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한국 일류학회지 '국어국문학' 2020년 제190기에 발표됐음. 저자는 김호웅 전은주 두 분이다.

김호웅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전은주: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차례

 

1. 서론
2. 디아스포라의 고달픈 삶과 울분
3. 도덕적 불감증과 정신적 타락상에 대한 고발
4. 강자 또는 천사로의 정신적 부활
5. 결론


<국문초록>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코리안 드림 이후, 노무, 취업, 무역 등으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재한 조선족의 수는 8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들은 가리봉동, 대림동 등지를 중심으로 조선족 타운을 형성하고 ‘재한동포문인협회’를 결성하였으며 신문, 잡지 및 문학작품집을 출간하면서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조선족 문학의 한 갈래이면서도 세계 한글문학의 중요한 한 갈래로 자리 잡고 있다.
본고에서는 상호텍스트성과 소설 미학의 관점으로 류재순, 김노, 구호준, 조은경, 강재희, 구용기, 리동렬 등 작가의 단편 소설들을 중심으로 재한 조선족 소설의 주제의식의 변화과정과 창작특징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첫째는 재한 조선족들의 어려운 삶의 모습과 디아스포라의 비애와 울분, 한국 재외동포 정책의 문제점을 예술적으로 재현하고 고발한 작품들이고, 둘째는 재한 조선족 자체의 도덕적 불감증과 정신적 타락상에 대해 고발한 작품이며, 셋째는 재한 조선족의 정체성의 조정과 변화,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다룬 작품들이다. 특히 리동렬의 단편 <저 꽃이 불편하다>는 조선족 출신의 여주인공 헤라의 형상을 통해 누구든지 남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주체적인 힘을 키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거듭나는 길밖에 없음을, 대척(對蹠)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주체적인 힘과 의지, 아량과 흉금을 가질 때만이 화합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재한 조선족 작가들은 코리안 드림의 물결을 타고 한국에 와서 조선족 형제자매들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이방인의 고뇌와 슬픔, 자아 성찰과 반성, 그리고 주체의식의 변화를 통한 정체성의 재조정 과정을 예술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서기관’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했다. 따라서 현장성과 사실성, 진정성은 중국 내 조선족 소설과 다른 재한 조선족 소설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김호웅 교수
김호웅 교수


핵심어
 재한 조선족 소설, 정체성, 자아 성찰, 현장성, 사실성, 진정성

 

