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21. 선물

  조선에서 선물하면 좀 특징적인 의미가 있는 듯하다. 나라 최고 영도자가 일반 서민들에게 주는 그런 의미로 말이다. 조선의 어버이 수령님으로 군림했던 김일성이나 현재 위대한 영도자로 군림하고 있는 김정일은 쩍 하면 백성들에게 선물을 하사한다. 나라가 풍족한 때는 더 말 할 것도 없고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이 선물 하나만은 꼭꼭 챙겨 준다. 작게는 4. 15나 2. 16 자신들의 생일 명절에 매 가족에 두부 몇 모에 명태 몇마리로부터 크게는 이른 바 공로자들에게 무슨 선물 아파트요, 선물 차요 하며 막 선사된다. 마라톤 여왕 정성옥이 김정일로부터 벤츠 승용차를 선물 받은 것은 후자의 경우에 속하겠다. 이런 선물 배려는 실로 섬세한 맛이 있는 것으로 속속들이 안 미치는 데가 없다. 김일성은 워낙 어린이들을 좋아하여 나라의 왕으로 떠 받들었는 지라 명절 때마다 학용품으로부터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선물 안 하는 것이 없다. 그리고 현재의 장군님으로 불리고 있는 김정일은 삼태자, 사태자 갓난아기에까지 금장도, 은장도같은 선물을 보낸다. 그리고 사람을 봐가며 선물로 생일상, 환갑상까지 차려 준다. 그래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온 사회가 어버이 수령님, 위대한 장군님 고맙습니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김대중 총재 밑에서 일을 보던 오익재씨는 이른바 사회주의 조국 품에 안겨 위대한 장군님의 이런 은정을 받아 안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오익재씨는 <현세의 한울님>이라는 책에서 눈물에 겨워 대서특필하고 있다. 조선에는 학교든지 병원이든지 공장이든지 농장이든지 가는 곳마다 김일성, 김정일 선물로 가득 차 있다. 눈에 띠는 좋은 물건 마다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혹은 위대한 장군님 김정일동지께서 몇년 몇월 몇일에 보내 준 선물이라는 딱지가 꼭 붙어 있다. 선물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선물용 물건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정하기도 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1972년 4월15일 김일성의 환갑을 맞아 김정일이 김일성 싸인체가 박힌 손목 시계를 특별 제작하게 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대단한 선물용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나는 이런 시계를 조선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저 본인은 영광스럽게도 상표에 김일성 싸인체가 박힌 김일성 선물술을 먹어 본적도 있다. 이런 시계나 술은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듯했다. 그런데 작년에 노동당창건55돐대형기념행사 때 그 대단한 10만 명 집단체조 인원들에게 준 김정일의 선물은 영 말이 아니다. 다른 선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전기담요만은 참 못 봐 주겠다. 어느 선물을 받은 분이 동숙생을 통해 나한테 전기담요 사용설명서 번역을 의뢰해 왔다. 그것은 워낙 중국 제품이었던 것이다. 설명서를 번역하면서 볼라니깐 그것은 이미 중국에서도 구닥다리로 변해 한물 간 것이었다. 나는 서글픈 데로 번역만은 그래도 열심히 잘 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어린 선물이니깐. 

  조선은 현재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렵다. 조선사람들 스스로도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넘쳐나는 것은 선물, 선물이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본다. 김일성이나 김정일 개인이 무슨 물건이 그렇게 많아 이렇게 많은 선물을 했을 거 가구? 이들은 부자간 위대한 인물로서 조선을 개국하고 그 모든 것을 상속받았으니 이만한 쯤 선물은 얼마든지 감당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을 굴리보니 납득이 갔다. 

 


  22.외국인

 

  조선에서 외국인은 존경을 받고 있다. 조선은 외국인에 대해 특별히 례우하는 듯하다. 내가 들고 있는 유학생기숙사만 해도 다섯 경비 아바이(우리는 이렇게 불렀다)가 24시간 앞뒤문 경비를 선다. 하찮은 내가 이렇게 경비, 보호를 받으니 송구스러울 때가 많다. 그리고 조선인민은 고난의 행군을 하는 어려운 때이지만 우리 외국인 학생, 교환교수들에게는 꼭 요리 세 접시에 국 한 그릇을 보장하며 만포식하게 한다. 그리고 매일 과일도 떨구지 않고 공급한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푸짐한 특식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항상 접대원이 써빙하기에 거저 먹고 나 앉으면 된다. 그리고 전기 사정이 그렇게 어렵지만 우리 유학생기숙사만은 전기공급을 전격 보장한다. 나는 이런 대우를 생전 처음 받아 본다. 

