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단 《70후》 대표주자 기자:  중국문단에서 70후 작가 중 3대작가중의 한사람 5대작가중의 한사람 이라고 할 정도로 당신은 70후 작가의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70후작가 를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김인순: 출생년대를 기준으로 1970년대 이후에 태여난 작가를 말한다.  1998년부터 문단에서 하나의 사조를 이루었는데 이렇게 부른다. 주로 우리 또래의 녀류작가들이고 광주, 소주, 하남 등 남방에 대표적 작가가 있고 나를 북방대표 라 하기도 한다.    기자: 당신의 소설은 70후 소설이 주로 이성관계가 소설의 주제로 되고있으며 또 성(性) 이 아주 솔직하게 그려지는것이 특징이다. 당신의 많은 소설들이 이성관계가 제재로 되고있으며 신세대들의 사랑(성)을 아주 솔직하고도 랭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되고있다. 독자들이 궁금한것은 이런 소설은 체험이 있어야 쓸수 있는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동하고 깊은 인상을 주는 세절(내용)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인순: 순수한 생활체험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매일 생활속에서 살고있기 때문이다. 희로애락이든가 등 생활의 본질적인것은 같다고 생각한다. 하기에 뭐나 다 꼭 실제로 체험해야 하는것은 아니다. 세절은 루적에 있다. 많은 세절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한다. 어떠한 세절이나 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특히 비등하는 시대에 살면서 더구나 많은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일상생활의 변화는 너무 빠르며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들이 보태진다.  세절적인것은 모두 눈으로 볼수 있는 표면현상이다. 더없이 다양하고 풍부해 보이고 변화무쌍해 보이는 바깥세상은 다 표면적인것이다. 리면의 본질적인것은 모두 같으며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애정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 이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단히 변화하는 시대에 또 너무도 평범하지 않은 시대에 살면서 사람마다 생활에 너무도 많고많은 유혹이 있게 된다. 즉 금전, 사랑, 혼인가정을 포함해 모두다 곤혹속에 묻혀있다.  어떤것이 좋은것이고 어떤것이 맞는것인지? 확실한 답안을 찾지 못하고있다. 이를테면 애인이 없을 경우에는 한평생 이렇게 사는게 너무 고독하고 뭔가 모자라지 않는가고 허무한 생각이 들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애인이 있으면 또 이건 혼인에 책임지지 않는것이 아닌가, 애정관에 문제가 생긴건 아닌가, 도덕은 어디로 가고... 여러 가지로 깊은 곤혹에 빠지게 된다. 참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나의 작품들에 많이는 이런 곤혹들이 담겨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어찌하였으면 좋을지 모르는 상태에 처해있으면서 자신의 여러 가지 관념들인 가치관, 도덕관, 혼인애정관 등을 새로이 정립하게 된다.  현재 나의 작품은 주로 이런 곤혹들을 쓰고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런 혼란한 상태에서 헤여나오겠는가 하는 출로는 다루지 못하고있다.  기자:  많은 70후 미녀작가들은 적라라한 성(性)을 다루면서 작품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여 화제다. 당신의 소설에서 시장효과의 비중은 얼마만큼인가? 김인순: 나는 글을 쓸 때 시장효과를 종래로 념두에 두지 않는다. 시장효과는 영화텔레비죤이 많이 이끌어낸다. 어떤 영화텔레비죤작품은 문학엔 아무런 기여도 없지만 시장엔 기여가 아주 클수 있다.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때문에 작가가 크게 뜰수도 있다.  기자: 이번 북경에서 열린 제7차전국작가대표대회 대표로 참가하였는데 축하를 드린다. 956명 대표가운데서 70년대후에 출생한 작가가 단 4명이라고 알고있는데 중국문단의 현재와 미래에서의 당신의 위치를 알수 있다. 대회참가후 감수라면?  김인순: 중국은 전반 문학창작분위기가 아주 좋다. 자유스럽고 충분히 발휘할 공간이 있다. 중앙에서 우리 문학계를 정면으로 긍정하고있고 전반 문화환경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자유스럽다. 창작은 절대적인 개별로동으로서 작가마다 자기의 세계관에 따라 자기의 목소리를 나타낸다.  하지만 창작은 반드시 현실생활의 무엇을 반영해야 한다.  현실리념이 저도 모르게 작용을 하게 된다. 전반 문화 분위기는 대환경으로 창작에 영향주는것이다. 외부환경이 어떠하면 작가는 자기 창작과정에 이를 일보일보 침투해 넣게 되는것이다. 우리 민족 제재의 작품 기자: 지금 당신의 소설 《사랑이 지나간 여름의 거리(愛情走過夏天的街)》를 개편한 드라마 엄마의 장국집 이 중앙텔레비 8쟌넬에서 송년특집으로 방송중이다. 이 드라마는 당신의 유일한 드라마작품이라고 하던데 왜 갑자기 드라마를 쓰게 된것인가? 조선족을 제재로 한것은 의도적인가? 김인순: 아주 우연이였다. 1999년 말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나를 찾아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 헌례작품으로 연길을 배경으로 한 8집 텔레비죤드라마를 창작해줄것을 부탁했다. 