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빈

[서울=동북아신문] 이튿날 아침,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손차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 후옌!”

그는 통역애한테 기분 좋은 아침인사를 건넸다.

“저기 있어요.”

여자애가 책상위의 주전자를 가리켰다. 안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감자가 가득 잔뜩 들어있었다. 아침에 숙소에서 쪄온 모양이다. 컵라면은 쌓아놓고 있어도 삶은 감자는 구하기 어려웠나보다.

“와 고마워요. 잘 먹을께요.”

“김차장님꺼!”

“응? 내꺼!”

손차장은 현지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어, 소장님. 내가 부탁한건 갖고왔어?”

현장점검을 마친 소장이 장갑으로 양팔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막 사무실로 들어서던 참이였다.

“네~그런건 얼마든지 해드립니다.”

소장은 왠지 모르게 한껏 부어있었다. 그는 가방에서 낡은 노트북과 휴대폰 충전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한번 나가기 힘드니 외출하는 사람한테 잔심부름도 시키는 모양이다.

“아니 애들 회식하는데…돈도 많은 회사에서 그렇게까지 하셔야 겠습니까?”

“영수증 첨부해서 청구서 올리라니까. 안 그래요 미스 리?”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대답하는 매뉴얼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종류의 질문들을 종종 받는다. 위의 경우처럼.

“아. 하하…”

직종과 계급을 불문하고 을이라는 위치는 모든 갑들 앞에서 참으로 비참하고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들이다.

“9시에 포모사와 미팅이 있습니다. 미스 리가 좀 수고해 주셔야겠습니다."

“네.”

포스코 사무실은 땀과 흙먼지가 섞인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손차장은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방금전 상황을 상관한테 고해 바쳤다.

“어휴, 방금 사무실에 갔더니 김소장이 아주 난리난리를…저번에 회집에서 회식했잖습니까? 그때 원래 세 회사에서 3분의 1씩 내기로 했는데 나중에 다들 인사불성이 돼서 후옌이 계산했나 봅니다. 그랬더니 아주…”

“내비둬. 아, 넘버2 아니여?”

“허허허…”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을 이럴때 쓰는건가?
하긴 현장에서 주말이면 외국인 직원들이 베트남 여직원 하나씩 끼고 사라졌다가 월요일 아침에 함께 나타난다는데 그쯤이야.

미팅이 끝나고 점심때가 되자 나는 대낮에 눈앞에서 별빛이 반짝이는 신비한 경험을 할수 있게 되였다. 어제 저녁도 거른데다가 어제 아침 같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전날 저녁 주방에 부탁해서 아침에 먹으려고 미리 냉장고에 넣어둔 김밥이 생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였다.

"점심은 뭘로 하실래요. 도시락을 드시고 싶으면 포스코에서 주문할때 꼽사리 껴서 하나 더 추가하면 됩니다.아니면 컵라면도 있고…"

"컵라면도 괜찮습니다."

나는 그냥 빠른걸 택했다.

"그러세요 그럼. 전 이제 컵라면 질렸어요."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소장은 언제 먹다 남았는지 모를 밥에 고추장을 들이부었다.

"음 맛없어!"

통역애는 소장의 밥그릇에 거침없이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소장은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황급히 시선을 다른데로 돌렸다.

"음~58키로 나가요."

여자가 숟가락으로 소장을 가리켰다.

"스트레스가 많으신가 봐요?"

"예. 미스 리도 아까 보셨죠?"

"가족들은 모두 한국에 계세요?"

나는 화제를 딴데로 돌렸다.

"캐나다에 있어요. 애가 거기 유학갔는데 거기는 애들이 유학가면 부모가 따라가서 함께 공부할수 있게 해줘요. 달마다 5000불씩 생활비를 보내요."

소장의 월급이 꽤 쎈 모양이다.

"삼성같은 대기업은 사람을 부품취급밖에 안해요. 평생 몸 바쳐 일해도 48이면 명퇴 당해요. 그럼 자기 인생은 없는거예요. 저도 대기업 다니다가 지금 사장님이 같이 베트남 가지 않겠냐고 해서 따라나선거예요. 근데 여기 스트레스도 만만치가 않아요.미스 리도 아까 보셨죠?"

소장은 밥먹는 내내 을의 숙명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서류를 번역하고 잡다한 업무를 처리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렇게 별탈없이 하루가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밤이 되기 전까지는.