  조선아이들은 외국인이 탄 버스가 지나 갈 경우에는 두손을 잘 흔들어 준다. 조선의 일반서민들도 외국인에 대해 퍼그나 우호적이다. 한번은 내가 심심해서 시내 버스를 타 보았다. 그런데 그만 버스 요금 10전 짜리 동전을 준비하지 않아 좀 당황해 났다. 그래서 5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누가 좀 잔돈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니 조선사람 몇이 동시에 돈 10전 짜리를 꺼내더니 앞 다투어 내 대신 버스요금통에 넣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고맙다 하며 내 대신 버스요금을 물어준 조선사람에게 지폐 5원을 드렸더니 절대로 받지 않는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외국인에게는 비교적 관용을 베푸는 듯하다. 한번은 실험적으로 아무데서나 길을 가로 건너 가 보았다. 교통경찰에 단속되었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잘 몰라서 그렇다 하니 신분을 확인하는 즉시로 그대로 놓아 보낸다. 이 경우 내국인이 걸려 들었다면 아무래도 좀 경을 칠 것이다. 

  외국인을 좋은 데는 다 구경시킨다. 명산절경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각 곳의 기념비, 사적지들도 참관시킨다. 국가적인 행사에도 잘 참가시킨다. 그리고 제일 좋은 자리를 배정해 준다. 필자는 조선에 있는 기간 조선로동당창건55돐경축열병식 및 군중시위, 야회와 홰불행진, 10만명 집단체조을 비롯한 많은 행사 및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실로 조선의 위용과 예술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인에 대한 각종 초대는 정말 쪽을 두지 않고 편향 없이 대하는 것 같다. 2001년 1월1일, 새해 첫날 우리는 평양체육관에서 진행하는 소년학생들의 새해 맞이 공연에 초대 되였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날 평양에 있는 외국인은 다 온 것 같았다. 양각호텔 단란주점과 사우나에서 일보는 중국 아가씨들까지 전원 출동했으니 말이다. 이 아가씨들이 단란주점과 사우나에서 자본주의적 돈벌이를 하든 관계없이 일단 외국인 신분 하나로 초대된 것 같다.