1. 서론

 재한 조선족 작가들이 최근에 창작한 중단편 소설들은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송화강, 민족문학, 동포문학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다수의 작품에는 작가의 실제 체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현장성이 녹아있다. 재한 조선족 작가들이 중국의 조선족 문학지에 투고하는 경우도 있지만 중국 현지의 조선족 작가들도 문학동네, 문학사계, 동포문학과 같은 한국의 문학지에 투고하기도 한다. 물론 허련순이나 김금희의 경우처럼 한국에서 단행본을 출판한 상황에 비춰 볼 때, 재한 조선족 작가와 중국 현지의 조선족 작가를 구분해서 각각 논의할 필요성에 대해 회의를 표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한국에서 5년 이상 생활한 재한 조선족 작가들의 작품, 그중에서도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소설화한 작품들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이들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구명하고자 한다.
 특히 2012년에 출범한 ‘재한동포문인협회’에서는 동포문학을 연간으로 간행하고 여러 차례 조선족 문학과 관련한 세미나를 개최하여 재한 조선족 작가들의 아지트로, 플랫폼으로, 신진작가들의 산실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찰의 범위를 일정하게 한정시켜 조선족 문학의 한 갈래인 재한 조선족 소설만의 특성과 성취, 그리고 문제점을 제대로 규명해보고자 한다.
 ‘88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코리안 드림이 시작된 지도 벌써 30년을 넘어섰다. 그동안 몇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이후, 1996년 ‘페스카마호’ 사건이 일어났고, 2011년에는 백청강 신드롬이 있었다. 그리고 2007년 ‘외국인 고용허가 및 인권보호 법률안’이 제정되어 조선족에 대한 방문취업제(H-2)와 재외동포 비자(F-4)를 도입하고, 불법체류자에 대한 사면을 통해 조선족의 한국 입국을 개방한 후 십여 년이 지난 현재 재한 조선족은 80만 명(귀화인 포함)에 육박하고 있다. 80만 명이면 어림잡아 조선족 인구의 40%가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코리안 드림의 전반 과정을 재한 조선족 작가들이 한국의 현장에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화해 온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한국에서의 생생한 생활 경험과 중국에서 겪었던 이중 정체성과는 다른 모국인과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다중 정체성으로 인한 고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현장성’이 깊이 녹아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상호텍스트성과 소설 미학의 관점으로 재한 조선족 소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의 우주 속에서 자유롭게 만나는 의식적 차원과 무의식적 차원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문학적 대화의 양상을 지시하는 데 소설에서는 주로 텍스트 사이의 구조와 인물의 관계 및 지향하는 의식을 통해 그 상호텍스트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재한 조선족 소설을 면밀히 살펴보면, 한국 또는 서양의 작품과 상호텍스트적 관계가 내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소설은 다양한 사회적 언어 유형 그리고 예술적으로 조직된 다양한 개인의 목소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인물, 시공간, 사건, 서술방식 등을 통해 그 미적인 본질에 다가가게 된다. 이에 따라 재한 조선족 소설을 크게 세 가지 범위로 나누어 주제적 특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재한 조선족 소설의 위상과 의의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디아스포라의 고달픈 삶과 울분
개혁개방 이후 한국과의 접촉이 조선족의 삶과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듯이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지는 조선족 이차 이산 역시 조선족 전체의 삶과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문학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재한 조선족 소설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는 한국에서 겪는 생활고로 인한 고통과 한국인의 차별에 따른 서러움 등이다.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소설화한 작품으로 류재순의 단편 <2006, 그해 겨울>(2016)과 김노의 <한심한 세상>(2000)을 주목할 수 있다. 물론 이에 앞서 김남현의 <한신 하이츠>(1992), 강호원의 <인천부두>(2000), 박옥남의 <내 이름은 개똥네>(2008), 정형섭의 <가마우지 와이프>(2008)와 같은 작품을 통해 조선족 형제자매들이 한국에서 당하는 냉대와 차별, 그들의 소외감과 분노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류재순의 <2006, 그해 겨울>은 2007년 ‘외국인 고용허가 및 인권보호 법률안’의 실행을 계기로 재한 조선족 형제자매들의 어려운 삶의 모습과 디아스포라의 비애와 울분, 한국 재외동포 정책의 문제점을 예술적으로 재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2006, 그해 겨울>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한국의 저명 작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1965)을 연상케 한다. 김승옥의 작품은 구청 병사계(兵事係) 직원인 ‘나’와 대학원생 ‘안’과 아내의 죽음을 대가로 돈을 받은 ‘서른 대여섯 살짜리 사내’가 서로 우연히 만나서 보내게 되는 하루 저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 인물은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문명사회 혹은 도시의 거대한 질서로부터 소외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소외로부터 짙은 절망감이나 권태를 느낀다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요컨대 세 명의 작중인물이 벌이는 하룻밤의 놀이를 통하여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분리되어 사회의 한 기계 부속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삶을 냉정하게 묘파하고 있다.
그러나 류재순의 <2006, 그해 겨울>은 2007년 ‘외국인 고용허가 및 인권보호 법률안’이 나오기 전의 캄캄칠야와 같은 실존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국 경찰과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쫓고 쫓기는 급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사건은 민정이의 핸드폰에 “큰일 났어요, 성남씨가 출입국에 잡혀갔어요!”라는 다급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실은 전날 저녁 성남이는 몇 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오빠를 만나 서로 슬픔을 나누고 위로하면서 취토록 술을 마시고 헤어진 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철 장의자에 누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순찰하던 경찰이 성남이를 흔들어 깨운다. 성남이는 귀찮다고 비몽사몽 간에 팔을 휘둘렀는데 그만 안경쟁이 경찰의 눈두덩을 들이치고 말았다. 함께 순찰하던 경찰 둘까지 합세하여 성남이를 장의자에서 끌어내려 사정없이 치고박고 밟아놓았다. 성남이도 조건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나중에 성남이는 외국인이라는 신분이 밝혀져 출입국에 잡혀 들어간다. 성남이는 중국의 한 무역회사 대표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사업에서 실패했고 중국 측의 귀국하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마누라의 암을 치료하기 위해 쏟아 넣은 돈을 갚지 못해 그대로 한국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는 독서를 즐기고 언제나 싱그레 웃으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그야말로 푸근하고 따뜻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인물이다.
‘나’는 남편에게 200만 원을 주면서 급히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성남이를 구해보라고 하고 나서 민정, 월매, 철수 등을 부른다. 이들은 똑같은 고독과 외로움, ‘중국 냄새’와 고달픔으로 한 동아리가 되어 휴일이면 꼭 모이는 친구들이다. 이때 남편의 전화가 오는데 성남이가 경찰의 발길질에 갈비뼈 세 대나 금이 가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이리저리 방책을 구하던 친구들은 병실에서 성남이를 지키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신임 공무원에게 맥주나 한잔 하자고 슬쩍 미끼를 던져 바깥으로 불러낸다. 그 사이 성남이는 도망을 친다. 허둥지둥 셋집에 돌아가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가지고 나온다.
하지만 ‘나’의 남편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갔을 때 방문서명란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것이 탈이다. 남편의 핸드폰에 저장된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통해 경찰은 이들 모두를 잡아들이고 강제추방을 시킨다. 이때 병원에서 성남이를 지키던 신임 공무원이 나서서 모두 자기의 불찰이니 어떠한 처분도 가중으로 받겠다고 하면서 중국동포들을 풀어주라고 호소한다. 그러자 중국동포들은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이 와-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참았던 눈물과 설움이 갑자기 터져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작품은 “아, 2006년, 그해 겨울은 너무 춥고 캄캄하였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라고 끝맺는다.
이 소설은 밤거리에서 한 남자가 자기를 부르는 관헌을 돌아보는 순간을 포착한 독일의 유대계 초현실주의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Felix Nussbaum, 1904∼1944)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이라는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외투의 가슴께에는 노란 다윗의 별이 붙어 있고, 왼손에 들린 벨기에 왕국의 외국인등록 증명서에는 ‘유대인’이라는 의미의 ‘JUIF-JOOD’라는 붉은 글자가 찍혀 있다. 몸을 감출 장소를 찾아 이국의 거리를 방황하던 남자는 끝내는 막다른 골목에 갇힌다. 이젠 도망갈 곳이 없다. 궁지에 빠진 남자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자신을 그곳으로 몰아붙인 관헌을 쏘아본다. 나치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절체절명의 벽 앞에 서서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으로 주장한 이 그림은 유대인의 자화상만이 아니라 모든 디아스포라의 자화상이라 하겠다. 야밤중에 한국 경찰에 잡힌 성남, 월매, 철수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소설은 탐정소설과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불법체류자들의 불안감과 소외감을 증폭시키고, 친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조선족 동포와 그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면서 그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특히 출입국 신임 공무원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한국국민과 중국동포 간에 가로놓인 높은 장벽에 한 줄기의 밝은 통로를 열어놓고 있다.
김노의 단편 <한심한 세상>에 대해 한국의 문학평론가인 이시환은 김노의 소설들을 보고 ‘읽는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이 자신과 대척(對蹠)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원천적으로 불평등하며, 삶의 조건이나 생활환경 등이 극도로 열악한 가운데 불안, 따돌림, 멸시, 차별대우, 폭언, 폭력 등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서울 생활에 적응하며 인간답게 살려고 고군분투하듯 노력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중국 조선족으로서 한국의 서울로 온 여성들이 많지만 남성도 더러 있다. 그들의 입국은 불법적인 밀항으로부터 합법적인 비자를 받아 들어오긴 했지만 대개는 그 과정에서 진 빚을 갚고 돈을 벌어서 돌아가기 위한 노동 생활로 체류 기간의 일방적인 연장이 불가피하고, 그로 인해서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어 불안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는 재한 조선족의 불우한 처지를 이해하는 한국 문인의 재한 조선족 현실에 대한 적중한 지적이다.
김노의 <한심한 세상>은 주요섭(1902∼1972)의 단편 <개밥>(1927)을 연상시킨다. <개밥>은 1920년대의 상해를 배경으로, 부잣집에서 어멈으로 일하는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주인 아씨는 개에게 사람도 먹기 어려운 쌀밥과 고깃국을 먹인다. 이를 보고 어멈은 속으로 몹시 분노한다. 어멈의 세 살 난 딸애는 잘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개는 쌀밥과 고깃국마저 잘 먹지 않는다. 주인 아씨는 개가 남긴 음식을 몽땅 버리라고 하지만 어멈은 몰래 집에 가져다가 어린 딸애에게 먹인다. 좀 시일이 지나자 개는 음식을 덥석덥석 잘 먹는다. 이제는 음식이 남지 않는다. 딸애는 먹겠다고 조르고 개는 염치 없이 다 먹어버리니 어멈은 음식을 두고 개와 싸운다. 가난은 허기에 지친 인간을 동물로 전락시킨 것이다.
주요섭의 <개밥>이 개와 사람이 음식을 두고 다투는 처절한 장면을 통해 빈부격차에 의한 최하층 인간의 아픔을 리얼하게 묘사했다면 김노의 <한심한 세상>은 애완견을 키우는 한국 유한부인들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과 개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조선족 출신 가정부의 구슬픈 처지와 뼈저린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 여자가 기르는 개 이름은 쉐리인데 이놈은 치즈에 소고기 캔과 같은 영양식에 요구르트를 먹고 정기적으로 애완견 미용실에 가서 미용을 한다. 주인 여자의 친구들 역시 애완견을 키우는데 이들은 쉐리의 생일날에 찾아와 온갖 추태를 다 부린다. 이들이 데리고 온 애완견 모두가 다이에나, 댄디, 샤니요 하는 왕세자비나 명배우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미견 선발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애완견들을 안고 헬스클럽에 가는가 하면 애완견의 오줌 무늬를 일일이 사진을 찍어서 천하의 걸작이라고 떠들어댄다. 심지어 선거 때 후보들의 정책 방향이나 비전은 고려하지 않고 무려 다섯 마리의 개를 키운다는 애견 정치인에게 한 표를 던지기도 하고 걸핏하면 목에 핏대를 세우고 견권(犬權), 즉 애완견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정부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건축현장의 함바집이나 완공되지 않은 건축현장의 으슥한 구석에서 남편과의 ‘사랑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주인집에서는 온갖 손빨래를 다 하고 쉐리를 보살피면서 짐승처럼 혹사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쉐리의 생일날 아무데나 오줌을 내갈기는 어느 손님의 개를 훈계하다가 손을 물리고 피를 흘린다. 주인 여자는 동정하기는 고사하고 귀한 손님들이 온 마당에 주책머리 없이 손을 상했다고 나무람하면서 파출부를 부르고 그녀를 내쫓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한국 유한부인들의 사치와 경박함을 꼬집고 조선족 출신 가정부의 개보다 못한 생활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은주 박사
전은주 박사


