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진

정진 약력: 1988~1992 목단강사범학원 중문학부 한어문전공(牡丹江师范学院中文系汉语言文学专业). 1992~1997 하얼빈시 조선족1중 한어문 교사(哈尔滨市朝一中汉语文教师). 2001~2002 도쿄외국어대학교(東京外国語大学) 한국근대문학연구. 현재 일본도쿄도청(日本東京都庁) 한일중 통역. 하네다국제공항입국관리국(羽田国際空港入国管理局) 한 일 중 통역. 2019년 전일화부동산협회컵 글짓기 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

 

“보고싶은 엄마,

오늘도 천만번 불러보는 우리 엄마, 변함없이 건강하시죠?

오늘이 추석예요. 추석이라면 평시에 헤어져 있던 사람들도, 평시에 좀처럼 시간을 짜낼 수 없던 사람들도 이 날만은 만사를 제쳐 놓고 동서남북에서, 천애지각에서 발걸음을 다그쳐 집을 향해, 고향을 향해, 그리운 사람을 찾아서 달려오는데 가족 하나 없는 이국 타향에서 우리 엄마는 지금 이 시각 무얼 하고 계실까?

오늘도 혹시 추석인 걸 모르고 계신 거예요?

우리들은 외할머니께서 아침 일찍 손수 지어 주신 맛난 요리를 배부르게 먹었어요. 철없는 동생 민이는 오늘 유치원에 안 가고 집에서 맛깔나는 음식을 먹는다는 그 이유 만으로도 행복해하는 모습이에요.

오늘도 우리 가정의 짐을 가냘픈 두 어깨에 짊어지고 발걸음을 다그치실 우리 엄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몇 백 년 전, 리백의 말처럼 머리 들어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고 머리를 숙이니 머리속은 온통 그리운 우리 엄마생각 뿐이에요. 오늘은 바람 한점 없는 참 좋은 날씨예요. 밝은 달 속에 엄마를 그려 넣고 쳐다보니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만 지네요. 조용히 온 대지에 하얀 은가루를 뿌리고 있는 저 달빛, 밝은 달빛속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나를 바라보시는 아름다운 엄마, 사실 저는 오랜 세월동안 5살난 어린 저를 떼여버리고 떠난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했었어요. ……”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쳐다보니 멀리 바다 건너에 있는 딸애가 그리워 나서 메일 함을 열었다. 그동안 받은 딸애의 메일을 거슬러 올라가며 읽다가 딸애가 고등학교 시절에 보낸 메일에 시선을 멈추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딸이 보내준 편지이다. 오랜만에 소녀시절의 딸애 메일을 읽으니 먼 옛날 딸애를 두고 떠나던 그 때의 아픔이 떠오르며 또다시 가슴이 저려 났다.

하네다국제공항에서 휴식 중에

어린 딸애를 친정엄마한테 맡겨 놓고 엄마로서 져야 할 모든 책임을 벗어 팽개치고 나의 꿈을 이룩하기 위하여 무작정 낯선 일본땅에 들어선지도 어언간 20년, 한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20년이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물론 20년 사이에 대륙과 섬 사이를 오고 가고 딸애도 일본에 와서 반년간 나하고 생활한 적이 있었지만 딸애의 곁에 있어주지 못한 세월이 너무나 많았다.

어렸을 때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앞으로 생육하지 못하리라는 최후통첩을 받고도 용케 딸애를 낳았건만 나의 그 행운에 대한 보답은 너무도 몰인정하였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나의 자식으로 태어나 주어서, 엄마라는 신성한 이름을 듣게 해주어서, 완전한 여자로 있게 해주어서 너무 고맙다. 내 딸아!

