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인] 한영남근작시 5수를 평함

허인 약력 : 본명 허창렬. 시인, 평론가. 기자/편집 역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전부회장. 동포문학 시부문 대상 등 수상 다수.

[서울=동북아신문]영원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비롯된 말인줄로 알고있다. 기세경[起世]이나 구사경[具舍], 십륜금강[十]을 살펴보면 한겁(一劫)은 대략 1279840000여년정도,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또 하나의 대천세계에는 1000개의 소천세계가 들어있으니 어찌보면 영원은 끝이 없을듯도 하다. 하지만 짧다면 손가락으로 먼지를 훌쩍 털어내 듯이《指一挥间》 결국 하나의 찰나(刹那)에 지나지 않는 셈이기도 하다. 시인이 시인으로서 자신만의 절제되고 함축된 시어들을 세상에 내놓고 오래도록 남으려 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어쩌면 시인 그 자신의것만이 아닌 이 세상의 모든 영혼의 스펙터클(壮观)한 울부짖음, 즉 자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리고 천인합일(天人合一) 우주와 인간의 진실한 목소리를 터닝포인트 (折点)로 들으려 하기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페인 철학자 미구엘 드우나무노는 디테일하게(详细的) "슬픔의 습관을 떨쳐버리라. 그리고 너의 령혼을 회복하라"고 토파한 적이 있다. 이렇듯 좋은 시는 치유의 힘, 즉 재생의 역활을 하기도 하며 우리 모두의 령혼의 심층부에 가 닿기도 한다.

<인생은 소설이 아니다>, <늙은 술병의 이야기>, <어느 여름의 하오>,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절대의 고독>, <비루먹은 개와 비루먹은 개보다 비루한 인간의 동침> 등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들은 첫째 읽기에 편안하고 둘째 변죽을 두드려 중심까지 울려주는 극히 세련된 시어들로 담담하게 엮어지고 있으며 셋째 결과적으로는 삶에 대한 통찰이라든가 깨달음, 즉 일종의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전달하려는 그런 측면에서 깊은 장점이 있는것 같다.

<인생은 소설이 아니다>의 경우 짧지도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을 드라마틱(戏剧性)하게 손으로 만져가면서 지나가는 바람, 강물, 락엽, 머리털ㅡ 등등 지극히 평이로운 시어들로 도킹(接)해가면서 아주 통속적이고도 어쩌면 너무나도 보편적인 주제를 뛰여넘어서려 하는 시인의 장인적인 그러한 정신적 가치와 예지가 돋보이기도 하며 <늙은 술병의 이야기>, <어느 여름의 하오>,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절대의 고독>에서는 시적 공간의 정밀한 내면성을 절제되고 정갈한 오직 자신만의 싱싱한 기억 속으로 재확인시켜가면서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인간상을 내레이션(解)으로 다소 긍정적이고 감상적인 새로운 방법으로 자연스레 풀이해나가면서 합리주의 바탕을 근거로 인간의 진실한 한 단면을 말이 아닌 생동한 그림으로 보여주려고 하고있는것 같다. 또한 인간 모두ㅡ 태초 이전의 그 순수함보다 더욱 가까운 현실속으로 독자들을 깊숙히 끌어들여 함께 사색하고 고민해려는 각고의 노력이 엿보여 더욱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이렇듯 령혼과 세상을 련결해주는 하나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5수를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가도록 하자.