당시만도 줄곧 소설에만 집념해 오면서 씨나리오 제의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다 거절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조선족을 제재로 하는 내용의 부탁이기에 자치주설립 기념 헌례에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한다는 생각에 례외로 대답을 했다. 나는 누구도 알리지 않고 홀로 조용히 연길에 가서 한주일간 체류하면서 생활체험을 했다. 아마 송기호텔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호텔에 류숙하면서 매일 그 아래 장국집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너무 인상깊었다. 하여 이를 제재로 오늘의 《엄마의 장국집》이 된 원작 《사랑이 지나간 여름의 거리》를 창작했다.   헌데 방송국에서는 아마 연변주헌례작품으로 품위가 장국집 이라는것이 주선률이 아니여서 그랬던지 결국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2년 《록차》가 영화로 제작되면서 영화텔레비죤계에서 주목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엄마의 장국집》을 찍겠다고 찾아왔다.  사랑이 지나간 여름의 거리 《엄마의 장국집》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내가 드라마를 목적으로 쓴 작품이다.   당신의 작품중에 우리 민족 제재를 반영한 소설들이 중국문단에서 주목되면서 일부 작품들은 당신의 대표작으로 인정되고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시종 주류문화권에서 살아오고있고 또 우리 말도 모르는 당신이 왜 낯설다 할수 있는 민족제재를 다루고 있는가? 또 정조의 상징 인 춘향을 그렇게 다루면 될수 있냐는 조선족문단의 일부 반대의견도 있다.   김인순: 고전소설의 경우 나의 소설의 배경은 고대 조선반도이다. 이것은 나의 의식적인 작업이다. 비록 단순히 배경에 그치는것일지라도 우리 민족 고전을 배경으로 삼고 다룬 작품이 고려이야기(高麗往事) 춘향을 주인공으로 한 《기(伎) 》등 이미 6편에 10만자(한자로)에 달한다. 물론 작품의 스토리들은 다 완전히 허구로 된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교류추천작품에 선정되여 영어, 일어로 번역되여있다. 어릴 때부터 조선족들이 없는 탄광구역에서 자라면서 성장환경의 제한으로 민족언어문자를 배우지 못했지만 내 마음은 완전한 조선족이다. 우리 민족 생활을 다루고싶었다. 조선반도에 다녀오지 못했지만 의식적으로 중문으로 번역된 관련서적을 통해 우리 민족 문화 풍속 등을 료해하고있다.  기자: 당신의 작품이 영어, 일어로 적지 않게 번역되여 외국에서 출판되였지만 아직 한국에서 번역출판된것이 없는것으로 알고있다. 서책보다도 한국방문을 해서 직접 체험한다든가 한국작가들과 합작할 등 타산은 없는가?  김인순: 아직 한국어로 출판되지 못한것이 유감이다. 여유도 없고 특별히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어떤 플랫폼이 마련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좋은 일이다. 문학과 그녀의 인생 기자: 어떻게 되여 소설을 쓰게 되였는가? 김인순: 4남매중의 막내로, 부친은 문화일군이고 어머니는 소학교 교원출신이다. 아버지가 당시 구락부(극장)의 주임으로 있다보니 밥 심부름을 하면서 당시 표 한장 구하기 힘들던 영화를 한부도 몇번씩 볼수 있는 행운을 가질수 있었다. 아버지는 또 책을 많이 사주셔서 닥치는대로 다 읽으면서 책에 빠졌는데 후에 소설을 쓸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내 행로는 우연속의 자연의 계속이엿다. 길림예술학원 미술시험을 보러 왔다가 그냥 좋아하던 영화생각이 나서 연극문학학부에 입학했으며 또 1학년때 우연히 숙제로 쓴 소품이 동북3성 공연에서 2등상을 타고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을 탔다. 그러다나니 문학소녀가 되여 대학때 10여편의 소설을 쓰게 되였다. 그러다가 돌파가 없어 필을 놓았다. 졸업후 잡지사 편집으로 배치받으면서 다시 문단과 인연이 시작, 다시 소설을 쓰게 되였는데 륙속 발표되면서 평론가들의 주의를 일으키고 마침 1998년부터 우리또래의 글들이 사조가 되면서 70 후가 된것이다.  기자: 돈은 얼마만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꿈이라면? 김인순: 돈은 좋은것이다. 허나 어떤 돈인가가 중요하다. 바친것만큼 보상받는것이 옳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요구가 높지 않은 사람이다. 언제나 겉보기엔 여유작작해 보이지만 머리속은 쉬지 못하는 보통 전직작가이며 예술학교 교원인 남편을 둔 안해이고 두살난 딸애의 엄마다. 꿈이라면 내가 만족하는 글을 쓰는것이다. 독자들이 나를 좋아하고 내 작품을 좋아하는것이 나의 제일 큰 행복이다. 기자:  김인순 이라는 이름 참 고전적이고 민족적인데... 다른 작가들처럼 필명이 없는가? 김인순: 김인순! 얼마나 좋은 이름이라구. 나는 따로 필명이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조선족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아주 기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조선족을 만나면 그냥 반갑고 좋다. 통화의 탄광구역에서 자라면서 주위에 조선어 공부를 할 환경이 없었지만 음식을 포함한 모든 가정생활환경이 순 조선족문화였다. 지금도 김치 담글줄도 알고 장국도 늘 끓여먹는다.