그날 저녁, 퇴근 시간 무렵 내 담당인 김차장이 웬 중년의 남자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섰다.

“미스 리, 인사해. 여기는 남사장, 하노이 시공사 사장인데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사이야. 오늘 남사장이 저녁 산다니까 가서 맛있는거 먹고와.”

“…”

남사장이란 사람의 외모는 내가 여태껏 봐왔던 여느 회사 사장님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빡빡머리에 목에는 두께가 1센치는 되여보이는 금목걸이를 두른, 얼핏 봐도 조직(?)에 몸담고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게다가 얼굴에 5센치 정도 되는 칼자국까지 있어서 인상이 여간 험악한것이 아니였다. 그가 자기 회사 직원이라며 소개한 사람은 한명은 머리가 벗겨진 60대 중반의 할아버지로 도면설계를 담당하는 기술자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수더분하게 생기고 덩치가 좋은 중년 남자로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현장 책임자였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고 학교나 사회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인상이 주는 찝찝한 느낌은 지울수가 없었다. 속으로는 무척이나 께름칙했지만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나 싶어 나는 쭈뼜쭈뼜 그들을 따라나섰다.

택시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할아버지 직원이 내게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우리 딸이야.”

스무살 남짓 돼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사진속에서 아빠랑 머리를 맞대고 깜찍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따님이 이쁘네요.”

할아버지 직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이게 우리 사장님 바인데 아마 하노이에서 제일 클걸?얼마전에 개업파티를 했는데 그때 찍은거야.”

“좋네요.”

말 그대로 광란의 파티였다. 곳곳에서 불꽃쇼와 샴페인을 터트리는 장면이 연출됐고, 노래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뒤영켜 있었다. 하지만 불빛 하나 없는,양쪽에 룸들이 쭉 늘어선 복도는 어둡고 괴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자,가시죠.”

우리가 탄 차는 30분쯤 달려 어느 한국식당 앞에 멈춰섰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여성이 우리를 맞았다. 발음으로 미루어 볼때 현지인이였다.

“룸 있지?”

“네, 당연히 있지요.”

주인은 시종일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였다. 남사장은 시종일관 반말로 화답했다. 우리는 제일 구석진 방으로 안내되였다.

“아따 시상에 우리 마누라가 한국 포스코 본사에 합격이 됐다네.”

자리에 앉자 마자 남사장은 자기 직원들한테 반말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대화속에서 듣게된 정보에 의하면 남사장은 20살짜리 베트남 여자애와 결혼해 살고있다.

“역시 사모님 능력이 출중하십니다.”

할아버지 직원은 부비부비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있었다. 늙은 쇠가 콩밭으로 간다고 처세술은 나이와 정비례하나보다.

“‘야, 니 어떻게 합격했냐?’ 그랬더니 ‘몰라, 이력서 넣었더니 내일부터 출근하래.’ 그러는거여, 어따 니 장하다이 그렸어”

“그럼요, 그럼요. 포스코 본사는 아무나 못 들어가요.”

할아버지 직원은 20분 가까이 열심히 부비부비를 해댔다.

“아니, 근디 우리 소장님은 왜 아무 말씀이 없어?”

남자는 이번에는 덩치 좋은 사내를 타겟으로 삼았다.

“어이구, 제가 무슨 말을 해요?”

젊은 사내는 그러고 아무말이 없었다. 생긴것과 같이 수더분한 성격이였다.

“아이고, 우리 소장님은 참 여전하셔. 허허”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남자는 꽤나 민망한지 일부러 더 호탕하게 웃었다.

“자, 미스 리라 그랬던가? 드시고 싶은거 다 시키세요. 김소장네 사무실에서 부실하게 드셨을텐디.”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 리가 나한테 많은걸 해줄수록 나도 미스리한테 해줄수 있는게 많아질테고… 능력에 따라서 보너스도 섭섭지 않게 챙겨드릴겁니다.”

“아닙니다. 그냥 제가 할 일을 하는건데요.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으레하는 인사치례로 생각하고 가볍게 받았다.

“아이구, 통역일을 해서 얼마나 법니까? 통역들 다 다른 수입원이 있습니다. 포모사만 뚫으면 앞으로 미스 리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질겁니다. 건당 통역일의 한달치 월급을 드리죠. 어떻습니까?”

“네? 뭘 뚫어요?”