3. 도덕적 불감증과 정신적 타락상에 대한 고발
이 장에서는 구호준의 단편 <겨울꽃>(2016)과 조원의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2018), 조은경의 <턱관절>(2017), 강재희의 <반편들의 잔치>(2013)를 통해 한국에 건너와 삶에 찌든 조선족 여인들이 선택한 삶의 도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난하고 불행한 조선족 여인들이 선택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타락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총명과 노력으로 한국의 주류사회에 파고드는 길이다. 적잖은 조선족 여성들이 사장 나부랭이들의 성추행을 당하고 있고, 개중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웃음과 몸을 파는 여인들도 있다.
구호준의 <겨울꽃>(2016)은 미자라는 조선족 출신 매춘부의 하루 일상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은 김광주의 <얘지(野鷄)>(1927)라는 소설을 연상시킨다. <얘지>에는 1930년대 상해 사창가(私娼街)에서 몸을 팔던 조선인 매춘부 이쁜이, 상해의 밑바닥에 뒹굴면서도 ‘흥, 누가 나더러 남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할 것이냐? 정말 귀여운 아들딸을 두 팔에 하나씩 안고 하루라도, 다만 하루라도 에미노릇을 하다 죽고 싶다!’고 했던 이쁜이, 인간의 자존과 여자가 가야 할 길을 잃지 않은 이쁜이가 등장한다.
그런데 오늘의 서울 바닥에도 매춘부로 삶을 영위하는 조선족 여성들이 적지 않다. 남편을 잃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마저 차 사고를 당해 불구자가 되자 그 아들이나마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한국에 온 미자, 그녀는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며 일하다가 마침내 매춘부로 전락한다. 그녀는 추운 겨울의 어느 날 북한산 등산길에서 사냥물을 노린다. 자칫하면 경찰에 덜미를 잡힐 수 있고 한국 ‘할줌마’들에게 들키면 뼈도 추리지 못할 줄을 뻔히 알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런 수치스러운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웬 남정이 올라오자 미자는 빵긋 웃으며 말을 건넨다.

“박카스를 드시지 않을래요?”
미자는 토마토를 먹으면서 넌지시 남자를 건너다본다.
“네?”
남자는 놀란 눈길로 미자를 본다. 미자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담으면서 남자를 향해 눈으로 윙크를 보낸다.
“어, 얼마인데요?”
남자는 재빠르게 주변을 훑어본다. 점심때가 가까우니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싸게 드릴게요. 2만 원만 주세요.”
미자는 마치 장터에서 팔고 남은 배추를 헐값에 파는 장사꾼의 표정이다.
“근데 여기에서 어떻게…”
남자가 잠깐 주춤하려고 한다. 고삐를 늦추면 힘들게 잡은 사냥감을 눈앞에서 잃게 된다.
“산이여서 스릴이 있잖아요?”
미자는 애써 얼굴에 화사한 표정을 담는다.
“선불이에요.”
남자가 주춤하자 미자는 손을 내민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에는 경험이 없어서 일을 하고도 돈을 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볼일만 보고 도망치는 파렴치한 남자가 있어도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는 것이 이런 일이었다.
남자는 배낭에서 지갑을 꺼내어 미자에게 2만 원을 주고는 말없이 숲속으로 들어간다.

