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숙

[서울=동북아신문]입동이 지난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가을은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빛바랜 단풍잎들을 마지막 무대에서 연출하게 하였다. 가을과 겨울사이에서 방황을 하던 지난 11월 17일, 재한동포문인협회에서는 당일코스로 강원도에 문학탐방을 다녀왔다.

이른 아침, 알람소리에 번쩍 눈을 뜨고 부랴부랴 준비해서 출발장소로 가니 벌써 부지런한 회원님들이 많이 와 있었다. 관광버스는 설레는 가슴을 안은 우리를 싣고 4시간 가까이 달려 강릉 오죽헌에 도착하였다.

그 곳은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삶이 녹아 있는 곳, 세계최초 모자(母子) 화폐인물 탄생지였다. 우리는 흔히 한사람의 자취를 좇아가기 위해 나서는 여정이지만, 그 곳에서는 두 사람의 발자취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신기한 소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삶의 가치관을 말해주듯이. 조금 걸으니 오른 쪽에 율곡 이이의 동상이 있었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는 근엄한 자태의 동상이었다. 율곡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시인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9년(1564년) 생원시(生員試),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급제한 후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등과 이조(吏曹), 형조(刑措), 병조(兵曹)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율곡 이이의 동상을 지나고, 신사임당 초충도(草蟲圖) 화단을 지나면 자경문이 있다. 율곡 선생이 20세 때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뜻을 기리고자 이름한 문으로 자경이란 “스스로를 경계함”이란 의미라고 한다. 500 년 전 유학자(儒學者)의 수양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자경문으로 들어 가면 바로 오른쪽에 율곡선생유적정화기념비가 있고, 조금 걸어서 층계를 올라가면 오죽헌(烏竹軒)이 있다. 한국에서 주거 건축으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인 오죽헌은 중종 31년(1536년)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이 탄생한 곳이며, 율곡 선생의 외가로서 바로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었다. 집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집 이름이 오죽헌(烏竹軒)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들이 사는 사랑채와 여자들이 사는 안채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공간은 막힘없이 틔어있었다. 남녀차별이 엄격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조선전기인 16세기 무렵까지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조선 후기에 비해 비교적 높았다.

담벼락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에게 높고 낮음이 없고 남녀가 서로 귀하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해줌으로써 그 당시 백성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가짐을 삶속에서 배우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하였다.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신사임당 영정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넓은 마루로 율곡이 놀며 글을 읽던 곳이다. 사임당과 율곡이 마루에 앉아 함께 글을 읽는 모습이 그려졌다.

안채 왼쪽 편에는 율곡 이이의 유품을 보관하던 어제각이 있었는데 책과 벼루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원래 오죽헌 앞마당에 있던 것을 1970년대에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지으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보는 시간이었다. 집이란 장소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어떤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집은 인간의 기본이 형성되는 공간이다. 집의 정서와 습관이 인간의 가치관이 될 것이다. 오죽헌에서 자라면서 배운 것 들이 신사임당의 인품이면서도 예술이 되었고, 그 것이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문 앞에는 율곡 선생 당시에도 있었던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있었다. 소나무는 푸른 잎 그대로 인데 배롱나무는 벌써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것 같은 신비로운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향해 나는 두 손을 모아 마음속으로 빌었다.

“저에게도 삶의 지혜를 주시옵소서!”

오죽헌 마당을 가득 채운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우주의 신비와 원리를 깨우친 신사임당은 그 것을 화폭에 담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갔으며,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야말로 율곡 이이라는 대학자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아닐까! 신사임당이 몸소 실천했던 것들을 율곡 이이가 보고 자라며 본인도 당연히 배우고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한바퀴 돌고 내려 오면 신사임당 동상이 있다. 위대한 어머니로, 우리민족의 만세(萬世)의 여성상으로, 문인이자 여류 화가, 예술가였던 신사임당의 넋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하였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당시 서인(조선시대 붕당정치 초기의 당파)과 노론(서인과 같이 성리학적 명분론을 신봉)의 사상적 뿌리인 이이의 “어머니”로서의 “현처양모”의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정치적으로 가려진 점도 분명이 존재한다. 하지만 “화가 신씨”든, “현모양처”이든 하늘은 성인(聖人)이 나실 곳도 함부로 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문화유산은 뿌리이자 근본이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가치관일 것이다. 이 것이 오죽헌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였다.

 

제2편

천년을 꿈꾸어 온 깨달음의 사찰 낙산사를 찾아서

 

점심식사 후, 낙산사로 이동하였다. 낙산사 입구의 홍예문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 시 산불로 소실되었지만 2007년 원래의 모습으로 보건 되었다고 한다.

홍예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낙산사 복원 후 故노무현대통령을 비롯한 고급 인사들의 기념식수가 쭉 이어진다. 이러한 기념식수는 현대적인 아름다운 조경을 보여주었다.