“맨날 이렇게 작은 공사만 해서는 답이 없어요. 지금 포모사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공개입찰 중인데 미스 리가 힘 좀 써줬으면 좋겠어요. 사실 생각하기 나름이예요.”

"…"

“지금 저한테 영업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예. 뭐 이를테면 그렇지요. 어떨땐 가라오케이 한번만에 계약이 성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

“뭐, 손버릇이 안좋은 사람들이 간혹 있긴 한데, 우리 직원인데 제가 당연히 보호해드리죠, 암요. 제가 그 정도는 카바할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 도움만 된다면요.”

‘니가 일을 성사시키면 널 보호해주겠지만 일이 틀어질 경우 니 몸뚱이는 니가 알아서 해’라는 뜻이였다.

나는 그 뒤로 남사장이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좋은데로 모시겠습니다. 오늘 밤 호텔에 묵으시면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남사장이 더욱더 무서운 제안을 해왔다.

“아니요. 남사장님 부탁은 들어드리지 못할것 같습니다. 김차장님한테는 제가 말씀드릴께요.”

나는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김소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이 사태에 대해 정확히 묻고싶었다.

“네….여보세요….여….”

전화기 너머는 무척 시끄러웠다.

“접니다.”

“잠시만요. 지금 회식중이라 잘 안 들립니다. 밖에 나가서 받을게요.”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밖에 나왔습니다. 이제 들리세요?”

“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 남사장이 하는 말들은 또 다 뭐구요? 소장님도 처음부터 다 알고계셨어요?”

“저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는데…제가 아는건 김차장님이 저나 남사장쪽에서 통역을 찾으라고 했고 미스 리가 할일은 주로 우리 두 회사와 김차장님의 포모사 관련 통역업무를 담당하는거였어요. 제가 처음 만났을때 세 회사 일을 하게 될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소장은 난감해했다.

“그랬죠. 근데 이런식이라고 얘기 안했잖아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아침 다 같이 김차장님한테 가서 자세한 얘기를 들어봅시다. 지켜보니까 지금 김과장님이 거의 그쪽 보호자인것 같으니까 내일 다같이 한번 얘기해 봅시다.”

“그럽시다.”

“포모사는 통역 한명이 뚫을수 있는데가 아니예요. 오늘 같이 식사한 회사는 하노이 업체인데 오늘 봤겠지만 싸가지가 없어요. 남사장은 하노이에서 제일 큰 술집 사장이예요.”

“…”

나는 그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나는 아침 6시에 현장으로 출근했다. 어제 봤던 남사장네 직원들이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어우, 저런것들은 능력도 보여주기 전에 돈부터 달래.”

할어버지 직원이 나 들으라는듯 빈정거렸다. 기가 막혔다. 어제의 친절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따지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였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내가 앉았던 자리는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여있었다.

"내 책상 어디 갔어요?"

나는 통역애한테 따져물었다.

"사장님이 저쪽 사무실로 가져가라고 했어요. 진짜 왜 이래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여자는 본인일처럼 꽤나 흥분했다. 하긴 아래사람들이 무슨 죄랴? 나는 곧바로 포스코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김과장님, 한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요. 내가 알아볼게요."

남사장은 이미 사무실에 도착해있었고 구석자리에서 김과장한테 사정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치가 떨렸다. 그러니까 김과장은 포주였던 셈이다. 처음부터 이번 일에 대해 훤히 알고있었고 같은 고향 출신인 어린 여자애를 술집 접대부로 팔아넘기려 했던것이다.

나는 두사람을 뒤로 한채 곧장 담당자한테로 걸어갔다.

“김차장님, 저 도대체 여기 무슨 일 하러 온겁니까? 저는 통역으로 알고왔는데 아닌가요? 왜 제가 접대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이건 처음과 얘기다 다르잖아요?”

“내가 언제 하라고 윽박질렀어요? 하기 싫으면 얘기하라고 했잖아요?!!”

저쪽에서 듣고 있던 남사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아우, 왜 그러세요? 남사장님, 그만 하세요.”

김과장이 교태가 줄줄 흐르는 목소리로 술집 사장을 뜯어말렸다.

“에헤이, 남사장 왜 그래? 조용히 얘기하자구.”

담당자도 말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자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컨테이너의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물를 틀어놓고 한참을 소리내여 울었다.