보다시피 시퍼런 대낮에 등산객들을 유혹해 2만 원이라는 헐값에 몸을 파는 미자이다. 하지만 남녀가 몸을 섞을 때 옥문과 항문 사이에 가시가 박혀 미자는 심한 고통을 느낀다. 이 작품은 거친 남성에게 깔려 신음하면서도 중국에 두고 온 아들을 생각하는 장면이 독자들의 눈물을 자아낸다. 짧은 단편에서 ‘겨울꽃’, ‘가시’, ‘새끼들을 품은 참새’ 등 여러 가지 메타포를 동원해 좀 난삽하고 혼란한 느낌을 주지만 오늘날 재한 조선족 최하층 인간들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코리안 드림 30년이 경과한 재한 조선족 사회의 계층 분화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구호준의 <겨울꽃>의 경우와 같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매춘부로 타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의 총명과 노력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조원의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2018)에서는 새로운 형상의 남성이 등장한다. 조영욱은 이 작품에 대해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학과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의 욕망의 삼각형 관점으로 남주인공의 형상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나서 남주인공은 여러 가지 욕망을 가진 현대 인간의 자화상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구체성이 없는 욕망의 화신으로 보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작품에 나오는 남주인공이 조선족인지, 한국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주인공은 스스로 ‘샐러리맨은 아니지만 요즘 나는 샐러리맨의 절박한 주인 감각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알람이 울린 후 30분이나 지나서야 잠에서 깨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야 했다’면서 ‘대충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챙기고 작업실이자 거주공간인 집을 나선다’라고 했으니 인테리어 사업자, 즉 충분한 지식과 기술을 갖춘 남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이 남주인공을 새로운 타입의 재한 조선족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남자는 바닷가에 있는 좌망이라는 마을의 전원주택 증축공사를 맡아 한다. 주인은 미모의 30대 여인으로 초등학교에 다니는 웅이라는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데 여러 번 ‘나’에게 미묘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첫날 경사진 옆 골목에 차를 세우고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목청껏 기분 좋게 인사를 보냈더니 여인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공사 중에 유의해야 할 점들을 세부적으로 명백하게 기재한 계약서를 내놓는다. 사뭇 깔끔하고 매서운 여인이다. ‘내’가 다락방에 있는 물건들을 마당에 내놓을 때 ‘셀로판지를 두르고 붉은색 비닐 끈으로 십자 모양으로 포장한 케이스’를 들고 내려오는데 그녀가 덮치기라도 하듯 낚아챈다. 그 바람에 ‘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것은 그녀의 웨딩사진인 것 같았다. 듣자니 여인의 남편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남편이 어느 고위층 관리 대신에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고 그 보상으로 좌망에 전원주택을 가지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다락방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되었으므로 그녀와 만나는 일은 더는 없었다. 하지만 정원의 파라솔 아래에 등을 지고 앉은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점심을 먹은 다음 ‘나’는 쟁반에 빈 그릇들을 담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부엌 쪽으로 가까워졌을 때, 짧은 실크 잠옷 치마자락에 감싸여진, 동그랗게 말려진 여인의 엉덩이를 보고 말았다. 여인은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오른쪽 어깨, 겨드랑이 사이의 접혀진 살, 쇄골의 굴곡과 실크 잠옷 속에서 갑자기 놀라서 튕겨 올라올 듯한 노브래지어의 젖가슴은 강렬한 햇빛 아래서 오히려 헛것처럼 보였다. 여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는 아득하기만 했다. 금방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 가늘게 치켜뜬 여인의 눈과 나는 마주쳤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행위를 감추려고 숨을 잠깐 멈추었던 것이 오히려 나의 머릿속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는 머뭇대다가 재빠르게 쟁반을 여인에게 내밀었다. 여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쟁반을 받았고 나는 휘청대며 계단을 밟고 성급히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거의 A4 용지 한 매 정도의 분량으로 쭈그리고 앉아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여인을 묘사했는데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와 같은 유미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세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묘사는 작품에서 여인이 존 밴빌(John Banville, 1945∼ )의 <바다>를 보고 있다는 서술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작가가 존 밴빌 소설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철학적 주제들을 블랙 유머와 묘사를 통해 형상화하는 문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작품 속 여자는 끝까지 베일에 가려있고 ‘나’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작품 말미에 여인은 ‘편견과 맞서는 데는 오만뿐만이 아니겠지요?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서 나를 잊으면서 살 수 없습니까?’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회는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스탕달(Stendhal, 1783∼1842)의 <적(赤)과 흑(黑)>에 나오는 쥘리앵 소렐이나 D. 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사냥터지기 멜로즈를 연상케 하는 건강하고 명민하고 침착하고 결단성이 있는 ‘나’는 끝내 이 여인을 범했을 것이고 둘은 불륜의 쾌락을 만끽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가 조선족 출신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는 쥘리앵 소렐처럼 신분 상승을 위해 육체를 이용하는 새로운 타입의 조선족을 의미하고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그러한 형태의 불륜이기 때문이다.
조은경의 <턱관절>(2017)은 일부 재한 조선족의 정신적 타락상을 꼬집은 작품이다. ‘나(정하)’는 고모에게서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듣고 한국에 간다. ‘나’는 스물일곱이나 될 때까지 16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실은 아버지가 한국에 다른 여자가 생겨 집에 돈을 부쳐오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던 것인데, 공사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어머니는 일편단심 남편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며 옷가게를 차려 ‘나’를 대학생으로 키워냈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삼촌을 한국으로 보냈다.
‘나’는 고모의 끈질긴 재촉에 못 이겨 한국에 가지만 4년간 인터넷으로 사귄 ‘나’의 남자친구 준은 그 사이 마음이 변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삼촌이 웬 아줌마를 데리고 와서 ‘형이랑 같이 살던 아주머니’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라고 한다. 후에 알고 보니 아버지의 정부라 할까, 아니, 아버지와 삼촌 모두의 여자였다. ‘구멍 동서’라는 말도 있지만 이들 형제는 한 여자를 번갈아 끼고 살았는데 대여섯 살 되는 아이 하나까지 있었다. 대관절 ‘나’의 동생인지 사촌 동생인지 알 수 없다. 더더구나 호텔에 돌아와 아줌마에게서 받은 쇼핑백을 열어보니 ‘열 살짜리 애들도 거부할 정도의 싸구려 머리핀’과 함께 봉투가 나왔다. 봉투 안에는 사망증명서와 함께 5만 원짜리 한화 20장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유골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정하야, 네가 싸워서 이겨야 될 사람은 이 다섯 살짜리 꼬마다. 큰오빠 사망보상금으로 나올 돈이 모두 정하 네 것이어야 마땅하지만…”

고모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이들이 돈을 노려서 꿍꿍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갑자기 오른쪽 귀밑의 턱관절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우상렬은 이 작품을 두고 ‘물질적 삶보다는 정신적 삶의 파탄을 가져온 이야기다. 아버지의 불륜, 삼촌의 패륜 및 영지 아주머니의 탐욕은 전형적으로 이를 말해준다’고 하면서 ‘이 소설은 순진한 처녀 후세대들의 눈으로 윗세대들의 불미스러움을 서술하는 시점을 취함으로써 비록 간접적인 제시방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황당함을 더 돌출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제목도 제목이겠지만 턱관절이라는 상징 장치로 황당함의 극치를 나타내며 작품의 고조부분을 장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강재희의 단편 <반편들의 잔치>(2013) 역시 일부 재한 조선족 노무자들의 타락상을 꼬집고 있다. 이 작품을 보기 전에 먼저 그의 단편 <탈곡>(2013)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조선족 농촌사회의 병폐와 일부 조선족 농민들의 허랑방탕한 근성을 꼬집은 세태풍속화이다. 소설의 제목을 <탈곡>이라 했는데 이는 다분히 상징성을 지닌다. 탈곡은 곡식의 낟알을 이삭에서 털어내는 작업을 말하지만 이 소설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 온갖 명분과 구실을 만들어 먹고 마시는 조선족 농촌사회의 현실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취기 어린 농담과 육담들이 오가고 도리깨가 난무하는 탈곡장을 연상케 하는데, 작품은 복이네 집에서 탈곡을 하는 하루의 일을 다루고 있다. 부지런한 ‘되놈’과 먹고 놀기만 하는 자신들과의 대조를 통해 조선족의 치부(恥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3인칭 서술 시점을 취함으로써 지나친 흥분과 섣부른 비판을 자제했고 시종일관 세부묘사에 의한 형상의 진실성을 추구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흥청망청 취했을 때도 직설적인 비판을 삼가고 능청스럽게 아이러니한 장면을 창출한다.

“모두들 점심 술에 푹 취해 버렸다. 취하지 않은 것이라면 공연히 정지와 마당에서 사람들의 발길에 묻어 다니는 햇강아지 누렁이뿐이었다.”

