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가인(상해)

   비가 내린다. 바람이 부는지 빗방울이 창문 유리에 부딪치는 소리가 방안 깊숙한 곳까지 들린다. 애란은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천둥 우레가 쾅 하며 폭우가 쏟아져도 한번 잠들면 잠에서 절대 깨지 않는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경이 부쩍 예민해졌다.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자 비가 유리에 부딪치는 것이 금방 유리를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애란은 흠칫하며 침대 쪽을 돌아다보았다. 남편 김용은 여전히 어젯밤 반듯이 누운 그 자세다. 기럭지가 침대 길이를 다 차지했다. 여명 전이여서 아직 어둑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 보였다.

삼 년 전 애란은 룸 메이터한테 끌려 다과회에 갔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모임인데 입장료가 1500백 원이다. 월급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해서 애란은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A 양은 벌써 여러 번 갔다고 하면서 꼭 같이 가자고 졸랐다. 애란은 마지못해 한 번만 간다고 약속하고서 1500백 원을 친구에게 건넸다. 다과회는 인민광장 부근에 있는 금문 호텔 연회홀에서 거행했다. 다과회를 거행하는 곳은 시 중심이었지만 그들이 사는 곳이 서북쪽 보산구여서 지하철을 두 번갈아 타고 가다 보니 개회 직전에 연회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정장을 입은 젊은 청년들과 예쁜 옷을 차려입은 처자들이 무대 쪽을 향하여 서 있었다.“늦지 않았네”A 양이 혀를 홀랑 내밀며 중얼거렸다.

주최 측에서 오늘의 행사 내용을 선포하자 조용하던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A 양은 애란을 데리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무대 쪽으로 다가갔다. 어리둥절한 애란과 달리 A 양은 노련했다. A 양은 몇 번 왔지만 아직 마음에 드는 청년을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 두 번째 절목은 장기 자랑이다. 노래하는 사람 악기를 다르는 사람 마술 부리는 사람 시를 읊는 사람으로 연회장은 완전히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중 독창을 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유명 가수 리건이 부르는 것 같다. 요란한 박수갈채와 함께 재창을 요구하자 청년은 무반주 노래를 한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한국 노래다. “저 사람 한국 사람이니?” 애란은 깜짝 놀라며 A 양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그런데 한국인은 아닐 거야, 이곳에는 외국인은 허락이 안되거든”, "중국 사람이면 발음을 저렇게 정확히 할 수 없어”,"그럼 무대 내려오면 가서 물어보려무나”,"글쎄…그래도 괜찮을까?”,"혹시 조선족일 수도 있겠네. 넌 저런 스타일이 좋니? 인물은 괜찮은데 키만 멋대가리 없이 큰 게 너무 약골이야. 나는 건장하고 나를 꼭 끌어안아줘도 넉넉하고 따뜻한 가슴이 넓은 남자가 좋아,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지 않니? 여기는 마마보이 천지야”

