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송숙 수필가

이 글은 2019년 kbs한민족방송 우수작품상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고송숙 약력: 연변작가협회 회원, 안성문인협회 회원,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소설 '백송이의 노란 장미꽃',수필 '푸른 달래',시 '13월의 사랑'등 50여편 발표.수필 '봄과 가을'연변TV공모 금상,수기'시어머님의 유산'연변일보 평강컵 공모 1등상, 2017년 청암문학으로 한국문단 등단.
고송숙 약력: 연변작가협회 회원, 안성문인협회 회원,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소설 '백송이의 노란 장미꽃',수필 '푸른 달래',시 '13월의 사랑'등 50여편 발표.수필 '봄과 가을'연변TV공모 금상,수기'시어머님의 유산'연변일보 평강컵 공모 1등상, 2017년 청암문학으로 한국문단 등단.

2019년은 3.1독립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 뜻깊은 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의 흔적을 찾아 역사 문화를 답사하려고 상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해에 도착한 이튿날인 2월 4일 남편과 함께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따라 첫번째 목적지인 상해 임시정부 청사로 찾아갔다. 상해 황포가의 한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임시정부청사는 지하철 신천지역 6번 출구에서 200m거리의 평범한 주택가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입구 앞 양옆과 주위에는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긴 집에 띄엄띄엄 검은색 문들이 달려있고 그중의 한 집 앞에 중국어와 한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라는 표지판과 유적지 관광 안내 등 현판들이 걸려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얼기설기 연결되어있는 전선줄, 청사 맞은편 집에서 살고 있는 주민이 걸어놓은 온갖 빨래들, 지어는 빨간색 속옷까지 바람에 날리고 있는 낯선 풍경과 마주하니 이곳이 바로 내가 그토록 찾아보고 싶었던 유적지가 옳은지 두 눈을 의심하며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놀라움과 실망에 빠졌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독립운동을 하였던 청사로써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부인데 너무 초라하고 허름하여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협소한 공간을 마주하니 무거운 돌에 가슴이 짓눌리듯이 갑갑해지며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임시정부 유적지라고 씌어 진 현판 바로 옆에 있는 매표소에서 인민페 20위안 (한화 3300원)으로 입장권을 끊고 실내로 들어가면 영상실에서 임시정부의 역사와 발자취를 소개하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영상을 본 후 층별로 순서대로 관람할 수 있었는데 1층에서 작은 회의실과 바로 세 발자욱 옆에 있는 2인식 식탁이 마련된 부엌 그리고 비좁게 자리하고 있는 가마솥을 만나볼 수 있었다.

내부에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관리인원이 나누어주는 비닐 덧신을 신발 위에 씌우고 한사람이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좁고 경사진 나무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씩 기다싶이 걸어서 2층으로 올라가면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던 김구선생의 집무실과 침실, 세 발자욱 옆에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무실과 숙소를 볼 수 있었다.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방에 책상 하나가 놓여있는 회의실에서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태극기였는데 그 태극기에 시선이 집중되면서 경건함과 숙연함으로 온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그 시절에 사용했던 태극기는 태극문양이 세로로 되어있는 팔쾌였는데 천안독립기념관과 안성 3.1운동기념관에서 만났던 태극기를 또 이곳에서 다시 보니 아주 오래전의 익숙한 얼굴을 만나 본듯이 만감이 교차되며 짜릿한 감동과 울렁거림이 내 가슴속 구석구석에서 꿈틀거렸다.

좁은 나무침대, 낡아빠진 선풍기, 보온병, 소박한 필기구들과 독립지사들이 사용하였을 몇 개의 찻잔, 빈 의자들, 하나하나의 소품들이 그들과 함께 했었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미어지는 울컥함이 솟아올랐다.

험난한 그 시대에 감시가 심했던 시절 빈민구의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림으로 하루에 한끼의 식사로 겨우겨우 연명해나가며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지만 임시정부 청사의 간판을 하루도 내린 날이 없었다는 설명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며 그들의 발자욱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3층에는 임시정부와 관련된 각종자료, 정부요인들의 활동사진, 청사를 다녀가신 역대 대통령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의원 30여명이 모여 설립한 대한민국의 산실, 민족혼의 기개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 민족의 유산인 대한민국을 있게해준 뿌리, 희생된 독립투사들의 얼과 넋이 살아있는 곳에서 그들의 익숙한 이름 낯익은 사진을 바라보니 100년 전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독립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환각에 빠졌다.

