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지월(52세)시인은 오늘 11월 1일(수요일) 오후1시~4시까지
경상북도공무원교육원 초청, 참살이휴테크과정으로
경상북도 도민 150여명을 대상으로
<문학과 지역성> 이라는 주제로 3시간 동안 문학특강의 시간을 갖는다.
가장 민족적이며 전통적인 시를 남달리 써온 서지월시인은
이날 지역성이 두드러지는 자신의 시 <팔조령에서의 별보기>,
<비슬산 참꽃>, <조선의 눈발> 을 비롯해 윤미전 시 <다부재 길따라>,
김소월 시 <진달래꽃> ,서정주 시 <선운사 洞口>, 고은 시
<문의 마을에 가서>, 송수권 시 <지리산 뻐꾹새>,
그리고 중국 조선족 시인인 남영전 시 <봇나무> ,석화 시
<연변> 등을 소개한다.

[1]김소월 시인의 경우

  김소월시인이 평안북도 정주 곽산 산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며 지역정서를 민족정서로 승화시킨 시를 많이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시가 <진달래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ㅡ김소월 시 <진달래꽃> 전문.

 

  이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민요적인 전통율격을 가졌다는 것과 진달래꽃이라는 자연 친화적인 친근감이 주는 고유정서, 그리고 사랑을 주제로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영변 약산’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한 편의 시로 인해 ‘영변 약산’ 은 일대 진달래꽃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그 지명 또한 우리민족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이다.
  김소월은 12월 25일 불운하게도 33세의 나이로 약을 먹고 자살을 했는데 돈도 돈이지만 인생에 대한 무한한 회의해 빠진 것으로 보인다. 김소월 시인이 세상을 뜬지 어언 7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우리민족에게 가장 대표적인 민족 서정시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김소월이 살았던 시대의 금은보화나 부호의 손가락에 끼었던 금반지는 주인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한낱 모래알과 같이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가난하고 불운하게 살았지만 김소월의 주옥같은 시는 오늘날까지 그 당시 부호들의 손가락에 끼었던 금반지 보다 더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민족의 얼로 빛을 발할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기회에 짧았지만 불운했던 김소월의 인생행로를 보면 이렇다. 아버지 김성도와 어머니 장경숙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에서 태어나 백일이 지난 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 본가로 돌아왔다. 2세때 아버지가 친척 잔치집에 간다고 말안장 뒤에 쇠고기를 싵고 가다가 검문에 의해 일본순사에게 모질게 폭행을 당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쇠고기가 실린 채 말만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후 아버지는 정신이상자가 되자 할아버지가 대신 어린 김소월을 돌보게 되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숙모 계희영에게〈심청전>,〈장화홍련전〉등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1915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했고 1916년에는 홍단실과 결혼했으며 3·1운동 직후 오산학교가 잠시 문을 닫게 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그가 오산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만식선생이 교장, 서춘, 이돈화, 시인 김억이 교사로 있었는데, 김억시인에게 시적 재능을 인정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 두고 귀국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1924년 시〈진달래 꽃>의 무대인 영변을 그때 잠깐 다녀왔던 것이다. 김동인, 김찬영, 임장화 등과 〈영대 靈臺〉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나도향과도 친하게 지냈다. 광산일이 실패하자 처가가 있는 귀성군으로 이사를 했는데 땅을 팔아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뒤 생활이 어려워져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1934년 33세 때의 일로 곽산에서 청산가리를 부인과 함께 먹고 음독자살을 한 것이다.

 

[2]서정주 시인의 경우

 

 단군이래, 그러니까 우리민족이 뻗어온 오천년 역사 속에 최대의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시인으로 미당 서정주시인이 자리하고 있다. 서정주는 서구적인 상징적 기법을 탁월하게 잘 활용한 시인이기도 하지만 민족정서를 잘 버부려 시를 써온 보기 드문 시세계를 펼쳐왔는데 서정주시인의 민족정서는 국선사상과 깊게 닿아있다. 쉽게 말하면 고유정서를 가장 높은 경지에 올려놓은 대표적인 시인이라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신부>라는 시가 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ㅡ서정주 시 <신부>전문.

