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현룡운 중국조선어정보학회장

1. 농민의 년봉-공수
 

글/ 현룡운 중국조선어정보학회장
글/ 현룡운 중국조선어정보학회장

1973년도 2월 말부터 나와 같은 졸업 동기들인 새파란 청년 남녀들은 집체호를 구성하고 정식으로 농촌 인민공사 생산소대 사원(社員)으로 되었다. 쉽게 말하면 소위 <하향지식청년>이라는 감투를 쓴 농촌 농민이고 더 나가서 소엉덩이를 두드려야 할 촌민으로 된 것이다.
 
옹근 동네에는 한족이란 한집도 없어 성인들은 한어를 전혀 몰랐고 편지봉투의 한자 주소를 쓸 때마다 지식청년들이랍시고 집체호를 찾아오곤 하는 동네, 세 개 자연툰에 달랑 대대 사무실에 전화 한 대, 그게 유일한 정보망이었던 우리 동네다. 혹간 영화이동봉사대가 와서 영화를 상영할라치면 조선말 <영화해설원>이라는, 기가 막히게 현장 해설을 잘 하는 화술사가 있어 전반 영화의 모든 남녀노소 배우들의 대사를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 우리 조선말로 즉석 배음(配音)해야 만이 영화 내용을 알아보는 조선족 마을이었다.
 
밭갈이철이 오자 도시호구 가족들 집에서는 명절이라야 맛이나 볼까말까 하는 찰떡을 잔뜩 쳐서 밭갈이 소한테 먹이는 것을 처음 보았고 소한테 우철(牛鐵, 편자')을 신기는 것도 처음으로 보았다. 소를 형틀에 묶어 매고 소의 네 발바닥에 철판으로 만든 우철을 박는다. 부림소한테 미끄럼 방지용이자 발바닥 보호용 철판을 대는데 쓰는 쇠못을 우철꼭지라고 불렀다. 소한테 신겨주는 구두 같은 평면철신이다. 촌의 대장간이 손수레 수리와 우철 꼭지를 박고 뽑고 하는 등등 일이 유일한 철공일이었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라서 부림소로 자격을 가지자면 코에 구멍을 뚫고 코뚜레를 꿰야 <코 꿴 쇄지>다. 소의 코를 꿰매고 수레나 발구를 끌기 위한 전 단계 연습으로 송아지의 목을 틔운다면서 발구에 석마 같은 무거운 걸 싣고 연 며칠간 ‘전문 훈련’ 을 받아야 부림소, 일군소로 승급하여 고삐를 끌고 다니게 된다.
 
송아지의 부림소로 승격을 하는 것이나 학생이 청년 농민으로 되는 과정이 똑같은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우리는 송아지가 부림소로 되는 과정처럼 목을 틔우고 코를 꿰거나 손발에 철판은 안 박더라도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야 농군이 될 것이라고 당지 청년 형님들이 충고 삼아 농담조로 “너네도 저 쇄지 (송아지)들처럼 고생 해야지”라고 한다.

당시에는 소가 제1생산력이었기에 "아비 없이는 살아도 소 없이는 못 산다" 하는 시대, 그래서 생산대의 최고건물이 소사양간 우사(牛舍)였다. 전례 없던<문화대혁명>시기인지라 거의 매달 터져 나오는 정치구호와 계급투쟁만 선동하던 여러 매체들의 사설(社论)과 상급 회의 정신이요, 무슨 동원이요 하는 등등 회의가 거의 매일 있던 시절이다. 생산대의 제일 큰 건물인 우사에 붙여지은 회의실이 집합장소이자 활동실이었다. 하루의 고된 전간 노동에 지쳤지만 정치활동에 빠지면 안 되었다.

일에 지친 소들은 우사 양편에 서열대로 줄지어 비스듬히 누워서 그 왕방울 눈을 껌벅거리면서 한가하게 새김질을 하고 한편에서 농군들은 또 정치를 해야 하는 저녁이다. 소들은 정치가 필요 없고 여물만 잘 먹이면 된다. 사람은 정치가 꼭 필요했다.

하향지식청년이 시골 농촌에서 단련을 받으면서 노동도 잘하고 정치활동 에도 적극적이어야 그 표현에 따라 당지 빈하중농 사원들과 간부들의 공동평가와 추천을 받을 수 있고 이 농촌에서 <출세>할 수 있었다.

