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련화

조련화 약력 : 2000년 5월 30일 일본행, 麗澤大学(日本語学科) 졸업. 澤大学院(日本語教育学科) 졸업, 坂本空調(株) 에 근무. 연변대학일본학우회 배구팀 부대장. 2019년 전일화부동산협회컵 글짓기 공모에서 격려상 수상.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한국에 가셨던 엄마와 아버지는 불법체류로 인해 돌아오셨다. 그 바람에 우리 집은 무언가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 사비 일본유학이 허가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떠났다.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도쿄 사랑이야기』를 보고 거기에 푹 빠지게 된 나는 다섯번이나 돌려 보면서 자연히 일본유학을 꿈꾸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교를 포기하고 일본에 가겠다고 부모님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나 엄마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커다란 수박을 사가지고 와서 잘라 주시면서 대학시험을 꼭 보자고 나를 달랬다. 우리 고향은 수박이 유명했다.

대학교 졸업식에서

그렇게 대학입시날이 다가왔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우리 집에 큰 일이 터졌다. 마을사람들의 부탁으로 독일 노무수출 수속을 맡아 하시던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의 돈이 가득 담긴 가방을 호텔에 맡기고 잠깐 집에 돌아와 서류를 가져가는 사이 동업자가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돈가방을 들고 도주해 버렸던 것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속을 끓이며 돈을 찾아보겠다고 도망간 사람 집에 가서 아예 살며 기다렸으나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남은 아내와 아들도 소식을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닥친 재난에 나도 앞이 막막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집에 가 있다 나니 나는 남동생과 함께 우리 마을로 와서 어린이들에게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한국청년들의 봉사활동을 도와주며 집을 지켰다.

그러나 돈을 갖고 도망간 사람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난생 처음으로 빚더미에 앉게 된 엄마는 어쩔 수없이 집을 팔고 여기저기 돈을 꿔서 겨우 일본유학 수속비용을 마련하고는 나를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에 가서 공부도 하면서 돈도 벌라고 말이다. 하루 아침에 나는 가족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연변대학 일어계에서 2년동안 학습을 하면서 고대 기다려왔던 일본비자가 내리고 나는 드디어 2000년 5월 30일 일본 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가방에는 소시지 인스턴트 라면, 지갑에는 8만엔, 마음에는 빚 걱정을 짊어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벅찼지만 그래도 잘 해낼 거라는 젊음의 힘과 믿음이 받쳐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토록 동경하던 일본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타향생활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어학교 2년, 대학교 4년, 대학원 3년, 뼈 빠지게 고생한 끝에 어느덧 드디어 빚을 다 갚고 집도 사고 학업도 완수했다. 하지만 그동안 겪어온 마음고생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이때까지 마음을 지탱하던 주축이 사라지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로 심신이 무너져서 한걸음도 앞으로 내디딜 수가 없었다. 그때, 내 곁을 지켜준 사람이23살때부터 믿고 의지해오던 바위같은 일본 사나이 지금의 남편이었다. 무엇인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 것 같던 그 순간에 남편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29살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결혼 후 책임감이 있고 이해심이 깊은 남편 덕분에 나는 다시 나의 꿈을 이루어 보려는 열정이 생기었고 새로운 인생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20대 젊은 나이부터 에어컨설비회사를 경영했다. 나보다 7살 이상인 남편은 겉모습이 웅장하고 말도 거칠게 하고 무서워 보이나 심성이 착하고 욕심 부리지 않고 무던해서 부지런히 일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성품이라서 친척 하나 없고 의지할 곳이 하나 없는 낯선 외국 땅에 와서 아등바등 애쓰며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나의 모습을 기특하게 봐주고 응원해주었던 것 같다.

