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모든 병원에 이런 전체적인 사고와 공중 위생 사고를 가진 감염과 의사들이 있다면, 국가가 첫 번째 방어선을 얻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신문주간 빠오안치(鲍安琪) 기자

 

124, 음력 섣달 그믐날, 우한 도시 봉쇄 이틀 째이다.

82세 푸단대학 부속 화산병원(复旦大学附属华山医院) 종신교수 웡신후아(翁心华)는 오후 상하이 코로나19 임상치료 전문가 회의 참석을 위해 상하이질병예방통제 센터에 갔다.

그는 이로 인해 그날 저녁의 섣달 그믐 저녁식사를 취소했다. 설에는 택시를 잡기 힘들어 그의 학생인 장원홍(张文宏) 전문가팀장이 일부러 차를 몰고 와서 그를 맞이했다.

차 안에서, 웡신후아는 웃으며 장원홍에게 사스(SARS) 때 자신이 반년 동안 상하이에서 일하면서 8명의 환자만 구했는데 이번에 첫 확진을 받은지 4일 만에 20명의 확진환자(12324시까지)가 나왔다고 말했다. 자신의 첫 느낌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SARS보다 전파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몽땅 이 질병을 예방 제어하는데 쏟아 부었다. 이것은 웡 선생님이 초기에 이 병을 중시해야 한다고 일깨웠던 것과 관계가 있다.” 장원홍이 이렇게 <중국신문주간>에 말했다.

“17년 전 SARS 때 나는 상하이 전문가 자문팀장으로 일했죠. 17년 후에 제 학생들이 저를 대신해서 팀장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는 매우 능력이 있고 나보다 더 잘할 것이에요.” 이번 상하이 임상치료 전문가팀 회의에서 웡신후아는 이렇게 말했다.

전염에서 감염으로

200210, 7차 중화의학회 전염병학 분회(第七届中华医学会传染病学分会) 주임위원에 웡신후아가 선출됐고, 리란쥐앤(李兰娟) 등이 부주임위원으로 선임됐다. 리란쥐앤은 제8차 주임위원 직무를 이어받았다. 이들의 최우선 업무 목표는 전염병학 분회를 감염병학 분회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것은 베이징협화병원(北京协和医院) 왕아이시아(王爱霞) 교수, 베이징대학 제1병원 교수 쓰총원(斯崇文)에서 웡신후아까지 3대째 주임이 이어받은 목표이다.

신중국 성립 이후, 중국 의학계는 소련 모델을 벤치마킹해 간질환을 위주로 치료하는 전염병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업계 식견이 탁월한 사람들은 이미 중국의 감염병학과가 응당 국제사회와 서로 연계하여 항생제, 공중위생사업 등과 결합해 대감염(大感染)’ 학과로 발전해야 한다는 점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웡신후아의 스승인 따이쯔잉(戴自英)이 다년간 노력해 온 방향이기도 하다.

따이쯔잉은 페니실린 발명가 중 한 명으로 노벨 의학상 수상자인 영국 옥스포드대학 병리학 교수 폴 플로리를 스승으로 모시었고, 1950년 옥스퍼드대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1955년 화산병원 전염과를 창설했다.

1962년 상하이 제1의과대학을 졸업한 웡신후아는 그 부속인 화산병원 전염병 연구실에 들어갔다. 연구실 주임은 따이쯔잉이었고, 웡신후아의 대학 교사인 쉬자오 위에(徐肇玥)가 부주임으로 있었다. 전염과 근무조건이 좋지 않아 거의 병원 안에서 조건이 최악인 과실이었다. 따이쯔잉은 전염과 의사는 짐을 짊어질 수 있어야 하고, 시련을 이겨내야 하며,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청빈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들을 훈계하였다.

다른 병원의 전염과가 대개 통일된 소련 모델을 실행하는 것과 달리 창사 이래 따이쯔잉이 주도하는 전염과에서는 일종의 혼합 모델을 실행해 왔다. 소련 모델인 전문적으로 전염성 질환자를 수용 치료하는 격리병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방모델인 감염성질환자를 수용 치료하는 일반병실도 있다.

