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금옥

1952년 12월 중국 화룡시 출생, 현재 천안시 두정동 거주.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1952년 12월 중국 화룡시 출생, 현재 천안시 두정동 거주.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세월의 흐름이 유수와 같다더니 나는 무연고 동포능력시험 추첨에 당첨되어 2010년 10월 20일에 오매에도 그리던 한국땅에 발을 들여 놓은 뒤로부터 벌써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국에 와서 고향 후배의 소개로 명동찜닭집에서 면접에 합격하여 거기서 6개월동안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언니 소개로 3일동안의 간병 실습을 마치고 남양주햇살요양원에서 간병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6인실인데 기저기환자, 치매환자, 화상환자, 거동 못하시는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먼저 손소독을 하고나서 환자들에게 기저귀를 바꿔주고, 변기통을 소독하며, 세수까지 시킨 뒤 방청소를 합니다. 식사시간이 되면 환자들에게 앞치마를 둘러주고 밥상을 올려주고 보호자들이 가져온 반찬을 올려주며 밥을 타다가 나누어 줍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는 먹여줘야 됩니다. 식사가 끝나면 양치를 시키고 재활치료하러 모시고 갑니다. 목욕은 한주일에 한 번씩 합니다. 

간병일 자체가 밤잠 못자고 힘든데 제일 힘든 것은 보호자들 눈총, 간호사들의 따가운 시선입니다. 잘못하면 원부에 고자질하고 간병협회에 고자질해서 자칫하면 짤리게 되는 경우입니다. 말 그대로 창살없는 감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과 한주일 동안에 환자 여섯명이 돌아가셔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내가 직접 시신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 드려야 하고 수의를 갈아 입혀야 해서요. 원래부터 심장이 나빠서 청심환을 먹구서야 시신을 다루었습니다. 그럴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돌아가신 이들이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절로 줄줄 흘렀습니다. 이러는 나를 보고 간호사들도 마음이 착해서 환자들을 너무 잘 보살핀다고 만족한 모습을 지었습니다.   

힘들게 환자들을 돌보면서 문득 내가 쓰러졌을 때 우리 어머니가 나늘 돌보아 주었던 그때가 주마등마냥 떠올랐습니다.

20년전 나는 파상풍에 걸렸었는데 너무 위급해서 연변병원에 입웠했어요. 집에는 출근하는 남편과 소학교 다니는 애들 둘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애들과 가정생계때문에 출근을 해야 되서 70세 고령인 친정어머니가 나의 간호를 맡게 되였습니다. 의식불명인 나의 대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시켜주며, 미음이나 약도 다 갈아서 한술한술 입안에 떠넣어야 했습니다.

매일 손발을 주물러 주었고 걸을 수 있게 손잡고 한발짝한발짝 걷는 연습도 시켰습니다. 말 할 수 없어서 아, 아… 소리부터 시작해서 악착스레 연습한 결과 한달만에 또박또박 말 할 수 있었고, 걸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퇴원 후에도 내 병에 효과가 좋다는 차입쌀구이랑 소고기국을 만들어서 나 혼자에게만 먹였고, 어머니는 국물만 드셨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가 있었기에 두달만에 퇴원할 수 있었으며 또 오늘의 내가 있었으며 대학생 아들과 석사 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를 놓고 말하자면 집안에 맡며느리로 들어와서 자식 7남매를 키워냈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상황에서 시동생들까지 장가 보냈으니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자기 자식이라면 끔찍이도 도와주시던 어머니는 큰오빠네 집에서 같이 살면서 손주들도 너무 잘 보셨습니다. 이제 자식들이 모두 어머니에게 효도하려니까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그때 나는 남편과 애들때문에 그냥 어머니 얼굴만 보고 집에 왔어요. 대신 언니가 어머니를 극성스레 보살펴 드렸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불과 한 달이 지나서 유언 한마디 없이 조용히 저세상으로 가셨어요. 이제와서 아무리 땅을 치며 울고 후회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식들에게서 효도라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겁니다. 맛난 음식도 사드리고 싶고, 좋은 옷도 사드리고 싶으며, 어머니 팔짱을 끼고 같이 산책도 하고 싶은데 우리 어머니는 기다려주지 않고 멀리멀리 가셨습니다. 마음 착하고 인정 많은 우리 어머니, 그 누구 하나 나쁘다고 하는 사람 없었고 존경받고 살아오시던 어머니였습니다.  

요즘도 간병일을 하다나면 어머니 얼굴을 자주 떠올리면서 어머니한테 하지 못한 효도를 어르신들한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날때마다 어머니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 내가 지금 잘 하고 있지요?'하고 속삭입니다.

어머니, 너무 보고싶어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계시면서 이 못난 딸을 지켜봐주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2020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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