20년 전 엄마의 따스한 손길이 가장 절실한, 햇병아리 같은 5살 딸애를 등뒤에 세워놓고 앞을 기약할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것은 한 엄마로서 영원한 변명밖에 안되지만 소녀시절에 심어 둔 꿈이 어린 딸애를 외할머니께 떠맡길 만큼 컸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인 13살때, 우리는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다. 어느 날, 일본어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참고서로 『친절한 일본어』(やさしい日本語)라는 책을 나누어 주셨다. 그때만 해도 참고서라는 단어가 어설픈 시대라서 지금의 어린 친구들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친절한 일본어』(やさしい日本語) 라는 참고서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화려하기 그지없고 사치하다고 할 정도로 좋은 질감의 책이었다. 책의 겉면과 처음 몇 페이지에는 채색으로 된 사진들이 있었다. 사쿠라 피는 계절에 울긋불긋한, 멋진 나들이옷을 쭉쭉 차려 입고 봄놀이에 나선 여유 있고 행복해하는 시민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다양한 모습의 빌딩숲, 얼기설기 얽힌 것 같지만 질서 있게 공중을 가로지난 멋진 입체교차교, 일본의 고도로 발달된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이 책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날 난생 처음으로 쓰는 일기장에 “일본어를 잘 배워 일본에 유학 가자!”라고 썼다.

그 꿈을 위해서 나는 일본으로 유학 떠나기 며칠 전에 딸애를 고향인 목단강에 있는 친정집으로 데려갔다. 실은 딸애에게 외할머니는 낯선 존재였다. 그때 중학교교사로 일했던 나는 방학때에나 딸애를 데리고 외할머니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갔을 뿐이었다.

그런 딸애를 낯선 환경에 적응시키려고 나는 일주일동안 매일같이 딸애를 업고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왔지만 낯선 외할머니, 낯선 유치원에 딸애는 두려워했다. 그 날은 아주 추웠다.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치고 북풍이 기승을 부리며 옷을 헤집고 들어와 가슴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길은 미끄러웠고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며 발걸음을 떼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지금도 키가 크지만 그 때에도 동년배들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자란 딸애를 업고 간신히 유치원까지 데려가면서 “외할머니말 잘 듣고 앓지 말고 잘 자라 줘!”하고 당부했다.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는 내 마음은 칼로 에이듯 아픈데 아직 어린 딸애는 저녁 때면 엄마가 자기를 데리러 오겠지 하고 믿는듯 웃어주었다.

1999년 12월, 나는 20세기의 마지막 열차에 운 좋게 몸을 실었다. 실오리같은 일루의 희망에 매달려 소녀시절의 꿈을 안고 그리고 착잡하고 모순된 심정으로 새 인생의 길에 나섰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 차디찬 북풍이 옷섶을 헤치고 들어와 그렇지 않아도 시린 가슴이 더 시려 났다. 어린 딸애를 떼여 버리고 떠나는 나의 심정은 칼로 에이는 듯 아팠다. 딸애와 그 어떤 약속도 확실하게 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혼자서 산길을 헤쳐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상황에 부딪칠 지 그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천 길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고 넘어지면 가시덤불길에 얼굴이 할퀼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허황한 집착에 무모한 짓이 될지도 모르는, 하지만 이미 뒤돌아갈 수 없는, 앞으로만 나아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이화여대에서 딸과 함께

그 시기 일본에서의 나의 삶은 공부→알바→수면 그렇게 팽이같이 돌아가는 매일이 계속되었다. 많이 피곤하고 힘들었고 딸애도 보고 싶었지만 일본유학은 어차피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딸애한테는 미안했지만 나의 사전에 후회는 없었다.

그때부터 딸애는 더욱 청개구리가 되었다. 어른들이 동쪽이라면 딸애는 서쪽으로 갔다. 지금도 딸애의 방에 커다란 자리를 척 차지하고 있는 주인 잃은 피아노도 딸애의 일시적인 충동의 결과물이다. 홀로 두고 온 딸애가 마음에 걸려 피아노를 사달라고 칭얼대는 한마디에 선뜻 2만원을 주고 피아노를 사주었던 것이다. 사실 딸애를 곁에서 챙기지 못하는 죄책감을 덜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딸애가 피아노에 마음을 붙였으면 하는 기대도 컸다. 피아니스트가 된 딸애모습을 보고싶기도 했다. 그런데 나의 절실한 기대와 달리 일년도 채 안돼 버림받은 피아노……