우리 속담에 <시작이 절반이다>는 말이 있다. 내노라 하는 허다한 시인들의 근작시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시를 내추컬러(自然色)로 자유분방하게 나름대로 이끌어 나가는것이 아니라 쥐여짜고 시에 끌려다니면서 자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띄여 채 읽기도전에 벌써 눈살부터 찌프리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그런 시인들이 <노력파>임은 승인하나 결코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과 초감각적인 재치는 여직 채 갖추질 못한 지극히 평범한 <천재>도 아닌 <둔재>들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이 방면에서 한영남시인은 어느 누구 하나 감히 흉내조차 낼수 없는 깁스된 상상이나 갭(差)이 없이 내추럴하게 적당한 울림, 즉 공명감을 손바닥안을 들여다 보듯이 훤히 잘 알고 있는 몇몇 안되는 재능을 갖춘 그런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되돌아오지도/만져지지도 않는다/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인생은 소설이 아니다>에서 <만져지지도 않는다>는 이 표현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어들로 구성된 제1련을 순식간에 황금정률로 바꿔놓는다. 또한 절제된 시어의 매력을 리메이크(再制作)로 증폭시켜 자의였든 타의였든간에 읽는이들로 하여금 모두 함께 공유할수 있다는 그러한 직감, 촉감, 예감을 오직 주제에만 올인할수 있도록 유인하여 마침내 참여의식과 함께 궁금증을 정갈한 샘물로 목을 추겨 갈수 있게끔 캐릭터를 증폭시켜 놓았으며 /바람은 지나가면/그만인것을/바람의 끝을 잡고/쫓아가봐도/바람의 거처는 알수가 없는것을/인생은 /다가오지도 스쳐가지도/않는다/강물을 보아라/강물이 흐른다고/생각지 마라/강물에 버린 락엽이/어디론가 흘러갔다고/생각지 마라/에서 다시 볼수 있듯이 시인은 멈춰서고 정지된 삶의 울타리에서 결코 움직이는 삶을 지켜보는것이 아니라 오직 시인만의 예리한 눈으로 움직이는 사물속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경험적으로 파헤쳐보려고 하였으며 /인생은/버려지지도 사라지지도/않는다/술을 억수로 마셔도/취할줄 모르는/술병처럼/비속을 걸어도/젖을줄 모르는/머리털처럼/인생은/ 소설도 드라마도/아니다/에서는 생을 보낸뒤의 비장한 각오나 후회조차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인 삶을 헤이드라이트로 재조명하여가면서 삶의 무늬를 스릴 넘치게 채색으로 현란하게 그려놓은듯 싶다.

신비주의를 뜻하는 <미시티시즘> 고대 희랍어에서 단어로써 <입을 닫고 비밀을 지킨다> 뜻이라고 한다. 이렇듯 시는 령혼의 제일 자연스런 목소리이기도 하다. 신비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우리는 잠시 가던 길이라도 멈춰서고 한참씩 귀를 기울려야만 한다. 아랍계 미국 시인 나오미 쉬하브 니예는 <너무 늦기전에 자신의 삶을 살라> 설파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인생의 전부이기도 하며 또한 전체이기도 하다. 이렇듯 시는 인간의 령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도 한다. 가다가 만난/바위 하나/에서도 볼수가 있다싶이 <<절대의 고독>> 역시 리듬은 마찬가지 실례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극히 경험적이고 감상적인 시인의 독특한 체험으로 삶에 대한 인간들의 너무나도 익숙하고 애틋한 천착으로부터 시작하여 뒤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리믹스하게 /억겁을 저렇게 엎드려/있었겠지/라는 다소 심각한 감오는 불쑥 독백의 질문을 던져놓아 읽는이들로 하여금 도대체 무엇일가 다소 초조하게 사색하게 하며 /어깨에 내려앉은/하늘만 해도/켜켜로 삼천자쯤/억겁을 저렇게 말이/없었겠지/에서는 어쩌면 미리 준비되여 있는 인간과 자연의 동일한 맥박소리를 싸늘히 식어버린 가슴이 아니라 따뜻한 심장소리로 다시금 들을수 있게끔 무대를 설정하여 허무한 현실에서 오는 무상한 깨달음을 불행하고도 행복하게 영원한 고독속에서 숙명적이면서도 저항적으로 디테일(详细的)하게 되살려 놓았으며 /삼라와 만상의/소리 /삼키고도 허기/살다가 만난//화난 바위/에서는 너무나도 오래도록 분출구를 찾지못해 억압되여온 여러가지 복잡다단한 심정들을 마침내 <<화난 바위>>라는 돌출구로 재치있게 폭발시켜 간결함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아낌없이 제대로 보여주는듯 하다.