A 양은 말해놓고 제풀에 새물새물 웃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애란은 한국 노래를 부르는 청년한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모호한 대답을 했다.마지막 절목은 왈츠를 추고 다음기를 예약하면서 끝낸다. A 양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마음에 드는 건장한 청년을 찾았나 보다. 춤출 자리를 비워야 하기에 모두 연회장 벽 쪽 둘레로 물러났다. 음악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청년과 처녀들은 파트너를 고르려고 살핀다. 노래와 춤의 고향 연변에서 왔지만 애란은 춤에는 약했다. 애란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서 사람들 뒤에 숨었다. 음악이 울리자 청춘 남녀들이 쌍쌍이 빈 공간으로 나간다. 애란은 두리번거리며 A 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구경이나 하다가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저의 파트너가 돼 주시겠습니까?.”,"네”얼떨결에 대답하고 바라보니 아까 한국 노래하던 청년이다. 그들은 원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한 곡이 끝나고 원 밖으로  나올 때 애란은 조심히 물었다. "혹시 조선족인가요?” "네…”청년은 조금 놀란 듯 조선어를 구사하는 애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음 곡이 울렸으나 그들은 조용한 곳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 신기했다. 상해 호구가 있는 상해 사람이다. 그리고 조선족이다. 애란은 이 남자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김용이란 이 청년은 연인이 있다고 한다. 대학 때 사귄 여자친구는 한족이고 지금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는 중이고 김용도 가려고 생각 중이라고 한다. 아무튼 결혼을 안 했으니 희망은 있다. 애란은 휴대폰 번호를 애써 얻어가지고 A 양도 찾지 않고 부리나케 손바닥만 한 홈으로 돌아왔다. 룸 메이터 A 양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애란은 침대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미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다. 몇 달 남지 않은 이해도 지나면 스물일곱이다. 엄마는 일주일이 멀다 하게 전화가 온다. 연길에 돌아와 선을 보고 결혼하라고 재촉한다. “너 어쩌려고그러니?” “연길에는 안 돌아가요.”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상해는 물가도 비싸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야”“그럼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요.”애란은 참다못해 대답을 했다."인물이 남보다 못하니 아니면 키가 작니? 너 정도면 이곳에서 괜찮은 상대를 고를 수 있어, 아직 안 늦었으니 이번 구정에는 돌아올 거지?”애란은 재촉하는 엄마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밤늦게 퇴근하고 썰렁한 집에 들어설 때는 가끔 엄마가 있는 넓은 집과 따뜻한 밥과 된장국이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이면 활기찬 대도시의 생활이 다시 애란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침대에 꼼짝 않고 몇 시간 앉아있던 애란은 서 시장에서 최고로 장아찌를 맛있게 하는 집에서 깻잎이며 김치며 여러 가지를 인터넷으로 잔뜩 주문하였다. 일요일 새벽에 주문했는데 화요일 오전에 도착했다. 애란은 직장 상사에게 사흘 휴가를 맡았다. 마트에 가서 제일 좋아 보이는 유리 옹기 몇 개를 샀다. 집에 돌아와 유리 옹기에 깻잎이며 총각김치를 차례차례 담았다. 김용이 퇴근할 시간을 기다려 전화를 하였다.”안녕하세요. 김용인가요. 저 애란이에요."애란은 일부러 성을 빼놓고 부드럽게 말했다. 친근함이 더해질 것 같았다.“?”“지난 토요일 저녁 다과회에서 만났던 애란이에요.”“아…밖에서 갑자기 조선어를 들으니 생소해서요.”“모국어 잘하시네요.”“조금 합니다.”“저의 어머니가 장아찌를 보내왔는데 너무 많이 보내왔어요. 혹시 집에 식구가 많으면 같이 나누어 먹었으면 해서요.”“어머님께서 힘들게 만든 것을 남이 어떻게…….” “괜찮아요. 혼자 먹기는 너무 많아서요. 그리고 오래 놔두면 냉장고라도 변해 버리거든요.”“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제가 지금 밖이어서요.”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노랫소리도 들린다. 애란은 김용의 말을 듣자 김이 빠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애란이가 아니다.“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몇 시까지 가면 되죠?” “동아리 모임에 왔는데 몇 시가 될지 잘 모르겠어요.”“주소 찍어주세요”잠시 정적이 흘렀다.“이렇게 하시죠. 제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저의 집으로 택배로 부치십시오. 택배비는 받는 사람이 지불하는 것으로 하면 됩니다.”“네. 알겠어요. 바쁘신데 지장을 줬네요.”애란은 속이 무척 상했지만 김용의 집 주소를 알아낸 게 오늘은 큰 성과라고 생각했다.

