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운걸 칼럼니스트

 [서울=동북아신문] 아래 글은 연변일보 1996년 9월 30일자에 실린 칼럼이다. 조선족 사회의 지난 날을 돌아보는 작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 다시 게재한다. <편집자>  

윤운걸 흑룡강신문 길림성특파원

거의 매일 매시각 가슴아프게 하는 우리 겨레들의 소식, 밀입국시도자 조선족xxx, 특대 살인사건 조작자 조선족xxx, 중국의 12억 인구가운데서 208만을 헤아리는 우리 겨레들의 범죄률이 줄곧 상승선을 긋고 있다.그중 밀입국시도자는 아마 중국 해당 범죄률의 90%를 차지하는 것 같다.오죽하면 근간에 산동성 위해시에  전문 밀입국자를 수용심사하는 구류소를 앉혔겠는가.

-1996년 2월 13일 7시 45분, 중앙텔레비죤 “동방시간과 공간”프로에서 85명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산동성해안에서 배사고로 8박9일 표류하다가 잡힌 사건”을 방송.

-1995년 9월 16일,흑룡강신문에서 “베일속에 싸인 위장결혼”이란 제목으로 조선족 처녀,과부 지어는 남편을 두고 이른바 가짜리혼을 하고“한국신랑”,“한국로인”과 위장결혼을 하고 떠나는 시실을 피력.

-1995년  9월 20일,흑룡강신문에서 “서해안해상 밀입국현장”이란 표제로 조선족동포들의 한국밀입국경로를 피력.

지급까지의 불완전한 통계(한국언론매체)에 의하면 1994년부터 시작한 해상,항공편으로 밀입국하려던 사례는 근 100건,밀입국시도자는 2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이 현상을 두고 일부학자들은 역이민이라고도 하지만 실질은 정착을 목적에 두지 않고 돈벌이를 목적에 둔 이동형태로 필자는 본다.

역사적으로 본 이민민족

중국조선족의 이민사를 간략해보면 1627년-1867년사이에 봉금령을 무릅쓰고 이민한 시기로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살길을 찾아 중국에 온 시기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1867년-1910년 사이에는 청정부에서 봉금령을 페지하고 개척시기를 마련했기에 살길을 찾아,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에 이민해왔다.

1910년-1945년 사이에는 생존을 위한 자발적인 이민도 있었지만 정치적 즉 일제와 싸우기 위해  온 항일투사들도 있고 또 일제의 강제이민도 있었다.

1945년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주로 중국의 동북지역에 216만3000명이 건너왔다.그중 강제이민,집단이민이 3분의 2를 차지했다.헌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시기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100여만명을 헤아렸다.절반 넘어되는 우리 민족은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다시 조선(한)반도로 역류한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이민민족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심리는 정착심리보다 이동심리가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중국조선족은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형제민족과 함께 공동히 적과 싸우며 중국을 조국처럼 지켜가면서 중화민족일원으로서의 역할도 남김없이 발휘했다.1943년의 통계를 보면 우리 민족이 동북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으로 만든 것이 31만6899헥타르로서 당시 전 동북지역 논면적의 90%를 차지했다.

또 일례로 항일투쟁은 물론 중국해방전쟁시기에 각오가 높은 우리 민족은 새 중국 창건을 위해 6만3000여명 사나이들이 해방군에 용약 참가했는데 이는 조선족인구의 5%를 넘는다. 전쟁시기 목숨을 잃은 연변지구의 조선족렬사는 3550명으로 길림성렬사의 93%에 달한다. 때문에 이민민족으로서의 우리 조선족은 중화민족력사에 빛나는 편장을 엮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방후에도 우리 민족은 당의 방침,로선에 따라 사회주의건설에서도 하냥 앞장서기만 했다.이런 민족의 일부가 왜 개혁개방시기에 들어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법을 무시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게 되였는가?

