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피는 물보다 진해   

 

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옛날 두 형제가 한 집에서 아기자기 잘 살았다한다. 그러다가 두 형제가 남의 사촉을 받아 대판 싸움을 벌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래저래 싸움을 그만 두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이 이어지는 티각태각 반목질시. 그 어떤 다른 원쑤보다도 더 밉게만 보이는 형제 사이, 실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역설적인 논리가 통하는 아이니켈.

  역대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을 괴롭혀 왔다. 특히 현대사에 있어서 36년간 일본 식민지 통치는 우리에게 한이 맺히게 했다. 그래서 일본하면 도리 머리를 흔드는 것이 우리 민족이다. 그래서 일본 미워하기는 남북한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조선․한국을 다녀 보면 일본보다는 우리 서로 상대방을 더 미워하는 그런 어처구니에 빠져 있는 듯하다. 

  조선사람들, 일본이 어떻게 어떻게 잘 살고 미국이 어떻게 어떻게 강국이라 해도 그런데로 수긍한다. 그러나 일단 한국이 어떻게 어떻게 잘 살고 어떻게 어떻게 좋다고 하면 눈을 부라리며 격분에 치가 떨려한다. 그 새끼들 어떻게 괴뢰질을 해서 잘 살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리고는 남조선 특무가 아닌가 해서 이상한 눈길로 여겨본다. 

  한국사람들, 사회주의 중국이 얼마나 배짱 있고 구소련이 우둔한 데로 내미는 데가 있다하면 그런데로 수긍한다. 그러나 일단 조선이 어떻게 어떻게 주체가 서고 어떻게 어떻게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도 감히 맞선다고 하면 쓰거운 웃음을 웃어 버린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지 하고 말이다. 그리고는 북한 특무가 아닌가 해서 이상한 눈길로 여겨본다. 

                                煮豆燃豆箕,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중국 삼국시기 曹植이 콩과 그 콩을 닦는데 사용된 콩깍지의 관계를 통해 형제 相殘을 안타까이 읊은 <七步詩>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장개석이 공산당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며 新四軍을 습격했을 때 周恩來는 민족 相殘을 통분하여 이 시를 끌어 들여 회포를 토로했다. 통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 해외 교포들, 조선․한국의 형제 相殘, 민족 相殘을 볼 때 안타깝다 못해 이젠 답답하다. 
  애매하게도 세계 냉전의 희생품이 되어 허리가 끊긴 것도 서러운데 괜히 남의 장단에 춤추다 보니 형제간에 물고 뜯으며 피를 보고…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거지? 우리는 너무 감정객이었어. 너무 충동적이었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그 역설보다는 이젠 그 진실을 알아야되.

 

 16. 아버지, 어머니 풀이

 

   아버지, 어머니는 누구나 다 잘 아는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제일 처음으로 배우게 되는 말도 아마 이 말일 것이다. 조선에서 이 말은 혈연적인 의미 외에도 새롭게 독특한 의미를 부여받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는 사회언어학적인 재미나는 관심거리의 하나이다. 아버지 원수님, 아버지 장군님 그리고 어머님… 이는 조선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을 가리키고 어머님은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을 가리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 여기서 아버지, 어머니가 일반적인 보통명사이면서 특정적인 고유명사로 둔갑할 수 있는 그 바탕은 무엇인가? 

  김일성은 조선의 시조고 일찍부터 위대한 수령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로부터 오늘날 위대한 영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숙은 공산주의 혁명투사, 항일의 여장군으로서 당당히 조선의 국모가 되기에 손색없다. 조선에서 이들은 이렇게 위대하고 대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치 친어버이처럼 나라살림을 하며 백성들을 돌봐 주었고 돌봐 주고 있다. 이들의 현지지도 걸음은 조선 땅 안 미친 데 없다. 보통 백성의 집에도 자주 들려 밥은 어떻게 먹는지, 옷은 어떻게 입는지 하는 생활세말사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사랑의 손길을 보낸다. 부모 없는 고아들도 일일이 돌보고 아이들을 나라의 왕으로 떠받들었으며 쌍둥이, 삼태자에게는 축하의 선물까지도 보내 준다. 그리고 명절마다 매 조선사람에게 은정어린 선물도 듬뿍 안겨 준다. 조선인민은 이들에게서 근엄한 위대한 수령, 영도자이기 보다는 우선 친아버지, 친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맛보게 된다. 이것은 조선인민이 이들을 아버지, 어머니로 부를 수 있는 가장 진지한 감정적 바탕을 이룬다.

  평안도 말에 비록 혈연적 관계는 없지만 나이 지긋한 남녀를 부를 때 아버지, 어머니라고 곧 잘 한다. 조선에서는 평안도 말이 표준어 맞잡이로 승격하면서 이런 호칭법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게 된 듯하다. 이런 언어적 관습하에서 온 사회가 하나의 혁명적 대가정이라는 분위기와 수령숭배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자기의 수령을 아버지, 국모를 어머님에 비겨 부르며 친밀한 감정을 기탁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君은 父와 같다는 동방예의지국의 유교적인 집단무의식이 그 도를 더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일반적인 의미도 의미겠지만 특정적인 의미로 곧 잘 사람들 입에 오르고 있다.                   


17. 의리의 사나이-김일성

 

   사나이대장부들하면 어쩐지 의리와 갈라놓을 수 없다. 예로부터 사나이대장부들과 의리는 쌍둥이형제처럼 붙어 다니는 법이다. <삼국지>의 도원결의, <수호지> 양산박의 108명 영웅호걸들… 이들은 의리 하나로 뭉쳤고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의리에 울고 웃고한 의리의 사나이들. 큰 일을 하는 사나이들의 의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같다고 해야 할지? 