그렇다면 <반편들의 잔치>(2013)는 <탈곡>의 자매편이라 하겠다. 한국에 건너간 조선족 노무자들의 경우,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서 가정을 살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한국에 건너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주제넘게 사치와 향락에 젖어 돈을 물 쓰듯 하면서 흥청망청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반편들의 잔치>는 이렇게 한국에서 노동으로 살아가는 조선족 노무자들이 힘들게 번 돈을 낭비하며 허랑방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꼬집었다. 추석 연휴에도 오갈 데 없는 조선족 출신의 노무자들은 친구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고 유흥업소에 가서 계집들을 끼고 즐기며 사흘 동안 일인당 300만 원씩 쓰고는 술이 깬 후에야 이를 후회한다. 이처럼 <탈곡>과 <반편들의 잔치>는 중국에 남은 조선족과 한국에 나간 조선족 형제들 모두에게 일침을 놓은, 코리안 드림의 음영을 증언한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다.


4. 강자 또는 천사로의 정신적 부활
이주민의 기억과 관계되는 모든 흔적은 이주민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주민의 기억은 역사와 언어, 그리고 문학의 층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재한 조선족 작가들은 다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이런 의미에서 재한 조선족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김남현의 <한신 하이츠>(1992), 리동렬의 <백정 미스터 리>(1994), 강호원의 <쪽빛>(2007), 조성희의 <조개료리>(2004), 허련순의 <남자의 동굴>(2007)과 같은 작품은 한국국민과 조선족 형제들의 갈등과 충돌을 동포애와 인간성의 발견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동포애와 상호 인간성의 발견만으로는 한국국민과 조선족들 간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재한 조선족의 경우, 의식의 전환과 주체적인 노력, 인간적인 자존과 자강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 또는 한국국민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점을 파악하고 새로운 인물과 사건으로, 재한 조선족의 의식의 전환으로 공존과 상생의 세계를 지향한 소설로 구호준의 <연어들의 걸음걸이>, 강호원의 <메이드 인 차이나>와 <탈출>, 그리고 리동렬의 <저 꽃이 불편하다>를 들 수 있다.
구호준의 <연어들의 걸음걸이>(2015)는 정신적으로 만신창이 된 재한 조선족의 인간적인 자각과 동산재기(東山再起)의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나’의 모든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돈 500만 원을 훔쳐가지고 달아난 아내, 그녀는 ‘나’에게 더러운 성병을 남기고 가버렸다. 결국 ‘나’는 서울의 가리봉동이나 대림동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빈털터리, 날마다 용역을 뛰는 막벌이꾼이 되었다. 가끔 ‘나’는 대림역 8번 출구에 있는 휴게실에서 노숙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아내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아내 같아 보이는 여자를 뒤쫓아 가다가 웬 한국 아가씨와 만나게 되고, 후에 낙지집에서 다시 만나 함께 일하게 된다. 이 아가씨는 어느 신문사 기자로 일하다가 다리를 다친 후 허드렛일을 하지만 아주 사려 깊은 아가씨다. 어느 날 도봉산을 등반하다가 둘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굉장히 의미가 있다. 여인은 저만치 앞에 앉아 여유작작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나’를 보며 말을 꺼낸다.

“오빠가 먼저 와서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이 와서 끼어들어 떠든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당연히 기분이 잡치지?”
나는 등산용 수건을 꺼내 여인에게 건네준다. 한번 물에 적시면 몇 시간이고 물기를 잃지 않는 수건이다.
“왜 자신도 못하는 일들을 남을 보고 하라고 하나요? 우리가 저기에 끼어들면 저 사람들도 단연히 불쾌해할 것인데.”
여인은 결국 교포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찾아주고 있었다.
“그럼 교포들의 정신이 무너지는 원인은 뭐라고 생각해?”
다시 천축사로 가는 길을 향해 걸음을 떼면서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만들어본다.
“우선은 자신들의 문제겠지요. 조금 더 긍정적인 사유로 산다면 정신은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스스로 피해의식을 갖고 살아가면 어떤 환경에서건 정신이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깐요. 그리고 한국정부도 동포들이 이민해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책임이 있고 중국 정부에서도 따로 한국으로 진출하는 동포들에게 어떤 배려도 주지 않으니깐 결국 이중으로 버림을 받은 셈이지요.”
나도 그래서 술을 빙자하면서 살아왔던가?
“한국에서 성공한 동포들도 적잖아요. 그 사람들도 꼭 같이 정신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나요? 생각의 차이가 서로 다른 인생을 만들게 하거든요. 오빠도 그럴 거고.”

이렇게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조선족 사내와 한국 아가씨는 정상을 바라고 돌층계를 톺아 오르면서 의미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등산도 정신력이 있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듯이 생활도 정신력이 있어야만 난관을 헤쳐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두고 장정일은 ‘몸뚱이가 찌그러져도 맑은 가슴으로 살려는 정신적 부활의 시의적절한 주제를 형상적으로 다루었다’고 하면서 ‘출구를 찾는 지하철 승객, 산을 오르는 등산객이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라는 이미지와 겹치면서 단단한 삶의 지층을 뚫고 건실한 넋을 길러내려는 주인공의 정신력에 상징적인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강호원은 한국의 산업 현장에서 일하면서 꾸준히 창작에 정진하는 작가이다. 단편 <쪽빛>(2007)에서 최하층 재한 조선족과 한국국민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동포애로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그는 단편 <메이드 인 차이나>(2014)에서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재한 조선족인 ‘나’는 자그마한 회사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는데 부실한 재료로 제작한 중국산 홀더 방전 차단제와 같은 부품들이 쉽게 깨어지고 부서져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어 회사 측의 손해가 적지 않다. 그때마다 사장은 ‘니들 중국산은 한결같이 이렇게 부실하냐?’ 하고 중국산 제품과 ‘나’를 싸잡아 욕한다. ‘나’는 값싼 메이드 인 차이나에 인건비 싼 차이니스를 고용하면서도 늘 그것이 불만인 사장의 사고방식에 화가 나지만 꾹 참는다. 하지만 이렇게 야유와 놀림을 당하던 어느 날 끝내 분통을 터뜨리고 만다.

“그러면 차라리 중국산 빼고 사장님이 선호하는 독일제, 미제, 일제 뭐 그런 게 많지 않나요? 왜 하필이면 질 나쁜 중국산만 번번이 사들이고선, 나중에 누구 탓만 같이 구질구질하게 물건 괴롭히고 사람 괴롭혀요?”

