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원 세계를 3차원으로 표현해낸 시인

엄정자 문학평론가

김귀희: 시인,평론가,문학박사, 한국문학진흥재단 사무처장(현), 한국문인협회 사무처장(역),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처장(역),  『수필시대』주간,제25회 청하문학상,  제4회 꽃 문학상 우수상수상,시집  『물빛속에 녹음 속에』,『바람과 나무』
김귀희: 시인,평론가,문학박사, 한국문학진흥재단 사무처장(현), 한국문인협회 사무처장(역),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처장(역),  『수필시대』주간,제25회 청하문학상,  제4회 꽃 문학상 우수상수상,시집  『물빛속에 녹음 속에』,『바람과 나무』

시는 하얀 종이에 까만 글자로 독자들의 눈앞에 2차원 세계로 나타난다. 그 시를 읽은 후 독자들이 머릿속에서 상상이라는 재창조를 해야 사람들에게 익숙한 3차원 세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김귀희의 시는 이런 재창조를 하지 않아도 직접 3D 세계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김귀희의 시를 읽고 나면 시를 읽었다기보다 동영상을 보고 난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김귀희의 시는 이런 3차원 세계에다가 한국적인 정서와 현대적인 의식을 담아냄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시적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는 김귀희 시의 이런 예술적 특성과 작가의식을 분석하는 것을 통해서 한층 깊이 들어가 김귀희의 시 세계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1. 달관을 통한 인생관

김귀휘의 제2시집 『바람과 나무』에 담긴 시는 자연을 그린 시가 많다. 바람, 나무, 강, 바다 산, 하늘 … 모든 자연이 시적 대상이고 이 대상들은 살아서 움직인다. 이 다양한 자연의 움직임 속에 시인은 자신의 인생관을 녹여내고 있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려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웅웅웅 울어대는 소리

바람이 우는지

나무가 우는지

나뭇가지 심하게 휘어대면서

여전히 둘은 실랑이를 한다.

보낼 것은 보내야

나무가 살지

떠날 것은 떠나야

바람이 살지

―<바람과 나무>의 전문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은 자연 속에서 흔히 보는 현상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바람과 나무를 의인화하여 바람과 나무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려 돌아가지 못한다”고 표현함으로써 바람과 나무에 감정이 생기었고 바람 소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를 “웅웅웅 울어대는 소리”라고 표현함으로써 슬퍼하는 마음이 생겨 헤어지는 현상에 대한 내면의 세계를 전하고 있다.

“나뭇가지 심하게 휘어대면서 여전히 둘은 실랑이를 한다.”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는 떠나겠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떠나지 말라고, 아니면 하나는 떠나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실랑이는 헤어짐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전히’란 단어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마지막에 “보낼 것은 보내야 나무가 살지 떠날 것은 떠나야 바람이 살지”라는 결론으로 이 시의 주제를 규명하였다. 흘러가는 것이 본성인 바람이 한 나무에만 얽혀 있다면 그 바람은 잦아버려 사라질 것이고 가끔은 좋겠지만 늘 바람 속에서만 산다면 나무 역시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말이다.

예전에 백두산(長白山)에 갔을 때 보았는데 산기슭에서는 하얗게 곧게 아름답게 자라던 자작나무들이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뒤틀리고 잿빛이 된 못난 모습으로 변하더니 정상에 이르러서는 아예 나무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이 거세지고 기압이 낮아지니 나무가 살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바람이 떠나지 않고 계속 나무를 붙잡고 있으면 나무도 결국 죽어버릴 것이다. 이 양자가 사는 방법은 서로를 떠나는 길뿐이다.

이런 ‘바람’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이로 본다고 할 때 시인은 여기서 과도한 ‘집착’은 사랑을 망친다는 달관한 관념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라도 그러할 것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도 그러할 것이다. 사랑할 때 사랑하고 놓아줄 때 놓아주는 것이 서로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시인은 보고 있다.

이같이 ‘바람’과 ‘나무’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런 ‘바람’과 ‘나무’에 사랑하는 모습을 담아내었기 때문에 ‘바람’과 ‘나무’가 살아있고 시인이 보여주려는 달관한 인생의 시뮬레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제주도 바다, (사진 정재명)
제주도 바다, (사진 정재명)

이런 인생관을 보여준 시로는 「제주도 단상」도 예시로 들 수 있다.

 

바다는

물의 끝에서

오름의 손을 놓아야 했다.

뒷걸음하면서

인연을 걷고

해가 지기 전에

하나씩 끼워졌던 깍지를 풀었어야 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어둠이 내리고

돌아 갈 길을 잃은 까닭에

바람 구멍 숭숭한

오름을 싸고 돌면서

천만년쯤 철썩거리고 있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제주섬과 바다의 업보가 되고 말았다.

―<제주도 단상>의 전문

시인은 오름을 둘러싸고 출렁이는 바다를 사람에 비유하였다. 바다와 오름을 인간 대 인간의 사이로 은유하여 돌아가야 할 때 돌아가지 못했기에 헤어지려 해도 헤어질 수 없는 “업보’가 되고만 그런 사이로 설정하고 표현하였다.

