와 오형범과 윤일주 부인(정덕기) 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보여주었다. 그 기와는 처마 끝에 쓰는 수키와인 막새였는데, 둥그런 테두리 안에 중앙에는 삼태극이, 위에는 십자가, 아래는 무궁화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 막새 기와는 현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2003년 6월 6일에 필자가 찾아갔을 때에는 본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동행한 연변대학의 김만석 (金萬石) 교수의 설명으로는 가옥 두 채를 헐어다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전면 5칸, 측면 2칸의 複式 10칸의 기와집이었다. 본채는 동서로 길게 남향으로 자리했는데, 나무 기둥에 하얀 회벽이고, 골이 진 기와를 올린 팔각지붕이었다. 칸마다 전면에는 중앙에 나무 문살의 문이 하나씩 달렸는데, 부엌과 곳간인 오른쪽 두 문은 중간까지 나무판으로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문제점은 복원된 본가의 구조가 좌우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평면도를 좌우로 엎어놓은 모양이란다. 원래는 지금과는 달리 우측에 굴뚝이 있고, 왼쪽에 부엌이 있었다고 한다. 맨 왼쪽에 소 외양간, 다음이 부엌, 부엌과 통한 터진 방, 앞뒤로 조부모와 부모방, 손님방과 윤동주 방의 순서라고 한다. 윤동주는 굴뚝이 있는 왼쪽 끝의 뒷방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3004년 11월 21일 서울에서 만났을 때 오형범․윤혜원 여동생 부부가 내게 설명해 주었다.

본채의 서쪽으로 사이를 두고 헛간채가 직각으로 서 있었다. 안에는 디딜방아가 놓여져 있었다. 안채와 헛간채 사이의 굴뚝 앞에 “윤동주생가옛터”라 새긴 복원비가 서 있는데, 용정시지신향인민정부와 용정시문학예술계연합회 공동 명의로 되어 있었다. 본래는 1900년경에 조부 윤하현이 세웠는데, 1994년 8월 29일에 복원한 것이라 적혀 있었다. 작은 뒷마당 울타리 너머로는 두어 길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제법 넓은 앞마당은 풀이 무성하였고, 앞 울타리 너머로는 밭이었다.

본채에서 왼쪽으로 대문이 있는데, 본채와 대문 사이 마당에 우물이 있다. 우물은 깊어서 두레박을 썼다는데, 지금은 메워진 채 맨 위에 설치했던 井자형의 재목이 돌과 섞여 보일 뿐이었다.

대문 밖 서쪽은 밭이었다. 동쪽으로 낮은 벼랑 밑 좀 언덕진 자리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길쭉한 창고가 있다. 그 앞에 명동교회 건물이 창고와 90도를 이루며 따로 서 있는데, 출입문에는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교회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인데, 벽면에는 가로로 두 줄의 목재가 드러나게 하고 벽은 모두 백회(白灰)를 발라서 하얗다. 5칸 모두 상하 두 목재 사이 좌우 중앙에 각각 창을 설치하였다. 중앙의 두 나무 기둥 중 왼쪽에는 “明東敎會舊址”, 오른쪽에는 “明東歷史展示館”이라 쓴 세로로 된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주변은 얕은 뜰이 둘러쳐져 있다.

교회 옆에는 설립자인 김약연(金躍淵) 목사의 집이 있고, 그 뒤에는 교회의 종을 매달았던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교회 뒤쪽에는 용정에서 삼합진으로 가는 큰 도로가 있고, 교회 밖에는 똘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작은 도로가 육도하(六道河)까지 나 있다.

윤동주의 본가에서 북쪽으로 10여분 정도 걸으면 작은 언덕이 있다. 이곳에 윤씨네 묘지가 있고, 그 서쪽에 송씨네 묘지가 있다. 윤씨네 묘지에 윤동주의 부모 묘가 있다고 하는데, 묘비가 없어서 확인할 수가 없다. 증조부 윤재옥의 묘라고 하는 구멍 뚫린 곳이 있는데, 장로회 회원이고 부농이었던 조부 윤하현이 잘 가꾸었는데 문화혁명 때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용정으로 이사와 산 곳은 두 곳인데 지금은 다 없어졌다. 첫 번째 집은 두 번째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데 얼마 살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집은 지금 용정현 기계수리공장의 정문과, 정문에서 공장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곳은 영국덕(英國德) 지역으로 은진중학과 명신여중과 제창병원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윤동주의 집은 제창병원 맞은편에 있었다고 한다.


      7. 윤동주의 마지막 詩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26세 때인 1942년 1월 24일에 쓴「참회록」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 마지막 시는「쉽게 씨워진 詩」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 3일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매부 오형범․윤혜원 부부는 2003년 6월 28일에 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이 시가 후꾸오까 감옥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었다고 하였다.

1947년 여동생 부부는 연변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6개월 정도 살고 있을 때였다.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두 사람은 윤동주가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다닐 때 사귀었던 친구들이었다. 여동생 부부가 이들을 알아본 것은, 윤동주가 용정 집에 왔을 때 박춘애와 그의 오빠, 김윤입 셋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아주 친한 사이라며 인상깊게 이야기를 하여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춘애는 윤혜원이 내가 여동생이라고 하니까 놀라더라고 하였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꾸오까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을 방학 때 고향에 가면 가져오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동생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서 서울로 월남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감옥에서 써서 김윤입이란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 적은 시가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윤동주가 쓴 사실과 그 작품을 받은 사람까지는 확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윤동주의 친 누이동생 부부가 보관자에게서 직접 듣기까지 한 것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작품 자체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한 가닥 희망으로, 김윤입이 친한 친구로서 옥중에서 윤동주가 쓴 그 마지막 작품을 잘 보관하고 있기를 바란다. 자손 중에서라도 그 작품을 보관하고 있기를 고대한다는 것이다. 1942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하여 오늘날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쉽게 씌어진 詩」처럼 꼭 보관되어 전해지기를 바란다.

 

 

<2004. 12. 1. 윤동주 60주기 전야제 세미나,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

<2004. 12. 30.『문예춘추』창간호>

<2006. 4. 15.『호주한인문학』제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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