중국 임상항생제학(中国临床抗生素学)의 창시자이기도 한 따이쯔잉 주관으로 1963년 상하이에 중국 최초의 항생제 임상연구실이 만들어졌다. 항생제 분야는 라틴어에서 나온 수많은 세균명과 약명을 다루고 있으며, 발음이 독특하여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따이쯔잉의 대학연구생이자 나중에 화산병원 감염과 주임, 화산병원 당서기를 지낸 장용신(张永信)은 따이 선생님의 오리지널 영국식 영어가 매우 부러웠지만 모방은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번은 장용신이 녹음할 수 있느냐고 떠보자 따이쯔잉은 흔쾌히 동의했고, 진지하게 상용 세균명을 한 번 더 천천히 읽었으며, 개별적 특수한 것은 또 중복을 가했다. 나중에 그 정판 테이프는 학우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복제되었다.

화산병원의 현재 항생제연구소 소장, 감염과 부주임 왕밍꿰이(王明贵)화산병원 감염병학과의 전체 제2의 전문학과는 국내에서 가장 잘 갖추어져 있고 국제사회와 가장 잘 연결돼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소련 모델과 서방 모델 둘 다를 받아들였고, 감염과와 항생제 연구소의 두 줄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중국신문주간>에 전했다. “이 두 개가 있어야만 당신의 감염과가 진정한 감염과라고 불릴 수 있다.”

198412, 따이쯔잉은 은퇴했다. 웡신후아는 그의 뒤를 이어 화산병원 전염과 주임을 맡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따이 선생을 모시고 논문을 발표하여 토론을 제기하였으며 학과 전환을 준비했다.

따이쯔잉은 전염감염의 개념을 규명하여 근본적으로 바로잡을 것을 제기했다. 중국 국내에서 전염병으로 번역되는 ‘infectious disease’는 국제적으로 감염성 질환으로 불린다. 비록 둘 다 미생물이나 기생충이 원인이지만 감염병의 개념은 전염병(contagious disease)보다 개념이 크고 또 비전염적인 감염성 질환도 포함된다.

이 인식은 점점 공통된 인식이 되어 가고 있다. 1999, 6회 전국 전염병과 기생충병 학술회의에서는 학과 이름을 바꾸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개명은 민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3년의 보고 비준 요청을 거쳐 마침내 웡신후아의 주 위임에서 비준을 얻었다.

웡신후아는 이것은 세 글자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학과 발전적 추세의 변화라고 했다. “이러한 확장은 학과 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며 또 우리들이 국제적인 접목을 해야 하는 필연적 요구이다.”

SARS 예방 퇴치를 위한 상하이 표준

웡신후아가 막 중화의학회 감염병학 분회 주임위원을 인계 받았을 때 중대한 돌발 공중보건 사태의 시련인 SARS가 발생했다.

20021116, 첫 번째 병례는 광동성 포산시(广东佛山市)에서 발생했다.

20032월 상하이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나중에 SARS로 명칭 전환) 예방 퇴치의 서막을 열었다.

상하이시의학회는 상하이시 위생국에 상하이시의 SARS 예방 퇴치 전문가 자문팀장으로 웡신후아를 추천하였다. 20033월 말, 웡신후아는 호주에서 학술회의에 참가하여 상하이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임명을 받았다.

전문가 자문팀은 상하이시 보건국이 앞장서서 감염과, 호흡과, 임상 미생물, 유행병학, 중증응급치료 등에서 온 최고의 전문가 20명으로 구성되었다.

거의 이와 동시에 상하이의 첫 사례인 SARS 환자가 발생했다. 327, 홍콩에서 돌아온 한 여성이 상하이의 어느 구급병원 열증 진찰실에서 진료를 받은 후 바로 SARS 환자를 수용 치료하는 상하이 거점 지정병원인 상하이시 전염병병원에 넘어갔다. 42, SARS 확진 진단이 내려졌다.