‘하나씩 끼워졌던 깍지를 풀었어야 했다’라는 묘사는 그저 ‘잡은 손’이라고 표현하는 것 보다 둘의 깊은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들어올려야 풀 수 있는 ‘깍지’, 이런 표현은 쉽게 풀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의미하고 있다. 물론 바다가 없는 제주도는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있어 마땅한 것’이 되어버려서 사람들이 스쳐 지나고 마는 그곳에서 시인은 도리어 인생의 哲理철리를 깨우치고 있다. 놓아야 할 때 놓지 못해서 일생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인생이고 업보가 아니겠는가? 시인의 예리한 투시력이 보이는 시이다.

제주도 오름 (사진 정재명)
제주도 오름 (사진 정재명)

「그림. 1」에서도 “긴 여정의 상처를 / 스스로 싸안고 / 풍만해진 몸을 / 천천히 뒤척이고 있다”고 강을 의인화하여 그리고 있다. 강이 흘러 흘러 큰 강으로 되었을 때 그 흐름이 유유해지는 모습은 마치 많은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중년의 여인이 “풍만해진 몸을 / 천천히 뒤척이고” 있는 듯 여유롭고 온화하다. “오랜 시간이 / 수면 위로 튀어 오르거나 / 햇살이 자맥질해도” 그런 자극에 “잠시 흔들릴 뿐”이다. 깊은 강물을 보고 사랑에 달관한 중년의 인생을 떠올리고 중년의 여유로운 사랑으로부터 유유히 흐르는 강의 기품이 표현되었다.

이같이 시인은 자연을 자연으로만 그리지 않고 거기에 생명과 의식을 부여하고 그것에 은유하여 자신의 달관한 인생관을 풀어내고 있다. 직설적인 설명이 없이도 자연의 움직임 속에서 독자들은 인생을 느끼고 사색을 하게 된다. 이런 수법은 김귀희만이 그려낼 수 있는 3차원 시세계이다.

 

2. 가을, 봄, 시공간을 통한 선험적 자아

김귀희의 시는 쉬운 시가 아니다. 그가 그리는 봄, 가을은 봄이고 가을이면서도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그가 그리는 시간 공간은 시간이고 공간이면서도 사실주의적인 현실이 아니다.

 

들판을

헤매던 바람

찢긴 상처 싸매고

휘릭휘릭 휘파람 되면

점점이 켜지는 녹색등

온통 연둣빛으로

화사해지는 세상

눈부신 계절

봄이라 한다.

잿빛 언덕 모퉁이 돌아가는

등 굽은 강변로가

모처럼 襤褸남루를 가리고

심호흡하는

눈부신 계절

봄이라 한다.

―「봄, 길을 가다」의 전문

시인이 보여준 봄은 사람들이 흔히 머릿속에 떠올리는 봄이 아니다.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빨갛고 노랗고 하얗고, 울긋불긋 꽃이 핀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방황하던’ 영혼이 “찢긴 상처 싸매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연둣빛’ 봄빛으로 덮어 감추는 그런 주관적인 이미지의 표상이다.

아마 시인이 느끼고 있는, 상처받고 방황하던 영혼이 살고 있던 마음은 어두움이 꽉 찬 캄캄한 세계였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무에 파란 싹이 돋고 대지에 파란 풀이 살아나는 모습을 “점점이 켜지는 녹색등”이라고 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어둠을 밝혀주듯이 봄은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고 파란 풀이 얼룩진 흙을 덮어주듯이 봄은 마음의 ‘襤褸남루’를 덮어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봄을 ‘눈부신 계절’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봄이라서 봄이라기보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계절이라는 의미에서의 ‘봄’인 것이다.

낙엽호수 (사진 홍영숙)
낙엽호수 (사진 홍영숙)

시린 하늘 담긴 호수에

가을바람이 다녀갔다.

구멍 난 나뭇잎 몇 장

후두둑 떨어져

물속에 잠겨 들었다.

수면을 뭉텅뭉텅 베면서…

호수,

쓰려서

몇 날 출렁거리겠다.

―「가을 호수」의 전문

시인이 생각하고 있는 가을은 ‘이별’인 것 같다. 나뭇잎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계절이니 맞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시린 하늘 담긴 호수”면 아픈 사랑을 담고 있는 마음이라 볼 수 있다. 그런 호수에 “가을바람이 다녀갔다”는 것은 이별을 통보하고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으로서, 그런 그가 던지고 간 “구멍 난 나뭇잎 몇 장”은 옛날에 주고받은 편지, 혹은 옛날 다정했던 시절의 사진 같은 것일까? 사랑이 퇴색하고 낡아져 버린 뒤에 버려진 편지나 사진을 누렇게 뜬 ‘구멍 난 나뭇잎’이라 표현한 것은 아닐런지?.

