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배문상 사장이 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자서전을 연재한다. 부모님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줄곧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걸어온 배사장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엮어졌다. 많은 애독 바란다. -편집자-

글/ 배문상 사장

16. 조선족에 대한 개인 생각

 

배문상 사장
배문상 사장

90년대 초반까지 개방되지 않았던 중국은 한국인에게 매우 신비롭고 큰 나라였다.  중국의 청심환과 한약재들이 매우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있어서 중풍을 앓으셨던 아버지를 위해 명동의 중국대사관 앞을 찾아다니며 사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홍콩 영화의 흥행으로 배우들이 한국에 초대되어 광고를 촬영하였고, 영화에서 보게 된 중국의 모습은 웅장하고 아름다웠으며 신비로웠다. 

  그러나 중국이 개방되고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다니면서 낙후된 모습들을 비하(卑下)하는 말들이 전해지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동남아 국가들과 함께 중국인과 중국 교포들을 무시하게 되었으며, 왜곡된 문화와 행동을 주제로 한 드라마, 영화들이 그 편견(偏見)을 부추기고 가중(加重)시켰다.

  한국의 경제가 좋지 못했던 시절, 한국인들이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한국인들은 백인들에게 유색인종이라며 흑인들과 함께 무시당했기 때문에 변두리 지역에서 흑인들에게 물건을 팔아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은 백인들에게 겪었던 차별과 수모를 흑인들을 무시하며 똑같이 행동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바나나’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겉모습은 노란 황인종(黃人種)인데 속은 백인들처럼 생각하면서 흑인들을 무시한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그래서 사회의 불만을 가진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면 한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은 흑인들의 표적이 되어 약탈을 당했다. 

  지금도 한국인들이 이러한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한국이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여 동남아 국가와 중국을 무시하는 행동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을 강제로 지배하고 약탈하며 괴롭혔던 원수의 나라 일본에게는 한국보다 경제가 부강(富強)하다는 이유로 친절을 베풀고 있는 모순적(矛盾的)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일본과 관계가 좋지 못하지만 일본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동경(憧憬)하는 한국인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조선족은 한국과 동일한 민족(民族)임에도 불구하고 북한(북조선)에게는 민족이라는 말을 쓰고 반기면서도 조선족에게는 편견을 가지고 무조건 멸시(蔑視)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TV에서도 북한을 소재로 하는 방송은 있으나 조선족을 소재로 하는 방송은 전혀 없으며, 외국인을 소개하는 방송에서도 중국, 베트남, 러시아 등 모든 나라의 외국인이 출연하지만 조선족이 출연하는 방송은 없다.  조선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중국인 취급을 하고 있으나 중국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고, 중국 교포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한국인 또는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북한을 소재로 하는 방송에서는 한국어와 전혀 다른 뜻이 다르거나 생소(生疏)한 북한 말을 소개하고 있고, 이것을 본 사람들은 이것을 신기해하면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이 한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을 하고 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투가 어눌하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구박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유학이나 이민으로 외국생활을 하게 되면 한국말이 서툴어지거나 한국말을 전혀 못하면서 조선족의 말과 행동을 멸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語不成說) 같은 일이다.

  조선족이 사용하는 언어가 한국어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중국 한족(漢族)이 통치하고 있는 공산국가의 외부와 단절된 환경 속에서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잃지 않고 수십 년 동안 지켜 왔다는 것은 정말 대견하게 생각해야하고 찬사를 보내야 할 일이 분명하다.

  일본이 조선에게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펴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제하여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고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는 탄압(彈壓)을 하였지만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싸워온 결과로 조선이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이루게 되었으나 중국의 만주족(滿洲族)은 만주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한족에게 융화(融化)되어 동화(同化)되고 말았다. 

  나도 식당을 창업하면서 조선족을 처음 만나게 되면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자애로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녀가 성장해야 부모가 되어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민족의 언어, 사상, 문화가 계승(繼承)되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족의 현실이 그렇지 못한 상황이 대부분인 관계로 그것이 단절(斷折)될 것 같은 예감(豫感)이 들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도로 표지판이나 안내문들이 앞으로는 한글을 사용하지 않고 한자로 바뀐다고 예고하고 있고, 한족들이 모든 상권을 장악하여 중국어를 모르면 물건도 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 중국의 정책을 거스를 수 없으므로 어쩔수 없이 동화되어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은 인구가 적고 인구감소가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외국인과의 결혼을 권장하며 다문화 정책을 펴고 있다.