그 중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여행 온 57세 여성 환자에 대한 치료는 가장 어려웠다. 그녀의 폐에 속발성 아스페르질루스 푸미가투스 감염이 잇따르는 등 위급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암포테리신 B로 아스페르질루스 푸미가투스 치료가 가능했지만 부작용이 커서 당시 환자의 몸 상태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문가팀은 보고 있었다. 화산병원 감염병학과 종신교수, 당시 항생제연구소 소장 장잉위앤(张婴元)은 보리코나졸을 사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상하이시 전염병 병원 주임의사, 임상치료 분과 전문가팀의 우산밍(巫善明)<중국신문주간>보리코나졸은 전문적으로 심부 진균류 감염을 조준한 신약으로 아직 중국에 들여오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SARS 기간 동안 화이자제약회사는 중국에 대량의 보리코나졸을 기증하였다. 이 약은 상하이에 재고가 없으므로 시 간부가 직접 지시를 하여 베이징에 긴급구원을 요청하였다. 환자가 회복 퇴원하여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퇴원한 한 명의 환자가 되었다.

전염병 사태에서 중국 국내(홍콩 포함) 누적 감염자는 8만여 명이고 사망자는 3,000여명이다. 이 중 베이징, 광둥, 홍콩 특구 감염자 수는 모두 1,000명을 넘어섰다. 상하이시는 322일 현재 404 명이 감염되었고, 4명이 사망하였으며, 그 중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병례도 다수가 발견되었다. 가정 계발성 감염이나, 내원성 감염, 의료진 감염도 타지역보다 현저히 낮았다.

이런 성적표가 있는 이유를 웡신후아는 유행병학사를 굳건히 지켜온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2003414, 보건부는 SARS5항 임상진단표준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유행병학사, 발열기침 숨가쁨 등의 증상과 병증, 조기백혈구 통계 높지 않음 등의 실험실 검사결과, 폐부 영상학 변화 병리 변화, 항균약물 뚜렷한 효과 없음 등 5개 방면이 포함된다. 420, 보건부가 조정된 진단 기준을 하달하였는데 유행병학 접촉경로 추적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고, 단지 동시에 제2, 3, 4항의 기준을 모두 충족하면 즉각적으로 의심환자를 진단할 수 있다.

420일 오후 8, 상하이시 보건국장 리우쥔(刘俊)은 상하이시 질병관리본부에서 회의를 긴급 소집하여 조정된 진단 표준을 검토하였으며 상하이시의 전문가 자문팀 구성원들이 총출동했다.

웡신후아는 유행병학사삭제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으며 확진병례와 의심병례에 대해서는 모두 유행병학사를 고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의견은 회의 참석자들의 일치된 찬성을 얻었다. “리우쥔 국장은 매우 유능한 리더이며 그는 우리 전문가들의 생각을 매우 지지하고 있다고 웡신후아는 말했다.

회의는 계속되어 11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질병예방통제센터에서 나왔을 때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웡신후아는 이것은 대야를 엎은 듯한 큰비가 아니라 이것은 항아리를 엎은 듯 큰비’”라고 했다. 그는 전문가팀 멤버, 장정병원(长征医院) 감염과 주임 미우샤오훼이(缪晓辉)의 차를 탔다. 빗물이 자동차 바람막이용 유리를 흐리게 해 앞길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어떤 길에서 달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차가 일방통행로로 역주행 해 한참을 달려야 발견됐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앞으로 나가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웡신후아는 마침내 자오자방로(肇嘉浜路) 근처에 있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 오전, 리우쥔은 웡신후아와 전문가 자문팀 부팀장, 푸단대 공중위생단과대학(复旦大学公共卫生学院) 교수 위슌장(俞顺章)을 상하이시 120구급센터에 있는 지휘부 사무실로 모시게 되었다. , 위 두 사람 앞에서 그는 보건부에 전화를 걸어 진단표준에 대한 상하이의 의견을 설명했다.