중국 속의 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사진촬영으로 기록을 남기고 그분들과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한층 더 가까이 만나보고 싶었지만 청사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너무 안타깝고 아쉬웠다.

전시관 끝자락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기부금을 내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었는데 20여명 관람자 대부분이 년세가 지긋한 한국인으로 보여졌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단체명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나도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나의 기부금을 청사관리 후원금으로 잘 유지해서 감사함을 전달하고 또 유적지가 더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편과 나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넣었다.

한 장 한 장의 사진과 소품들, 전시된 모든 해설을 마음과 눈 머리 속에 더 많이 담아가려는 욕심으로 전람했더니 다른 관람객들이 30분이면 끝마친다는 관람을 무려 두 시간 넘게 관람했어도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으로 청사 문을 나서니 상해의 하늘도 나의 무거운 마음처럼 검은 구름에 뒤덮인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듯이 잔뜩 흐려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상해에서 대한민국 아픔의 역사와 함께 공존하는 특별한 지역, 공산당 제1차 당대표 대회를 열었던 아담하고 고풍적인 창당기념관과 빛나는 도시의 상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좁고 한적한 거리의 한 귀퉁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서로 다른 문화들이 마주 보며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100년 전의 이름할 수 없는 아리숭한 냄새와 체취에 젖어 깊은 사색 속에 빠져 들어갔다.

100년의 긴긴 세월을 견뎌낸 빨간색 벽돌 청사를 뒤로하며 걸음을 옮겼어도 삐꺽이는 그 나무계단 소리가 어느 독립투사의 힘든 신음소리처럼 들려오고 이곳 저곳에서 "나의 소원은 대한민국의 독립이오" 하는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려오며 몽롱한 환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벼운 묵념을 다시 한번 하고 임시정부 청사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해있는 루쉰 ( 홍커우)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루쉰공뭔에서 200m 걸어 들어가면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1층 기념관에서 윤봉길의사의 동상과 유언시, 김구선생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를 교환했던 회중시계,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 선서문을 붙이고 왼손에는 수류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찍은 사진이 전시되었고 2층에서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었다. 일본 천왕의 생일 겸 축하행사에서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물통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을 처단한 의거현장에서 큰 바위에 중국어와 한자로 그의 업적을 소개한 글을 읽으며 25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감한 삶에 머리가 숙어졌다.

윤봉길 의사의 "매헌"이란 호를 따서 "매헌"이라고 이름 지은 빨간색건물의 기념관, 또 앞마당에 200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관리하는 중국정부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이 계절에 봉우리를 살짝 터뜨린 매화꽃을 보니 윤봉길 의사를 만나듯이 반가웠고 우리의 영웅이 자신이 좋아하던 매화와 늘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마음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시계를 보면서 그의 체취를 느끼고 십자가 형틀 아래 거적따위에 무릎을 꿇린 채 포승에 묶이어 총살형을 당하는 마지막 모습의 사진을 보니 그의 아픔을 나누지 못한 애석함과 일제의 만행에 저도 모르게 빨라지는 심장박동소리를 느끼며 가슴이 터질듯한 분노로 숨 가쁜 시간을 보냈다.

매헌 기념관에서 전람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 사이에 창살같은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2월에 내리는 비라고 믿지 못할 정도로 마구마구 쏟아졌는데 길가의 가로수며 매화나무며 착잡한 내 마음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크나큰 슬픔으로 목구멍까지 올리미는 응어리를 토해버리고 싶었던 나는 남편이 건네주는 우산을 받지 않고 온몸으로 큰 비를 맞아가며 매화나무를 부여잡고 참고 참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슬픔과 눈물을 큰비와 함께 맘껏 울고 흘렸더니 뇌를 씻은듯한 청신한 느낌으로 무거웠던 마음과 머리가 가벼워졌다.