그 나뭇잎이 ‘수면을 뭉텅뭉텅 베면서’ 물속에 가라앉는다. 버림받은 마음이 행복했던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편지나 사진에 의해 현실을 자각하게 되며 아프게 베어진다. 여기서 ‘뭉텅뭉텅’이란 표현은 베어지는 마음의 아픔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니 “호수 / 쓰려서 / 몇 날 출렁거리겠다”란 예상대로 아픔은 얼마 동안 持續지속될 것이다.

이같이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호수에 떨어지는 흔한 풍경을 시인은 상처 주고 상처받는 행위로 은유하였다. 이렇게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 이입되면서 「가을 호수」는 흔한 산수시(山水詩)가 아니라 사랑과 이별을 그린 한 편의 드라마가 되었다.

 

진짜 독창적인 사람은 모든 사람의 눈앞에 있으나 아직 알아 차리지 못해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는 니체의 말대로 김귀희는 그런 독창적인 혜안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시인이다.

동짓달 열아흐렛 밤

그믐으로 가는 달이

가을 산에 내렸다.

창백한 나뭇잎 사이에

무명천처럼 앉았다.

몇 굽이

강물 따라 갈

서러움은 풀지 못하고

침묵으로 너울대는 산

흔들리는 잎새에 기대인 달

―「풍경. 2」의 전문

어딘가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을 연상시키는 시이다. 황진이의 「동짓달」이 쉬이 만나지 못하는 ‘님’과 보내는 짧은 봄밤이 아쉬워서 일 년 중 제일 긴 동짓날 밤을 베어냈다는 표현으로 ‘님’과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은유했다면 김귀희는 달이 가을 산을 비추는 풍경에 ‘아픈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입히었다. 현실에서는 시간이 달라도 매일 산을 비추고 있는 달인데, 시인은 달이 “동짓달 열아흐렛 밤/ 그믐으로 간다”라는 전제를 만들어줌으로써 달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따라서 움직일 수 없는 나무는 따라가지 못하고 남을 것이라는 이별의 이미지를 줄 수 있었다.

제일 춥고 긴 밤 즉 사랑이 없는 곳으로 가는 길이어서 달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무를 보려고 가을 산에 잠깐 내리는데 이를 통하여 슬픈 이별의 애틋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슬픈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시인은 달빛이 반사된 나뭇잎의 모양을 “창백한 나뭇잎”으로 표현했고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하얗게 쏟아지는 정경을 “무명천처럼 앉았다”고 표현했다. 한낮에 보면 파랗게 싱싱한 모습일 나뭇잎이겠지만 달빛 아래에서 보면 푸른빛이 사라지니 ‘창백’해 보이는 거고 그래서 사랑에 아파하는 모습이 절절하게 그려졌다.

헤어져야 하는 운명에 서러움을 풀어놓으면 “몇 굽이/ 강물 따라 갈” 정도로 쌓였는데 그 서러움을 풀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어서 산은 “침묵으로 너울대는” 것이다. 다만 소리 없는 흐느낌에 “흔들리는 잎새에” 달은 가만히 기대어 나무를 안아줄 뿐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이별이다. 그리고 이 시에는 소리가 없다. 오히려 그런 적막감이 시의 경지를 승화시키고 있다. 하얀 무명천을 드리운듯한 달빛 속에서 소리 없이 떨고만 있는 나무, 아프다는 소리지르지 못하고 원망하지 못하는 처연함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임규찬 평론가는 황진이의 <동짓달>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동짓달’, ‘밤’, ‘허리’, ‘춘풍’, ‘이불’ 등 그 자체는 너무도 흔하다고 여겨지는 말들이다. 겨울밤이 가장 길고 봄바람이 따스하다는 것도 누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빤한 말과 생각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형상화로 창조했으니 그런 마음의 눈, 창조의 힘이야말로 언어의 참 본질에 부합한다.”

나는 이 말을 그대로 김귀희의 시에 대입하고 싶다. 강변로의 나무에 움트는 싹과 파랗게 살아나는 풀, 가을바람에 낙엽이 지는 가을 호수, 고요한 밤 달빛이 쏟아지는 가을 산, 이 모든 것은 흔히 우리의 눈에 뜨이는 대단하지 않은 자연인데 김귀희는 완전히 새로운 시적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상적인 자연과 추상적인 시간 속에 선험적 자아를 녹여 아픔과 아름다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감각적 心象심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3. 바다, 김귀희 시의 원초적 근원

시집 『바람과 나무』에는 바다에 대한 묘사가 아주 많다. 그것은 바닷가에서 태어난 시인에게 있어서 ‘바다’는 그의 시 세계의 원초적 근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 바다 (사진 정재명)
제주도 바다 (사진 정재명)

시인에게 있어서 바다는 고향이고 아버지를 이미지 한다.

……

아버지는 돌다리를 놓았다.

눈에 언제나

가득한 파도를 담고서

비오는 날이면

천지 분간 없이

비 내리는 날이면

서울의 골목길에서

아버지의 신발 한 짝이 젖고

고향 마당가 남겨진 또 한 짝도 젖었다.