‘나’는 한바탕 울분을 토하고 술자리를 떠났다. 이튿날 춘천에 있는 친구의 아들 결혼 잔치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마음은 후회막급이다. 도대체 왜, 그깟 별것도 아닌 일 갖고 언감생심 사장과 맞짱을 떴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금방 이런 생각을 뒤집고 가만히 부르짖는다. ‘그래, 비록 부모님 고향이 여기라도 저 만주 대륙에 이민 가서 나를 낳았으니 나는 틀림없는 메이드 인 차이나다, 어쩔래?’ 공장 동료의 권유대로 사장을 보고 ‘죄송합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풀렸을 일이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때 서울 공장에서 막내 동료 김씨가 춘천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나’는 ‘나 잘린 거야?’ 하고 묻는데 김씨는 ‘우리 사장님은 가끔씩은 산타할아버지 못지 않게 남을 배려한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내일 직원들 모두 휴가로 춘천에 가서 낚시도 하고 특산도 맛보게 되었으니 하루 더 춘천에서 묵고 내일 춘천에서 만나자고 한다. 사장은 공장에서 6년간 일해 이미 기술자로 된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장의 고육지계(苦肉之計)를 간파하니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이 소설에서 화해를 이끌어낸 것은 단순한 동포의 논리가 아니라 인격과 능력의 논리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인간적인 자존을 지키고 스스로 자신의 힘을 키워갈 때 비로소 한국국민과의 대등한 대화와 화합이 가능해진다는 도리를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리동렬의 단편 <저 꽃이 불편하다>를 살피고자 한다. 이 작품은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경험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주로 인물 성격 창조를 우선적인 과제로 내세운다. 소설의 승패는 성격 창조의 성공 여부와 관련된다고 해도 대과(大过)는 없을 것이다. 코리안 드림 이후, 조선족의 많은 소설들에서 각양각색의 한국인을 다루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리동렬의 단편 <백정 미스터 리>(1994)에 나오는 동명의 주인공일 것이다. 소나 돼지를 잡는 백정이지만 유식한 체하고, 실없이 농지거리를 하지만 시비 경우가 바르며, 때론 거칠고 난폭하지만 일솜씨가 좋고 인정미가 넘치는 ‘미스터 리’, 그는 색다른 형상으로 독자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미스터 리는 포스터(E.M. Forster, 1879∼1970)의 소설론에 따르면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그 개인적 성격이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평면적 인물에 속한다. 반면 <저 꽃이 불편하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헤라는 작품 내에서 성격이 변화, 발전한다. 즉 헤라는 기질과 동기가 복잡하고 미묘하며 특수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 점에서 미스터 리와는 구분되며 입체적 인물에 속한다.
<저 꽃이 불편하다>의 서사구조와 상징에 대해서는 류경자가 세세히 분석, 논의한 바가 있다. 말하자면 빈의 장례식이라는 현재의 서사와 헤라의 회상이라는 과거의 서사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된다는 점, 박영근의 <저 꽃이 불편하다>라는 시가 이 작품에 시종일관 관통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불편함은 서로 대척 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느낌일 뿐이기에 그들의 사이가 왜 불편한가를 세밀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작품에는 한국의 상류층들이 사는 한남동과 가난한 재한 조선족 형제자매들이 사는 대림동이라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두 개의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한남동은 한국국민을 상징하고 대림동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 불법체류자를 상징하며, 더 비약한다면 한반도의 남과 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빈과 헤라는 이 엄연한 경계를 넘나들고자 하는데 주변의 눈이 무서울 수 밖에 없다. 다름 아니라 이들 둘의 스스럼없는 관계를 얄밉게 지켜보는 세상의 눈이라 할까, 관습이라 할까, 그게 무서운 것이다.
빈은 한남동의 꽤 고급스러운 빌라에서 살았던 한국인이다. 그는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왔고 그의 부친은 미국 LA의 모 대학교 교수요, 모친은 의학박사이다. 그런데 빈의 모친은 고향이 이북이며 미모, 교양, 직업 모든 걸 떠나서 그 출신만으로 빈의 부친과 결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기에 아들인 빈이 자기의 전철을 밟을까 봐 무척 걱정한다. 모친은 빈과 그의 첫사랑인 진희의 결합을 한사코 반대한다. 진희는 중국에 살지만 그의 고향이 이북의 청진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진희는 불편한 존재였고 빈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헤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중국 연태에서 살다가 웬 한국 영감을 만나 한국에 들어온다. 그녀는 파출부로 일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6년 만에야 한국 영감의 허락을 받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 영감을 따돌리고 익명으로 대림동에 잠적한다. 그녀가 어느 식당에서 한국 영감과 맞닥뜨려 다시 잡혀갈 뻔한 것을 빈이 선뜻이 나서서 구해줌으로써 둘은 애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님과 사회의 눈을 의식하는 빈에게는 헤라가 귀한 존재이면서도 불편한 존재이다.
헤라에게도 빈은 불편한 존재이다. 빈의 장례식에 나선 헤라는 빈과 법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일천 하룻밤을 살을 섞고 산 사람’일 뿐이다. ‘서로가 걸어온 길은 달라도 추억 속에 소금 알맹이로 짠하게 맺혀있는 상처만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사리에 밝은 헤라는 빈이란 존재는 잡을 수 없는 무지개이며 자신은 그에게 본질적으로 불편한 존재로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실 빈의 장례식이 끝나면 한국 영감의 고발을 이미 받은 몸이라 헤라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 이미 중국 국적이 취소되고 이제 한국 국적까지 잃게 되면 헤라는 무국적자가 된다. 이 경우 설사 빈이 살아있다 해도 헤라는 떳떳하게 빈을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헤라는 영영 불편한 존재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가? 다시 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빈의 장례 자체가 하나의 알레고리이고 상징으로 된다. 세상의 냉대와 편견을 뿌리치고 의지가지없는 이북 출신의 진희를 사랑했고 중국 흑룡강 출신인 헤라를 구해주고 사랑했던 남자, 그래서 헤라는 아무런 법적 책임이 없지만 세상의 따가운 눈총도 개의치 않고 달갑게 상주가 되어 제사를 지내고 마음속으로 빈을 위해 울어준다. 뿐만 아니라 빈이 헤라에게 남긴 1억 3천만 원이 들어있는 저금통장을 진희와 그의 딸에게 주면서 그녀가 자기 가슴속에 더는 불편한 존재가 되지 말았으면 한다. 이 과정을 통해 피눈물 나는 통과의례를 마치고 천사로 부활한 헤라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헤라를 통해 누구든지 남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주체적인 힘을 키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길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대척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주체적인 힘과 의지, 아량과 흉금을 가질 때만이 화합과 평화를 찾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빈의 장례는 하나의 거룩한 희생제의(犧牲祭儀)로 볼 수 있다.


5. 결론
재한 조선족 작가들은 코리안 드림의 물결을 타고 한국에 와서 정착한 후, 이방인의 고뇌와 슬픔, 자아 성찰과 반성, 그리고 주체의식의 변화를 통한 정체성의 재조정 과정을 예술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서기관’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했다. 따라서 현장성과 사실성, 진정성은 중국 내 조선족 소설과 다른 재한 조선족 소설만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재한 조선족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강호원이 언급한 바와 같이 재한 조선족 작가들의 소설에는 몇 가지 허점이 존재한다.