이틀 후,“리애란씨 휴대폰 맞나요.”“네”“장아찌 잘 받았어요. 너무 맛있었어요. 예쁜 편지도 그렇고… 글씨가 너무 이쁘네요.”듣기 좋은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김용 어머니였다. 하루 전에 조선 문자로 짧게 몇 줄을 파란 편지지에 써서 봉투에 넣어 박스에 같이 담아 보낸 것이 대 성공이다.“혹시 토요일에 중요한 일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식사같이 하는 게 어떠세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애란은 심장이 밖으로 튀여 나올 것 깉았다.“그래도 될까요”“오랜만에 조선말 하는 분을 보니 반가워서 그래요.”“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애란은 얌전히 대답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애란은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이제부터 뭐 해야 하지…. 남경서로에 있는 백화점들의 옷은 너무 비싸고 남경 동로에 있는 백화점들의 옷은 잘만 고르면 괜찮을 거야……. 애란은 토요일에 입고 갈 옷을 사려고 남경 동로에 있는 백화점들을 반나절이나 들락날락했다. 김용의 집은 2호선 뚱창루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꼭대기 층에 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애란은 눈이 커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복층인데 일층의 탁 트인 거실 창문으로 황포강에 떠있는 유람선이 보였다. 한 폭의 그림이다. 거실 벽에 황금빛이 유유히 뿜어 나오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화 한 폭이 걸려 있다. 김용은 외동아들이고 어머니는 퇴직한지 얼마 안 되고 아버지는 작은 금융회사를 운영한다고 한다.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김용의 할머니다. 할머니는 몹시 친절했다. 평안도 말씨여서 좀 투박한 느낌은 있었지만 잘 다듬은 머리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는 많이 보아온 할머니들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다. 할머니는 애란의 손을 꼭 잡고 돌아갈 때까지 놓지 않았다. 다음 주 또 온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잡은 손을 놓아 주었다. 애란은 매주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찾아갔다. 김용의 부모는 같은 동포라고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게 애란을 대해주었다. 그뿐이었다. 며느릿감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 때문에 참고 있는듯했다. 분위기가 이제는 그만 왔으면 하는 눈치다. 그다음 주에 갔을 때는 두 분이 계시지 않았다.김용은 할 말만 하고 예의 바르고 군더더기가 없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아홉시에 출근해서 다섯시에 퇴근하는 공무원이다. 취미라면 거실과 식당 사이를 절반이나 차지한 대형 어항에 열대 물고기를 기르는 취미와 성악 동아리에 다니는 것이다. 애란은 그런 김용이 부러우면서 시기가 났다. 세상은 너무 공평하지 않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누구는 죽자고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는데, 만약 같은 직장인을 만나 결혼해도 평생 벌어서 상해에서 집을 사고 자식을 공부시키는 일은 먼 나라 일로만 생각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애란은 만약 김용을 쟁취하지 못하면 연길로 돌아가려고 생각하였다. 지금에야 비로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급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비슷한 직장인들끼리 세월을 보내다 보니 사람은 다 그렇고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 말라는 속담이 거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골똘히 생각하다가 지하철을 갈아타는 역을 지나쳤다.날이 갈수록 김용의 할머니는 애란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김용은 끝내 상해를 떠나지 못했다. 할머니의 주선으로 일 년 후 애란과 김용은 결혼하였다. 김용의 부모는 아들이 외국 유학을 한번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김용은 가려고 하였으면 몇 년 전에 갔을 거라고 하였다. 혹시 애란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옛 연인을 따라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용은 천성이 느긋하고 욕심이 없다 보니 자신은 공무원이 적성에 맞는다고 하였다. 사람마다 타고난 복은 따로 있는 거라고 애란은 생각했다.

애란은 창가를 떠나 남편 옆에 가 누웠다. 평온해 보이는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애란은 긴 한숨을 내쉬였다.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심인가 보다. 이 사람에게 시집 오려고 온갖 짓을 다했다. 이 사람보다 이 집이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복층인데 삼백 평방미터에 가깝다.한 달 전에 회사 부근의 부동산에 가서 이곳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았다. 이곳의 아파트 시세는 평방 미터당 20만 원이다. 너무도 놀라서 갑자기 딸꾹질이 올라왔다. 부동산 직원이 종이컵으로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가져다주었다. A 양은 쩍하면 애란이를 보고 부잣집에 시집가는 게 꿈이라더니 꿈을 실현했다고 애란이가 같이 안 놀아 줄 때는 비양거렸다.“부자는 무슨 개떡같은 부자니?”애란이는 괜히 짜증이 나서 A 양에게 눈을 흘겼다. 직장에 다니면서 매일 할머니 비유 맞추랴, 시부모 눈치 보려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애란은 남편과 영화 보러 갔다 오다가 따로 나가 살면 어떠냐고 슬며시 물었다. 김용은 그를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이 집이 불편하오?”“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팔자 좋은 남편은 취미생활 외에는 모든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애란은 방한 칸이 있는 낡은 집이라도 단둘이 사는 게 지금의 심정이다. 할머니는 은근히 증손자를 기다리는 눈치다. 그런데 남편은 별로 조급해 하지 않는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유화를 매일 지나다니며 수없이 보면서 어떤 날은 잠시 서서 감상하곤 했다. 황금나무 아래에는 나무 우를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사슴 한 마리가 있다. 풀을 뜯어 먹어야 하는 사슴이 먹을 수도 없는 황금이 달린 나무를 왜 올려다보는지 알 수 없다.

애란은 날이 갈수록 여위여 갔다.