지루한 회의 후엔 또 <대채평공>라고 하는 노동 공수 평의를 하는 노동 평가 회의가 있었다. 산서성 석양현의 대채 대대의 발명이라 해서 <대채평공>이라 하였는데 우리는 이를 <대개평공>이라 고도 하였다. 얼굴도 붉힐 필요 없이 대충대충 평하자는 뜻이다. 농촌의 생산노동이라는 것은 일 년 내내 거의 한 가지 일로 고정된 작업이란 것이 없었다. 춘하추동에 밭고랑과 씨름하고 자연과의 박투에 고정된 일이라곤 없다만 그러한 여러 종류의 일에 대한 평가만은 꼭 매일 해서 그 공수(工數) 만은 각자 기입해야 한다. 도시 노동자들은 고정된 기술 직종에 따른 고정된 작업 분야가 있는데 이런 면에서 보면 농민들이 노력 현장에 대한 적응력이 공인들보다는 더 높다고 내가 공장 직장생활한 후에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당시에는 "공인계급이 일체를 영도하는 계급"이라고 하였는데….
 
농촌이라 봄부터 또 두엄 모으기 작업, 농토 개량 작업, 한전(旱田)의 조이홰지(홰지-조를 심을 때 땅을 가르는 작업)부터 두 세 벌 기음, 수전은 벼 모내기부터 제초 작업, 돌피 뽑기 작업, 벼가을 걷이, 거기에 또 담배 모내기, 담배 뜯기, 조이 가을걷이, 콩 가을걷이, 원경지 감자농사, 화목(불땜 나무) 하기, 묶걱질하기, 곡식 탈곡하기 등등 4계절마다의 일은 여러 가지로 다른 일이었다. 농부의 일생은 무한이라, 소털같이 많은 날에 일도 많기도 하였다.

연말의 총결 때 일 년 동안 받은 각자의 공수의 합계가 성적표였다. 보통 근면하고 농사일에 미립이 있는 농군의 하루 표준 공수를 10부, 혹은 1공수라고 하였다. 거기에 채 미치지 못한 일군의 보수는 7부, 8부, 9부라고 했는데 우리가 좀 모자라는 사람을 가리켜서 <팔부 같은 자식> 이라거나 <쟤는 팔부여>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 같다. 그때 <꽃 피는 마을>이란 영화에서 한 협동농장에서 일 년에 600공을 벌었다는 뚱뚱한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도 좀 뚱뚱하고 인물이 차하지만 일을 뚝심 있게 하는 여자들을 가리켜 <600공 처녀> 라고 불렀다.
 
땡 볕 쬐이는 삼복더위에도 사래 긴 밭에서 하루 동안 고된 김매기를 하고 서도 또 밭머리에 둘러앉아서 하루 노동 평공을 작업조별로 해야 한다. 노동 태도, 숙련 정도, 적극성 등등을 가지고 서로 평가를 하는데 정말로 골치가 아팠다. 그 평가에 근거하여 본인이 자기 공수는 자기가 기록 했다가 생산대 기공원이라는 <간부>가 따로 있어 매달 기공부를 서로 맞추어서 누락이 없도록 해야 한다. 연말에 가서 생산대 일 년 총수입을 합계한 후, 일 년 내의 전 생산대 남녀노소의 총 공수를 합계하고 나누면 한 공수의 값이다. 분홍(分红)이라는 일 년 분배 잔치 전에 일 년 왕래 명세를 공개해서 공제한다. 되놀이, 개 추렴에서 마셨던 술값도 싹싹 적어야 한다. 그걸 일러 <개고기 문서> 혹은 <도투고기 문서>라고도 했다. 농민들은 일요일이 따로 없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야 자동 휴일이어서 힘들 때면 비가 오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지식청년의 선진 일군 추천표준은 일도 잘해 공수도 잘 벌고 정치활동 에서도 적극적이어야 했었다. 일 년 가서 연말에야 <연봉>형식으로 현금을 받는 시골에서, 공수 종류에는 일공(하루 일 공수), 계건제(計件制) 공수, 탈리 공수 혹은 반 탈리 공수, 출장 공수, 의무노동 공수, 단독작업 공수 등등 여러 가지 명목이 있었다. (탈리-- 집체로동을 떠난다는 말)

청춘시절 6년을 그런 공수 벌이를 하였었다. 야들야들한 잔뼈를 굳히는 작업이었다. 연간 300공내지400공을 벌면 갑급이요, 200~300공은 을급, 100~ 200공이라면 병급으로 된다. 3~4년 정도 농사일을 하고 나중에 겨릿소를 몰고 밭갈이 가대기를 잡고 이랴 하면서 밭갈이나 후치질, 엎어갈이(감자밭 후치질 정도의 일종) 정도는 해야 진짜 농군으로 된 셈이다. 그 정도의 일을 다 할 수 있는 농군은 300~400공을 받을 수 있는 농군 이다. 300~ 40공을 버는 총각들은 장가를 가기 좋은 대상들이었다. 우리 지방의 말로 "명주 바지에 댑싸리" 붙듯이 처녀들의 청혼이 든단다. 그땐 당뇨병이란 용어도 없었고 고혈압이니 저혈압이니 용어도 없었고 심지어 근시안경이나 돋보기를 끼는 노인도 극히 적었다. 한 공수에 따른 가치를 공치라고 하였는데 공치가 높은 생산대나 지역이 잘사는 동네였다. 그때는 공치가 최대의 정치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나는 힘든 일에 청년들 대장 노릇 하다 보니 연간 300공 아래는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식 청년이라서 연애나 약혼은 금지 구역이었다. 지금 같으면 안 그럴 텐데 말이다.