 

 민간설화를 가지고 시로 읊었는데, 서정주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시가 되지 않는 게 없다고 말한 연세대 유종호교수의 말같이 멋드러진 산문체 가락으로 풀어내고 있다. 첫날밤 신부에 대한 오해로 신랑을 떠났지만 혼례를 치른 이상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 하는 한국여인의 한(恨)을, 그리고 우리민족 고유색상인 ‘초록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도입함으로써 한 편의 문학작품을 넘어서서 우리의 고유문화의 맥을 잇는 위대한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북 고창 선운사 들어가는 입구에 <선운사 洞口>라는 서정주 시비가 세워져 있다.

 

禪雲寺  고랑으로
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디다

 

ㅡ서정주 시 <선운사 洞口>전문.

 

 위에서 보듯 지역정서를 잘 살린 대목이 나오는데 판소리의 동편제 가락인 ‘육자배기’가 그것이다. 전북 고창은 조선조 명기 이매창을 비롯해 인촌 김성수 같은 정치가, 단재 신재효 김소희 같은 판소리 대가, 전봉준 같은 혁명가 등 다혈질의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선운사 또한 한국불교문화의 요람인데 백파스님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으며 선운사 비림에는 ‘백파율사대기대용지비’ 라는 추사 김정희가 내린 추사체 비석도 눈에 띈다.
 선운사의 명물로 동백꽃, 상사화, 단풍이 유명한데 서정주시인은 동백꽃을 등장시켜 육자배기 가락과  매치시킨 것이다.

 

[3]고은 시인의 경우

 

고은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시가 있는데 <문의 마을에 가서>이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짤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ㅡ고은 시 <문의 마을에 가서>전문.


 고은시인이 1974년에 펴낸 시집 <文義마을에 가서> 표제시이기도 하다.  이 시는 모친상을 당한 신동문 시인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문의마을에 가서 장례식을 주관했던 사실을 배경으로 해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과 삶의 길이 어떻게 다른가에서 죽음과 삶의 길이 하나임을 깨닫는 삶에 대한 경건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흰눈으로 하여금 지워진 적막의 세계, 거기 새로 꿈틀거리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역시 뛰어난 언어구사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다든지,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끝까지 사절하다가 /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등의 관조적 표현들이 그것이다.

 

[4]송수권 시인의 경우

 

 김영랑의 나긋나긋한 남도정서를 이어받아 선의 굵고 힘찬 남도정서로 재구성해 보이고 있는데 남도를 대표하는 전통시인을 꼽는 데는 송수권 시인이 독보적으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정서 중에 남도정서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낸 걸출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 대표작으로 <지리산 뻐꾹새>를 꼽을 수 있다.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中
저 連連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下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ㅡ송수권 시 <지리산 뻐꾹새>전문.

 

 보라. 가장 한국적인 새소리 중의 소리인 뻐꾹새 소리가 지리산을 왼통 붉게 물들게 하고 있다. 거기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데 섬진강이다. 그러니까 지리산 뻐꾹새와 철쭉꽃 그리고 섬진강의 조화가 일품인데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은 우리민족 한(恨)의 빛깔 다름 아닌 것이다.
 특히, 서정주와 박재삼시인의 전통시어와 가락을 남도가락으로 변용해 노래하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5]서지월 시인의 경우

 

  나 역시 김소월과 다름없는 대구 가창 산골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시를 써 오며 살아가고 있다. 가창에서 청도를 넘어가는 팔조령이라는 산고개가 있는데, 젊은 날 나는 무수히 그 산 고개를 넘어 젊은 날 방황의 시간을 청도 금촌못에 가 낚시를 하며 소일했는가 하면, 청도에서 대구 우시장으로 소 팔러가는 쇠방울 소리를 들으며 문학 청년기를 보냈던 것이다.
  이런저런 경험으로 나의 지역정서의 1번이라 할 수 있는 시 <팔조령에서의 별보기>가 씌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팔조령에 별을 보러 갔지요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별을 보러 갔지요
두 발 동동 구르며 쳐다보는 밤하늘
어둠 속에 소풍 나온 바람과 함께 별을 보러 갔지요
모여서 사는 것이 더 아름다운 거라고
별들은 우릴 내려다 보며 노랠 불렀지요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불빛과
밤 이슥해도 꺼질 줄 모르는 저들만의 눈짓이
우리가 모르는 골짜기가 되고 강물이 되어
닭 울음소리 담을 뭉개는 새벽녘이면
또 어디로 쉬임없이 흘러갈지 몰라도
무시로 저무는 별을 봤지요
어깨 겯은 나무들이 둥둥 떠오를 즈음
밤은 먼발치의 길을 덮고 언덕을 덮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 우리는
얼굴 하나로 꼿꼿이 서서 별을 봤지요

