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전은주 문학박사

전은주 약력: 1986년 도문 량수 출생, 연변대학교 문학 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객원연구원, 2008년 계간 ‘창작21’ 시인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1. 자신과 소통하기

사람은 본질적으로 소통하기 힘든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의 소통도 마찬가지다. 의식 부분의 뇌세포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인 아는 나는 늘 무의식인 모르는 나와의 불통을 경험한다. 칼 융은 이 무의식의 부분을 그림자로 부른다. 의식의 그림자에 속하는 이 무의식은, 의식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며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멋대로인 이 무의식 때문에 곤혹을 치른다. 의식은 행복을 바라지만, 결과적으로 무의식은 불행을 자초하는 일을 저지르고, 당당하고 건강한 삶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비굴하고 병든 삶을 산다. 운동선수가 수천 번 수만 번 연습을 하는 것도 이 무의식의 반응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의식은 언제나 산문의 법칙처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시는 혼란스럽고 모순된 무의식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산문보다 훨씬 더 독자와의 소통이 어렵다. 그러나 시인은 불통의 무의식 세계를 시에 포용하여 자신의 무의식적이고 원초적인 욕망과 서정을 소통의 문자로 표현하려 든다.

오늘 우리가 읽는 시인 변창렬의 시도 무의식을 포함한 불통의 요소를 아우르고 있다. 물론 그의 시는 그림자의 난해함으로 끝나거나 자신의 무의식 세계만을 혼란스럽게 펼쳐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불통의 무의식적 요소를 소통의 세계로 이끌어내기 위한 시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이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 시인은 다양한 소재와 자신만의 시적 방법으로 시를 창작한다.

시인 변창렬이 먼저 이루어야 하는 것은 자신과의 소통이다.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성찰이 필요하다. 시는 언제나 자신이 머금고 있는 세상과 소통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소통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자신의 서정을 형상화하는 깊이도 서로 다르다.

바람이 기대어도 싫지 않다/ 등은 좁으나 내어주고 싶다/ 기실/ 나도 흔들리며 살고있어/ 기대고 싶다/ 끝을 둥글게 만들어/ 허공에 기대고 싶으나- 풀꽃부분

이 소박한 듯한 시에는 기묘한 시적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시 앞부분의 바람과 뒤의 허공은 같은 개념처럼 보이지만 달리 사용되고 있다. 앞에 나오는 바람은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바람 같은나약한 사람이나 헛된 정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자신과 닮은 그 바람 같은 존재들에게, 자신의 등이 비록 좁지만 기대게 해주고 싶다.

각박한 세상, 한국과 같은 모진 땅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병들면 회복하기 힘든노동판에서 누구의 등이 되어주기란 쉽지 않다. 그 자신도 자신의 앞가림조차 벅찬것을 잘 안다. 자신도 흔들리고 지쳐 기댈 수 없는 허공에 기대고 싶을 정도로 외롭고 고달프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세상을 탓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 비롯된 것임을 잘 안다. 이는 세상에 대한, 자신에 대한 시인의 연민이자 아픔이다.

소외된 인간의 흔들림은 불안 때문이다. 불안한 만큼 허공에라도 기대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잘 생각해보라. 인간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흔들려서는 안 되는 줄 알기 때문에, 용기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불안할 뿐이다. 흔들리는 대로 살면 안 되는 걸까? 흔들리며 피는 갈대는 태풍에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뛰어 내릴 때/ 벼랑이 아니다/ 떨어져도 부서지는 그림자는 없다/ () / 떨어질 때/뒤돌아보는 꼴 싫은 게 사는 꼴이다

- 낙엽 1부분

뛰어 내리거나 도망쳐야 할 다급한 상황에서는 내릴 곳을 가릴 여유가 없다. 그렇다. 한국으로 이주 와서 야박한 노역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야 하는 디아스포라에게는 중국에서 쌓은 자신의 과거 이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 자신이 기자였건,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인으로 지냈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곳의 일터에서는 그냥 일당 일꾼일 뿐이다. 매순간 그 일을 할 것이냐. 하지 말아야 할 것이냐에 대한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뛰어내리듯이 힘들게 살아도 그림자 같은 과거의 이력은 늘 저만치 서 있다. 젊은 시절의 사랑이나 미래와 맺은 다짐도 마찬가지다.

너와 나, 우리가 손깍지 맺고 다짐했던 그 맹세는 이 험난한 삶으로 뛰어내릴 적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현재의 상황 말고 달리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소용이 없음을 시인은 절감한다.

이 두 시에서 시인은 이러한 현재 상황에서 자신과 소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과 소통하는 것은 현재의 위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자신이 현재 허공한테 기대고 싶을 정도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벼랑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이 두려움이나 절박함 때문이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과 소통하는 길이라는 것을 시인은 발견한다.