비가 내린다. 바람이 부는지 빗방울이 창문 유리에 부딪치는 소리가 방안 깊숙한 곳까지 들린다. 애란은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천둥 우레가 쾅 하며 폭우가 쏟아져도 한번 잠들면 잠에서 절대 깨지 않는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경이 부쩍 예민해졌다.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자 비가 유리에 부딪치는 것이 금방 유리를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애란은 흠칫하며 침대 쪽을 돌아다보았다. 남편 김용은 여전히 어젯밤 반듯이 누운 그 자세다. 기럭지가 침대 길이를 다 차지했다. 여명 전이여서 아직 어둑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 보였다.

삼 년 전 애란은 룸 메이터한테 끌려 다과회에 갔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모임인데 입장료가 1500백 원이다. 월급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해서 애란은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A 양은 벌써 여러 번 갔다고 하면서 꼭 같이 가자고 졸랐다. 애란은 마지못해 한 번만 간다고 약속하고서 1500백 원을 친구에게 건넸다. 다과회는 인민광장 부근에 있는 금문 호텔 연회홀에서 거행했다. 다과회를 거행하는 곳은 시 중심이었지만 그들이 사는 곳이 서북쪽 보산구여서 지하철을 두 번갈아 타고 가다 보니 개회 직전에 연회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정장을 입은 젊은 청년들과 예쁜 옷을 차려입은 처자들이 무대 쪽을 향하여 서 있었다.“늦지 않았네”A 양이 혀를 홀랑 내밀며 중얼거렸다.