처음 남편을 만난 것은 2003년 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손님으로 오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그때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은 그의 본가 동네였고 나는 대학교가 있는 곳에서 전철로 15분, 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원룸 방을 빌려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 당시 학교 부근의 치안이 좋지 않아 오토바이 타고 가며 가방을 채 가는 사건도 발생하였고 여자가 혼자 밤길을 걸으면 갑자기 치한(痴漢)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막차로 집에 갈 때면 나는 이어폰으로 신나는 한국노래를 들으면서 갔다. 그렇게 앞뒤를 살피며 힘차고 씩씩하게 걸어 가면서 억지로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지만 무서움을 어쩔 수 없었다. 매일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마음의 큰 짐이 되었다.

조롱에 갇힌 새처럼 매일 학교와 아르바이트로 고달프고 외롭게 살던 시기에 그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차를 샀다며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100키로의 덩치에 어울리는 큰 BMW를 타고 왔는데 처음 타본 느낌이 비행기에 앉은 것 같이 편했다. 그는 자기의 어릴 때 꿈이 파일럿이어서 승차감이 좋은 이 차를 샀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드라이브하고 양 꼬치 먹으러 가자”하던 약속이 금방 실현이 되어 우에노(上野)의 천리향(千里香) 연변음식점에 가게 되었다. 그는 처음 먹어본 양 꼬치를 신기해하면서 너무 맛있다고 하였다. 콜라, 건두부 무침(拌干豆腐), 양 꼬치는 그가 늘 주문하는 세트이다. 우리는 요코하마중국거리(横浜中華街)에도 가끔 갔었다. 그는 맛있게 잘 먹는 내 모습이 보기 좋다며 늘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다.

조선족식당에서 양꼬치 구이를 먹는 남편과 딸

2003년 여름에 내가 대련에 집을 사게 되자 그는 나를 보러 대련에 놀러 왔고 우리 엄마가 일본 오셨을 때는 요코하마중국거리(横浜中華街)에서 밥을 사주고 셋이서 노래방에 간 적도 있다. 1년반 정도 사귀다가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몇 년은 친구로 지내기도 했지만 내가 아프거나 힘든 일에 부딪힐 때마다 두말없이 달려와서 병원에도 같이 가주고 상담도 해주면서 변함없이 잘 대해줬다.

드디어 아버지가 진 빚을 다 갚고 집도 샀는데 엄마는 동생이 사고 칠 적마다 나를 닦달했다. 당장 돈을 부치지 않으면 동생이 감옥살이를 한다면서 엄마는 내 목을 조르곤 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나에게 끝없이 요구만 하는 가족 때문에 밤마다 울며 지내다 나니 나는 신경성위염을 앓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악지로 버티었는데 다행히 그이가 옆에서 지켜준 덕분에 점차 밥도 잘 먹게 되었고 잠도 잘 자게 되었다. 옆에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생기니 지쳐 쓰러져 자다가 아침이 돼 일어나면 또 힘이 났다. 젊음은 그래서 좋은 것 같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산다는 말이 옳음에 40이 된 지금 새삼스레 공감이 간다.

2008년에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다시 사귀게 되었고 2009년3월 대학원졸업장을 받고 나서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다. 반지도 결혼식도 없이 결혼생활이 시작되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나를 지극히 잘 보살펴주고 책임져주었다. 남편은 혼인신고를 한 날 나에게 카드를 넘겨주면서 앞으로 월급을 여기에 넣겠으니 용돈을 매달 10만엔만 달라는 것이었다. 일을 해도 되고 주부를 해도 되고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 단지 일을 한다면 회사의 스트레스를 집에 가져오지 말고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면허증을 따오라고 하며 지방에 내려가 하는 교습소(教習所)에 보내주었다. 2주간 합숙하면서 면허증을 따오자 남편은 작은 중고차를 사주었다. 그러고 3년이 지나자 토요타 크라운으로 바꿔주었다.

면허증을 따고 금방 임신하게 되었는데 텔레비전, 냉장고, 소파, 커튼 등 새살림은 모두 남편이 고른 것이었다. 내 머리에는 내 꿈을 이루고 싶다는 집념 하나가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결혼살림을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것 같다. 딸이 태어나 한살이 되자 나는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내 꿈을 이루기 위해 기반을 닦아왔다.