  김일성, 장장 50년 간 북한 통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진한 발자취를 남겼음. 10대의 어린 나이에 혁명에 참가.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는다고 맹세하고 건넌 압록강. 아버지로부터 권총 두 자루와 더불어 동지확보에 대한 사상도 유산으로 받는다. 김일성 자신의 말대로 혁명은 동지를 얻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승리한다. 김일성 주위에 혁명의 동지들이 모여든다. 김일성은 한별-조선의 별로 추대된다. 김일성은 동지들과 志遠의 뜻을 안고 사향가로 향수를 달래며 만주 벌판 장백산 줄기를 주름 잡아 간악한 일제와 싸웠다. 장장 20년 만에 드디어 개선. 실로 衆志溶鐵. 

  30대 초반의 젊은 개선장군-김일성 장군의 만세소리 더 높은 속에 김일성은 최고의 권좌에 오른다. 그러나 김일성은 일신의 영달에만 도취되어 있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오늘을 있게 한 동지들을 생각했다. 특히 오늘의 이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이미 자기 곁을 떠난 동지들을 생각했다. 그는 자꾸만 이 동지들을 위해 무언가 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제일 처음으로 착수한 일이 만경대혁명가유가족학원(현재의 만경대혁명학원)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국내외 곳곳으로 파견하여 희생된 동지들의 후예를 찾아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만경대혁명가유가족학원에 입학시켜 남부럽잖게 먹여 주고 입혀 주고 공부시켜 주었다. 자기가 그들의 부모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러 왔던 김구가 당시 이 학원을 참관했었다. 학원생들 가운데 응당 자기네들이 돌봐 주어야 할 민족주의 계통 투사들의 후예도 있는 것을 보고는 감개무량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현재도 만경대혁명학원은 여전히 그 창립 당시 김일성주석의 취지를 살려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한 몸을 바쳐 투쟁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의 후예들로 그 주요 학생 내원을 이루고 있다. 오늘 북한 당, 정, 군 권력 핵심부는 이 학원 졸업생들로 충당되고 있다. 이 졸업생들이 정말 말 그대로의 어버이 수령님인 김일성주석 및 더 나아가 김일성주의에 충성과 효성을 다 할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동지에 대한 김일성 주석의 의리에 관한 미담은 이외에도 상당히 많다. 그럼 여기에 그 하나만 더 들어 보도록 하자. 김일성은 살아 생전 희생된 동지들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혁명의 수령으로서 희생된 동지들에게 실로 영생하는 정치적 생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 다망한 사무 속에서도 시간을 내여 자기보다는 항상 혁명동지들의 생전 사적에 대해 고증하고 얘기해 주며 빛내 주었다는 김일성 주석. 평양대성산혁명열사능원도 전적으로 김일성 주석의 발기와 조직에 의해 꾸려졌다 한다. 혁명 동지들을 생전의 모습대로 반신상 동상을 세우고 벼락방지 피뢰침 같은 세세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다 보아주었다는 것이다. 사진 같은 것이 없어 생전의 모습을 잘 고증할 수 없는 혁명동지에 대해서는 자기가 직접 기억을 살리며 형상 도안을 잡아 주거나 연고자를 붙여 주어 동상이 혁명 동지의 생전 모습을 최대한 살리도록 했다. 그리고 대성산을 참비로 훑듯 답사하여 주작봉 마루에 그 터를 잡아 준 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노심초사가 엿보인다. 첫째, 반신상을 주작봉 마루에 세워 주면 오늘의 번영하는 평양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혁명 동지들의 생전의 뜻을 이뤄준다는 것이다. 둘째, 반신상을 주작봉 마루에 세워 주면 자기가 일 보고 있는 금수산궁전에서도 볼 수 있어 마치 혁명 동지들 속에서 일하는 것 같아 더 없이 좋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은 일을 보다가 힘들 때면 대성산 주작봉 마루의 해빛에 반짝이는 혁명 동지들의 동상을 바라보며 새 힘을 얻어 계속 일을 보았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이와 같이 생전 먼저 간 혁명 동지들을 한시도 잊지 못해 실로 품에 꼭 안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 주석 서거후 그의 금고에 남아 있은 것은 거액의 돈이 아니었다. 이것은 한국의 전두환, 노태우 전 두 대통령이 퇴임한 후 산더미처럼 챙긴 무슨 비자금이요 하는 것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김일성 주석의 금고에는 한장의 사진이 소장되어 있었다. 조국 광복 후 김일성 주석 자신과 김책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전이었다. 김책으로 놓고 말하면 김일성 주석 자신의 한쪽 팔이나 다름없이 많은 중책을 떠맡고 활동해 온 동지였다. 김책 자신은 김일성보다 나이가 훨씬 위였으나 나이에 관계없이 김일성을 잘 보좌하고 모셨다. 김일성 자신이 회고록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조선전쟁이 한창인 때 심장 마비로 인한 김책의 돌연한 서거는 그에게 더 할 수 없는 비애를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정국이 안정되자 김일성은 그에게 동상을 세워 주고 김책공업대학, 김책제철소, 김책시와 같은 새로운 명명 제정으로 그에 대한 자기의 영원한 기념을 나타냈다. 김일성에게는 김책 같은 충신들이 많았다. 김일성은 바로 이런 충신들의 士爲知己者死하는 충심에 떠받들려 광복 후 복잡한 정국을 쉽게 풀어 나갈 수 있었다. 

  <동지애의 노래>, 김일성이 생전 제일 좋아했다는 노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야 할 혁명의 길, 혁명 앞에 다진 맹세 변함 없이 끝까지 지키며 꽃필 끈끈한 동지애의 사랑과 동지적 의리를 노래한 <동지애의 노래>, 김일성주석의 심혼이 담긴 노래다. 그래서 조선의 곳곳에서는 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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