2. 존재에 대한 발견

인간은 어떻게 소통할까? 상대에게 다가가서 억지로라도 끌어안아야 할까? 자신과 소통하기를 구걸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 방법은 소통이 아니라 즉각적인 불통을 불러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엇보다도 소통은 자신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 의문을 의문으로 끝내지 않고 질문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삶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본질에 대하여 치열하고도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존재이자 그 의문을 질문으로 바꾸어 묻는 존재이다. 그 질문이 바른 것이라면 끝 지점에서 종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해답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화할 때, 새로운 존재의식을 지닌 지혜가, 문학에서는 새로운 시가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어떤 의문을 갖는다.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르는 것과 만나는 숭고한 순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문을 갖자마자 그것을 포기하거나 자신이 지닌 종래의 지식으로 적당히얼버무린다.

시인은 의문을 얼버무리지 않고 질문하는 자이다. 시인은 확연히 알아질 때까지 자신에게 되묻는다. 그것이 바로 자아성찰이다.

시인 변창렬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르는 것과 만나 자신에게 스스로 존재론적 질문을 자주 던진다. 그의 질문은 단순해보이지만 자기 삶의 핵심을 건드린다. 그러니까 그는 끊임없이 자아성찰을 한다.

온 몸을 태워 연기로 사라진/ 엄마/ 마디마디를 어떻게 부수었기에/ 소리가 없지/ 내 귀는/ 엄마가 훔쳐 갔나?!

-신의 눈물은 소리가 없다부분

시인 변창렬은 성찰한다. 자신이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는 것, 그러나 세상의 모순과 만나 쉽게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미래도 부질없을 것이라는 이런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한다.

 

전은주 평론가(우)와 변창렬 시인

시인 변랑렬은 그것이 엄마라는 존재 때문이었음을 발견한다. 이 발견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모든 의문에 대한 시적 전환을 이룬다. 그 소중한 이미지가 바로 엄마이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시인의 어머니는 세상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자식들을 위하여 소리 소문 없이 한생을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어머니의 헌신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가 그가 사라진 뒤에야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뒤늦게 그 숭고함을 발견한다. 그때 왜 몰랐는지에 대해 후회의 눈물을 훔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곧바로 그조차도 잊는다. ‘엄마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발견하고 체험하려는 순간에, 불행하게도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약간의 후회와 눈물로 덮어버린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그러나 시인 변창렬은 후회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랑에 대해 거듭 몸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 그렇다. 여자는 평범한 한 사람일 적에는 아프면 엉엉 울고, 지치고 힘들면 짜증도 낼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동안 시인은 어머니가 그의 를 막아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귀를 통해 세상과 가족과 자신의 고통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몸으로 막아주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어머니로 인해 자신이 세상의 고통에 신음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어머니라는 존재의 발견이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으로 표상하는 어머니의 눈물조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 그의 시적 전환이 된다.

나무는 눈을 감고/ 새끼들을 몽땅 쫓아버린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 몸부림치는 놈들도 있으나/ 어차피 떠나야할 몸이라/ 손맥을 푼 것이다/ 손에 손 잡고 살아봤자/ 다들 굶어죽을 판이라/ 걸식하는 것이 법이다/ 민낯이다

- 낙엽 2부분

이 시에서 어머니의 헌신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말라버린 주린 얼굴로 등장하는 나무(어머니)의 가슴 아픈 지혜가 엿보인다. 나무는 평생 마른 몸집을 흔들어 가며 새끼들을 키운다. 바람 잘 날이 없는 세월의 풍파와, 바깥세상의 온갖 추위를 이제 지켜줄 방도가 없다. 그런 경우가 되면 눈을 감고/ 새끼들을 몽땅 쫓아 버린다.” 그것이 자식과 함께 굶주려 죽는 것보다 더 낫다는 본능 때문에 그들을 떨군다.

엄마손에 손 잡고 살아 봤자/ 다들 굶어 죽을 판이라라고 말한다.

시인은 이미 어머니의 속마음을 눈치 챈다. “어차피 떠나야 할 몸이라는 것을 알고 어머니는 애써 눈을 감고모질게 바깥세상으로 자식들을 떠미는 것이다. 이제 자신들이 세상과 부대끼면서 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그렇지 않다. 어머니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모든 인간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온갖 보호를 받았던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나오는 그 두려움 때문에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린다. 생각해보라, 어머니의 뱃속에서 손가락을 입에 넣고 웅크린 채 잠자고 있는 태아의 모습을, 모든 불안과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고 평화롭게 지냈던 인간 처음의 모습을! 따라서 어머니는 부드러움, 따뜻함, 안락함, 완벽함으로 대변되는, 모든 불안과 위험으로부터 격리된 안전함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제 낙엽들은 그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철저히 홀로 남게 된 것이다.