―「思鄕之心사향지심」의 일부

우선 시인은 아버지가 만들던 ‘돌다리’를 떠올린다. 여기서 ‘돌다리’는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서 무언가 이루려고 하였던 작은 꿈, 혹은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서 하시던 ‘일’을 말할 것이다. 아버지는 “눈에 언제나/ 가득한 파도를 담고서” 서울의 거리에서 일하고 살아가셨다. 시인은 이런 ‘파도’가 담긴 아버지의 눈을 통하여 바다와 아버지를 동일시하였고 아버지의 마음속에 늘 고향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간략한 시구에서 바다-고향-아버지의 삼위일체가 이루어졌고 김귀희의 시 세계의 기반도 이루어졌다. 물론 이런 작업이 이미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벌써 이루어졌었을 것이고 다만 이 시에서는 그 과정이 표현되었을 따름이다.

시인은 시적 환경을 ‘비오는 날’로 설정했다. 비는 원래 사람들에게 애수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는데 시인은 이런 분위기를 진하게 살리기 위해서 ‘비오는 날’ 이라 쓴 다음에 다시 한번 ‘비 내리는 날’이라는 다른 표현을 썼다. ‘오는’으로 땅에서 쳐다보는 비와 ‘내리는’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비로 시점을 바꿔줌으로써 단조로움을 피하면서도 온 세상이 비로 꽉 찬듯한, 비 오는 날의 우수에 찬 분위기를 찐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런 묘사를 통해서 시인은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준비하였다.

시인은 이런 날이면 ‘서울의 골목길에서’, ‘고향 마당가’에서 ‘아버지의 신발 한 짝’이 비에 젖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표면적 공간은 ‘고향 마당가’와 ‘서울의 골목길’로 나누어지나 실질적으로는 고향에서의 아버지 모습과 서울에서의 아버지 모습을 ‘그리움’으로 통일시킨 것으로서 시인의 머릿속에서 동일 이미지로 통일된다.

시골 마당가에 던져져 비에 젖고 있는 신발 한 짝이나 서울 골목길에서 누군가 잃어버린 신발 한 짝,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일상의 한 장면이지만 이는 현실적 화면이라기는 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하고 아픈 그리움을 표현하는 이미지적 표상일 뿐이다.

시인은 고향과 서울이라는 부동한 공간을 물을 이미지 하는 비를 통하여 ‘비’→‘물’→바다 이런 연상을 통해서 두 개의 공간을 이어놓음으로써 현실적 공간을 존재론적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여기서 ‘신발’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상징할 것이다.

 

미완성의 돌다리와

빛바랜 신발을 두고

홀연히 바다에 묻힌 아버지…

―「思鄕之心사향지심」의 일부

여기서 ‘미완성의 돌다리’는 아버지가 자기의 꿈을 이루시지 못했음을 말하며 ‘빛바랜 신발’ 은 아버지가 세상을 버린 시간이 흘렀음을 말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할 때 옆에서 “그냥 들어주라고/ 함께 젖어주라고” (「소나기」에서) 일러주시던,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넓고 따뜻한 사람이었고 “뜨락의 햇살을 모아/ 아궁이에 넣어주시고 휘파람을 불며 문풍지를 붙여 주셨”던(「아버지의 가을날」에서) 낭만적이고 자상하신 분이었다. 그런 바닷냄새를 풍기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란 시인이기 때문에 시인의 마음속에서 바다, 고향, 아버지가 삼위일체를 이룰 수 있었고 지금의 김귀희의 시세계도 구축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바다라 한다

퍼렇게 출렁이는 그리움의 永劫영겁을

밤마다

등 뒤에서 철썩이는

내 아버지의 나라를

―「思鄕之心사향지심」의 일부

시인이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가 묻힌 바다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자연의 풍경이었을 바다가 시인에게 있어서는 그저 바다가 아니라 ‘그리움의 永劫영겁’을 품은 ‘아버지의 나라’인 것이다.

이 시에서 바다, 고향, 아버지는 하나의 全一體전일체로 통일되고 있고 그래서 이 시는 김귀희의 시 세계의 원초적 근원이 아주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다.

김귀희의 詩魂시혼은 바다 혹은 섬이 주는 단절감으로부터 생기는 ‘恨한’의 감성이다. 그런데 이 ‘恨한’의 이면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이 사랑이 충족 안 될 때 ‘恨한’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만번쯤

당신 이름

불러보리라

온 몸의 피

모두

쏟아내고

허연 거품만 내뱉을 때까지

구르고 구르면서

크게

내지르고 보리라

종내

펄펄 끓던 기운 소진하여

모래톱에 잦아질 때까지

앞도 뒤도 없는

갇힌 섬 끌어안고…

―「섬에서」의 전문

귀가 먹먹할 정도로 철썩이는 파도 소리, 시인은 이런 바다의 자연현상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천만번’ 부르며 마음에 쌓인 ‘恨한’을 풀어내는 서정적 주인공의 모습을 담아냈다. 파도가 엎치고 덮치면서 거품이 생기는 모양에 “온 몸의 피 / 모두 / 쏟아내고 / 허연 거품 내뱉을 때까지 / 구르고 구르면서 / 크게 내지르고 보리라”고 사랑을 위해서 몸도 목숨도 내던지는 모습을 담았고 힘이 진한 파도가 모래톱에 잦아드는 모양에 불타는 사랑에 모든 기운을 소진하고도 사랑하는 ‘섬’을 ‘끌어안고’야 마는 사랑의 극치를 투영했다.

