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홍남

김홍남 :  흑룡강성해림시 출생, 교사 출신. 현재 충북에 혁신도시에 거주. 청년생활, 연변녀성, 흑룡강신문 등에 작품 발표. 흑룡강신문사 실화소설 응모 1등상 수상.
김홍남 : 흑룡강성해림시 출생, 교사 출신. 현재 충북에 혁신도시에 거주. 청년생활, 연변녀성, 흑룡강신문 등에 작품 발표. 흑룡강신문사 실화소설 응모 1등상 수상.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친할아버지도 친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다 세상을 떠나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는 생존해 계셨고 그래서 오직 외할머니만 기억에 생생하다.

외할머니는 목단강 시내에 살고 있었다. 나의 엄마처럼 딸만 넷을 낳았는데 농촌에 시집간, 맏이인 우리엄마만 빼고 다들 그래도 도시에서 잘들 살고 있었다. 둘째이모는 대학을 졸업하고 무한에서 대학생인 한족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고 셋째 곰보이모는 대학생을 만나 결혼하여 목단강시 방직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예쁜 막내 이모는 한족 남자에게 시집가서, 시골을 벗어나 목단강 시내 할머니네 집 헛간을 방으로 고쳐서 임시로 살다가 중학교 교사, 가두판사처 등에 근무하면서 자리를 잡았고 남편은 목단강포도주공장 공장장까지 하다 보니 다들 농촌에 살고 있던 우리 집만 빼고는 그 시대엔 풍족한 생활을 하고 사셨다.

해림현이 고향인 나는 어렸을 때 방학이 되면 엄마를 따라 할머니네 집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그때는 지금처럼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걸어서 이웃동네인 남라고촌에 있는 라고하에서 배를 타고 건너서 다시 걸어서 북라고 공사마을에 가야만 기차를 타고 목단강에 갈수 있었다. 라고하는 작고한 윤림호 선생의 소설 나고하의 배사공이 탄생된 고장이다. 겨울은 그나마 다행으로 얼어버린 마을 뒷강을 건너 북라고까지 가로질러 가기도 하였다. 그래도 적어서 10리길을 걸어야 한다.

할머니는 언제 봐도 아주 깔끔한 분이셨다. 한번은 내가 바지 속에 적삼을 넣고는 허리띠로 허리춤까지 단정히 잘라맸더니 깔끔하다면서 늘 남들 앞에서 칭찬하고 다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할머니는 농촌에 시집가서 사는 우리 엄마가 불쌍해서인지 특별히 우리 가족들을 잘 챙겨 주셨는데, 엄마는 갈 때마다 쌀을 한 자루 이고 가서는 올 때면 이모들이 입다만 옷가지들과 먹을 것들을 한보따리 지고는 돌아오곤 하였다.

동년의 눈으로 본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 같은 시내와 농촌의 풍경은 천양지차였다. 아침이면 이모네 온 가족을 따라 북산공원에 가서 등산도 하고 광장에서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일품이었다.

식사할 때가 되면 할머니네 집식구들은 밥도 주먹크기만한 공기에 담아 드시는 것이었다. 우리같이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공깃밥은 당연히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그럴때면 할머니가 밥주걱에 밥을 푹 떠서는 나의 밥사발에 얹어주곤 하였다.

시내에서 할머니는 술병이나 박스 신문종이 같은 물건들을 주어서 모아 뒀다가는 밀차를 끌고 골목을 누비는 고물상들이 꽹과리를 치면서 서우 퍼랄러...”라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내다 팔곤 하였는데 그렇게 모은 돈을 엄마의 호주머니에 가만히 찔러주곤 하셨다.

할머니는 또 이모들의 자식들이 방학이 되면 농촌에 있는 우리 집에 데리고 놀러 오시곤 하였는데 시내에 살던 사촌동생들은 또 내가 살던 농촌을 신기해하며 달포씩 놀다가군 하였다.

우리 집 마당 앞에는 동네에서도 제일 큰 사과나무가 한그루가 있었다. 사과는 가을이 가야 빨갛게 익어서 새콤달콤해 맛이 나지만 여름엔 파랗게 덜 익어서 시었다. 사촌동생들은 파랗게 신맛이 나는 사과도 내가 시내에 가면 즐겨먹던 사탕이나 과자처럼 얼굴을 찡그려가며 맛있게 먹곤 하였다. 가끔 공놀이, 제기 차기, 술래잡기도 하면서 사과와 사탕을 바꿔 먹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입안이 스르르 군침이 돌며 동년의 아련한 추억 속에 서서히 사로잡히게 되면서 세월의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마이 삥궐라.

할머니는 올적마다 우리 집 골목길을 돌며 불러대는 얼음과자장사의 목소리만 들려와도 허리춤에 꽁꽁 싸놓았던 동전들을 풀어서는 우리에게 하나씩 사주시곤 하였다.

그때는 얼음과자가 왜 그리도 맛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방학이 되면 사촌동생들이 오기를 학수고대해 기다렸다. 사촌동생들이 오면 할머니도 따라 오시니깐. 그러면 맛있는 얼음과자도 사주시고 사탕도 사주시고 과자도 주시니깐.

우리형제들은 따스한 여름방학이면 잠자리도 잡고 마을을 흐르는 뒷강에 가서 목욕도 하고 골뱅이도 주어서 삶아 먹곤 하였다. 지금은 그 많던 골뱅이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가 없다.

겨울이면 마을 앞에 있는 뒷강으로 나가 썰매도 타고 눈싸움도 하며 즐거운 동년을 보내곤 하였다.

할머니는 두통이 심했는지 늘 정통편을 밥처럼 드시곤 하셨다. 그렇게 깔끔하고 우리 집에 잘도 오시던 할머니도 어느 시점부터인가 발길이 뜸해지더니 여름방학이 가고 겨울방학이 와도 오시지를 않는 것이었다. 할머니 부고가 왔을 때 난 그때 뭘 했었던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엄마와 누이들이 가서 후사를 치렀다고 한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목단강으로 가는 엄마의 발길도 뜸 해지는 것 같았다. 사촌형제들도 학교를 졸업하고 점점 성인으로 변하더니 이젠 오지를 않는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빈자리가 더욱 그리워 난다.

할머니나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때의 소중했던 하루하루의 우애가 요즘처럼 삭막해져가는 현실에서 얼마나 소중한 추억이었던가를 가슴깊이 실감하게 한다.

나에게는 그나마 외할머니의 가슴 깊은 추억이라도 남아있지만 우리 집 공주님에게는 외가나 친가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한분도 안 계신다.

그러니 우리집 따님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 추억들이 얼마나 쓸쓸하고 눈물겹고 달콤하고 아련한가를, 가을의 낙엽을 밟는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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