이제 시인은, ‘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엄마는 부끄러워야 낯이 붉어지고/ 아버지는 울대를 세워야 얼굴이 빨개진다/ 형이나 누나나 똑같은 피부색깔을 이어 받았으나/ 난 그 빛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 /속으로 조이고 계시는 엄마는 잎이었고/ 힘들게 받쳐준 아버지는 줄기였다.

- 연꽃 단상부분

시인의 발견에는 어머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끄러울 적에 얼굴이 붉어지고’, 화가 날 적에 빨개지는’ ‘아버지를 함께 발견한다. 시인은 그것이 연꽃을 피우는 소중한 힘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붉어지고’ ‘빨개지는것은 내적인 표현이냐, 외적인 표현이냐의 차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그것의 미묘한 다른 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잎과 줄기가 되었음을 형상화한다. 그러니까 연꽃은 자식들이고 시인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해낸다. 자신은 더 이상 부모님처럼 부끄러워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고 한다. 부끄러움은 오히려 소중하다. 그것은 바로 이슬 한 방울로 아픔을 참고 계시는 엄마의 눈동자에는/ 밥 한 그릇이 담겨 있어 난 배고픔을 잃었던 것때문이다. 부모님은 늘 가난과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은 그만큼 배고프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힘이 자신을 한 송이 연꽃으로 피워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발견의 중심은 언제나 사랑이다.

3. 불통 시대의 서정성

문학 창작의 기본이 독자들과의 소통이지만 모든 작품이 다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소통할 경우에 감동을 느끼지만 불통의 경우에는 불쾌감이나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래 문학은 소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성취해왔지만, 상호 단절과 불확실의 시대에 불통을 내세우는 수도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처럼 낯설게 하기등을 통해 인간이 지닌 상투적이고 반성 없는 획일적 판단이나 분별을 깨뜨리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을 잘못 이해한 경우에는 불통이 목적인듯한 시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그리하여 뜻이 사리지고 껍질만 남은, 언어적 상상과 환상이 강한 하이퍼 시와 같은 불통의 문학을 지향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문학이 외면 받고 배척받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대의 서정성과 불통의 원인에 대해 심각하게 수많은질문을 던져야 한다.

시인은 왜 불통의 언어로 소통을 이루려고 할까? 문학의 상투성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움직임은 아닐까? 이 시대의 획일적 서정성에 대한 재정립을 촉구하는 것은 아닐까? 식민지시대와 해방기에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서정성의 소통은 재고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연변의 노래방에서 불리는 흘러간 옛 노래는 디아스포라가 과거를 회상하거나 모국을 그리워할 적에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선조들이 떠나온 남쪽 고향과 부모님과 이웃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애절한 표현이 아닐까? 이 불통의 시대 또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그에 어울리는 새 서정성이나 가락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시대의 시인들은 그것에 어울리는 시의 서정성이나 새로운 가락을 내놓아야 되는 것은 아닐까?

살아가는 것이 굴러가는 것이다/ () /길바닥에 찍어 준 바퀴무늬는/ 소나기가 와도 지워지지 않는다/ 살아가는 속도에/ 바퀴에 달린 야성은/ 허공을 짓뭉개는 또 하나의 죽음 아닐까/ 바퀴에 자갈을 물리는 고삐를 매여두자

- 바퀴의 야성론부분

이 시는 흘러간 옛 노래의 감성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시적 소재나 가락 모두가 그렇다. 낯선 서울의 야밤을 질주하는 살벌한 밤 운전에 대한 시이다. 각박하고 거친 운전과 그에 따르는 과격한 긴장감만이 감돈다. 시인은 이미 바퀴가 굴러가 듯이 삶도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굴러가는 것임을 안다. 과속방지턱을 만나 덜컹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벌금딱지를 내면서도 삶은 느리거나 또는 빠르거나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것임을 안다. 그것을 잘 안다고 해도 시인은 자꾸만 불안해진다. 살아가는 속도에 비해 끊임없이 굴러가는 바퀴가 도달하는 곳이 느닷없는 죽음으로 이어질까봐 두렵다. 바퀴의 목적지가 죽음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두려움 대신 기대에 가득 찰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바퀴의 궤도에 대해 발견한다. 그것은 자동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본능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그 본능적 두려움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된다. 태어남과 동시에 앞만 향해 굴러가다가 다시 죽음으로 이어지는 바퀴의궤도, 시인에게 바퀴의 야생론은 결국 인생의 궤도와 맞물려 있다.