전화의 다른 쪽에서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문가팀 토론을 거쳐 결론이 내려지면서 리우쥔, 웡신후아, 위슌장은 이 결론을 모두 매우 견고하고 지지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만약 상하이 측이 뜻을 굽히지 않을 경우, 상황 설명 및 서명을 제출해야 하며 이후 책임을 져야 한다고 표명했다. 리우쥔이 웡, 위 두 사람의 의견을 묻자 두 사람 모두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였고 즉석에서 상황 설명에 서명했다.

얼마 후, 53, 보건부는 다시 한번 진단기준을 수정하여 다시 접촉경로 추적을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았다.

진단기준에 대한 이 에피소드는 한때 외신의 관심을 끌었다. “상하이가 자체 제정한 까다로운 기준을 계속하여 적용해 SARS를 진단하였고, 의심환자 숫자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시켰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으나, 당시 방역상황에서 상하이 측은 다른 기준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했다. 진실한 상황이 도대체 어떠한가에 대해서 17년이 지난 지금, 웡신후아는 드디어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샅샅이 검사하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상하이의 SARS 예방 퇴치에 중요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봄철은 호흡기 질환이 많이 발생하는 계절이어서 환자들에게 기침 고열, 폐부음영 등의 증상이 매우 흔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들을 모두 SARS 의심병례로 분류하여 격리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유행병 관리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고, 실제 감염된 환자는 입원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관문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이후 상하이시 과학기술위원회의 지원으로 전문가 자문팀 구성원, 푸단대 공중위생단과대학 원장 지앙칭우(姜庆五)SARS 유행병 연구과제팀을 이끌고 역학지역에서 혈청 표본 1,000인분 가까이를 채집했다. SARS 유행 중후기에 북방 일부 지역에서 이미 임상에서 SARS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의 절반가량이 체내에 SARS 바이러스 감염의 근거가 없는 과잉진단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행병학사를 중시하는 것도 이번 SARS 예방 퇴치에 참여한 장원홍에게 가장 인상 깊은 깨우침이다. 전염병 발생기간 그는 그 동안 스승을 대신해서 근거지를 지키면서 의심환자를 샅샅이 검사했다. 그는 또 웡신후아의 요구에 따라서 국내외 모든 관련 자료를 조목조목 명확하게 분류했다. 5, 두 사람이 공동 저술한 176페이지 되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한가지 새로 나타난 전염병>이 곧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SARS를 다룬 중국내 최초의 전문서적이다.

장원홍은 전염병의 발원지 접촉경로 추적을 고집하는 것이 전염병 예방 통제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고 말했다. “당신이 만약 그물을 너무 넓게 펼치면 오히려 진짜 대어를 잡지 못할 거야.” 이번 코로나19 예방 통제에서 상하이의 전략은 사실 2003SARS 때와 똑같다. 중점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잘 지키면통제할 수 있다.

감염계의 셜록 홈즈

코로나19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 목요일마다 웡교수의 대회진은 화산 감염과의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웡신후아는 목에 청진기를 달고 수십 명의 젊은 의사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키가 커서 사람이 많아도 많은 사람이 그를 볼 수 있다.

회진제도는 따이쯔잉 교수 이래 전해 내려온 전통이다. 출장을 가지 않는 한 따이 선생은 반드시 매주 회진하였고, 회진 전날에는 환자의 자료를 보고, 공부를 하였다. 1966년에 이 전통은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70년대에 다시 회복되었다. 웡신후아의 말에 따르면, 이전에는 자기 동년배의 교수와 함께 회진 하였는데, 최근 몇 년간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웠거나 불편해 해서 그 혼자서 회진하게 되었다.

회진 전에, 각 의사는 먼저 과 위챗 단톡방을 통해서 난제를 보고하는데 매주 그 중에서 가장 해결이 곤란한 1, 2명을 선정한다.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전국 각지에서 넘어온 난제 병례이다.