“20년 전, 필자는 나름대로 멋지게 잘 살아보자는 목적으로 외국 ‘밀항선’에 오른 적이 있었다. 결국, 밀항은 실패로 끝났고 돈만 날리고 홍콩감옥에서 반년간 ‘옥살이’를 하는 참담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그 아픈 기억이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 필자의 기억 속에 영원히 추억이 아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과거 황당하고 어이없는 나의 실수가 남긴 오점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가슴 한구석을 늘 괴롭히던 이 ‘오점’을 지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냥 지우기는 싫었다. 이것을 소재로 소설과 실화로 다뤄 연변문학, 도라지 등 중국 조선족 대표 간행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잡지에 발표했지만 뭔가 부족한 감이 들었다. 소설이 실화 같았고 실화가 소설 같기도 한 혼란을 겪었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오락가락 한, 소설 같으면서도 소설 아니고 실화 같으면서도 실화가 아닌, 한낱 글 장난에 불과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왕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이 객관성을 잃고 필자 본인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든가 진실과 허구의 자연스러운 조화가 어색하다든가 하는 등등의 허점들이 드러났다. 보다 문학적이고 예술화한 작품으로 승화시키려면 필시 이런 허점들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때 아픔이 수시로 필자에게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가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강호원이 시인한 바와 같이 작가 자신의 절실한 체험의 소설화라는 측면에서는 재한 조선족 소설의 가치가 크지만, 일부 작가의 경우에는 생계 때문에 날마다 노동현장에서 뛰다 보니 체계적인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마저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적잖은 작가들은 소설 창작에 있어서 허구와 상상이 빈약하고 소설적 구조의 단순성, 묘사의 거칠음(粗糙)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세부에 대한 끈질긴 집착, 새로운 기법에 대한 탐구, 성격의 부각과 주제의 깊이에서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일부 작품은 줄거리만 있고 문학적 형상화가 부족하며 중편 이상의 분량으로 소화해야 할 내용을 단편이라는 작은 그릇에 담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실화와 소설 사이의 어중간한 작품들이 적잖은데 이를 한 단계 승화시켜 문학성을 기할 필요가 있다.
코리안 드림 30년, 재한 조선족 사회에는 계층 분화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구호준의 <겨울꽃>의 경우와 같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매춘부로 타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의 총명과 노력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 중에는 본격적인 소설공부를 통해 구미(歐美)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창작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를테면 앞에서 본 조원의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나 곽미란의 <로마로 가는 길>(2019)을 들 수 있다. 특히 곽미란의 경우는 칙릿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칙릿 소설이란 도시 중산층 여성들의 일과 사랑, 취향 등을 가볍게 형상화한 소설을 말하는데, 이런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마치 친한 친구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소설형식을 모방하기보다 자기의 뿌리에 여러 가지 유익한 형식의 가지들을 접목시켜 체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어떤 기존 모형에 찍어낸 작품처럼 유형화된 아류의 작품을 반복해 만들어내는 우를 범할 수 있고 결국에는 독자들을 식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길>만 보아도 여로의 플롯을 통해 위선자에게 당할 뻔한 여자의 이야기라는 거의 같은 형식과 이야기를 반복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본고는 2000년대 이후 재한 조선족 소설을 상호텍스트적인 관점과 소설 미학의 관점에서 주제의식의 변화과정과 창작특징을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갖고 있지만 위와 같은 칙릿 소설을 비롯한 창작 경향과 구미 문학과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논의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아 있다. 이 부분은 후속 연구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주해: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객원연구원
1) 기존의 조선족 문학 관련 연구는 대체로 중국 조선족 문학과 재한 조선족 문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재한 조선족 문인들의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 역량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재한조선족 문학이 단독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한중 수교 이후 재한 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가 있다.
2) ‘재한동포문인협회’는 2012년 8월 19일, 재한 조선족 사회 유지인사 20여 명의 참여하에 구로구에서 발족 되었다. 소설분과, 시분과, 평론분과를 두었으며, 회원들의 문학同人誌(또는 작품집) 발간, 역량 있는 동포 작가의 등단 및 작품 발표, 각종 문학 관련 세미나 개최, 유망작가 발굴과 육성,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세계 각 지역 작가협회와의 상호교류 등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리동렬, 「재한 조선족 문학의 사회적인 의미」, 동포문학제9호, 2019: 299쪽.
3) 복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고 복수 타자 문학과의 연관성 속에서 자기의 문학을 건설해온 중국 조선족 문학은 주로 세 가지 중요한 참조계를 갖고 발전, 변화하여왔다. 즉 중국 문학 계통과 한반도의 문학 계통 그리고 세계인류 문학 계통이라는 이 세 가지 큰 참조계를 갖고 스스로 좌표를 설정하고 나아갈 방향을 조절하면서 자기의 문학을 영위해왔다. 김호웅 외, 중국조선족문학통사(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11: 8쪽.
4)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조선족’을 담론화한 소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재한 조선족들의 삶을 깊이 있게 다루는 작품들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표 소설로는 공선옥의 <가리봉 연가>, 김인숙의 <감옥의 뜰>, 천운영의 <잘가라, 서커스>, 한수영의 <그녀의 나무 핑궈리>, 박찬순의 <가리봉 양꼬치> 등이다. 이상의 작품들은 조선족의 시각에서 서사를 전개해나가고 있지만, 전부 한국인 작가에 의하여 창작된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재한 조선족 작가들이 직접 쓴 작품을 통해 조선족 문제를 담론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 재한 조선족 문학에 대한 자료를 제공해줌과 동시에 연구자들의 연구 범위 망을 넓히는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5) 조선족 집거지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민족문화를 공유하며 살아오던 조선족들의 삶은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정책과 한중 수교로 인하여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다. 조선족들의 삶의 중심지였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비롯한 동북 삼성의 집거지에 모여 살던 조선족들의 삶의 무대는 점차 넓어져서 북경, 상해, 산동 등 관내 지구로의 이동과 한국으로의 이주가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한반도에서 만주 지역으로 이주해 간 조선인들의 후예인 조선족들의 이차 이산이 본격화된 것이다. 최병우 지음, 이산과 이주 그리고 한국현대소설, 푸른사상, 2014: 161쪽.
6) 10년 단위로 행해지는 중국 인구 보편조사(2016년)에 따르면, 전체 조선족 인구수는 183만 929명이며, 그중 연변조선족자치주 거주 인구수는 79만9천여 명이다. 전은주, 「재한 조선족 디아스포라 위기와 자아성찰」, 통일인문학제72집,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200쪽.
7)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대화이론을 차용하여 만들어낸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용어를 간단히 정의하면 텍스트 간의 상호관련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상호텍스트성의 낱말의 구성은 ‘속’, ‘사이’ 또는 ‘상호’의 뜻을 지닌 ‘inter’라는 접두어가 어떤 물건이 짜여져 있다는 것에서 나온 ‘원문’이나 ‘본문’의 뜻을 지닌 ‘text’와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면서 명사를 만드는 어미 ‘ity’가 덧붙어져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낱말의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텍스트 내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이루어진 것을 지칭하는 추상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김도남 저, 상호텍스트성과 텍스트 이해 교육, 박이정, 2014: 98쪽.
8) 안성수, 「소설의 상호텍스트성 연구」, 현대소설연구제24호, 한국현대소설학회, 2004: 95쪽.
9)  김욱동 저, 대화적 상상력-바흐친의 문학 이론, 문학과지성사, 1988: 225쪽.
10) 최병우 저, 조선족 소설의 틀과 결, 국학자료원, 2012: 102쪽.
11) ‘다윗 왕의 방패’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대인 그리고 유대교를 상징하는 표식이다.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과 유대를 통합한 후 다윗의 별을 유대 왕의 문장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는바, 다윗의 별은 오늘날 이스라엘 국기에 조상의 얼을 기리기 위해서 그려져 있다.
12) 이 작품은 후에 <개팔자 상팔자>로 제목을 고쳤다.
13) 이시환, 「김노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소고」, 중국여자 한국남자, 신세림, 2016: 332∼333쪽.
14) 구호준, 「겨울꽃」, 연변문학제7호, 2016: 89쪽.
15) 예동근 등이 백산서당을 통해 펴낸 조선족 3세들의 서울 이야기(2011)와 연합뉴스 글로벌코리아센터에서 펴낸 인생을 바꾼 기차표 한장(2017)이란 책이 이를 증언한다.
16) 조영욱, 「주체할 수 없는 욕망」, 장백산제6호, 2018: 101쪽.
17) 조영욱은 좌망을 ‘坐忘’이라 했는데 전반 작품을 보면 ‘坐望’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앉아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다.
18) 조원,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장백산제6호, 2018: 87쪽.
19)그는 1989년 <증거의 책>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05년 열여덟 번째 소설인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2006년 <크리스틴 추락하다>라는 추리소설을 발표했고, 2007년 <은빛 백조>를 발표하는 등 지금까지 소설과 희곡을 포함해 총 20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주로 진리, 시간, 분열적인 자아 등 여러 철학적인 주제들을 섭렵하며 탁월한 문체
20)로 형상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와 함께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이언 매큐언(Ian McEwan, 1948∼),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1946∼)와 함께 현대 영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를 연상시키는 어두운 유머와 극도로 섬세한 문체로 유명하다.
21) 한 여자를 형제간이나 동서 간이 번갈아 끼고 사는 경우.
22) 조은경, 「턱관절」, 연변문학제6호, 2017: 20쪽.
23) 우상렬, 「이 가을 우리 문학의 풍성한 열매-제37회 ‘연변문학 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연변문학제11호, 2018: 148쪽.
24) 강재희, 「탈곡」,반편들의 잔치, 료녕민족출판사, 2013: 257쪽.
25) 송현호, 「중국 조선족 이주민 3세들의 삶의 풍경-<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를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제46호, 한국현대소설학회, 2011: 137쪽.
26) 김호웅 저, 「조선족동포와 한국국민의 갈등과 화합의 론리」, 경계의 미학과 창조력, 2019: 281∼289쪽.
27) 구호준, 「연어들의 걸음걸이」, 도라지제5호, 2012: 28∼29쪽.
28) 장정일, 「2012년 도라지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도라지 제1호, 2014: 142쪽.
29) 이러한 주체의 환골탈태를 통한 자각과 갱신이라는 주제는 단편 <탈출>에서도 반복된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김관웅이 상세히 해설한 바가 있다. 김관웅, 「적극적인 주제, 돋보이는 인물형상, 그리고 현념」, 도라지제1호, 2015: 23∼28쪽.
30) 류경자, 「‘불편함’의 망각 속으로」, 동포문학제2호, 2013: 296∼306쪽.
31)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희생제의라는 것을 신의 뜻에 따라 희생물을 신에게 바쳐서 신의 은총을 받는 장치로 보지 않는다. 그는 집단 속에 드러나 있지는 않을지라도 분명히 내재하고 있다가 마침내 분출하려 하는 폭력을, 집단 외부의 대상이나 복수에 휘말릴 염려가 거의 없는 희생물이라는 집단 내부의 특정한 대상에게 분출시킴으로써, 내연하고 있던 갈등과 폭력을 없애고 다시 질서와 평정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문화적 장치로 해석한다. 지라르의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인간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 사회 안에 내연하고 있던 갈등과 반목, 폭력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희생물에 불과하다. René Girard, La Violence et le Sacré, 김진식·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2014: 499쪽.
32) 강호원, 「머리글」, 어둠의 유혹, 도서출판 바닷바람, 2016: 4쪽.
33) 칙릿(chicklit)은 199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 미국을 거쳐 2000년대 한국에 소개되었다. 1999년 출간된 헬렌 필딩의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칙릿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경우 칙릿의 기본 법칙에 충실한 백영옥의 <스타일>(2008), 31세 여성 펀드매니저의 사회적, 성적 욕망을 강렬하게 그린 우영창의 <하늘다리>(2008), 20대 후반 젊은 여성들의 연애관과 결혼관을 요리에 빗대 풀어나간 박주영의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2008), 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2007), 이홍의 <걸프렌즈>(2007),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2006)를 들 수 있다. 오늘날에는 쇼핑과 연애로 반짝거리던 ‘칙릿 소설’이 빛바래진 걸로 간주하고 있다. 김기란, 최기호 지음, 대중문화 사전, 현실문화연구, 2009: 86∼88쪽.
 