그렇다면 어차피 바퀴에 자갈을 물리는 고삐를 매여두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살아가는 것이 굴러가는 그 자체가 되어 굴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순간, 인간은 삶은 운명에 종속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그 종속적인 타자로서의 삶을 거부한다. 스스로가 구르는 바퀴를 멈춰 세울 줄도 알고, 필요에 따라 다시 굴릴 줄도 아는 주체로서의 존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시인의 존재에 대한 발견은, ‘주체로서의 발견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 주체는 자신이 남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발견에서 출발한다.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주체가 될 수 없다. 시인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 주체가 되는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 발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빛은/ 땅굴 어귀에서 길을 잃었다/ 마지막 한 발을/ 여기서 잘라 버린 것이다/ 박쥐들의 똥이 유전자로 / 공룡의 알이 되는 그 속을/ 파고 들어갈 길이 없다/ () / 풀어도 무의미한 판도라는/ 눈빛으로 풀릴 수 없다

- 비밀?부분

이 시는 특이하다. 흔히 은 구원이나 시인 외부의 성스러운 힘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시의 빛은 자신 또는 조선족이 된다. 땅굴 어귀에서 길을 잃은 빛의 이야기는 비밀이다. ? 어둡고 컴컴하고 두렵고 부끄러운 치부는, 박쥐들의 똥처럼 딱딱하게 묻어두고 싶은, 또는 공룡의 알처럼 오래오래 숨기고 싶은,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오래되고 케케묵은 상처들은 쉽게 풀리지 말아야 한다. 빛이 다시 길을 찾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땅굴에서부터 밖으로 나와야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왜 물음표를 쳤을까? 물론 시의 분석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시인이 노래하고자 한 것과 전혀 다른 현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시인은 자신의 시를 불통인 채로, 착각한 채로 내놓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시인의 비밀이 되기도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부끄럽고 민망한 부분을 숨기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인 변창렬도 그 부끄러움들을 주저하지않고 고백하기도 한다.

눈을 떴다 감았다 수십 번 했어도/ 둥지를 못 찾은 멍청이/ 허공에서 헛디딜 때가 많다/ () / 날개 죽지 하나를 꺾고/ 발 하나를 동여맸다/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는 하늘길/ 난생 처음 십자가를 만들어/ 땅에 그림자 던진다/ () /벼랑길이 천당이다/ 누울 자리를 허공에 잡아 놓고 빙 돌고 있다

- 새는 날면서 무덤을 찾는다부분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에게 둥지를 못 찾은 멍청이는 더 이상 숨기고 싶은 비밀이 아니다. ? 멍청이는 단순히 자책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멍청이발견하기까지 시인은 바르게 날기뒤집어 날기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도전과 성찰의 과정을 겪었다. ‘작은 눈도 크게 떠 보고 없는 귀도 열어가면서 바람의 무서움을 견뎌가며 눈을 떴다 감았다를 수십 번을 해본다.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는 시발점을 찾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시인이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는 하늘 길을 만들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십자가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가 다시 그 십자가에 박히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삶, 시인은 그렇게 살아온 자신을 발한 것이다. 이 발견은 아주 중요하다. 자신이 진 십자가임을 발견했으니 이제 다시 내려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발견이 없다면, 어쩌면 평생 종속된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시인의 그 발견은 결국 주체로서의 자신에 대한 발견이 된 것이다. 이는 바퀴의 야생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그는 모든 벼랑길이 천당이될 수 있음을 알았고 모든 허공이 그의 누울 자리가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모든 시공간을 자신의 으로 만들어 편히 누울 수 있는 주체로 승화된 것이다.

그 발견은 십자가를 통해 구원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해설에 독자가 소통할 수 있을까?

무덤(냄새)’등이, 그리고 하늘무덤십자가작은 신묘비천당같은 시어가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 소통의 접점을 찾기 보다는 오히려 불통의 확인으로 쓰일 수도 있다. 시인은 왜 이 불통의 가능성이 큰 시를 썼을까? 언어는 문자적 의미를 통해 논리성이나 객관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그는 왜 색채나 음표를 쓰는 미술이나 음악처럼, 언어가 지닌 최소한의 의미로 독자들과 소통하려 들지 않았을까? 아마 시인은 명확하게, 객관적으로 답하지 못할 것이다.

시는 그의 무의식의 표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이 결코 알 수 없다, 안다면 이미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 된다.

이 지점에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시를 불통인 채로 발표해도 될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대나 다음 시대에도 문학 작품은 소통을 전제로 해야 한다. 물론 독자의 서정도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 시적 정의에 따라 성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의 정서를 시인이 이끌어갈 임무도 있다. 물론 세상에는, 문학에는 정답이 없다. 그러나 정설은 있다.

문학의 목적은 소통에 있다.

-2020 도라지 1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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