중국에 돌아가서 체류할 때마다 나의 생활은 늘 딸애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 깨어나 뚱뚱하여 진 딸애를 집주위와 학교운동장을 달리게 하고 줄 뛰기를 시키면서 딸애의 다이어트에 전념했다. 그런데 딸애가 잔머리를 굴리며 내가 정해준 5바퀴를 가까운 거리로 줄여 운동장 안쪽으로 달리는 것이었다. 그런 딸애를 책망하다 나니 딸애와 실랑이가 벌어졌고 화가 난 나는 딸애의 귀뺨을 때리고 말았다. 주위에 아는 얼굴이 꽤나 모인 자리라 자존심이 많이 상한 딸애는 나를 확 치고 달아났다.

지금은 딸애가 가끔 농담으로 “이 날씬하여 진 몸매는 그때 엄마의 한 대가 낸 성과예요. 고맙습니다, 엄마!”하고 까불지만 그 당시에는 토라진 딸애를 어떻게 달랠지 몰라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혼자인 딸애를 외롭게 하지 않으려 동생을 낳아주려고 마음먹었다. 형제가 있어야 외롭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고민 끝에 어렵게 취직한, 일본사람도 취직하기 어려운 대기업의 일을 그만두고 40세 되는 고령 산모의 위험을 무릅쓰고 딸애한테 귀여운 남동생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딸애의 친구들도 많이 사랑해주었다. 딸애 친구들이 놀러 오면 과일을 꼭 쟁반에 담아 딸애 방에 들여놓았고 가끔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케익을 만들어주고 카레라이스도 맛나게 만들어주었다. 때로는 딸애 친구들을 식당에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는 얘들을 우리 가족나들이에도 끼워 주기도 했다. 내가 그 애들을 잘 대해주면 그 애들도 우리 딸을 잘 대해 주리라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항상 딸애한테 멋진 사람이 되라고 하였다. 스포츠에도 예술에도 숙맥이 되지 말고 어지간히 소양을 갖추라고 하였고 옷은 항상 정결해야 하고 행동거지는 대범하며 사유와 마음은 부자가 되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쳤다. 그리고 자립의 힘을 키우라고. 꾀죄죄하고 궁상맞은 꼴은 나 자신이 딱 질색이었다. 남들 앞에 나설 때 항상 정결한 몸 가짐으로 나서는 것이 남들에 대한 예의이고 자신 또한 반듯하고 멋있을 수 있다고 수차례 일러주었다. 항상 주위로부터 실제 연령보다 10살이상 젊고 모델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 나를 두고 딸애도 무척 우쭐대는 눈치였다. 그래서 딸애 친구들도 많이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물론 어떻게 보면 변명으로만 들리겠지만, 비록 딸애와 같이 지내는 시간들이 적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는 딸애에게 아름다운 기억을 심어주려 노력하였다. 건전한 책 하나가 한 사람의 멋진 인생을 만들어준다고 일러주며 딸애의 테이블에 직접 책장을 세워놓고 고금동서 책들을 빽빽이 꽃아 주었다. 그 책들을 읽으며 딸애는 당시(唐诗)를 습득했고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고기소만두(包子)를 만든 사람이 제갈공명인 것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 한글을 최초에 만드신 분이 세종대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에 대한 극단적인 편견을 버리고 넓은 마음으로 타인의 인간적인 면을 봐야 한다는 도리도 책 속에서 터득하게 되었고 그래서 조조의 다른 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는 극단적인 부정은 조조에 대한 옳은 평가가 아니라고 했다. 독서는 딸애를 사리분별한 사람으로 키워주었다.

나는 중국에 체류할 때는 웬만해서 친구들과 가지는 회식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요리솜씨를 발휘해서 동양요리 서양요리 등 여러 나라의 영양가 많고 색깔이 다채로운 음식들을 만들어 금쪽같은 내 새끼들을 즐겁게 행복하게 해주었다. 때로는 딸애한테 귀여운 캐릭터 앞치마를 두르게 하고 요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아마 우리 딸애가 학급에서 제일 음식을 잘했던 것 같다.