결혼하기 직전에 남편회사는 유한회사에서 주식회사로 바꾸면서 경기도 좋지 않아 힘든 고비를 넘어야 했는데 엎친데 덮친다고 현장에서 차까지 도둑맞는 바람에 400만엔의 손실을 보았다. 3년이 지나서야 회사가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남편은 술을 즐기지 않지만 비즈니스 때문에 골프를 자주 갔다. 골프가 끝나고 회식을 가도 술은 조금만 마시었고 할아버지들 연배 사장님들 앞에서 눈치가 보인다며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다시 먹는다. 가끔 친구들과 술자리가 있다며 늦는다고 전화를 걸어오는데 그래도 10시면 집에 돌아온다. 그래서 술로 속태웠던 일이 한번도 없었다.

딱 한가지 음식 습관이 다른 점이 우리집 밥상의 부족점이다. 나는 된장찌개를 팔팔 끓여서 김치와 같이 먹고 싶지만 남편의 입맛은 그렇지 않다. 김치는 냄새도 싫어해서 처음엔 김치를 밥상에 올리면 멀찌감치 놓으라고 할 정도였다. 고추장은 더더욱 싫어한다. 하지만 나는 고추장을 너무 좋아한다.

어릴 때 친한 친구 집에 가서 어른들이 안 계시는 틈을 타서 둘이서 몰래 계란을 볶아서 고추장에 찍어서 먹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 기억이 남아 있어 나는 지금도 계란 볶음에 고추장을 찍어서 먹는다. 처음 계란 볶음과 고추장 접시를 올렸을 때 남편이 케첩인 줄 알고 찍어서 먹은 적이 있다. 매워서 물을 들이켜는 남편을 보며 나는 깔깔 웃고 말았다. 음식문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나마 내가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어서 우리는 밥 먹을 때 대화도 잘 오가고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다행이 시어머니는 한국요리를 좋아하셔서 가끔 김치찌개, 오이김치, 불고기를 만들어서 갖다 드리면 맛있다며 잘 드신다. 옆에 살고 계시는데 애도 잘 봐주시고 청소도 해 주신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40년간 가스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아들 딸 셋을 키우며 부지런하게 살아오신 분이라 내가 외국 며느리라고 괄시하지도 않고 많이 챙겨 주신다.

시어머니는 회사생활 하실 때 사원여행으로 세계각국에 다니셨고 지금도 형제들과 함께 일년에 한번 여행을 다녀오신다. 아들 회사 서무를 맡아서 하고 마장, 체조, 게이트볼, 꽃 심기, 야채 심기도 한다. 시누이네 아들 셋까지 돌보며 70을 넘으셨는데 진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부지런하게 사시며 아들 딸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시는 것 같다. 시집 가족은 모두 성격이 무던하고 마음이 고와서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

남편은 중학교부터 다니던 미용실에 지금도 다니고 있고 초등학교 시절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베개를 지금까지 베고 잔다.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 거의 나에게 맞춰주지만 큰 일에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결혼 후 우리는 내가 우겨서 역 근처에 집을 잡고 살았었는데 딸이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시어머니 도움이 필요하고 해서 끝내 남편의 주장대로 본가 옆집으로 이사 왔다. 평소에는 자상한 그이지만 아버지가 산 집터, 어린 시절 형제들의 소중한 추억들이 담긴 집터에서 살려는 의자만은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그런 남편의 모습에서 자기 뿌리를 소중히 여기고 가족을 사랑하는 굳건한 마음가짐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더욱더 남편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런 남편이 고마워서 나는10년동안 줄곧 내가 쓰레기를 버리었다. 시어머니가 고마워서 집 열쇠를 맡긴다. 참 좋은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나는 행복을 느끼었다.

일본인 시어머니 일본이 남편의 사랑을 받아서 행복하면서도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같은 동포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조선족 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었다.

