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숙 수필가

천숙 약력: 중국 벌리현 교사 출신. 집안 심양 등지에서 사업체 운영, 재한동포문인협회 수필분과장. 수필, 시 수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서울=동북아신문] 지난해 봄 부터 나는 시간을 내어 꼭 전라북도 남원시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 것은 지난해 봄 에야 영양 천씨 중시조 족보 책이 알려지면서 우리 중시조 할아버지의 묘가 남원시 환봉사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혈육들은 모두 이북에 계시고, 17살에 혼자 중국으로 건너 온 아버지한테서는 혈육에 관한 간단한 얘기와 천씨는 한집안이라는 얘기만 들었지 천씨 족보에 관한 얘기는 들은 적 없었다. 좀 궁금하긴 했지만 여자이니까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전북 남원시 금지면 환봉사

그런데 우연하게 우리 천씨네 뿌리를 찾게 될 줄이야!

언젠가 흑룡강작가협회에서 나와 같은 천씨 성을 가진 교원이 수필우수상을 탔었는데 한집안 식구라며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이 끈이 되었던 것이다. 상대방도 같은 생각을 했다며 무척 반가운 회답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상해에 있는 오빠가 천씨 종친회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그 얘기가 있은 지 한 달도 안돼서 청도에서 천씨네 남자 분들 몇 명 모이 더니 그 모임에서 생각 밖으로 족보 책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 족보 책을 소장하고 계신분의 아버님께서 40년대에 소 세 마리를 판 돈으로 함경북도 명천군에 가서 사온 것이라고 하였다. 1935년에 신청해서 1939년에 출판된 것이었다. 

그리고 ‘천씨네 대가족’이란 그룹이 탄생하였다. 너도나도 아버지의 이름과 할아버지의 이름을 대면서 뿌리 찾기에 나섰다. 우리는 모두 ‘천만리 장군’의 후손들이었다. 족보 책에서 찾아보니 우리 아버지는 ‘천만리 장군’의 제 18대 (19世) 후손이었다.

‘천만리 장군’은 원래 명나라 사람이었다. 주원장과 함께 명나라를 세운 천암(千岩)의 손자이다. (선조 25- 임진) 임진왜란때 중국지원군의 조병영량사(凋兵領糧使)의 직함으로 이여송(李如松)제독과 함께 출정했다.

1593년 1월에 첫 전투인 평양전에서 승리하고 4월에 서울에 입성하였고, 이어서 남원의 숙성령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강화협상으로 5년간을 대치 상태로 지내오다가 결렬되고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이어진다.

여러 차례 승리를 거운 후 1598년에 명나라 군대가 개선(凱旋)할 때 잔류부대 2만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만세덕, 조승훈과 함께 남았고, 9월에 철수 할 때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그대로 머물렀다.

천씨 가문은 조국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큰 시련을 겪었다. 임진, 정유왜란으로 조선과 명(明)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에 후금이 일어났다. 만주족 누루하치(청태조)가 후금(後金)을 세워 인조 14년(1636년)에 국호를 청(淸)으로 바꿔 황제로 칭하고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조선의 16대 임금)는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업신여기던 오랑캐에게 삼전도 나룻터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 현재 서울시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에 그 아픈 역사의 기념비가 있다.)

기세등등한 청나라는 조선에 압력을 넣어 명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명나라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들이게 되니 천씨 일가들도 서울을 떠나 멀리 심산유곡으로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관직에 오를 수 없었고, 대개는 농사와 고기잡이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왜란평정의 은혜를 잊지 못한 숙종 임금은 청의 눈을 피해 명나라 황제의 제사지내기 위한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이때 천만리장군도 여기에 종향하였고, 후일 순종황제는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려 보은했던 것이다.

천만리장군의 묘소는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의 환봉산에 있으며 그의 아들 상(祥)과 희(禧)의 묘는 고성군 동해면에 있다.

역사는 아픈 역사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과거에 국한되는 옛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흘러가는 역사의 전개 속에 계속된 진행을 온 몸으로 겪고 있다. 그 것은 결코 과거와 단절된 상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과거와 연장선상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과거의 길을 조심스럽게 되짚어가며 영광된 역사전개와 바람직한 역사를 이어 줄 사명감이 있는 것이다. 그 것이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선조들의 뒤를 이어나가야 할 이유이다.

드디어 남원에 갈 기회가 왔다. 열흘 동안이나 내리던 장마 비는 그날부터 멈추었고 하늘은 맑게 개었다. 서울을 벗어나 둬 시간쯤 달리니 푸른 산과 푸른 들만이 차창 밖으로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하늘은 그날따라 너무도 파랗고 , 흰 구름송이들은 마치도 목화송이처럼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날처럼 그렇게 파란 하늘과 고운 구름송이들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네 시간 쯤 달려서 우리 일행은 중시조 천만리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고리봉아래 환봉사에 도착하였다.

입구에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구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고 있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환봉사 안에는 서재, 환봉서원, 동재, 충효문, 내삼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천만리 장군 묘 외에도 중건기념비, 신도의 비(碑)도 있었다. 무술신도비에는 조정에서 물자가 지원되고 관원이 동원되는 예장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발견 된 지석도 국장이나 예장에만 쓰는 지석이었다는 점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남원지방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천장군 묘소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예장이었음을 암시한다.

이 것은 한국 역사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고리봉아, 말해다오, 너는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지?
하늘을 찌르듯 솟아 오른 늙은 소나무여, 
그대 좀 얘기해보세요!

하지만 북방의 영양 천씨 족보책의 기록에 의하면 천만리 장군 묘는 칠보산에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하였다.  처음으로 영양천씨 족보 책을 만드신 분은 1801년 함경북도 명천 12대 조상 일시(一時)분이라고 전해 온다.

이 문제도 남북이 통일되면 공동으로 연구해 봐야 할 하나의 과제인 것 같다.

고리봉 기슭에서 나는 눈을 감고 두손 모아 우리 조상님들의 넋을 기리었다. 그리고는 파랗게 고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름 타고 내려다보시는 것 같았다.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우리의 뿌리를 찾았어요. 저 지금 중시조 할아버지의 산소에 와 있어요. 아버지 생전에 이 사실을 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족보 책을 보니 아버지는 천만리 장군의 제 18대 후손이더군요. 그리고 제 17대 후손인 우리 친할아버지 묘는 함경남도 갑산군 운흥면 룡천리에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꼭 찾아가 뵐게요. 아버지 생전에 그렇게 가 보고 싶어 하시던 고향이예요!”

아버지의 미소를 실은 흰 구름송이들은 둥둥 북쪽하늘로 흘러갔다.  북쪽에 계시는 우리 조상님들께 이 소식을 전하러 가는듯 싶었다.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는 없고 조상 없는 후손은 없다.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계의 모든 대상들이 영혼을 지니고 신령한 힘을 지녔다고 믿으며 산과 들에서 제사를 지내며 숭배하는 전통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하늘을 으뜸으로 여기며 존중하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래서 한식, 단오, 추석이 되면 자손들이 조상의 묘를 찾아서 성묘를 하며 제사를 지낸다. 이 전통은 살아 있는 자손과 후손들에게 조상을 추모하고 숭배하는 정신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거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바쁘다는 핑계 속에서 점차 전통을 밀어내는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번 환봉사 답사를 통해서 조상을 공경하고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후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유산일까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후손들에게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중요한 자녀교육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묘와 제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간과 공간은 나의 지난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남은 시간을 잘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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