개혁개방의 물결이 일게 되면서 조선족은 엄청나게 변한 세상을 알게 되였다.이런 크나큰 충격속에서 일부 사람들은 가치관념이 따라서지 못해 국법을 무시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

그제날 토막나무를 때면서 이밥을 먹으면 대만족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180도로 바뀌여졌다.그제날에는 자전거도 없이 몇십리 지어는 몇백리 길을 걸어야 했고 시골에서는 지금도 소수레를 주요교통도구로 쓰고있는 우리 조선족은 한국에서 자전거는 보건체육용으로 리용되고 소는 식용으로 하기 위해 기르며 수레는 력사사명을 완수하고 “골동품”으로 취급되여 박물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한국의 일인당 소득은 만딸라,중국의 일인당 소득은 겨우 350딸라라는 수자적대비도 알게 되었다.친지방문차로, 공무차로 한국나들이를 한 사람들에게서 조상의 나라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이야기를 전설에서 나오는 신화처럼 들은 이웃과 동료들은 부럽기만 했다. 처음에는 약장사로, 다음에는 단기취업으로 부자가 된 조선족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직 우리 혈맥이 이어진 한국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부자로 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조선족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조선족의 대부분은 시골에서 살고있다.동북3성의 통계에 따르면 60%이상이 농사에 종사하고있다. 도시와 농촌의 수입차이,로동강도차이,문화생활조건차이,자녀교양차이...이 모든 것은 농촌에서 도시로,농업에서 다각경리에로,해외에로 진출하는 대이동을 초래했다. 례하면 얼마전 5000여명으로 통계수자가 나오던 북경의 조선족인구가 지금 5만여명으로 급증, 몇백명밖에 안되던 산동성의 조선족인구가 지금은 4만여명으로 급증하고 있다.따라서 출국열을 올리는 우리 민족의 사례는 천지개벽의 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중국조선족의 한국방문인수는 12만 1049명,1992년까지 두만강통상구를 거쳐 조선을 방문한 인수(대부분 장사의 길)는 16만여명,1993년도에 러시아장시길에 오른 연변의 조선족만도 2만여명,이밖에 연수,로무송출로 미국,싸이판,아르헨띠나,리비아 등 나라에 나간 우리 민족은 중국의 그 어느 민족보다 인구당 비례가 높다.

중국조선족의 대이동은 정상적인 현상으로 불 수 있다.한족들도 그제날 나라가 동아병부로 되니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미국 등 나라로 가지 않았는가?한국에서도 60년대에 살기 힘들어 많은 사람들이 구라파,중동으로 이동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자세

그제날 조선(한)반도가 망국의 설음으로 신음할 때 중국이란 나라는 그래도 우리 조상들을 한몸에 안아주었다. 그래서 조선족은 한족들과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고있다.

특수한 지리,자연 환경으로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회고해볼 때 조선(한)반도는 “친부모”이고 중국은 “양부모”이다.중국조선족은 “친부모”를 잊지 말아야 하거니와 “양부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 잊지도 않을 것이다.

시장경제의 거세찬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조선족들이 대도시로 대이동하고 한국 등 해외로 나가고 있지만 돈만 벌면 꼭 정든 고향을 찾아와 고향건설에 참가한다. 연길시만 보더라도 연길시의 문화생활이 이 몇 년래 몰라보게 변한 것도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의 공로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류학갔다가 돌아오는 중국의 한족류학생은 43.2%밖에 안되지만 조선족은 미국 류학을 하고도 대부분 돌아와 고향건설에 기여하고있다.

우리 조선족의 집단구역인 농촌이 대이동으로 인하여 허물어지기 시작한다.이로 인해 자녀들의 교육난이 생기고 있다.큰 근심을 할 필요는 없다.워낙 중국교육체제에 허점이 있고 교원 특히 조선족교원 원천이 빈약하다.그래서 시골에서 억지로 “소학생이 소학생을 기르치고”,“중학생이 중학생을 가르치는 식으로”교육방침을 운영해나갈  것이 아니라 즉 분산된 교육사업을 집중적인 교육사업으로 벌려나가야 한다.그러면 엄청난 자금이 수요된다.이런 자금은 단지 정부에만 의거해서는 안될줄로 안다.바로 우리 조선족들의 대이동 속에서 나올 줄로 안다.