목요일 오전에 웡 선생이 먼저 함께 과의 회의실에서 이 병례를 회고한다. ()의사, 연수 의사와 학생은 많을 경우 70, 80명이고 적은 경우에는 50명 정도인데, 회의실이 꽉 차서 어떤 때는 앉을 자리조차 없다. 회고가 끝나면 다시 같이 가서 환자를 본다. 병실은 작아서 주치의사 등만 안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교대로 병실에 들어가서 견학한다.

발열 대기 조사는 웡신후아의 독보적인 기술로 그는 감염계의 셜록 홈즈로 불린다.

화산병원 감염과 주임의사 주리핑(朱利平)<중국신문주간>에 환자의 원인불명 발열에 직면하면 의사는 보통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웡신후아는 그들에게 발열 대기 조사는 사랑 이야기처럼 주제는 영원하지만 이야기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발열 대기 조사에 대해서 사랑을 탐색하듯 호기심을 가지면 스트레스는 동력으로 바뀔 수 있다.

주리핑은 한 달 동안 열이 나는 환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심장 류머티즘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웡신후아는 회진 때 그의 눈꺼풀을 뒤집었더니 눈꺼풀에 부분적인 점상 출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틀림없이 심장 류머티즘이 아니며 감염성 심내막염으로 의심되었다. 이어 확진 판정을 받고 투약 사흘 만에 퇴원했다.

주리핑은 그 후로 과실 의사들이 모두 눈꺼풀을 뒤집는 방법을 배워 여러 사례의 감염성 심내막염을 진단해 냈다고 말했다. 미숙한 의사는 때로 환자의 눈꺼풀을 부어오르도록 뒤집어도 뒤집어지지 않는데 웡신후아는 환자의 눈꺼풀을 뒤집는 것도 기술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20111129, 어느 14세 남자 아이의 가족이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화산병원의 명성을 듣고 감염과 외래 진찰에 왔다가 수용 치료하여 입원했다. 이 남자아이는 이미 열이 난지 16개월이 되어서 왼쪽 아래 턱이 아프고, 오른쪽 허벅지가 아프다고 했다. 2년 동안 고향 장쑤(江苏)와 상하이의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만성골수염진단을 받고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이 소년은 항생제 수십 가지를 사용했지만 병세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남자아이가 왔을 때, 왼쪽 아래턱뼈는 사라졌고 왼쪽 볼은 움푹 들어갔으며, 오른쪽 하체는 강판(钢板)을 하고 있었다. 124, 후앙위시앤(黄玉仙) 주임의사와 사오링윈(邵凌云) 부주임의사가 그의 진료를 인계 받았다. 두 사람은 이 병례를 <중국신문주간>에 자세히 회상하면서 소개했다.

남자아이가 입원한 후 일주일 동안, 매주마다 난치병 병례 토론회에서 웡신후아에게 회진을 부탁했다. 웡신후아는 병력 보고를 들은 후 환자를 보고나서 병력을 다시 한번 자세히 물었다. 그는 남자아이의 증상이 전형적인 골수염과 다르기 때문에 골수염이라는 진단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질병, 특히 폐랑게르한스세포조직구증, 림프종 등 혈액계통 질환을 고려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1216, 웡신후아는 한차례의 화산병원 원내 대회진을 조직하여 정형외과, 악골안면외과, 혈액과 전문의들을 초청하여 참가하게 했다. 악골안면외과와 정형외과의사는 골수염이 아니라는 웡신후아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당시 혈액과 전문의들은 명확한 병리증거가 없으며 비감염성 질환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보고 있었다.