다음 <늙은 술병의 이야기> 경우 /젊은 술을 담은 늙은 술병은/비칠거리지도 않고 /내게로 향기로/되었다/다독이지 마라/거들먹거리지도 마라/한잔의 술이/ 되어오기까지/늙은 술병은 얼마나/많은 서러움을/속으로만 속으로만/새겨야 했던가/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접촉에서 가장 익숙한 시각과 손이 아직 따뜻한 느낌으로 낯선것들을 익숙한 곳으로 지체없이 데리고 가장 정신적인 기탁으로부터 풀려나오는 아득히 멀고 가까움, 생성적인것과 파생적인것, 기쁨과 고통을 현대시의 세가지 방식인 ㅡ느낌, 관찰,ㅡ변형으로 긴장감을 완화시켜가면서 누구나 령혼의 거처로 되돌아갈수 있게끔 단단히 말뚝까지 박아주었으며/초농낀 부러운 // 생겨난 산호초는/싱싱하게 젊음을/이슬덩이같은 구름은/늙은 하늘을/ 자맥질하며 가르르를/쏟아내고있었다/ 등등 에서는 내면적인 시간에 대한 새롭고 직감적인 발견을 새삼스레 어깨 흔들어 일깨워주고기도 한다. 시인의 령혼을 투시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속에서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단어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시에서는 여러차례 "늙었다"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데 무척 흥미롭고 가장 인상적인것은 그렇게 포장된 늙음속에서도 아직까지 싱싱하게 살아 쉬는 젊음을 빛발처럼 가슴에 받아안는듯한 느낌에 파스터 컬러(淡柔和色)가 너무나도 어울린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찍 벤은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이미 완성이 된다. 허나 작자는 그의 텍스트를 모를뿐이다" 말한적이 있다. <어느 여름의 하오> 경우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한모퉁이를 세심한 스케치로 완성시켜놓고 수없이 되풀이되는 현실속에서 오는 여러가지 콤플렉스와 스트레스, 수많은 폴더때문에 격하고 욱해질대로 욱해진 징크스를 맥주 대신 커피와 콜라를 사들고 돌아온 동료의 얄미운 행위에 강력한 불만을 토로해가면서 "빵만큼이나 건방져가지고" 실례인지조차 모르게 맥이 풀리게 하는 "건방진 콜라와 커피" 덕분에 오후 내내 자장가를 부르게 하오의 아이러니컬한 기억을 수면우에 불쑥 떠오른 얼음덩이와도 같이 차겁게 적어놓은것이 아니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과민한 반응으로 실생활 모퉁이로 적은것 같다.

다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시작하면/배낭도 없이 길에/나선다/눈이 너무 내려서/길이 보이지 않으면/아무데나 발길/닿는대로 간다/준비 없이 목표 없이/나선 /어디인들 갈곳이/아니며/누구인들 만날 사람이/아니랴/하늘에서 눈이/펑펑거리면/인사도 없이 길을/나선다/막차를 놓친 길손처럼/약간 허둥거림을/즐기며 간다/길은 눈밑 숨어서 나를/ 따라온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에서 제일 성공적인것은 아무래도 제일 마지막 련의ㅡ /길은 눈밑 숨어서 나를/ 따라온다/인것 같다. 마야 앤젤루는 <시는 인간의 목소리를 위하여 씌여진 음악>이라고도 말을 하였다. 이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에서는 그러한 경쾌한 리듬이 반갑도록ㅡ 기쁘도록ㅡ 슬프도록ㅡ 시내물처럼 졸졸 가슴에서 가슴속으로 흐르고 있는것 같다.