그렇게 될수록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 순간 속에 마주보도록 노력하면서 등을 보여주지 않았고 동네에 나가서 아줌마들과 수다 한번 떨지 않았다. 아무리 큰 명절때에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마작 한번 만져보지 않았다. 틈틈이 짬을 타 요리책을 읽고 컴퓨터를 검색해 아이들의 영양식을 만들었고 두 아이가 노는 생활 단편들을 무비에 담아서 아이들이 아름다운 기억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한국에서의 즐거운 한때

나는 그렇게 내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려 했지만 딸애는 집 식구들에게 빚받이꾼이나 된 것처럼 거의 매일같이 집안에 불화를 일으켰다. 밥투정, 돈 투정, 옷 투정을 밥 먹듯 했고 방을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바람에 개미들이 개미왕국을 꾸릴 지경이었다.

사춘기에 들어와서는 그것을 빌미로 청개구리본성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저녁때에만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누나를 보고 좋아라 아장아장 걸어와 반기는 아들 민이에게 밖에서 받은 화풀이를 마구 해댔고 민이가 장난을 치다가 조금이라도 저의 살을 다치면 서슴없이 발길을 날렸다. 저녁 늦게까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와서도 거의 책을 보지 않고 텔레비전을 제일 높은 음량으로 켜 놓았으며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집식구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의 한마디에 딸애는 열마디로 답했다. 나는 애쓰는 내마음을 몰라주는 딸애 때문에 너무나도 속이 상하였지만 그래도 마음을 가라 앉히고 전화를 끊을 때면 꼭 “우리 딸 사랑해!”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딸애는 쑥스러운 듯 그냥 묵묵히 전화를 놓아버린다.

장거리 국제전화 할 때는 그렇듯 서로 애틋하다가 정작 오랜만에 만나면 상봉의 기쁨은 잠시, 그동안 쌓아 두었던 걱정이 쏟아진다. “왜 말을 듣지 않느냐? 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느냐?” 그렇게 딸애를 원망하고 나무람 하며 타박을 주었다. 딸애의 성장에 맞춰 같은 키높이에서 딸애와 함께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야 할 것들을 나의 욕심으로 딸애에 대한 기대치만 잔뜩 높여 놓고 거기에 못 미친다고 딸애를 달달 볶아 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로서 딸애를 곁에서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할지 언정 그렇게 타박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랑으로 대해주지 못한 엄마라서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다투던 어느 날, 흥분이 가라앉고 나를 돌이켜 보다가 나는 나의 진심이 딸애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가 강요만 하고 타박만 하는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겠는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나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딸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처음으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 나온 사과를 하였다.

그러고 돌아온 뒤 갑자기 딸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저 학생회주석이 되었어요?”

“뭐?”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여태껏 반급 간부조차 못했던 아이가 불시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엄마가 그날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엄마가 정말로 미안하다. 그동안 엄마가 많이 잘못 했어. 용서해 줘.’하며 말해준 그날 저녁, 전 저의 방으로 들어가서 많이 울었어요. 도도한 엄마가 저의 앞에 꿇어앉으시는 순간 제 잘못이 무엇인지 탁 깨우쳐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학생회주석으로 당선되었어요. 고마워요!”

갑자기 철이 들고 어른스러워진 딸애의 말을 들으며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딸애의 성장은 나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진심이 통해야 한다는 도리를 깨치게 하였다. 그것이 설사 부모자식 지간이라 해도 거기에 마음이 담겨야 상대방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그날부터 우리 모녀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딸애가 클수록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게 되었고 서로 상담대상이 되어주었다. 딸애는 지금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메이지신궁(明治神宮)에서 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따르릉” 갑자기 울리는 전화소리에 나는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딸애에게서 온 전화였다.

전화를 든 순간 나의 입에서는 사랑한다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사랑한다, 우리 딸! 지금까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 주어서 너무 고마워. 네가 있어서 엄마는 너무 행복해!”

잠깐 뒤 전화 너머에서 딸애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나도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 너머에는 우리 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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