이에, 국기에 대한 맹세도 다문화에 대한 차별이라며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를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변경하며 ‘민족’이라는 단어를 삭제하였다.

  글로벌 시대에 국제결혼을 규제할 방법은 없지만 같은 민족을 배척하면서 전혀 다른 민족을 융화시키려는 정책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조선족도 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족에게만 특별한 대우를 한다면 형평성(衡平性)에 어긋난 일이지만 한국인과 같은 민족인 조선족을 배척하거나 이질감(異質感)을 일으키는 무분별한 대중매체(방송, 드라마, 영화 등)의 규제가 필요하고, 한국인과 조선족을 융화시키기 위한 인식개선의 홍보와 교육 및 대중매체의 활동을 권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국이 발전할 수 있다고 사료(思料) 된다. 

  첫째, 한국은 조선족에게 고향, 박물관, 민속촌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중국의 민족통합정책을 펴더라도 한국이 ‘민족의 나라’, ‘고향의 나라’로 건전하게 존재하고 있어야 조선족이 한족에게 완전히 동화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조선족에게 한국의 문화를 전파하고 계승해야 할 의무가 있다. 

  둘째, 한국의 인구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한국이 조선족을 우대하고 포용만 해도 200만명의 민족과 인구증대 효과가 발생한다.  조선족과 한국인의 결혼이 활성화 된다면 민족을 유지하면서 인구문제를 해결하는 고무적(鼓舞的)인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첫째에서 언급(言及)하였듯, 한국이 무분별한 다문화 정책으로 민족의 의미가 사라진다면 같은 민족인 조선족을 잃게 되는 결과를 만들게 될 것이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하는 시간과 비용보다 같은 문화를 가진 민족을 유지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일 것이다. 

  셋째, 한국은 조선족을 우대하는 만큼 발전할 것이다. 
한국이 조선족을 반기고 조선족이 한국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만큼 조선족의 활동이 활발하여 경제적 교류와 내수경제(內需經濟)가 유지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조선족이 모두 중국으로 귀향을 한다면 한국은 코로나 사태보다 더 큰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될 것이 분명하다. 

  넷째, 조선족은 한국에게 매우 유리한 외교 협상 카드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좋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한국에 조선족이 생활하고 있고, 교류가 매우 활발하다면 한국은 조선족을 이유로 인도적(人道的)인 협상과 관계유지를 제시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돈독하다면 한국이 미국을 견제(牽制) 시킬 수 있으며,  중국을 의지하고 있는 북한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한국에게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조선족을 동화시켜야 인구, 경제, 외교 문제를 해결하거나 유지 할 수 있고, 부수적(附隨的)으로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민족을 보유할 수 있다.

  개인적인 나의 생각이 현실과 다를 수는 있으나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다면 그렇게 되도록 한국이 조선족과의 유대강화에 노력하고 한국인 스스로도 자각(自覺)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17. 결어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교수님 존함은 ‘상문’이었고, 내 이름은 ‘문상’이라서 친구들이 헛갈려서 반대로 부르거나 보고서에도 교수님의 존함을 틀리게 쓰는 친구들이 많았다. 

  교수님의 존함은 한자로 ‘商文‘이셨다.  ’그래서 교수님이 되셨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이름은 한자로 ’文祥‘인데 공부도 잘 하지 못했고, 책을 읽는 것도 싫어했고, 글짓기는 더더욱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이름과 현실은 반대인 경우도 있구나‘ 생각했다.  교수님처럼 상문(祥文)으로 이름을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문상(問喪)만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그 실력으로 항고장을 작성해서 피해아동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있다는 것이 참 모순적인 것 같고, 이런 형편없는 글을 남에게 보여주자니 망설여진다.

  해 마다 있었던 굵은 일들을 회상하고 글을 쓰면서 뒤를 돌아보니 내 발자국이 너무 어지러워 더 열심히 복되게 잘 살았더라면 이라는 후회가 생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반성을 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바보 같은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나온 내 삶이 결코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 바보 같은 삶을 후회하지 않으며, 그 삶은 앞으로의 내 삶의 기본이 되어 또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갈 것이다.

격동의 시대를 지내온 부모님의 기막힌 사연들을 나열하자면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부모님 생전의 가르침과 상속받은 인생의 교훈처럼
나의 남은 인생은 남에게 더 의미 있고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 소중한 기회를 주신 이동렬 대표님과 김경애 공동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0.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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