현재 료녕성 심양시에 조선족으로 똘똘 뭉친 서탑거리가 새로운 면모로 나타났는데 이 거리의 부지값은 기타 구역의 3배라고 한다.그래도 이 거리에는 교육,상업이 일체화로 되어나가고있다.이 돈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바로 우리 민족이 번 돈이요,한국인들이 투자한 것이다.

우리 조선족의 이렇듯 강한 삶의 의욕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지 서로 헐뜯는 고약한 습관이 자라났다.한피줄로서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도와나설 대신 사기협잡으로 피를 빨아먹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권세깨나 쥐였다고 지기 민족의 리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 아부하는 인간도 있다.아직도 해외진출문이 활짝 열린 것이 아니다. 웬 영문인지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 해외진출을 하자해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외진출(문)이 좁으니 자연 담장을 뛰여 넘는다. 밀입국은 국법을 무시하고 도덕을 어긴 행실이지만 이런 사람들을 범죄의 길에 들어서게끔 올가미를 쳐놓은 자들이 있다.해외진출(문)이 좁은 기회를 리용해 해내외로 결탁하여 폭리를 얻은 고약한 자들이 있는가 하며 또 그들을 두둔해 비렬한 “정책”을 제정해 놓은 관리들도 있다. 이런 자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민족의 건전한 대이동이 있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백성들만 골탕을 먹게 된다.

어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재일본 한국인이 일본국적을 얻기 위해 시종 한국인아라는 것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일본국적을 가진후에 한국인이라는 것이 발각되여 일본국적법에 의해 기소당했다.헌데 한고장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이 한국인을 대신해서 “그 사람이 한국인이면 어떠냐?”며 데모로 정부의 행실을 질책했다.

이 기사를 읽으며 코마루가 찡해났다. 제2차세계대전후에 일본에서는 중국땅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갈 수 있게끔(적지않은 일본인들이 중국국적에 가입한 것으로 알고있다)허용했을 뿐더러 중국땅에 묻혀있던 일본인 해골까지 다 파서 가져갔다.
헌데...

우리 자신도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을 때 왜 우산을 갖추지 못했는가?”고 후회하지 말고 평소 “일기예보”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 큰 사단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무단행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에서도 조선족들의 해외특수한 관계를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려 “우산”도 마련해 줘야 하거니와 탄탄대로를 질주하게끔 넓은 길을 마련해 줘야 하며 또 “도로표식”도 잘해 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족들의 만만디성격도 일부 배우는 것이 좋을상 싶다.앞뒤를 챙겨가면서 “도로표식”도 잘 보고 빨리 뛸 때에는 빨리 뛰고 천천히 뛸 때에는 천천히 뛰여야 한다.개구리도 멀리 뛰기 위해서는 잠시 뒤걸음질하지 않는가?조선족의 호미와 한족의 호미를 비교해보아도 그 성격을 알 수 있다.조선족은 자루가 짧은 호미로 김을 매다보니 허리가 곱사등이 되어 밭 한고랑도 절반쯤 매고는 단김이 빠져 “에라 모르겠다”고 하고는 벌렁 앉아 휴식을 취한다.그쯤 한족은 우산같은 초모자를 쓰고 허리를 쭉 펴고 호미질하다 보니 힘도 크게 들이지 않고 서서히 따라잡는다.

이런 리치에서 볼 때 우리 조선족은 기회가 왔다고 너무 성급해하지 말고 나라에서 제정한 각종 정책과 법규들을 잘 집행해나가야 한다. 오직 이래야만 우리 조선족들은 정든 땅을 영원히 고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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