이후 웡신후아의 끈질긴 고집에 혈액과는 병례를 상하이시 혈액병 난치병진료센터로 옮겨갔다. 이번 회진을 통해서 폐랑게르한스세포조직구증진단이 나왔다. 남자아이는 화산병원 혈액과로 옮겨갔다. 화학요법을 통해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골통이 사라졌으며, 연루된 골격계통이 점차적으로 완쾌됐다. 후기의 방문 지도를 통해서 그들은 남자아이가 키가 자랐고, 등산과 달리기도 할 수 있으며, 공부도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료업에 종사하여 수십 년 동안, 이 병례는 후앙위시앤을 정말로 복종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 남자아이가 혈액과 병을 앓았다는 것을 감탄하면서, 직종이 다르면 산을 사이에 둔 것과 같아 감염과 의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었고, 이 병이 너무 희귀하고 너무 전형적이지 않아서 설령 혈액과 의사라고 해도 미처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웡 교수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내과학 지식이 매우 포괄적이며, 대선배 의사로부터 배운 대내과(大内科)적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다학제적 토론을 통해 질병의 본질을 움켜잡는 임상적 사고는 젊은 의사들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해준다.

제자들

여러 해 동안, 웡신후아는 플랫폼을 구축하여 줄곧 현대 감염학과 배치를 위해 주력해 왔다.

감염과는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인기과가 전혀 아니다. 일에는 위험성이 따르고, 많게는 가난한 환자를 수용 치료하며, 조작성이 적고, 의사 대우가 낮다. 그러나 초기 진단과 후배양성에서 웡신후아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독보적인 비결을 갖고 있었다.

1993, 웡신후아는 처음으로 석사생을 모집했는데, 지원자 중 합격선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 해 318, 화이베이시 인민병원 심내과(淮北市人民医院心内科) 주치의 루홍쪼우(卢洪洲)가 단신으로 화산병원에 연수를 왔다. 심내과는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그냥 전염과로 옮겼다. 그 동안 그는 상하이의과대학(화산병원은 당시 상하이의과대학부속병원이었다) 심내과 석사 연구생을 지원했다. 웡신후아는 루홍쪼우가 시험을 보고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자신의 문하로 옮기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매주 회진할 때마다 수행원에게 둘러싸이는 자신이 우러러보는 웡선생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니, “작은 의사루홍쪼우는 대뜸 승낙하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함께 택시를 타고 대학원에 갔고, 루홍쪼우는 웡신후아의 첫 석사생 및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1999년 루홍쪼우가 박사를 졸업할 때, 웡신후아는 과에서 새로운 전염병 연구를 강화하기로 고려했다. 그러나 새로운 전염병은 에이즈를 피해갈 수 없다. 웡신후아 휘하에서 한 사람이 연구차 미국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루홍쪼우에게 미국에 가서 에이즈 연구를 하겠느냐고 묻자 그가 받아들였다. 원위메이(闻玉梅)원사와 웡신후아의 공동 추천으로 그는 미국 반덴버그대학(范登堡大学)에 가서 박사후 과정을 밟았다.

2001, 루홍쪼우는 당장 귀국할지를 놓고 망설였다. 어느 날 그는 웡신후아에게서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웡신후아는 학생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처음이라며 전염과 소속의 젊은이들의 각자 특징과 발전방향을 분석하였다. 그는 루홍쪼우가 매우 추진력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가 귀국하여 에이즈 방면의 연구에 종사하기를 희망하는데 반드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을 것이고, 행정관리 방면에 있어서도 성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루홍쪼우는 당시 미국에 계속 있을 생각이 있었다며 웡 선생님의 장문의 편지를 받고 바로 제때 제 시간에 귀국했다고 말했다. “웡 선생님은 영명하신 분이에요. 그는 마치 총 기획자인 양 배치를 하고 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방향이 있고, 자신의 제2의 전문 분야가 있으며, 모두 노력을 통해 자신의 분야에서 의학적인 대가가 될 수 있다.” 루홍쪼우는 <중국신문주간>에 이렇게 전했다.

장원홍을 발견한 것도 역시 한 번의 스친 듯한 인연 때문이다.