 [취재인상] 《커피같은 녀자?》 《물같은 녀자?》 김인순?그녀 이름을 보고 혹시 조선족이 아닐가고도 생각했다가 중국 70후 소설의 대표작가가 설마...하고 주춤했었다. 중국문단에서 미녀작가들로 불리우는 70후 대표답게 그녀는 무용수같은 날씬한 몸매에 얼굴선이 아름다운 36세의 녀자였다. 그러면서 70후의 녀류작가 가운데서도 특유의 스찔로 커피같은 녀자   부드러운 정을 가진 킬러   고독한 기수로 불리는 그녀 얼굴에서는 동양적인 눈매와 서구적인 입술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있다. 그냥 생머리를 뒤로 맨 모습이나 구김살없는 자세는 오히려 흐르는 물 같은 녀자 라고 부르고싶은 녀자였다. 순수하고 솔직한 눈매의 그녀는 그냥 순기자연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인순이 가장 깊게 준 느낌은   전형적인 조선족녀성이구나! 였다. 조선말 한마디도 할줄 모르는 그녀에게서 조선족녀성의 특유의 분위기가 그녀 깊숙한 어느 곳에서 새여나와 감싸고있었다. 그 점이 아마 문단에서 그녀를 알수 없는 신비의 녀자 라고 부르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적라라한 성(性)을 다루는것으로 특징인 70후 녀류작가중에서 작품이나 인격에서 누구 못지않게 솔직하지만 또 누구보다도 절제할줄 아는 신비의 녀작가로 불리고있다. 그녀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디 가나 조선족이라고 말하죠. 남들도 첫눈에 조선족이 아닌가고 묻구요. 김치 담글줄도 알고 된장찌개도 잘해요... 필명이요? 없어요. 김인순, 얼마나 좋은 이름이예요! 얼마전 북경에서 진행된 제7차전국작가대표대회에 참가한 김인순, 956명 대표가운데서 70년대후 출생한 작가는 4명, 그중의 한사람이 김인순. 중국문단의 오늘과 래일에서 그녀의 위치가 보여지는 대목이다. 갈라지면서 기자가 말했다.  정말 조련찮아요. 당신은 우리 조선족녀성의 자랑입니다!

 간력 및 대표작 김인순, 조선족, 1970년 출생. 길림예술학원 연극학부 졸업, 현재 장춘에 거주, 전직 작가. 전국적으로 이름있는 청년작가이며 《70년대작갬들중의 대표작가의 한사람. 소설집 《애정 한류(愛情冷氣流)》와 《달빛이여 달빛(月光月光)》, 산문집 《방불히 일장 백일몽(彷佛一場白日夢)》, 영화문학작품집 《록차(綠茶)》 등이 있다. 《사랑이 지나간 여름의 거리(愛情走過夏日的街)》는 지금 《엄마의 장국집(妈妈的酱湯館)》이란 26집 드라마로 각색되여 중앙텔레비죤 8채널로 방영되고있다. 1992년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한 이래 소설, 영화텔레비죤문학, 산문, 평론 등 100여만자(한자)에 달하는 작품을 창작, 《70년대작갬들중 유일하게 동북에서 생활하는 대표작가이다. 《물가의 아디리아(水邊的阿狄麗雅)》《고려기왕사(高麗往事)》, 《기(伎)》, 등 작품은 영어, 일어로 번역되여 국외에서 출판되였고 많은 작품들이 《20세기 중국단편소설선집》, 《2001년 단편소설선》, 《70년대작가 애정소설 선본》, 《전국단편소설 10편 입선작품》, 《2002년 최우수작품집》 등에 선재되였고 단편소설 《고려기왕사》는 2000년 최우수단편소설상, 《물가의 아디리아》는 2003년 길림성 첫 문학상을 수상했다.

길림신문이 만난 사람/기자: [한정일 김정함 사진: 유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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