  일반적으로 외국인 단체가 움직일 때는 꼭 외사지도원이 따라 붙는다. 차를 비롯한 교통수단도 제공된다. 택시도 꼭 외국인을 위해서만 서비스한다. 그리고 어디에 가든지 꼭 안내원이나 접대원이 나와 설명, 해설을 한다. 조선에서는 외국인들에게 정면에서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보여 주기에 노력하는 듯하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치부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말없는 불문율이 많기도 하다. 외국인이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다니는 것은 이상한 일. 그리고 조선사람을 막 접촉하는 것도 반갑지 않은 일. 외국인과 내국인을 격리시키는 원칙을 취하는 듯하다. 외국인은 외국인이 쓰는 돈이 따로 있고 지정된 상점과 식당도 있다. 목욕, 수영을 해도 특별 봉사라 하여 외국인이 하는 날과 지정된 곳에서 하도록 되여 있다. 한번은 내가 목욕을 하러 갔다가 어쩌다가 내국인들이 하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곳의 접대원은 내가 들고 있는 외국인이 사용하는 목욕표를 보더니 매우 당황해 하며 나를 외국인이 하는 곳까지 데리다 주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대학만 놓고 보아도 우리 외국인은 대학도서관진입을 엄금한다. 책은 우리를 대신하여 전문 빌려 주는 사람을 통하여 빌린다. 공부도 지정된 곳에서 외국인들끼리 따로 하도록 되여 있다. 조선에서 외국인이 일반 조선사람을 만날 경우에는 사전에 외사지도원을 통해 신청해야 한다. 신청한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님. 필자는 교환교수로 조선에 1년 간 체류. 큰 형님이 조선에 계시여 가자마자 만날 것을 제출. 첫 시도 성공. 그래서 첫 상봉 이루어짐. 그런데 큰 형님은 이미 돌아간지 3년이나 됨. 그래서 큰 형님 3년 제사날을 기해 또 한번 제출. 산소에 가 술이나 한잔 붇겠다고. 거절. 그래서 새해가 되여 조카들이 어떻게 사는가 보고싶어 가정방문제출. 역시 거절. 그래도 귀국하기 전에 한번 만나라는 희망은 줌. 조선에서 외국인에게 가정방문 같은 것은 일반적으로 절대 시키지 않는 듯하다. 친지들와의 만남도 외사일군의 주선하에 호텔 같은 시내 어느 지정된 곳에서 제한된 시간내에 만나도록 되여 있으니 말이다. 그 제한된 시간이나마 적어도 외사일군 둘이나 따라 붙으니 속 시원히 말하기도 거북스러움. 조선은 우리 외국인을 좋게 말하면 경원시하고 나쁘게 말하면 두려워하는 것 같다. 사회주의 독보적 존재로 자부하는 조선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국인을 자본주의사상 오염체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내국인을 적게 만나게 하고 못 만나게 하려는 것같다. 그리고 은근히 외국인이 할 일 없이 돌아다니며 일을 칠까봐 꽤나 신경쓰는 것 같다. 1989년, 조선에서 제11차세계청년축전을 개최했을 때다. 마침 그때 중국의 6.4동란을 비롯한 세계정세가 좀 복잡했다. 조선에서는 제11차세계청년축전에 참가한 청년들이 난동을 피울가봐 은근히 근심했다. 그리하여 저녁마다 연일 무도회요, 야회요 하는 것들을 조직하여 이 청년들을 기분 좋게 잡아 두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내국인에게 될 수 있는 한 외국인과의 접촉을 피하도록 주의를 주는 것 같다. 길을 가다가 길동무나 될까 하여 아무 조선사람에게나 말을 걸어 보면 그 조선사람은 긴장해 나고 정색한 표정을 지어면서도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다. 조선사람은 아직 외국인 접촉에 습관되어 있지 않다. 조선에서 외국인과 그래도 많이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선정된 사람들. 선망의 대상들. 외사지도원 같은 외사 부문의 사람들 그리고 속된 말로 외화벌이 한다는 무역부문 일군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친구들은 국내외 사정을 다 잘 알고 매너도 신사적임은 물론 여러 면에서 많이 세련되어 있다. 그러니 이들에게 선물을 주도 자존을 살리주는 등 퍼그나 신경을 써가며 주어야 한다. 우리 외국인들이 전문 이용하는 상점이나 식당의 접대원 아가씨들만 보아도 모두 다 잘 빠진 미스 코리아들이다. 조선에서 잘 통하지 않는 아가씨란 말도 이들에 한해서는 무람 없이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러저러한 걸죽한 농담도 잘 받아 주는 제치있는 아가씨들이다. 내가 들어 있는 유학생 기숙사만 보아도 다섯 경비 아바이를 보면 모두 다 연로보장(정년퇴직)에 들어간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인데 네 분은 5-60년대 대학생 출신들임. 이들과 얘기해 보면 그 박학다식에 머리 숙여짐. 우리가 어떤 때 농담 삼아 왜 그렇게 대단한 분들이 이 잘난 경비 노릇을 하는가고 물으면 그들은 씩 웃으며 그래도 이 노릇이 좋은 노릇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외국유학생들과 같이 들고 있는 다섯명의 동숙생들도 보면 정치사상적으로는 더 말 할 것도 없고 여러 면에서 훌륭한 조선의 대학생들이다. 이들에게서 좀 아쉬운 점이라면 남자 동숙생 둘, 여자 동숙생 셋 모두 같은 생각, 같은 말을 하는 그것이다. 대학생이면 그래도 좀 자기 생각, 자기 말을 할 줄 알아야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얘기를 나누어 봐도 재미가 없음.

  그런데 이들도 우리 외국인과 마음대로 접촉하지 못하는 내부율이 있는 듯. 하루에도 네뎃 번 만나는 경비 아바이들과 청소공, 전공 및 식당 종업원들은 절대 우리 개개인의 방으로 찾아오는 법이 없다. 우리가 모실까 해서 잡아 끌어도 잘 안 들어오는 그들이다. 외사 지도원은 우리가 들고 있는 기숙사의 1층에 사무실을 잡고 있으면서도 할 일 없이 우리 개개인의 방으로 놀려 다니는 일은 없음. 동숙생의 경우라도 함부로 다른 방으로 놀러 다니지 않음. 그리고 좀 익숙해져 무람없이 대할까 하면 저쪽에서 아주 조심하고 경계하는 눈치 보임. 언젠가 한번 동숙생이 나한테 돈을 꾸러 왔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돈은 좀 꾸야 되겠다고 해 놓고는 우물쭈물한다. 나는 너무도 희한한 나머지 걱정말고 얼마든지 꾸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내 대장부가 뭘 꼼지락 거리는가고 어려워 말고 어서 얼마 꾸겠는가 말만 하라 했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이 한 10딸라만 되는데 꾸는 전제 조건으로 절대 누구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 말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 하며 아예 그 잘난 얼마 되지도 않은 10딸라를 꾸 주기는 새나 거저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펄쩍 뛰었다. 선생님, 꾸는 것만도 송구스러운데 어떻게 거저 가지겠어요? 그건 절대 안됩니다. 이에 나는 형님이 공부 잘 하라고 주는 셈치고 받으면 되지 않는가고 하자 그는 우리는 외국사람한테 돈꾸는 일조차도 엄금되어 있는데 어떻게 거저 받을 수 있는가 하며 실토정을 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아직 우리 외국인과 마음 터 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 쪽에서 너무 쓸데없는 신경을 써며 긴장해 있는 것 같다. 마음을 열고 우리 서로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였으면.                