1996, 장원홍은 아직 상하이의과대학에서 중서의학 결합 석사학위를 전공하였는데 한번은 화산병원 전염과 실험실의 친구를 만나러 왔을 때 웡신후아와 우연히 만났다. 처음 이야기를 나누면서, 웡신후아는 이 젊은이가 매우 똑똑하고, 사고가 활발하며, 지식면이 넓고 반응이 빠르다고 생각하여 전염과 박사과정으로 옮기라고 권했다.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웡신후아의 주선으로 장원홍은 그 해 전염과에 들어가 간질환 전문가인 우샹훼이(邬祥惠)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는데 웡신후아 역시 지도 교수 구성원이었다. 장원홍은 주로 웡신후아를 따라다니면서 결핵 과제를 했기 때문에 웡의 박사과정 학생이기도 했다.

감염과 의사들은 비교적 수입이 적어 상하이에서 생활하기 어려웠고 생활에 쫓기었다. 2001년을 전후해 30대 초반의 장원홍은 전업의 뜻을 품고 웡신후아를 찾아가 사퇴 의사를 밝혔다. 웡신후아는 젊은 의사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그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좀 더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희망을 피력했다. 그의 능력으로 분명 좋은 의사,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많은 일들은 가장 힘든 순간만 견뎌낸다면 앞으로도 서서히 나아질 것이고 그는 말했다. 맞는 얘기인 것 같았다.” 장원홍은 버텨냈다. 2010년 그가 화산병원 감염과 주임을 맡은 때부터 지금까지 화산병원 감염병과는 9년 연속 중국 병원 전문 과목 1위를 차지했다.

주리핑이 1997년 박사를 졸업했을 때, 웡신후아는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웡신후아는 추세를 놓고 보면 향후 면역력이 약해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호르몬 치료, 화학요법, 장기이식…… 모두 기회성 감염(일부 병원성이 비교적 약한 병원체가 인체 면역기능 저하로 인한 감염을 의미)이 우려된다따라서 세균과 바이러스 감염 외에, 진균류 감염은 하나의 중점 방향이다. 우리는 사람을 파견하여 이런 방향에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하는데, 당신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물었다.

현재 주리핑은 중국내 진균류 연구의 최고 전문가가 됐다. 그는 자신이 매우 축하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런 선견지명이 있다니 확실히 고수이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나는 천천히 알 수 있었다.”

장원홍은 감염과 질병은 온몸에 퍼져 있기 때문에 우수한 감염과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인체기관과 관련된 질병만 잘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전반적인 사고능력과 다학제적 협력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병원마다 이런 전반적인 사고와 공중위생 사고를 가진 감염과 의사들이 있다면 국가는 제1의 방어선을 갖게 될 것이다. 매번 전염성 질병이 생길 때마다 만연하기 전에 이러한 전문적인 자질을 가진 의사들에 의해 식별된다. 잘못하면 우리나라는 계속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다행히 상하이에서의 역대 중대한 공중위생 사건에서 감염과 의사가 이미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2003년 웡신후아는 상하이시 사스 예방 퇴치 전문가 자문팀장을 맡았다. 2009년 루홍쪼우는 상하이시 신종 인플루엔자 치료 전문가팀장을 맡았다. 2013년 루홍쪼우는 상하이시 유행성 감기(H7N9)예방 제어 임상 전문가팀장을 맡았다. 2020년 장원홍은 상하이 코로나19 임상 치료 전문가팀장을 맡았다.

웡신후아는 1962년 혹은 1963, 그가 처음 과에 들어갔을 때, 쉬자오위에(徐肇玥)가 과실의 10여 명을 데리고 따이쯔잉의 집을 방문했던 것을 기억한다. 따이쯔잉의 집 거실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그의 옥스포드대학 박사학위 증서가 소중히 걸려 있었다. 칭다오 출장을 다녀온 그는 사람마다 당시 보기 드문 국광 사과를 하나씩 선물했고, 또 웡신후아에게 지금 막 들어온 거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말했다.

웡신후아는 따이쯔잉 교수의 하늘에 있는 영혼이 오늘날 천천히 만들어 낸 국면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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