 

ㅡ서지월 시 <팔조령에서의 별보기> 전문

 

  물론 <팔조령에서의 별보기> 이 시는 별이 가장 맑고 선명하게 보이는 밤에 팔조령에 올라 그 풍광의 운치를 읊은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고 있는 시이니 더없는 보람을 가지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나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눈발>이라는 시가 또 있는데 1986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된 시로 감히 나의 출세작으라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세계의 가장 평안한 牛車에
실려가고 있다

 

아침 상 받으면
풋풋한 생채나물
그 미각을 더불어
어린 날의 서당골 물푸레나무
결 고운 길을 따라
잠 덜 깬 포대기 속 아이의
꿈결같이 굴러가고 있다

 

우리가 닿아야 할 예지의 나라
순은의 밀알들,
바다와 강이 놋요강처럼 놓이고
능은 풀잎처럼 잠든다

 

문경새재에 눈이 내리면
청솔가지 꺾어들고 오는
하얀 버선코,
사슴의 무리가 눈을 뜬다
지붕밑 동박새가 살을 부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눈은 내리고
누군가 흰 고무신 눈발 속을
조심조심
미끄러져 가고 있다

 

아침 신문 유액 위 '조선통사'가 빛나고
한술의 배고픔 보다 천근의 무게로 울려올
우리의 풍악소리.....


몇 백년쯤의 뒷날을 다시 생각노니,

지금 나는
세계의 가장 평안한 牛車에 실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간다

 

ㅡ서지월 시 <조선의 눈발> 전문.

 

  역시, 이 시에서는 지역역서와 민족 고유정서 그리고 역사의식까지 가미한 웅장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문경 새재 역시 영남의 대표적인 산고개이며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벼슬길의 관문으로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가는 벼슬길이었는데 그걸 나는 놓치지 않고 한 편의 시로 썼던 것이다.
 ‘우차(牛車)는 소달구지이다. ‘청솔가지 꺾어들고 오는 하얀 버선코’ 는 한국여인의 표상으로써 ‘코고무신’의 실체인 것이다. 꽃송이가 아닌 ‘청솔가지’인 것도 고결함 내지는 의 절개 등으로 비유됨으로써 동양적 여인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이 내리는 겨울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계절 같지만 새로이 열리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고 보면, 다분히 희망적이며 민족정서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설경은 새롭게 다가오는 세계 다름 아닌 것이리라.
  나의 시중에 또 한 편 지역정서를 잘 살려낸 시가 <비슬산 참꽃>이다.

 

진달래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百姓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난 듯 큰일난 듯 발병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속에 초가집 한 채씩
李太白 달 밝은 밤 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山川草木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진달래꽃물 들였었지요

 

ㅡ서지월 시 <비슬산 참꽃>전문.

 

