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산공원 문앞에서 바라보는 북산의 절간군.

길림 북산을 과거에는 구룡산 또는 북대산이라고도 불렀다. 길림시 서북쪽에 앉은 북산에는 동서에 두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상대높이가 100메터밖에 안되지만 그 명성은 국내의 고산대옥에 못지 않다. 그 까닭은 동쪽 산봉우리에 관우사당, 신농사당, 감리궁, 옥황각 등 4개 절이 가지런하게 분포되여있고 또 200여년동안이나 전해내려오는 절장날풍속이 있기 때문이다.

1. 관우사당

북산의 기념아치를 지나 얼마 안돼 오른쪽으로 굽어들면 돌층계가 있다. 돌층계를 따라 산허리의 《범설당(泛雪堂)》을 지나 산꼭대기 낭떠러지에 오르면 바로 관우사당이다.

관우사당의 본채는 3칸인데 청나라 강희 40년(1701년)에 길림성에 이주해온 산동적 인사들이 자금을 모아 세운것이다. 옹정 9년(1731년)에 절의 대문을 세우고 동쪽에 곁채 5칸을 지었다. 가경 19년(1814년)에 이르러 절을 보수했다. 동치 8년(1869년)에 극장과 종고루를 앉히고 선인당과 불당을 각각 3칸씩 세웠으며 서쪽에 또 곁채 7칸을 지었다. 민국 13년(1924년)에 북산을 공원이라 불렀다.

이해에 또 징산각, 저학헌을 각각 3칸, 민국 18년(1929년)에 송풍당, 잠류헌을 각각 3칸 지었다. 하여 관우사당의 부지면적은 4500평방메터로 되였다.

관우사당의 본채는 신전(神殿)과 앞뒤벽이 없는 집(卷棚)으로 구성, 관우사당의 문아래와 기둥들에는 많은 편액들과 주련들이 걸려있는데 이는 청나라의 이름있는 서예가 하소기, 민국년간에 길림성 성장으로 있은 서정림 등 많은 명인문객들의 필적이다.

2. 신농사당

신농사당을 삼황사당이라고도 한다. 신농사당은 관우사당뒤에 자리잡고있다. 건륭 3년(1738년)에 건설했는데 건륭 52년(1787년), 광서 13년(1887년)에 선후로 여러차 보수했다. 3칸으로 된 신농사당의 동서에는 또 곁채가 3칸씩 있다. 서남에는 안약지(眼浪池), 서쪽에는 춘강산각(春江山몬)이 있으며 각 옆에는 령심당(쥣心堂)과 꽃온실이 있다. 꽃온실밑에는 지하실이 있는데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이 지난세기 30년대좌우에 육문중학교서 공부하며 혁명활동에 종사할 때 이 지하실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신농사당의 부지면적은 3000평방메터.

3.감리궁

감리궁은 신농사당의 뒤문에서 약 70, 80메터 떨어져있다. 감리궁은 광서 23년(1897년)에 건설했다. 광서 34년(1908년), 민국 5년(1916년)에 다시 수리했다.

감리궁의 본채 역시 3칸으로 되였으며 동쪽의 곁채도 3칸, 서쪽에는 호선당(胡仙堂)  4칸이 있다. 감리궁주위는 벽돌담장으로 둘러쌓았다. 정전(正殿)은 신전과 앞뒤벽이 없는 집으로 되여있다. 한복판엔 일(日)신과 월(月)신을 주요한 제물로, 량쪽엔 토신(土神), 산신(山神), 룡왕신(龙王神), 뢰공신(雷公神)과 화덕신(火德神)을 부제물로 모셨다. 《주역(周易)》에 따르면 팔괘(八卦)중의 감은 수(水)를 대표하고 리는 화(火)를 대표한다 한다. 수는 음에 속하고 화는 양에 속하기 때문에 도교에서는 수와 화를 주로 믿는다. 일신과 월신의 사당을 감리궁이라고 부른다.

4. 옥황각

옥황각을 또 대웅각이라고도 한다. 북산의 절들중에서 지세가 제일 높은 곳에 앉은 옥황각은 감리궁뒤에 위치했다. 건축 역시 가장 웅위로운 옥황각은 건륭 39년(1774년)에 관진중이 창건, 건륭 41년(1776년)에 초보적 규모를 갖추었다.

옥황각을 건설한후 일찍 여러차 보수했는데 그중 민국 15년(1926년)에 길림사무독판 겸 성장이였던 장작상이 자금을 조달해 대규모적인 보수를 한적 있다. 옥황각은 이진뜨락으로 되여있다. 정문안 량쪽에는 《4대천왕》 조각상이 있으며 정문밖 량쪽에는 종고루가 있다. 기념아치우에는 길림의 서예가 장서신이 일찍 청나라때 길림장군으로 취임됐던 송균이 쓴 《천하제일강산》을 모방하여 쓴 편액이 걸려있다.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산세에 의해 옥황각은 절의 대문, 기념아치, 《타운전》을 중축으로 동서곁채가 좌우로 대칭된데서 주차가 선명해 정말 가관이다.

북산의 절군은 도교를 위주로 믿으면서 또 유가, 석가모니를 다 받아들인 사당으로 한면으로는 건륭시기 길림사람들의 종교신앙특점을 반영하였으며 다른 한면으로는 절장날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한데 있는것으로 분석된다. 청나라 중엽에 《천산사묘갑천하, 북산묘회승천산(千山寺庙甲天下, 北山庙会胜千山)》이란 말이 있었다. 해마다 음력 4월 8일(석가모니가 탄생한 날), 4월 18일(녀신묘회), 4월 28일(신농묘회), 5월 13일(관우생신)에 이 4개 사당에서는 다 절행사를 크게 펴낸다. 특히 4월 28일 묘회 기간(4월 27일―29일)에는 향불을 피우고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선남신녀들로 절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

해방후 특히 개혁개방이래 사람들은 절장날을 점차 장날무역과 관광특색을 띤 성회로 만들어가고있다. 북산 절군은 《문화대혁명》기간 역시 큰 봉변, 여러 가지로 엄중한 파괴와 손실을 입었다. 당중앙 11기 3차 전체회의이래 북산 절건물들을 보호하고 당의 종교정책을 락착하며 관광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길림시 관계부문에서는 북산의 절들을 원상복구, 정비보수해 절의 면모를 일신했다.

길림 북산 절은 길림시 도교, 불교 활동의 주요한 장소이다. 길림 북산절군은 1987년 10월 24일 길림성정부로부터 성급문물보호단위로 비준되였다.

향불을 피우고 념불하며 부처에게 절을 하고있는 중들.

감리궁의 외경.

관우사당 정전 오른쪽 역두에 걸어놓은 강덕9년에 주조한 《성세종》.

《천보구여》 액틀이 걸려있는 문을 넘어서면 신농사당이다.

옥황각 기념아치에 걸려있는 《천하제일강산》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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