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선(시인, 문학박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의 저서 『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애지)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2편을 수록한다.
아름답고 심금을 울리는 시와, 시보다 더 아름답고 삶을 관조하게 하는 시평을 읽으며, 독자들은 저물어가는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 새날을 맞이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ㅡ 편집자 주

'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 표지


마른 우물    

시 / 임동윤  

 

주렁주렁 온몸에 링거줄을 매달고
가랑가랑 숨결 잦아드는 마른 우물 하나 누워 있다
수없이 퍼내어도 늘 찰랑찰랑 만수위를 이루었던 몸
두레박만 내리면 언제나 뼈와 살과 단단한 생각들을
넘치게 담아내셨던 우물, 우리 육남매가 퍼마셨으나
하룻밤만 지나면 다시 그 우물은
출렁출렁 일정한 만수위를 유지하곤 했었다
그러던 몸이, 어느 날 문득 폐답이 되어 있었다
조금씩 잦아들면서 드러나는 밑바닥
넘쳐나던 물은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나뭇잎만 쌓이고
검버섯 핀 벽엔 하루살이 모기떼만 알을 까고 새끼를 쳤다
별빛 달빛 찰랑거리는 여름도 가고
이젠 황갈색 버들잎만 툭툭 떨어져 내린다
찢긴 걸레조각과 과자봉지만 둥둥 떠다니는 그 속,
찰랑대던 몸 대신 꼬로록 잦아드는 물소리
링거액 떨어지는 소리만 병실의 고요를 흔들고 있다
이젠 퍼 올릴 수 없는 마른 우물 하나
온 몸에 링거 가득 매달고 가랑가랑 누워 있다

 

[시평 이혜선] 생명의 젖 주던 어머니 이젠 ‘마른 우물’ 되어...

 

추수를 해버린 텅 빈 들녘, 곡식 그루터기만 남아 누워 있는 논밭 앞에 서면, 자식들에게 젖을 다 빨리고 말라버린 어머니의 쭈그러진 젖가슴이 떠오른다. 평생 마르지 않는 젖줄을 퍼 올려 뭇 생명을 키워내고 이제는 기운이 다 진해져 말라버린 마른 우물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험한 세상살이 찬바람 이겨내느라 불어터진 입술로 마른 침 삼키며, 잃어버린 용기를 다시 얻으려 그 우물 앞에 와서 아직도 마른 두레박을 내려 보는 다 큰 어린아이 내 모습이 참 한심하게 비친다.

수없이 퍼내어도 늘 찰랑찰랑 만수위를 이루었던 몸인데, 언제까지나 그 우물에서 목을 축이며 생명을 유지하고 용기를 얻고 두 팔 휘두르며 뽐내며 세상 속으로 다시 나갈 수 있으리라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었는데... 어머니는 어느새 온 몸에 저승꽃이 피고 숨결 가랑가랑 잦아드는, 황갈색 버들잎만 툭툭 떨어져 내리는 폐답이 되어 누워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자식들 모여 앙상한 어머니 온몸에 주렁주렁 링거줄을 매달아 연명을 기도해보지만 그 또한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오히려 고통만 드리는 건 아닌지...

그래도 어머니는 내년 봄이 되면 메마른 가슴에 다시 새싹을 틔우고 새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봄비에 젖는 새 땅이 되고 새 우물이 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이 입술을 대고 그 젖을 빨아먹고 자라는 영원한 우리의 대지, 위대한 우리의 어머니이니까.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

 시 / 최금녀

 

나무들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잠시도 너희들 잊지 않았다

강물들아, 울지 마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좋은 시절이 오고 말 것이다

바람아, 우리 언제 모여
밥 먹으러 가자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한솥밥
우리들 함께 먹는 밥
먹으러 가자

압록강아,
그날까지
뒤돌아보지 말고
흘러 흘러만 가다오.

 

[시평 이혜선] 한 솥밥 먹고 한 식구 되는 그날까지...

 

화자는 지금 압록강 변에 서 있다. 그러나 화자는 지금 태어나서 자란 북녘 땅 함경남도 영흥에도 있고, 부산 영도섬 선창가에서 도나스를 팔던 열한 살 피난민 소녀가장으로 서 있고, 참혹한 전쟁의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헤쳐 나와 어엿한 성인이 되어 활달하게 오가던 서울 거리에도 서 있다. 그렇지만 화자는 두 동강 난 조국에서 지금까지도 눈앞을 가로막는 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가슴애피’로 서 있다.

반동강이 난 남쪽의 조국에서 북녘 땅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바다로 하늘로 둘러 둘러서 도착한 남의 땅에 서서 강 건너 그리운 고향을 바라보는 화자의 의식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겨레의 아픈 역사가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소용돌이치며 강물 되어 울고 있다. 그래서 더 더욱 화자에게는 저 강 건너에 있는 나무들이 강물들이 바람들이, 삼라만상 모두가, 내가 만나야 할 고향이며 가족이며 친지이며 분신으로 느껴져 살갑게 다가온다.

그래서 화자는 시간과 공간과 자연과 인간과 자아와 타자의 구별을 초월하고 바로 한 몸이 되는 지극한 만남을 통해 그동안 앓아온 이별과 망향의 상처를 치유하고 ‘한솥밥’ 먹기를 희원한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은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한 식구가 되어 한솥밥을 함께 먹는 것이다. ‘뒤돌아’보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겨레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앞으로의 희망을 위해서만 흘러간다면 반드시 ‘한 몸’ 되는 날이 오고 말 것이다. 비단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 누구나 압록강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볼 때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를 노래하고 있어 가슴 쓰리고 아픈 공감을 느끼게 한다.

 

李惠仙:
 1981년『시문학』등단. 시인. 문학박사. 한국 문인협회 부이사장.
시집『흘린 술이 반이다』『운문호일雲門好日』『새소리 택배』『神 한 마리』외 다수. 저서『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문학과 꿈의 변용』『이혜선의 명시산책』 윤동주문학상, 현대시인상, 동국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상(평론)외 다수 수상. 세종우수도서 선정(2016). 동국대 외래 교수, 세종대, 대림대, 신구대 강사, 동국문학인회 회장, 시문학문인회 회장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이사.『자유문학』추천위원,『불교문예』편집위원。
e-mail: hs920@hanmail.net 
blog.daum.net/hs920(다음 블로그 <시인 이혜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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