주최 측에서 오늘의 행사 내용을 선포하자 조용하던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A 양은 애란을 데리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무대 쪽으로 다가갔다. 어리둥절한 애란과 달리 A 양은 노련했다. A 양은 몇 번 왔지만 아직 마음에 드는 청년을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 두 번째 절목은 장기 자랑이다. 노래하는 사람 악기를 다르는 사람 마술 부리는 사람 시를 읊는 사람으로 연회장은 완전히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중 독창을 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유명 가수 리건이 부르는 것 같다. 요란한 박수갈채와 함께 재창을 요구하자 청년은 무반주 노래를 한다.“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한국 노래다.“저 사람 한국 사람이니?”애란은 깜짝 놀라며 A 양에게 물었다.“모르겠어, 그런데 한국인은 아닐 거야, 이곳에는 외국인은 허락이 안되거든”"중국 사람이면 발음을 저렇게 정확히 할 수 없어”"그럼 무대 내려오면 가서 물어보려무나”"글쎄…그래도 괜찮을까?”"혹시 조선족일 수도 있겠네. 넌 저런 스타일이 좋니? 인물은 괜찮은데 키만 멋대가리 없이 큰 게 너무 약골이야. 나는 건장하고 나를 꼭 끌어안아줘도 넉넉하고 따뜻한 가슴이 넓은 남자가 좋아,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지 않니? 여기는 마마보이 천지야”A 양은 말해놓고 제풀에 새물새물 웃었다."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애란은 한국 노래를 부르는 청년한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모호한 대답을 했다.마지막 절목은 왈츠를 추고 다음기를 예약하면서 끝낸다. A 양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마음에 드는 건장한 청년을 찾았나 보다. 춤출 자리를 비워야 하기에 모두 연회장 벽 쪽 둘레로 물러났다. 음악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청년과 처녀들은 파트너를 고르려고 살핀다. 노래와 춤의 고향 연변에서 왔지만 애란은 춤에는 약했다. 애란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서 사람들 뒤에 숨었다. 음악이 울리자 청춘 남녀들이 쌍쌍이 빈 공간으로 나간다. 애란은 두리번거리며 A 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구경이나 하다가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저의 파트너가 돼 주시겠습니까?.”"네”얼떨결에 대답하고 바라보니 아까 한국 노래하던 청년이다. 그들은 원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한 곡이 끝나고 원 밖으로  나올 때 애란은 조심히 물었다."혹시 조선족인가요?”"네…”청년은 조금 놀란 듯 조선어를 구사하는 애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음 곡이 울렸으나 그들은 조용한 곳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 신기했다. 상해 호구가 있는 상해 사람이다. 그리고 조선족이다. 애란은 이 남자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김용이란 이 청년은 연인이 있다고 한다. 대학 때 사귄 여자친구는 한족이고 지금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는 중이고 김용도 가려고 생각 중이라고 한다. 아무튼 결혼을 안 했으니 희망은 있다. 애란은 휴대폰 번호를 애써 얻어가지고 A 양도 찾지 않고 부리나케 손바닥만 한 홈으로 돌아왔다. 룸 메이터 A 양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애란은 침대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미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다. 몇 달 남지 않은 이해도 지나면 스물일곱이다. 엄마는 일주일이 멀다 하게 전화가 온다. 연길에 돌아와 선을 보고 결혼하라고 재촉한다.“너 어쩌려고그러니?”“연길에는 안 돌아가요.”“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상해는 물가도 비싸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야”“그럼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요.”애란은 참다못해 대답을 했다."인물이 남보다 못하니 아니면 키가 작니? 너 정도면 이곳에서 괜찮은 상대를 고를 수 있어, 아직 안 늦었으니 이번 구정에는 돌아올 거지?”애란은 재촉하는 엄마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밤늦게 퇴근하고 썰렁한 집에 들어설 때는 가끔 엄마가 있는 넓은 집과 따뜻한 밥과 된장국이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이면 활기찬 대도시의 생활이 다시 애란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침대에 꼼짝 않고 몇 시간 앉아있던 애란은 서 시장에서 최고로 장아찌를 맛있게 하는 집에서 깻잎이며 김치며 여러 가지를 인터넷으로 잔뜩 주문하였다. 일요일 새벽에 주문했는데 화요일 오전에 도착했다. 애란은 직장 상사에게 사흘 휴가를 맡았다. 마트에 가서 제일 좋아 보이는 유리 옹기 몇 개를 샀다. 집에 돌아와 유리 옹기에 깻잎이며 총각김치를 차례차례 담았다. 김용이 퇴근할 시간을 기다려 전화를 하였다.”안녕하세요. 김용인가요. 저 애란이에요."애란은 일부러 성을 빼놓고 부드럽게 말했다. 친근함이 더해질 것 같았다.“?”“지난 토요일 저녁 다과회에서 만났던 애란이에요.”“아…밖에서 갑자기 조선어를 들으니 생소해서요.”“모국어 잘하시네요.”“조금 합니다.”“저의 어머니가 장아찌를 보내왔는데 너무 많이 보내왔어요. 혹시 집에 식구가 많으면 같이 나누어 먹었으면 해서요.”“어머님께서 힘들게 만든 것을 남이 어떻게…….” “괜찮아요. 혼자 먹기는 너무 많아서요. 그리고 오래 놔두면 냉장고라도 변해 버리거든요.”“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제가 지금 밖이어서요.”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노랫소리도 들린다. 애란은 김용의 말을 듣자 김이 빠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애란이가 아니다.“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몇 시까지 가면 되죠?” “동아리 모임에 왔는데 몇 시가 될지 잘 모르겠어요.”“주소 찍어주세요”잠시 정적이 흘렀다.“이렇게 하시죠. 제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저의 집으로 택배로 부치십시오. 택배비는 받는 사람이 지불하는 것으로 하면 됩니다.”“네. 알겠어요. 바쁘신데 지장을 줬네요.”애란은 속이 무척 상했지만 김용의 집 주소를 알아낸 게 오늘은 큰 성과라고 생각했다.