밤이였을게다

비가 내리고 있었을게다

나는 이불을 여미며 어떤 고단함을

달래고 있었을게다

얼마쯤이였을가 제법 비루먹은 개가

이불속에 들어왔을게다

나는 비루먹은데다가 비까지 흠뻑 맞아

더없이 더러워 보이는 개를 끌어내기 위해

안깐힘을 썼을게다

개는 따스한 이불속에서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무등 애를 썼을게다

하는수없이 포기하고 터럭이 군데군데

문드러진 개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했을게다

그러자 개는 점점 샅을 파고들기 시작했을게다

거기는 아니야 그러면 안돼

이렇게 누워야 아무리 달래고 얼리고 해도

개는 막무가내 한사코 고집이였는데

아마 비루먹은 개는 저를 어떻게든

쫓아내려는 비루한 속내를

아는 모양이였을게다

나는 비루먹은 개보다 비루한 속내가

발각되자 팬티를 까내리고

불털을 뽑아대기 시작했을게다

그러자 나는 점점 비루먹은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는 비루먹은것들끼리 즐겁고 있었을게다

태양이 죽어버린 어느

까만 밤이였던가 아마

<비루먹은 개와 비루먹은 개보다 비루한 인간의 동침> 전문이다.

그야말로 해학과 풍자의 결정체, 몇번이고 다시 읽고싶은 브아이피같은 존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수 없는 좋은 시임이 틀림없다. 즉 빙의적인 사색으로 인간승화를 이끌어낸 한떨기 럭셔리한 꽃이라고 하여야 겠다. 또한 기승전결의 탄탄한 구조우에 이야기식으로 자연스럽게 시적화자를 편승시켜 인간 본질의 그 깊숙한 내면속의 오래동안 억압되였고 무질서해진 저항의식과 자기성찰, 즉 이 세상 똑같은 중생의 어려움에 왜서인지 눈굽이 축축해지게끔 하는 타협과 공존의 리유를 최대로 클로즈업하여 생생히 두눈에 보이는듯이 그림으로 완성시켜 놓은것이 압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슬 푸른 장검은 아닐지라도 뾰족한 송곳에 아프게 허벅지가 찔리운듯 하여 마음이 알짜지근한 느낌이 드는것을 어쩔수가 없다. "시를 쓰는 만공여덟번째 이유"에서 한영남시인은 "그 만공여덟번째 리유가 시로 되지 않아도 나는 시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고 말을 한다. 한영남 시인의 근래 창작경로를 곰곰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의견은 바로 이렇습니다. 남이 뭐라하든 우선 서정단시이고 거기에 이런저런 현대적수법을 가미시켜 기본은 종래의 전통시로 흐르게 하고 거기에 마치 이밥에 열콩알이 다문다문 씹히듯이 새로운 기법이나 새로운 착상, 새로운 언어조합을 섞어서 읽을맛이 더욱 감칠맛나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저는 될수록 시어들을 많이 정련해볼려 하는데 그게 아직도 잘 아니 됩니다. 시인이 시어를 아끼려 하는것은 곧 수련의 진미이기도 하지요. 우선 착상이 좋고 시는 시의 흐름이 나름대로 류창해야 한다고 생각도 합니다…"

셋째."시에서 엉뚱한 비유와 은유, 직유는 자못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엉뚱한 상상력과 시인의 순발력은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도 하여주며 또한 시의 깊은 곳으로 더욱 빨리 다다르게도 하여 시인이 재치껏 만든 시적장치속에서 스스로의 자신들을 반추하게끔 하여 시원하다못해 통쾌하다는 느낌도 줄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삶에는 결코 두번 일어나는것은 없다. 또한 일어나지도 말아야 한다.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매일 련습없이 태여나고 실습없이 죽어가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 보내온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5수를 살펴보면 창작초기의 그 절절함이 많이 줄어들어 조금 아쉬운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그 대신 또다른 정교함이 돋보여 필자는 "잘 다듬어진 문체를 통해 감정의 절제와 그 거리감, 그리고 포용과 관용으로 희로애락을 잘 표현해 나가는 것이 곧 시이기도 하다"고 조심스레 생각을 가져본다. 아무튼 바야흐로 밝아오는 2015년 새해벽두를 맞이하면서 한영남시인이 시적 탐구의 길에서 한층 더 업그랩이 되고 한층 더 차원이 높은 시들을 더욱 많이 써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심양에서 201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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