그야말로 치열하고 강렬한 사랑이다. 바다같이 넓고 깊은 사랑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恨한’의 극한에서 생기는 최고의 사랑이다.

이런 강렬한 사랑은 「강화 바닷가」에서도 보인다. “어두워지자 바다는 달을 불렀다 / 쿨럭대는 바다를 온통 싸안으면서 / 달은 그렇게 왔다 / 바다는 / 같이 넘실대주고 / 같이 달려주는 달과 밤을 지샌다 / 오늘밤 / 귀를 막는다”

달빛 아래 넘실대는 바다의 모습으로부터 달과 바다가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주위의 그 어떤 반대도 방해에도 ‘귀를 막는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귀를 막고’ 사랑만 하고 있다. 세상의 풍파에 시달린 사람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랑에는 ‘恨한’이 서려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오늘 밤 온 세상을 등지더라도 이곳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려 하며 원 없이 사랑함으로써 쌓인 한을 풀려고 한다. 진정한 사랑이 별로 없는 현실 세계와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환상적이고 열정적이고 낭만적이다.

이같이 시인은 모든 생명의 요람인 바다에 의탁하여 생명의 원초적인 근원이 되는 사랑을 그려냄으로써 ‘恨한’의 극한에서 완성되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

바다로부터 ‘바다-고향-아버지’의 통일이라는 승화된 시적 의식이, 바다와 섬의 단절된 이미지로부터 ‘恨한’의 극한에서 완성되는 최고의 사랑을 보아냈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시인에게서만 탄생할 수 있는 시적 의식이고 시혼이고, 그런 승화된 감수성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바다의 시이다.

 

4. 관조적인 자세와 허무주의

觀照관조는 본질상 자아와 대상 사이에 거리를 둠으로써 성립한다고 한다. 성기조 시인은 김귀희의 시집 『바람과 나무』의 시평 제목을 「내 것 만들기와 거리두기」라고 달았다. 이 ‘거리두기’가 관조적인 시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의식의 관조는 ‘무관심성’ (Uninteressiertheit)을 특징으로 하는데 김귀희의 경우 이런 ‘무관심성’은 자기가 실존하는 공간을 幽體離脫유체이탈한 것처럼 제3 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런 관조적인 시선은 조용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자기의 참모습을 보아낼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시의 영상미를 살리는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특히 인생의 본질적 측면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병마, 죽음 같은 인생의 어두운 면을 그릴 때 이런 관조적인 시선을 많이 쓰고 있다.

지지대에 달려

강쪽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운 수액

건너편 강에서

하루 종일 왁작거리는

햇빛 구경하고 있다

둔덕에

무더기로 핀 개나리가 있어

더욱 풍성한 봄

첫 번 사랑했던 날 같다

―「병실에서」의 앞부분

기실 시의 서정적 주인공은 병원에 누워있는 시인 자신이다. 그런데 이 시 속에 시인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병실’이라는 공간 위에서 병실 안의 정경과 병실 유리창 밖의 정경을 관조하고 있다.

대신 시인은 무생물인 ‘수액’을 인격화하여 주인공을 대신하여 창밖의 봄 경치를 바라보게 하였다. “지지대에 달려/ 강쪽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운 수액”은 적막한 병실에 홀로 누운 시인의 모습이다.

이렇게 적막하고 창백한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유리창 건너편은 봄빛이 화창하다. 여기서 시인은 바깥세상의 현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햇빛이 쏟아지는 모양을 ‘왁작거린다’는 ‘소리’로서 표현하였다. 이처럼 시각적 현상인 ‘햇빛’을 청각적인 현상으로 바꿈으로써 햇빛까지 청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고요한 병실의 적막감이 대조적으로 강조되고 병마에 시달리는 서정적 주인공의 고독한 심리가 잘 드러날 수 있게 하였다. 청각은 그 본성상 거리 두기와 관조가 안 되는 감각이다. 청각은 진동을 통해 우리의 몸에 직접 와 닿는다. 김귀희는 청각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봄날의 정경이 작가가 만든 거리를 뛰어넘어 직접 독자들의 몸에 미치게 하였는데 이런 자극은 독자들의 감정에 영향 주고 있다.