도쿄 문화의 밤 행사에서

2015년 고향 선배님의 추천으로 제1회 재일조선족 배구시합에 나가게 되었고 2018년 5월 20일에는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한 우리 노래 대잔치에 짝꿍 훈이와 「북국의 봄」을 듀엣으로 불러서 인기상을 받았다. 올해에는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의 사회자의 한 사람으로 올해 1월부터 10개월간 함께 준비해온 세계조선족문화절 무대에 올랐다.

일본 중국 한국으로부터 경제인 문화예술인들과 애심인사들이 도쿄에 모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성립대회를 함께 하였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서 세계규모의 조선족문화절 및 도쿄포럼행사가 성황리에 열렸다.

내가 이 모든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밤」 사회를 할 때 입은 한복은 남편이 직접 사준 선물이다.

조선족 활동에 참가하는 것은 내가 나의 정체성을 되찾고 나 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내 삶의 활력소가 된다. 같은 민족의 피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나는 가정하고는 또 다른 행복을 느낀다.

요즘은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성을 표현할 수 있고 서로 같은 감성으로 소통할 수 있는 우리글이 너무 좋아졌다. 그래서 나는 우리글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덧 주위에 글쟁이 친구들이 늘어나 조언도 해주고 고무 격려도 해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딸과 함께 같은 감성을 느끼고 싶어서 올해 6월부터 딸을 조선족어린이학원인 샘물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딸애가 샘물학교에 다니기 전에는 밖에서 식사하거나 쇼핑할 때 내가 한국말을 하면 “엄마 한국말 하지 말고 일본말 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요.”하고 질색했고 집에서 내가 한국말로 말하면 “못 알아들어요. 일본말로 하세요.” 라면서 반항까지 하였다. 그러던 애가 샘물학교에 가서 우리글을 배우더니 이젠 4개국어를 하고 싶다고 한다. 샘물학교 교장선생님이 ‘동기부여’가 된다던 말씀이 딱 맞는 것 같다. 그리고 학교 친구들이 자기한테 한자를 물어본다고 한다. 왜 하고 물었더니 한자가 눈에 들어와 기억이 잘 된다는 것이다.

우리 딸은 원래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일본말을 했기 때문에 한국말을 하는 것을 쑥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샘물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한국어 중국어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다국어를 받아들였다. 언어를 한가지 더 안다는 것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고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두주일 한번 세시간 운전하고 가야 하는 거리이지만 보람을 느끼며 다니고 있다.

싱가포르에서의 가족여행 기념

이 글을 쓰게 되면서 나는 남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다문화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조선족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못 마땅하지 않아요?”

“루이(딸 이름)가 샘물학교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요?

남편은 자기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애가 샘물학교 다녀서 언어를 습득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 남편의 말을 들으면서 17년을 같이 지내오면서 쌓아온 신뢰는 국경이나 민족 같은 거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올해 10월 1일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한달 동안은 가슴이 산에 눌리듯 슬프고 힘들었다. 징검다리 놓는 것처럼 하나하나 쌓아온 내 사랑을 꼭 안고 살아가라던 아버지의 음성이 마음에 남아서 언제 어디서나 지켜 주시는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작년까지 유방암초기 진단을 받았지만 항암치료, 수술, 방사선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한국에서 씩씩하게 일하고 계시고 말썽꾸러기이던 내 동생은 착한 올케를 만나 금쪽같은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다.

20대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학업을 완수하느라 고생을 했다면 30대는 풀 한 포기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원수를 만들지 않고 좋은 대인관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수련을 한 것 같다. 올해 40대를 맞이하면서 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고 나의 정체성을 똑바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바위 같은 남편의 어깨에 앉은 독수리처럼 나는 푸른 하늘에 날아오르고 싶다. 나에게는 하늘을 날다가 배고프고 힘들면 다시 돌아올 보금자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한번 날개를 펼쳐 보려고 한다.

저 푸른 하늘이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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