 이 시의 원제는 <진달래 산천>으로 오세영시인에 의해 중앙일보에 소개된 작품이기도 하다. 온 국민이 봄날이면 가슴이 들떠고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수 천년 함께해 온 꽃이 진달래 즉 참꽃인 것이다. 봄날 만산홍을 이루는 풍경은 유구한 역사속 한국민의 최대 정서로 자리한 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소월의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진달래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니, 진달래에 대한 정감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민족이 우리 민족일 것이다.
  나는 ‘다듬이소리’와 ‘초갗와 ‘청산별곡’을 곁들여 진달래꽃을 노래했고 보면, 앞으로 몇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진달래꽃은 계속 피어날 것이며 그 속에 우리 민족 고유정서인 다듬이 소리와 청산별곡 가락과 숨결은 변함없으리라 본다. 공교롭게도 내 고향의 으뜸산인 대구 달성의 비슬산이 참꽃 군락지로 유명하니 더욱 지역정서로의 문학작품으로 잘 맞아 떨어지는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발 딛고 사는 땅, 그게 고향이든 나라이든 간에 그 고유의 전통과 숨결이 스며있기 마련이다. 요는 그것을 어떤 표현수단으로 승화해 내느냐는 것이다. 독일에 가면 로렐라이가 있고 로렐라이 언덕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정선아리랑이 있고 아우라지 강변이 있듯이, 그 민족의 숨결이 예술로 승화된 모습을 보여줄 때 더욱 빛나는 것이다.

 

[6]윤미전 시 <다부재 길따라>

 

  칠곡 왜관에 가면 다부재가 있으며 또 6.25사변 때 낙동강전투로 인해 끊어진 철교가 회한의 뼈대처럼 남아있다. 우리민족 최대의 비극이라는 6.25 사변 그 동족상잔의 상흔이 거기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나,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며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그게 역사이며 되새기며 나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그 정황을 한 편의 문학작품으로 아주 잘 살려 낸 시인이 바로 칠곡 왜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고 있으며 <다부재 길따라>를 쓴 윤미전 시인이 그 주인공이다. 지금 칠곡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칠곡군협의회 의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 시는 가곡으로도 작곡 되어 불리워지고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굽이마다 돌아앉은 다부재 길따라
조팝꽃 무더기 바람에 흩어지고 있네
산허리 둥지 튼 도봉사 올려다 보며
피로 물들던 낙동강 설움인 양 울먹이네

 

발길마다 돌아앉은 다부재 길따라
솔새 한 마리 마중 나와 나를 반기네
육이오 옛 상흔 아물 길 없는가
허리 끊인 철교는 뼈만 남아 말이 없네

 

총성도 그치고 세월도 흐르고 흘러
노을만 붉게 눈빛 던지고 있네
저녁연기 피어나는 인가(人家) 내려다 보며
그날의 다부재 길 돌아서며 배웅하네

 

ㅡ윤미전 시 <다부재 길따라> 전문.

 

 다부재는 6.25사변의 낙동강 전투 막바지 기점이 되기도 했던 한국전쟁 상흔의 현장이며, 경북 왜관-칠곡을 잇는 그 지역민의 고유정서가 되어왔다. 지금도 다부재는 흰 쌀밥같은 `조팝꽃무더기’를 피우고 있는 것 보면, 그냥 지나치며 지나갈 고개가 아닌 것이다. 왜관 거주 여성시인인 윤미전 시인이 시를 썼으며 계명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창작가곡으로 작곡되어 노래로 불려지게 되어 한층 다부재에 대한 역사적 소명의식과 지역적 특성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

 우리의 옛 시골, 세월은 흘러 세상은 많이 변하고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것은 바로 지역민의 면면한 정서가 묻어있는 산고개인 것이다. 폭설이 내려도 소나기가 퍼부어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의 굳굳한 모습으로 버티어 자리 지키고 있는 이 다부재가 이제는 문학작품과 예술가곡의 공간적 무대로 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모두가 우리 민족 또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 시대의 한과 넋이 서려있는 풍정의 세계인 것이다. 유달리 가난과 시련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의 지난했던 삶의 숨결이 가곡 다부재를 통해서 새롭게 선보여 주고 있다 하겠다.
 
 다부재 고개에 올라서서 바라보이는 풍광은 그냥 한 폭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니라, 민족의 상흔이 묻어있는 풍경들로 피로 얼룩진 낙동강과 끊어져 말없는 철교가 불운했던 지역정서로 고스란히 남게 것이다.

 

[7]석화 시 <연변>

 

  내가 잘 아는 중국 조선족 시인의 시 <연변>에서도 보면, 명확히 드러나는 지역정서를 잘 살린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란 이름으로
다시
피여나는 곳이다

사래 긴 밭을 갈면 가끔씩
오랜 옛말이 기와조각에 묻어나오고
룡드레우물가에
키 높은 버드나무가 늘 푸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백두산 이마가 높고
두만강 천리를 흘러
내가 지금 자랑스러운
여기가 연변이다

 

ㅡ석화 시 <연변> 전문.