한참 울고 나오니 통역애가 김차장이 나를 찾고있다고 했다. 회의가 있으니 포스코 사무실로 오라는것이였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이미 한무리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사건 관계자들이 모두 모였다.

김차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스 리, 내가 교통정리 좀 할께. 우리 회사에는 남는 자리가 없어. 그래서 적은 남사장네랑 김소장네 둘 중 한곳에 두고 비용은 각자 반씩 부담하기로 했어. 그런데 남사장이 조금 욕심을 부렸나봐.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됐어.”

이제야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졌다.

똥개마냥 여기저기 끌려다닐때 김과장한테 지금 묵고 있는 호텔에는 빈방이 없냐고 물었을때 그녀가 없다고 했던것도 바로 이런 이때문이였다.

또 한가지는 워킹비자다. 무릇 베트남에서 취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워킹비자를 받아야 한다. 베트남에서 비자를 받으려면 소속된 회사가 있어야 한다. 회사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회사측에서 그 계약서를 들고 해당 기관에 가서 신고하여 워킹비자를 발급 받아야 합법적으로 일하고 거주할수 있는 자격을 얻을수 있다. 나는 한달짜리 여행비자로 베트남에 입국했다. 그러니까 한달안에 워크비자로 전환하지 않으면 나는 불법체류자가 되기전에 자진출국 하거나 감옥에 갇혔다가 강제추방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헌데 무슨 이유때문인지 김소장측에서는 계약서를 쓰자는 얘기도 없고 비자신청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지금 김차장의 말을 종합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한국 기업생태계의 특성상 하청업체가 선부담하는 비용은 매몰비용이 되기 십상이고 원청업체측에서도 이중장부를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 와중에 남사장은 야무진 꿈을 꾸고있었다. 남사장쪽은 공사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에 사실상 통역이 필요없는 상황이였다.
그의 목적은 나의 비용을 반 부담하고 거기다 몇푼 더 얹어서 포모사의 다른 프로젝트를 따내려고 하는것이였다. 그러니까 내가 받는 월급에는 애초부터 ‘접대부’역할도 포함되여 있었던것이다.

“자자…미스 리, 어제 남사장이 한 얘기는 못들은걸로 하고 원래 자기가 하기로 했던 업무만 해.그럼 되지?”

그럴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사이는 틀어졌고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일하는건 불가능해졌다. 

“싫습니다.저는 남사장님 일은 안합니다. 저 그냥 약속한 월급의 반만 받더라도 한쪽일만 하겠습니다.”

“그건 안돼. 미스 리는 원래 애초에 세 회사 일을 하기로 하고 여기 온거야.”

“그럼 저 그만 두겠습니다. 비용 청구하려면 하세요.”

나는 화김에 큰소리쳤다. 이 사람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재수가 없으면 역으로 내가 모든 비용을 토해내고 여차하면 손해배상까지도 당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 맘대로 해!”

김차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저기, 미스 리! 미스 리!"

소장은 나를 뒤쫓아 밖으로 나왔다.

"예순이 넘은 분한테 그렇게 밖에 말 못합니까? 다 큰 어른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할수 있는겁니까?"

적반하장이라더니 소장은 오히려 나한테 따지기 시작했다.

"지금 어른이라 그랬어요? 그럼 다 큰 어른인 당신들은 할일이 없어서 어린 여자애 하나 상대로 사기를 쳤어요? 처음이랑 얘기가 다르잖아요? 벌써 며칠째인데 비자도 안 돼있고 숙소도 몇번을 옮긴겁니까 ?내가 축구공이예요? 미리 결론을 내고 사람을 데려오던가?"

"그래요, 가세요!"

똥 뀐 놈이 성낸다더니 지금 딱 그꼴이다. 나는 그길로 회사를 나와 숙소로 향했다.

하숙집에 돌아오니 주인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차장님이 전화 주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미스 리가 올거라고…”

“네. 저 비행기표 예약해주세요. 내일걸로요.”

“어디 가게요?”

손차장이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은 모양이였다.

“집에 가야죠. 광주행으로 끊어주세요. 저는 베트남어를 모르니까 부탁드립니다.”

사장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손님의 개인사정에 관여하지 않는것은 오래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 익힌 센스일것이다.

나는 테이블에 아무말 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줄수 없어요? 제가 도움을 줄수도 있잖아요.”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슬며시 나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제 다 끝났어요. 후련하긴 하네요. 사흘치 월급을 달라고 하기도 치사하고 그냥 똥 밟았다 치죠 뭐.”