거기에다 ‘첫 번 사랑했던 날 같다’라고 첫사랑을 언급함으로써 센티멘털한 분위기가 생기면서 병실이라는 공간 속에 고독감이 진하게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고독할 때 흔히 마음 구석에 깊이 묻어두었던 첫사랑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따분했을 병실의 일상이 시인의 관조적인 시선을 통하여 전달됨으로써 영화의 한 장면같이 독자들의 눈앞에 떠오르며 미적 향수를 준다. 그것이 설사 화창한 봄날 때문에 아픈 현실이 더 절감되는, “불면의 밤이 처방”되는 힘든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봄을 통해 구원의 힘을 암시해준다. 이것이 김귀희가 가진 창조적 힘으로써 “강함의 페시미즘”이다.

「歸去來辭귀거래사」, 「納骨堂납골당에서」, 「問喪문상」 같은 시들은 아우와 친구의 죽음을 쓰고 있는데 그 마지막 이별 장면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歸去來辭귀거래사」에서는 아우가 마지막 숨을 거둔 ‘헝클어진 침상, 얼룩진 이불’ ‘삼베옷에 감기는 얼굴’을 관조하면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 남겨진 ‘어린 아들 한 점’, 마지막으로 찍었던 ‘바다 나들이 사진’ 등 구체적인 사물을 통하여 가슴 아픈 장면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納骨堂에서」는 “잿빛 하늘 가득히 / 통곡소리 / 걸어놓고” “모두를 / 서늘이 안으면서 / 하직하는” 아우의 이미지를 그리었는데 ‘잿빛’이라는 색깔로 비를 머금은 하늘을 보여주면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눈물을 표현하였고 실상은 육안(肉眼)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통곡소리’에 ‘걸어놓고’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갑자기 맞닥친 슬픔이 너무 커서 울음도 잠시 턱 막힌 상태를 보여주었고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인 ‘안으면서’ 앞에 원래는 올 수 없는 체감을 나타내는 단어 ‘서늘’을 씀으로써 싸늘히 식은 몸을 안을 때의 느낌을 표현하였다. 보통은 산사람들이 죽은 이를 이별하나 여기에서는 망자인 아우가 가족들하고 이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늘을 ‘잿빛’으로 만든 것도, 통곡 소리를 ‘걸어놓’은 것도, ‘모두를 안’는 것도 다 아우가 하고 있다. 아우가 움직임으로써 서정적 주인공은 관조적인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이렇듯 시인은 관조적인 시각으로 아우가 가족들과 이별하는 모습으로 영별의 장면을 그림으로써 육체는 식었으나 아우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느 산 자락에서/ 어느 길 모퉁이에서/ 홀연히/ 툭 터진 강처럼 다가오려는가/ 휘청대는 바람처럼 다가오려는가”, 어느 날 갑자기 맞은 동생의 죽음 앞에서 큰 산에 턱 막힌 듯한 막막함이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홀연히 툭 터질 강물같이 큰 통곡으로 터져 나올 것 같고 몰아치는 바람같이 다가오는 슬픔에 휘둘리어 몸과 마음이 휘청거릴 때 아픈 감정의 흐름은 절정에 이른다.

이같이 혈육의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뼈저린 아픔인지를 느끼면서도 관조적인 시각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죽음을 삶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고통스러우나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시인은 자신의 이러한 意識의식을 설명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영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실질적 존재처럼 보여줌으로써 삶과 죽음을 실존적인 존재 그대로 인정하는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다음 백과사전
사진 다음 백과사전

「길에서」는 작가의 허무주의적인 의식이 제일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등 굽은 낙타 한 마리 몰고

서쪽으로 가는데

흔들흔들 따라오면서

점점 키를 늘이는 그림자

신에게 도착하기 전

바다에 들를 수만 있다면

푸르고 비린 해초내음 가득한

그 갯벌에서 잠시 취해도 좋을 텐데

간단없이

밀려오고 쓸고 가는

바다에 갈 수만 있다면

한 귀퉁이 깨진 조개껍데기라도

우우우

먼 바다소리 안고 있을 그 자갈밭에

그림자도 누이고

낙타도 누워서

하루쯤 여정을 늦춰도 좋을 텐데

―「길에서」의 전문

김귀희는 이 시에서 인간의 자아를 찾기 위한 3개의 단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온순하게 묵묵히 감내하며 ‘서쪽으로 가는데’ 이는 인생을 감내하며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을 ‘극복, 순응’하는 시인의 인생관이 보인다.

‘점점 키를 늘이는 그림자’는 시간의 흐름을 말하고 있고 ‘신에게 도착하기 전 / 바다에 들를 수만 있다면’ 하는 것은 회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바다’는 시인의 고향이자 아버지를 이미지 한다. 따라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맨발의 철부지들은 / 뒹굴다 자다가”(「아버지의 가을날」에서) 그렇게 놀던 곳이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순응하던 인생에서 시인은 처음으로 “바다에 들를 수만 있다면”하고 자기의 염원을 외친다. 이는 운명에 대한 거역으로서 처음으로 ‘사자’가 되어 자유의지와 자유 인식을 외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바다에 갈 수만 있다면” 이런 갈망은 어린아이 단계로 돌아가려는 즉 삶과 세계를 ‘유희’로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현실에서 해탈하고 초탈하려는 욕망과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돌고 도는 인생의 톱니바퀴를 따라가야 하는 인생에서 시인은 인생의 중력을 감내하면서 순종, 극복만 하던 존재로부터 자기의 중심을 잡고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 하고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면서 자아의 완성을 이루고 있다.