홍예문을 정면으로 계속 걷다가 이정표부분에서 왼쪽으로 약간 가파른 길을 걸어 오르다가 다시 왼쪽 계단을 올라가면 사천왕문을 만날 수 있다. 이 사천왕문은 1914년 중수되었고, 한국전쟁 및 2005년 낙산사 화재 시도 피해를 입지 않아 중수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관세음보살님의 원력 덕분이라고 하였다. 사천왕문은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천왕으로 낙산사를 지키는 왕이 다. 사천왕이 낙산사만 지키지 마시고 한반도를 다 지켜줬으면 좋겠다.

사천왕문을 지나 정면으로 바라보면 빈일루(賓日樓)가 보이고 왼쪽방면으로 범종루가 있다. 원래 이 범종루는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여 예종의 명으로 구조된 동종이 달려 있던 곳이다. 이 동종은 보물 47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는 범종루를 완전히 전소시키고 동종도 용해시켜버렸다. 결국 2006년 10월 완전히 용해된 동종을 복원해 범종루에 걸었지만 다시 보물로 지정되지는 못했다. 여행객들에게 한 사람이 단 한번만 종을 칠 기회를 주었다. 우리는 줄을 서서 한 번씩 종을 쳤다. 종소리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깨우침을 주듯 울려 퍼졌다.

조금 걸어서 올라가니 7층 석탑이 보였다. 7층 석탑은 보물 제 4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낙산사 화재 당시에도 살아남았다.

조금 더 올라가니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아담하게 가꾸어진 흙길을 걸으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빈 흔적들이 보였다. 나도 흙길을 걸으며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면서 고운 돌 하나를 주어서 올려놓았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지나면 아주 웅장한 규모의 해수관음상이 나온다. 1970년대에 세워진 높이 15m, 둘레 3m의 거대한 불상조각으로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 당시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날따라 작은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우리는 마음을 씻는 자세로 해수관음상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동쪽바다 끄트머리 오봉산 품안에 자리한 천연 고찰에서 도도히 밀려드는 파도의 힘찬 진군을 바라보노라니 마음은 어느새 파랑으로 물들었다.

낙산사의 의상대(義傷臺)와 홍련암이 유명하다.

바닷가 언덕위에 위치한 의상대는 신라의 고승(高僧)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하였던 곳이다. 1925년 8각형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고 명명하였다. 의상대 앞쪽에는 이 곳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노송인 관음송이 있다. 파도소리 철썩이는 절벽위에 노송과 정자가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 곳은 동해안 일출을 볼 수 있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의상대에서 내려다보니 해안 절벽에 세워진 작은 홍련암이 보였다. 의상스님이 그 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 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7 일 후 바다위에 홍련(紅蓮)이 솟아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하였으므로 그 절벽위에 암자를 짓고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왜 연꽃이 불교를 나타내는 꽃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의상대에서 내려와 홍련암으로 가는 길에 의상대사가 그 절을 창건할 그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감로수각”이었다. 당시 바닷가의 샘물이 나 있는 곳이 흔치 않았는데 신통력으로 물을 보냈다고 한다. 차가운 날씨였지만 전설의 바닷가 샘물을 걸려 있는 작은 바가지로 퍼서 마셔보았다. 시원한 샘물을 마시니 마음이 맑아지며 세속의 찌든 때를 씻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홍련암 입구에는 시주받는 암자가 있었다. 현금을 지니지 않았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그냥 지나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가게 되면 꼭 명심해야겠다. 창턱에는 떡 공양을 하는 접시도 있었다.

홍련암 근처 풀밭에는 아직도 2005년 4월 산불흔적이 남아있었는데 그 속에서도 연보라빛 구절초가 환하게 웃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배웅해준다. 여기를 다녀가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하듯이.

전국 3대 관음성지로 불리는 홍련암은 온 마음을 다해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기도처다. 우리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온 마음을 다해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우측 중앙부의 네모난 작은 구멍으로 홍련암 아래의 절벽과 파도를 내려다 보았다. 몸을 최대한 낮춰야 한다. 자신을 낮추어야 세상이 보인다는 도리를 깨우쳐 주는 듯하였다. 사람들 소원을 들어주듯이 바다는 홍련암 아래서 쉴 새 없이 넘실거렸다. 1500년의 모진 세월을 거뜬히 버텨낸 절벽위의 홍련암, 태풍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산사태가 나도 끄떡없었다. 2005년 4월 낙산사 일대를 삼켰던 화마도 홍련암은 범하지 못했다.

낙산사를 가보지 않고선 선비라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듯이 낙산사는 시인들과 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우리 문인협회의 회원들도 낙산사에서 많은 영감(靈感)을 얻었을 것이다.

 

전설과 보물이 숨겨진 곳, 낙산사는 해빛에 바래져 역사가 되었고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되었다.

사람들은 관동팔경의 하나가 뿜어내는 아름다운 정취에 취해 낙산사를 찾지만, 낙산사는 자연이 뽐내는 수려함을 맛보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라와 당나라간의 전쟁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들의 생활이 힘들어 지자,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의상스님이 기도하여 세운 절이 바로 낙산사이다.

낙산사는 천년동안 국민들의 애환을 함께 하여 왔다.

나의 몸에는 아직도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질 것 같은 낙산사의 기운이 흐르고 있다. 그 기운이 앞으로도 쭉 이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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