이튿날 중경에 도착하여 1940년부터 5년간 사용했던 중경 임시정부청사에서 상해 청사의 12배나 큰 규모의 5개 건물에서 사진촬영도 자유롭게 하면서 전람하였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김구선생의 빛바랜 흉상사진, 광복을 맞아 오랜 타향살이에 마침표를 찍고 환국기념으로 청사계단에서 태극기를 손에 꼭 잡고 찍었던 정부요인들의 빛바랜 기념사진들, 100년이 흐른 후에 그 청사계단에 서서 그날의 그 순간을 느껴보니 또다시 크고 작은 감격과 설레임으로 목이 메어오고 짜릿한 전률로 눈굽이 뜨거워졌다.

전람하는 내내 사연 하나하나에 마음이 아프고 숙연해지는 마음이 들고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독립투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다 같은 단군의 후손이고 같은 고구려의 피가 흐르고 같은 말과 같은 글을 쓰는 한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었을 것이다.

같은 한민족이었기에 긴 세월을 떨어져 지내면서도 우리말과 우리 글을 잊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고 용정 3.13운동, 청산리 전역, 봉오동전투에서도 하나로 뭉쳐 싸웠기에 나라의 독립이 가능할 수 있었고 정부에서도 동포라고 포용해주고 좋은 정책으로 반겨주게 되었다.

100년 전의 독립영웅들이 있었기에 100년 후에 우리 가족도 할아버지의 탯줄이 묻힌 고국에 와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신화처럼 동경하던 무릉도원에서 딸과 남편은 회사에 나는 식당에 근무하면서 같은 문화가 주는 편안함과 같은 말과 같은 글을 쓰는 익숙함 속에서 각자가 자기의 꿈을 펼쳐가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3년 전에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에서 후원하는 "민족의 정체성 찾기 교육"에 참여하여 천안독립기념관, 백제유적지를 탐방한 후부터 고기가 물을 만나 즐기듯이 한국역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역사탐방에 중독되어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민족의 뿌리와 한국사를 배워가고 유적지가 세계 유네스코에 선정될 때면 가슴 뛰는 뿌듯함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50대 후반의 평범한 가정주부이지만 무궁화꽃을 보면서 애국가가 저도 모르게 불려지고, 3.1운동기념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3창을 목청껏 웨치고, 안성 위안부 동상 제막식에 후원금을 헌납하고, 상해임시정부 매표소에서 한화와 카드불가로 중국지페가 없어 관람을 포기하는 한국 관람객들에게 주저없이 입장권을 사서 선사하는 마음은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한사람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100주년이라는 의미가 뭉클하게 다가오고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는 역사적인 시점에 나도 한국인들과 똑같은 애국심으로 동질감을 느끼며 구정휴가의 시간을 내어 남편과 동행하여 임시정부 유적지 체험을 하였더니 책에서 보지 못했던 다채로운 이야기와 더 많은 내용을 알게 되어서 더 뭉클하고 더 숙연한 마음으로 독립영웅들을 공경하게 되었다.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대한민국 인천에서 상해까지 1시간 40여분, 상해에서 가흥 김구선생피난처까지 버스로 두시간, 김구선생 피난처에서 항주 임시정부청사까지 버스로 1시간 30여분, 항주에서 중경까지 비행기로 3시간 30분이란 시간을 이동하면서 민족의 역사를 더 많이 더 가까이 더 세세히 탐방하면서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태극기 따라 떠난 역사 여행에서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를 돌아보고 어둡고 무거운 유적지답사로 5박 6일의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부부가 한마음으로 동행하여 순간순간을 공감하고 중국동포라는 한사람으로, 한민족이라는 뜨거운 이름으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에 역사적현장을 찾아가서 감사함을 표현하는 의미있는 체험을 하니 뿌듯하고 특별한 최고의 여행을 보냈다.

역사 유적지 여행을 마치며 우리의 역사를 지켜주고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에게 편안한 일상을 지켜주신 독립투사들에게 내가 배운 가장 따뜻한 말과 무거운 말로 머리 숙여 삼가 인사를 드린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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