 

  잘 알다시피 연변은 중국 만주땅이면서 지금까지 가장 한국적 정서가 그대로 재현되어 오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며 일제치하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가 그곳에서 터를 잡아 살아온 땅이기도 하다. 시인은 연변이라는 곳을 바로 우리의 숨결의 현장으로 노래한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유랑정서가 배어있는 곳이 연변이다. 지금은 그 후예들이 터전을 지키고 있는 중국 만주땅 안의 서울 다름 아닌데 시인은 진달래와 기와조각과 버드나무를 통해 면면히 이어온 숨결을 되살리고 있다. 거기다가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라 했으니 말이다.  마을 뒷산에 누워계시는 할아버지와 대조를 보이며 더욱 실감을 자아낸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민족의 웅혼한 기상인 '백두산'과  '두만강'이 그 땅을 지켜온 수호신 다름없으니 <연변>은 우리 민족의 본거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시가  중국 조선족 국정교과서인 의무교육조선족학교 교과서 《조선어문》(초급중학교 1학년) 에 수록되었다니 더욱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8]남영전 시 <봇나무>

 

  역시 중국 만주땅에서 대형문예잡지 《장백산》 총편을 맡고 있으며 길림 신문사 사장으로 있는 남영전시인의 시 <봇나무>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붓나무가 바로 만주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민족의 끈질긴 삶을 만주지역에서 자생하고 있는 봇나무에 아주 잘 비유하고 있다.

 

바람의 채찍질에 등이 구불고
눈보라 물어뜯어 옷이 찢겼네

근육은 불거져서 돌뼈가 되고
살가죽 갈라 터져 창상이 되고

하늘은 너에게 공정치 못하건만
너는 하냥 쓰러질 줄 몰라라

돌바위에 뿌리박은 부락들이네
자랑차게 머리 쳐들 산민들이네

봇나무여 봇나무
굴함없고 불멸하는 족속들이여

 

ㅡ남영전 시 <봇나무> 전문.

 

  봇나무는 중국 만주땅 전역에 산재해 있는 자작나무의 일종으로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풍경은 가이 수채화를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지 않고 만주땅 전역에서 눈비바람을 무릅쓰고 꿋꿋하게 자신을 지탱해 온 끈질긴 민족성으로 노래하고 있다는데  의미 깊게 안겨든다.

  조상 없는 후손이 어디 있으며 조국 없는 백성이 어디 있겠는가. 일제치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만주땅에 메아리쳤던 독립군의 함성이 바람 불면 그 봇나무의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로 들려오는 듯, 이제는 그 후예들이 그 터전을 지켜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시인은 깨어있는 눈으로 '근육은 불거져서 돌뼈가 되고 /살가죽 갈라 터져 창상이 되'어도 '하냥 쓰러질 줄'모른다 했거니와  '돌바위에 뿌리박은 부락들이네 / 자랑차게 머리 쳐들 산민들이네'라고 읊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굴함없고 불멸하는 족속들이여'라며 민족성을 봇나무에 비유해 아주 힘 있게 표현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산엣나무인 봇나무가 만주땅을 대변하는 우리 민족성을 지켜나가는 자존의 나무로 인식되는 것도 설움과 애환의 삶에 길들여져 있지 않고는 쉬이 노래 되어 읊조려지는 것이 아니니라.

  역시, 중국 만주땅 나아가서는 중국 전역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남영전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잔잔한 흐름 같으면서 그 속에 아리랑민족의 기상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이 재삼 확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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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지역정서는 고유정서로 나아가서 민족정서로 대변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 한편의 시가 속물적 근성을 가진 자들이 보면 아주 보잘 것 없는 넋두리 같이 보여도, 지역정서를 잘 살려낸 시는 그 시대를 넘어서 민족 고유 문화적 가치까지 지니며 무엇보다 값진 문화유산이 되는 것이다.  (서지월 시인 /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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