이틀 후,“리애란씨 휴대폰 맞나요.”“네”“장아찌 잘 받았어요. 너무 맛있었어요. 예쁜 편지도 그렇고… 글씨가 너무 이쁘네요.”듣기 좋은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김용 어머니였다. 하루 전에 조선 문자로 짧게 몇 줄을 파란 편지지에 써서 봉투에 넣어 박스에 같이 담아 보낸 것이 대 성공이다.“혹시 토요일에 중요한 일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식사같이 하는 게 어떠세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애란은 심장이 밖으로 튀여 나올 것 깉았다.“그래도 될까요”“오랜만에 조선말 하는 분을 보니 반가워서 그래요.”“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애란은 얌전히 대답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애란은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이제부터 뭐 해야 하지…. 남경서로에 있는 백화점들의 옷은 너무 비싸고 남경 동로에 있는 백화점들의 옷은 잘만 고르면 괜찮을 거야……. 애란은 토요일에 입고 갈 옷을 사려고 남경 동로에 있는 백화점들을 반나절이나 들락날락했다. 김용의 집은 2호선 뚱창루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꼭대기 층에 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애란은 눈이 커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복층인데 일층의 탁 트인 거실 창문으로 황포강에 떠있는 유람선이 보였다. 한 폭의 그림이다. 거실 벽에 황금빛이 유유히 뿜어 나오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화 한 폭이 걸려 있다. 김용은 외동아들이고 어머니는 퇴직한지 얼마 안 되고 아버지는 작은 금융회사를 운영한다고 한다.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김용의 할머니다. 할머니는 몹시 친절했다. 평안도 말씨여서 좀 투박한 느낌은 있었지만 잘 다듬은 머리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는 많이 보아온 할머니들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다. 할머니는 애란의 손을 꼭 잡고 돌아갈 때까지 놓지 않았다. 다음 주 또 온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잡은 손을 놓아 주었다. 애란은 매주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찾아갔다. 김용의 부모는 같은 동포라고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게 애란을 대해주었다. 그뿐이었다. 며느릿감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 때문에 참고 있는듯했다. 분위기가 이제는 그만 왔으면 하는 눈치다. 그다음 주에 갔을 때는 두 분이 계시지 않았다.김용은 할 말만 하고 예의 바르고 군더더기가 없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아홉시에 출근해서 다섯시에 퇴근하는 공무원이다. 취미라면 거실과 식당 사이를 절반이나 차지한 대형 어항에 열대 물고기를 기르는 취미와 성악 동아리에 다니는 것이다. 애란은 그런 김용이 부러우면서 시기가 났다. 세상은 너무 공평하지 않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누구는 죽자고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는데, 만약 같은 직장인을 만나 결혼해도 평생 벌어서 상해에서 집을 사고 자식을 공부시키는 일은 먼 나라 일로만 생각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애란은 만약 김용을 쟁취하지 못하면 연길로 돌아가려고 생각하였다. 지금에야 비로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급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비슷한 직장인들끼리 세월을 보내다 보니 사람은 다 그렇고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 말라는 속담이 거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골똘히 생각하다가 지하철을 갈아타는 역을 지나쳤다.날이 갈수록 김용의 할머니는 애란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김용은 끝내 상해를 떠나지 못했다. 할머니의 주선으로 일 년 후 애란과 김용은 결혼하였다. 김용의 부모는 아들이 외국 유학을 한번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김용은 가려고 하였으면 몇 년 전에 갔을 거라고 하였다. 혹시 애란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옛 연인을 따라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용은 천성이 느긋하고 욕심이 없다 보니 자신은 공무원이 적성에 맞는다고 하였다. 사람마다 타고난 복은 따로 있는 거라고 애란은 생각했다.

애란은 창가를 떠나 남편 옆에 가 누웠다. 평온해 보이는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애란은 긴 한숨을 내쉬였다.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심인가 보다. 이 사람에게 시집 오려고 온갖 짓을 다했다. 이 사람보다 이 집이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복층인데 삼백 평방미터에 가깝다.한 달 전에 회사 부근의 부동산에 가서 이곳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았다. 이곳의 아파트 시세는 평방 미터당 20만 원이다. 너무도 놀라서 갑자기 딸꾹질이 올라왔다. 부동산 직원이 종이컵으로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가져다주었다. A 양은 쩍하면 애란이를 보고 부잣집에 시집가는 게 꿈이라더니 꿈을 실현했다고 애란이가 같이 안 놀아 줄 때는 비양거렸다.“부자는 무슨 개떡같은 부자니?”애란이는 괜히 짜증이 나서 A 양에게 눈을 흘겼다. 직장에 다니면서 매일 할머니 비유 맞추랴, 시부모 눈치 보려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애란은 남편과 영화 보러 갔다 오다가 따로 나가 살면 어떠냐고 슬며시 물었다. 김용은 그를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이 집이 불편하오?”“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팔자 좋은 남편은 취미생활 외에는 모든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애란은 방한 칸이 있는 낡은 집이라도 단둘이 사는 게 지금의 심정이다. 할머니는 은근히 증손자를 기다리는 눈치다. 그런데 남편은 별로 조급해 하지 않는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유화를 매일 지나다니며 수없이 보면서 어떤 날은 잠시 서서 감상하곤 했다. 황금나무 아래에는 나무 우를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사슴 한 마리가 있다. 풀을 뜯어 먹어야 하는 사슴이 먹을 수도 없는 황금이 달린 나무를 왜 올려다보는지 알 수 없다.

애란은 날이 갈수록 여위여 갔다.

현재 상해 거주 /자유 기고인
현재 상해 거주 /자유 기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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