            

     
   23.同宿生


  김정일과 우리 아버지가 벼랑끝으로 떨어지는 순간 누구를 구하겠는가를 둘러싸고 중국유학생과 조선의 동숙생이 쟁론을 벌리게 되었다. 중국유학생, 우리 아버지부터 구해! 조선의 동숙생,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부터 구해! 칼날처럼 예리하게 대립, 맞섬. 중국유학생과 조선의 동숙생은 이렇게 달랐다. 

  조선에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해서 그렇게 잘 먹여 주건만 응석받이로 황제처럼 곱게 자란 중국유학생, 부지런히 국내로부터 갖가지 먹을 것을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100% 철면피족들은 냠냠 잘도 먹어 준다. 옆에 동숙생이 있건 말건. 좀 염치가 있는 얌치족들은 그래도 동숙생 먹어라고 얼마간 내여 놓는다. 그 대신 기숙사 청소 같은 것은 뒤전. 내 걸 공 것으로 먹었으니 청소 같은 것을 알아서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의 동숙생들 그 만큼 열 받는다. 중국유학생들, 왜 그렇게 자사자리해 지고 고약해 졌는 지 조선의 동숙생들 도저히 이해가 안감. 

 조선의 동숙생들, 정녕 여러모로 훌륭한 학생들이 외국 유학생들과 동숙하게 된다. 그들은 대공무사한 공사주의사상으로 중무장한 지라 처음에는 옴니암니 그리 따지지 않고 자기가 들고 있는 기숙사 청소 같은 것을 도맡아 한다. 어떤 친구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공들이 해야 할 복도 내지는 화장실 청소까지 싹 해 놓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길어지면 기숙사 청소 같은 거 때문에 동숙하는 유학생과 마찰이 빚어지기도 한다. 같은 나이 또래인데 내가 왜 일방적으로 너만 모셔야 되냐 말이다, 그 잘 난 거 좀 얻어 먹었다구? 더럽다, 더러워! 안 먹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식의 인간 고유의 반발. 

  사실 외국 유학생들은 조선의 동숙생들을 존경하며 높이 모셔야 한다. 그들은 뭐니뭐니 해도 생활실천 속에서 조선말을 배워주기 위해 외국 유학생과 동숙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생 맞잡이인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설음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하다. 너무도 안스럽다. 

 나는 같은 동족으로서 그들을 위로해 줄 양으로 이런저런 귀맛 좋은 말을 잘 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도 나를 선생님, 선생님 하며 잘 따랐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문학을 한다고 나를 잘 찾아 오는 한 동숙생이 나를 찾아 왔다. 우리는 말말 간에 앞으로의 타산이며 이상같은 것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날 나는 그 동숙생이 눈물이 글썽하여 선생님, 나는 문학을 안 하갔습니다, 나는 앞으로 꼭 경제학자가 되어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도 한번 잘 살아 보겠는가에 대해 연구하갔습니다라는 말에 벌떡 놀랐다. 평시에 그렇게 문학에 심취되어 작가, 시인이 되어 보겠다던 그가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이해가 갔다. 고난의 행군을 하는 모든 것이 부족한 조선의 어려운 형편에서 조선의 건아들이면 누구나 적어도 한번 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들 눈에 잘 살아 보이는 그 외국인들이 선망의 대상이다 못해 이젠 일종 스트레스의 발원체로 안겨 왔을 것이다. 

  그들에겐 못 사는 설음과 스트레스가 무의식중에 막 북받쳐 오르고 있는 듯하다. 

  조선은 새천년에 들어서 강성대국 건설을 힘차게 웨치고 있다. 강성대국, 뭐니뭐니 해도 백성들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내용 하나 있겠지. 하루 빨리 강성대국이 건설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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