말없이 듣고만 있던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그냥 똥 밟았다 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예요! 미스 리가 업무상으로 뭐 잘못한거 없죠?”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어지럽게 방안을 왔다갔다 하던 사장은 조금은격앙된 목소리로 나한테 물었다.

“네.”

“이건 백프로 회사 책임이예요. 가서 따지세요. 그리고 그 동안 쓴 비용을 돌려달라고 하세요. 바보같이 당하지 말구. 여기 아사리판이예요. 이것 저것 볼거 없어요. 미스 리가 남자면 벌써 가서 드러누웠어요. 여자니까 걔네들이 함부로 하는거예요. 남자면 감히 그런짓은 못해요.”

“아니면 본사 게시판이나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려보세요. 공기업이 이래도 되는거냐구?”

“아니면 요즘 한국 본사에서 높은 분이 감사를 온다는데 협박이나 한번 해볼까요?”

내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던졌다. 저번 일요일에 김과장이 묵는 호텔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정보였다.

“그것도 한 방법이구요.”

사장은 진지하게 받았다.

“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소장한테 카톡을 보냈다.

"월급은 안 받을테니까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쓴 비용과 집으로 돌아갈 비행기값을 주세요."

"왜 아까는 저한테 비용 청구하라더니 갑자기 마음이 바뀌였어요?"

소장이 빈정거렸다.

“생각해보니 제가 잘못한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처음부터 소장님이 사실대로 말해줬으면 저는 여기 오지도 않았죠.”

“…….”

한참동안 답이 없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나는 있는대로 퍼부었다.

“그래도 물장사 하는 양아치랑은 다를줄 알았는데 결국 당신도 똑같이 쓰레기군요.”

“……”

여전히 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김과장한테 톡을 보냈다.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본사에서 VIP가 온다고 했죠? 당신네 회사 사람들이 묵고있는 호텔에 있을테니 거기로 바로 갈까요? 이번에 오는 목적이 감사라고 하셨죠. 내가 가서 모두 꼰질러도 당신들은 아무 문제 없겠죠?”

여전히 답이 없었다.

결국 나는 제일 상식적일것 같은 손차장한테 문자를 보냈다.

“손차장님..”

“지금 회의중입니다.”

짧은 답장이 돌아왔다.

한참 후 손차장한테서 답장이 왔다.

“저희 직원이 지금 거기로 갈겁니다.”

그로부터 10분이 지났을까? 봉고차 한대가 식당앞에 멈춰서더니 소장과 김과장이 차례대로 내렸다.

“김소장이 왔네요. 금자씨를 대동하고서”

사장이 웃으며 소곤거렸다.

“그러게요.”

나도 씁쓸하게 웃었다.

사장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담배 한대를 꺼내 물었다.

두 사람은 나와 한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담판자와 회사측 증인으로.

“결론 났어요?”

내가 먼저 물었다.

“올때 비용 받을래요, 아니면 갈때 비용 받을래요?”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여기 계속 있을거면 올때 티켓값이랑 비자 비용하고 오늘 숙박비까지 저희 회사에서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실거면 제가 티켓을 끊어 드릴께요.”

“왜 반만이예요? 이번 일은 전적으로 회사 책임인데?”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요.”

이 말 역시 거짓이다. 현장 근처에는 은행이 없다. 회사들도 외국인 직원들의 월급은 대부분 현금으로 지급한다. 그래서 외국인 직원들은 1년에 한번 휴가를 나가기전까지 호텔 베트남직원들의 눈을 피해 요량껏 자기 월급을 안전한 곳에 숨겨야 한다. 옷장에 비밀공간을 만들든 24시간동안 몸에 지니고 다니든. 더군다나 소장은 회사의 운영자금을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적어도 몇달치 직원 월급은 수중에 갖고 있을것이다. 나는 회의장소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제안이 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인지 아니면 김과장과 김소장의 합작품인지는 지금까지도 알수 없다. 나는 말없이 소장을 쏘아보았다.

“자자, 서로 절반씩 양보합시다. 자기도 반이라도 받는게 좋지 않겠어?”

침략자보다 앞잡이가 더 나쁘다고 했던가?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올때 쓴 비용 주세요.”