2. 지식청년의 고민
 
그때는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한다 "라는 등등의 정치구호가 항상 귀청을 때릴 정도로 많았는데 처음 농촌에 내려가서 결심 발표도 여러 번 하긴 하였는데, 제일 큰 자아 고민은 "본인은 한평생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을 하겠습니다"라고 지극히 극단적인 선서문을 써서 올려야만 했고 여러 가지 회의에서도 이러루한 태도표시 후 고민이 더욱 깊었다.

한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을 농촌에서 농민으로서 소 궁둥이만 두드려야 한다는 그 정도 결심을 해야 뭔가 진보적인 지식청년으로 낙인이 찍히는데, 한두 해 지나면서 깊은 고민만 고여 가고 있다가 하루는 덕화공사의 당위 김서기(덕화 공사의 최고책임자)가 우리 대대에 시찰차로 왔다가 여관도 없는 동네라 그런대로 잠자리가 편한 우리 집체호에 오셨기에 나의 침실에서 투숙하시게 되었다. 그때 당시의 우리 눈에는 공사 당위서기는 "하늘"같이 높은 존재였다. 매일 이리저리 보내면서 일을 시키는 생산대 대장, 그 위에 대대 주임이나 대대 당서기, 또 그 윗분이 아닌가, 현장 시장 아래가 공사서기이니 말이다.
 
잠자리에 누워서 이러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부친과 친분이 있었기에 용기 내여 벌떡 일어나서 물어본 말이 있다.
"김서기, 농촌에 영원히 뿌리박고 혁명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 같은 적극 분자는 정말 한뉘 농촌에 남아 농사일만 해야 하구 군대도 학교도 공인으로도 못 감둥?"
"오, 네가 그런 게 고민인 모양이구나" 높은 간부라서 인차 내말 뜻을 낌새를 챈 것 같았다.
"야, 그래 농촌에 단련을 내려와서 발전하겠다는 놈들이 그 정도의 결심 발표는 해야 조직에서도 저 놈이 결심이 괜찮다고 인정하고 밀어줄게 아니야. 그게 조직의 의무야, 그렇다고 앞길이 창창한 놈들을 전부 이 농촌에 뿌리박게 하구 어데도 못 가게 하는 정책은 없어. 전쟁판에서도 결사대가 다 죽어버리라는 게 아니고 그런 정신으로 임하라는 뜻이 아니겠어? 다 죽으면 전투는 누가 하구…."
아하, 그런 뜻이었구나, 피 끓어 번지는 내 가슴에 와 닿는 가장 깊은 훈시, 눈앞이 훤해졌고 머리에 부담이 훅 날라 갔다.
 
그 이튿날 아침, 식사 후 어깨를 펴고 김서기를 모시고 대대 전간에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전야를 둘러보시는 김서기가 그렇게 자상하고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개인의 전도와 이상이 당시 정치 풍도에 어울리지 못하고 언행이 불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깊은 우려에 빠진 젊은이의 머릿속 고민을 하루 밤새 대화로 활활 풀어 주었다. 꽉 막힌 장기(象棋)의 수를 신의 한 훈수로 풀어 주듯이 말이다. 그때 그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조언해 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내 인생의 첫 정치적 고민을 풀어준 첫 은인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내가 화룡에서 자동차 정비회사 사장할 때 이미 현급 간부로 계신 그분을 우연한 장소에서 딱 한번 만나 인사드리고 술 한 잔을 올리면서 “김서기, 그때 그 말씀이 정말 고마웠습니다.”하니 “다 정치가 문제야, 펀펀이 공부할 놈들을 시골에 내쫓고, 너도 잘 성장해 줘 고맙다. 이제부터 잘 해봐. 뿌리는 어디에 가도 박고 살아야 산다, 뿌리가 마르면 생물이 죽지. 옳지?” 하면서 내 등을 다독여주시던 하늘나라에 가신 그분이 정말 그립다. 그리고 고마웠던 분이시다. 그때 그 시절 정치적 기후에 정치적인 솔직한 멘토(mentor)가 희소한 세월에 젊은 나한테는 첫 유익한 멘토인 셈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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