참고문헌

1. 자료
강재희, 「탈곡」,반편들의 잔치, 료녕민족출판사, 2013: 247∼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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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저
김관웅, 「적극적인 주제, 돋보이는 인물형상, 그리고 현념」, 도라지제1호, 2015: 23∼28쪽.
김도남 저, 상호텍스트성과 텍스트 이해 교육, 박이정,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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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호, 「중국 조선족 이주민 3세들의 삶의 풍경-<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를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제46호, 한국현대소설학회, 2011: 135∼158쪽.
안성수, 「소설의 상호텍스트성 연구」, 현대소설연구제24호, 한국현대소설학회, 2004: 93∼114쪽.
우상렬, 「이 가을 우리 문학의 풍성한 열매-제37회 ‘연변문학 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연변문학제11호, 2018: 146∼148쪽.
이시환, 「김노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소고」, 중국여자 한국남자, 신세림, 2016: 332∼335쪽.
장정일, 「2012년 도라지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도라지 제1호, 2014: 141∼143쪽.
전은주, 「재한 조선족 디아스포라 위기와 자아성찰」, 통일인문학제72집,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197∼228쪽.
전은주, 「한중 수교 이후 재한 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조영욱, 「주체할 수 없는 욕망」,장백산제6호, 2018: 97∼104쪽.
최병우 저, 조선족 소설의 틀과 결, 국학자료원, 2012.
최병우 지음, 이산과 이주 그리고 한국현대소설, 푸른사상, 2014.
René Girard, La Violence et le Sacré, 김진식·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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