잠깐의 고민끝에 나는 이미 발생한 비용을 돌려받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엔 가족들한테 창피했다. 이왕 온거 호치민이나 하노이쪽에 가서 일자리를 더 알아볼 생각이였다. 하지만 이때 집으로 가는 티켓을 끊어달라고 했었어야 했다.

“언제 귀국할겁니까?”

또 “협박”할까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였다.

“신경 끄세요! 언제 가든 알아서 할께요!”

내가 쏘아붙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자들을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저기요. 우리 애들은 한끼에 3만동짜리 먹어요.”

3만동은 인민페로 9원 정도 되는 돈이다. 하긴 거기에 비하면 한국물가가 적용되는 하숙집에 묵은 나는 ‘초호화’숙식을 제공받은 셈이다. 뭐 결국 내 돈으로 해결한 꼴이 됐지만.

소장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 하자 김과장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 내가 귀국전까지 숙박비를 다 대줄수는 있는데 태도가…”

소장이 나를 쏘아보았다. 나도 피하지 않고 "뭐?"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봤다. 사람이 악에 받치면 눈에 뵈는게 없다.

“됐어 됐어.”

'친절한 금자씨'가 다시 한번 소장을 뜯어말렸다. 

말리는 시누이 보는 기분이 이럴까?

소장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김과장한테 빌붙었다.

“제가 현금이 좀 모자란것 같은데 과장님께서 먼저 빌려주실수 있으시겠어요?”

“얼마나 모자라요?”

정말 환상의 콤비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계산하더니 소장이 나한테 돈을 내밀었다.

“여기에 싸인해.”

이번엔 김과장이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뭡니까?”

종이는 “각서”로 시작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비용을 얼마 돌려 받았고 앞으로 이 일로 문제 삼지 않겠다는 보증서야.”

나는 기가 막혀 한참동안 입을 딱 벌리고 종이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각서에 싸인을 휘갈겨 넣었다 .아까 내가 보낸 문자들이 진짜 ‘협박’으로 받아들여졌나? 뭐가 됐던 효과가 있었으면 그만이다. 까짓거 쓰지 뭐.더이상 이자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해리성기억상실증이라는 정신의학 용어가 있다고 한다. 인간의 뇌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을 의식적으로 차단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날 공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두 사람이 나가면서 뭐라고 말했던것 같은데 말하는 입모양과 두 사람이 일어나서 차까지 걸어가는 장면이 영상으로만 기억날뿐 무슨 말을 했던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떻게 해결됐네요. 제가 끼여드는건 아닌것 같아서 아무말 안했어요. 이거 드실래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장이 나한테로 다가왔다. 어쩌면 내가 반이라도 돌려받을수 있었던것은 이 사람이 때문이였는지도 모른다. 사장은 초코파이 한뭉치를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드세요. 어후, 여기 있으니까 이런게 다 맛있네.”

“아니요. 단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여기서 초코파이 같은 스낵은 귀한 음식 대접을 받는다. 언젠가 회의중에 현장 사람들이 냉동실에서 꺼낸 꽁꽁 언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먹는것을 본적이 있다.

그날 밤, 나는 김과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부질없는 짓인줄 알지만 내가 그만두면 아무 회사나 소개시켜줄수 있고 심지어 포모사도 가능하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당신도 내 또래의 자식을 키우는 엄마로써 어떻게 그럴수 있냐고,지금까지 동포들을 팔아 넘기면서 돈을 벌었냐고 있는대로 퍼부었다.

“아까 손차장님이랑 얘기했어. 왕청애가 차라리 착했다고. 니가 뭐라고 떠들어도 나는 회사사람들한테 신임을 받고 있고 고향에 집을 두채나 샀어. 내가 너를 포모사에 소개시켜 주면 회사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니? 그리구 본사에서 온 분은 회계감사때문에 온거지 너 따위 하나 자르던 말던 신경도 안써. 너한테 돈 안주면 그냥 열흘이고 한달이고 들러 붙을것 같아서 그냥 빨리 주고 치우려고 한거야. 이제 알겠니?”

“……”

여자는 전화기 너머에서 악다구니를 써댔다.

회식때 손차장이 나더러 김과장을 본받으라고 했다.

도대체 뭘?

결국 그녀가 나와 했던 모든 약속은 공수표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하니 나도 참 순진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과장은 동포들이랑 왕래는 커녕 말도 안 섞는다고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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