김귀희는 자기의 시 창작에서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주장하고 있는 비극이론을 체현하고 있는 것 같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관조적인 대상으로 삼고 형상화함으로써 그 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 현실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고 있다.

 

5. 농후한 한국적인 정서와 현대적인 의식의 절묘한 조합

김귀희 시는 한국 고유의 전통적인 정서와 현대적인 의식을 잘 융합하여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김귀희는 ‘艸丁초정 金相沃김상옥의 시조를 연구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전통시조와 현대시조에 대해 연구도 많이 했을 것이고 알게 모르게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영향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그의 시의 기본적인 정서로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그러면 김귀희 시의 한국적인 정서는 어떻게 조성되고 있는가?

우선 소리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김귀희의 시를 읽은 뒤의 첫 느낌은 마치 현대문명이 아직 침범하지 않은, 현대사회하고는 동떨어진 순 자연만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준다는 것이다. 시인과 현대사회 사이에는 고속도로의 방음벽같이 結界결계가 쳐있는 듯하여 자동차 소리 음악 소리 떠들썩한 말소리, 이런 현대사회의 소음이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들리는 거라야 바람 소리 파도 소리 먼 종소리, 이런 자연의 소리뿐인데 이런 소리는 오히려 시적 세계의 정적과 적막감을 더해줄 뿐이다.

길상사 종루
길상사 종루

김귀희의 시에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다 잠깐 얼굴 비추는 사람이라야 아버지, 노인, 동생, 아들, 이 정도인데 그도 얼마 안 된다. 시인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너도나도 시 안에 자기 이야기를 닮기 급급해하는 바람에 ‘시’라기 보다는 ‘일기’에 가까운 시들이 성행하는 시대에 김귀희의 시만은 대부분 시가 자연을 그리고 있고 자연에 생명과 의식을 부여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다 나니 자연히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종소리같이 이런 자연의 소리만 들리기 마련이다.

물론 ‘종소리’는 자연의 소리라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 종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종소리’만, 즉 소리라는 물리적 현상만 그려내었기 때문에 이 종소리에서는 사람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거니와 그래서 고요한 산야 풍경이 전달되고 있을 뿐이다.

 

어제도 그랬다.

이 고개에 이르면

머릿수건을 벗으면서

여인은 무릎을 꿇는다

귓전에 맴돌던 저녁종소리

갈빗대 밑으로 흘러들고

어둠으로 조밀한

밤 열한 시

오늘을 잊기 전에

아직 내일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23시」의 전문

이 시는 김귀희의 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사람’이 등장하는 시중의 한 수이다. 밤 열한 시에 ‘고개’에 올라 기원하는 여인, 그녀는 구체적인 일개인이라기보다 하나의 관념을 나타내는 象徵體상징체이다. 여인이 왜 이 시간에 이 고개에 와있는지, 여인은 무엇을 바라는지, 여기에 대해 시인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고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었다. 다만 그 시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루가 거의 끝나가고 좀 있으면 새날이 시작하는 ‘23시’, 오늘과 내일이 제일 근접한 시각, “떠나는 것과 다가오는 것의 교차로”(「저녁 시간」에서)이다. 이런 교차로에서 인간은 내일보다는 ‘오늘’을 선택하고 있다. 미래보다는 ‘순간’ 즉 현재를 긍정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시인의 실존주의적인 관념이 이 시의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종소리’는 어떤 작용을 하는가? 시인은 ‘귓전에 맴돌던 저녁종소리 / 갈빗대 밑으로 흘러들고’ 하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공간적으로 절이 산 중턱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래서 귓전이 아니라 ‘갈빗대 밑’이라고 하였다. 시간상으로는 ‘저녁종소리’를 통해서 늦은 시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認識인식할 수 있도록 ‘23시’라고 단 제목과 달리 시 안에서는 고유숫자로 ‘열한 시’라고 시간을 말함으로써 한국적인 정서가 짙어지게 하였다.

‘종소리’는 불교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불교의 윤회론 관념, 니체 실존주의의 ‘영원회귀’ 관념은 이 시에서 충돌하지 않고 서로 보완하는 작용을 한다. 만약 여기에 ‘종소리’를 넣지 않았다면 적나라한 현대의식만 남아서 서구적인 시풍이 형성되었을 것인데 한국 전통의식의 심벌이라 할 수 있는 ‘종소리’, 그것도 ‘저녁종소리’가 들어감으로써 한국적인 정서에 현대적인 의식이 잘 융화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귀희가 쓴 ‘종소리’를 왜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불교적 영향이나 문학적 영향으로 서로 많이 연관되고 있는 중국, 일본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은 정치적 원인으로 한시기 불교가 전멸했다가 다시 복귀하면서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한적한 ‘절’의 이미지가 파괴되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관광지 양상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의 절은 유래가 깊은 명찰 몇 곳만 내놓고 대부분 절이 인가가 밀집한 주택가에 지어졌고 중들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해서 ‘한적하다’기 보다 인간 냄새가 다분히 난다. 주지승도 일종 직업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으며 주택가인 것만큼 종소리가 나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한국의 사찰은 아직도 산속에 있고 스님들도 결혼하지 않기 때문에 속세와 격리된 한적한 한국 山寺산사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같이 김귀희의 시에서 흐르는 한국적인 정서와 현대의식의 융합은 시인만의 아름답고 독특한 시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맺는 말

처음 김귀희의 시집 『바람과 나무』를 읽은 다음의 느낌은 ‘참 아름답다’라는 것이었고 그다음 다시 읽을 때의 느낌은 ‘참 어렵다’라는 점이었다. 단순히 한 번 읽어서는 그 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에, 그렇게 다시 다시 읽어보아야 그 참뜻을 알 수 있는 깊은 인생 철학이 담긴 시였다.

물론 시란 쓸 때는 시인의 것이지만 시집으로 출판된 다음에는 독자의 것이 되니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르고 느낌이 다를 것이다.

김귀희의 시에서 한국어와 한국적인 정서의 아름다움을 느꼈고 한마다 한마디 글귀를 따라서 살아 움직이는 시적 세계를 보면서 글이 아니라 그 동적인 영상이 입체적으로 머리에 남았을 때 나는 김귀희 시를 해설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었다. 물론 한국 시를 잘 모르는 재일동포인 내가 해석함에는 어려운 점도 많아서 ‘해석은 독자의 자유’라는 배포로 시작한 글이지만 써 내려갈수록 김귀희 시의 매력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김귀희가 그리고 있는 산, 바다, 강 이런 자연의 소리는 한국적인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뎅그덩 뎅그덩’ 山寺산사의 종소리(「저녁시간」), “몽돌 사이에 숨어들었다/ 골골골 따라가는 물소리”(「포구」), “천만년쯤 철썩거리고” 있는 파도 소리(「제주도 단상」), “퍼얼럭 / 펄럭펄럭 / 펄럴럭 / 펄럭럭” 펄럭대는 깃발같이 울리는 耳鳴이명 (「耳鳴이명」), “빗줄기는 / 우릉우릉 / 천지를 울리고”(「장마」) … 이런 한국어 고유의 의성의태어들을 많이 씀으로써 소리 자체가 한국적으로 들리게 하였다. 이런 말들은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한다 할 때 그 한국적인 정서가 백 퍼센트 전달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어로 읽어야 제맛이 나는 언어와 표현 때문에 시의 한국적인 정서는 더 짙어지고 있다.

다음, 시적 대상이 한국적인 ‘恨한’의 정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시인은 바다, 산, 강, 비, 바람, 나무, 달 같은 단절감을 나타내는 자연물의 속성에 은유하여 ‘恨한’을 표현하고 있다.

늘 부딪치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바다와 섬, 바다와 하늘, 바람과 나무, 달빛과 나무, 바람과 호수, 이같이 서로 단절된 두 사물의 관계성으로부터 하나가 될 수 없으므로 하여 생기는 ‘恨한’을 그려내었다. ‘恨한’은 원래 상대가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감정이니만큼 이런 설정은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렇게 자연에 생명을 주어서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한국의 원초적인 정서인 ‘恨한’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예술성을 높일 수 있었다. 직설적인 설교가 없이 사람들이 예술적 감상을 통해서 ‘恨한’을 풀기 위한 몸부림, ‘恨한’으로 인한 아픔을 느낄 수 있어서 예술감상 뒤의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외에도 이런 ‘恨한’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비. 가을, 저녁을 배경으로 많이 썼고 노란 개나리와 무덤 (「잉걸불」 「봄맞이」 「그림. 4」)같이 한국에서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감상적인 분위기, 그리고 퍼런 멍(「11월의 비」), 퍼런 약속(「소문」), 퍼렇게 물든 심장(「이야기. 2」)같이 한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아픔의 표현방법을 많이 쓰고 있다.

김귀희는 자연에 생명과 의식을 부여하고 자연의 움직임 속에서 인생을 풀이하는 시인이다. 그런 시 세계에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시인의 세계관을 투영했고 현대적인 의식을 가장 전통적인 한국적인 정서로 풀어내었다.

김귀희의 시는 종이 위의 평면적인 2차원 세계가 아니라 모니터 위의 입체적인 3차원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김귀희의 시는 대중적인 시가 안 될지는 모르나 그 높은 예술성과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한국시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시로 남을 것이다.

다음은 어떤 시 세계를 만들어낼지 기대된다.

 

글쓴이 :  엄정자(厳貞子),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사,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대표 겸 회장, 연변작가협회 회원,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 「화산 우에서 사는 사람들」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필 『감나무에 담긴 정』 제1회 同胞文學 安民賞 수필부문 우수상.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연변인민출판사,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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