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27. 나와 경비아바이

  일단 한 사람 몫으로 요리 세 접시와 국 한 그릇에 밥 한 공기. 먹다 모자라면 요구하는데로 제공. 그리고 후식으로 과일 공급. 매끼마다 예쁜 아가씨 하나 따라 붙어 써빙. 무슨 중앙부장급 대우라나. 조선에서 우리 외국교환교수에 대한 대우 최고. 처음 거저 공짜라는 턱 하나 대고 실큰 먹어주기. 그러다가 조선인민은 고난의 행군을 하느라고 배를 곯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알량한 인도주의가 발동. 그러면서 자연히 경비서는 아바이들 한테로 신경이 쏠리게 됨. 다섯 경비아바이 24시간 내가 들어 있는 류학생기숙사를 지켜 준다. 집에 가만히 앉아 모심을 받아야 될 이미 정년퇴직을 한 나이 지긋한 노인들인데 말이다. 여하튼 조선의 계속 혁명정신은 대단해. 

  정년퇴직을 하면 배급도 줄어든다던데. 그리고 고난의 행군 세월에 배급도 잘 안 된다고 하든데… 경비아바이들 밥이나 옳게 먹고 출근하는지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면서 자꾸 많이 상한 듯한 얼굴들이 꿈결에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먹을거리를 날라주기로 했다. 먼저 가장 챙기기 좋은 빵부터 챙기기. 아침 식사는 빵에 우유, 죽. 누가 안 볼 때 부지런히 빵을 지갑에 넣기. 누가 보아도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하고 싶었다. 삼라만상이 잠든 깊은 밤이 됨. 나는 빵을 두 몫으로 나눠 비닐주머니에 갈라 넣고 도적고양이처럼 조용히 기숙사방을 빠져 나왔다. 오늘은 김아바이와 박아바이가 기숙사아파트 앞뒤 문 경비를 선다. 나는 먼저 앞문으로 갔다. 아바이, 수고하십니다. 오며가며 이미 잘 아는 처지라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눔. 먹는 얘기부터. 그러다가 슬그머니 빵을 내 놓으며 아바이 참으로 이거라도 좀 들어 보십시오 하고 슬쩍 비쳐 본다. 빵을 보는 순간 아바이는 반색하는 기색을 나타냄. 야, 빵이라, 오래간만인데. 하긴 밀가루 음식도 먹어야 하겠는데. 아바이, 어서 드십시오. 아바이 빵 하나를 쥐더니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나는 기뻤다. 그런데 순간 아바이의 눈에서 이슬방울같은 것이 반짝 빛난다. 나는 어리둥절해 졌다. 아바이, 왜 그럼니까? 아니, 별일 아니네. 고 손주 녀석이 생각나서 그만… 아바이, 드십시오. 이거는 다 드시고 이걸 갖다 주십시오. 나는 어망결에 다른 한몫을 꺼내 들었다. 순간 좀 무안해 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아바이. 아바이, 어서 드십시오. 내 다음에 또 갖다 드릴게요. 많이 갖다 드릴게요. 나는 자기도 모르게 아바이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나는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방으로 돌아 왔다. 뒤 문을 지키는 아바이에게 못 갖다준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그날 나는 달콤한 잠을 잤다. 

  그후 나는 과일도 이렇게 날랐다. 이제 남는 것은 그 풍성한 요리들이다. 이 요리들을 좀 갖다 드려야 겠는데… 이렇게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식탁 위에 있는 티슈로 닭고기 튀김을 가만히 싸서 지갑에 꿍져 넣었다. 그 다음 기숙사 방으로 와서 비닐주머니에 넣자고 꺼내는데 지갑은 어느새 겉에까지 기름이 배여 나온 기름투성이.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그 후부터는 직접 비닐주머니를 들고 가 닭고기 튀김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포함한 여러 튀김유 그리고 삶아 저며낸 돼지고기며 소고기 부치들을 가만히 담아 냈다. 이런 것들을 경비아바이들한테 갖다 바치는 것이 나의 일과의 하나로 되었으며 재미로 되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죄진 사람들처럼 발편한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때로는 좀 있다가 먹겠다 하며 내 몫을 통채로 기숙사 방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그리고는 여러 비닐주머니에 채소유는 채소유대로, 고기는 고기류대로, 밥은 밥대로 보기 좋게 포장한다. 아무리 신경을 써가며 여러 방식으로 먹을거리를 챙겼것만 내 혼자서 다섯 경비아바이를 공대하자니 힘에 좀 부쳤다. 그때 마침 나와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여러 나라에서 온 눈이 새파라기도 하고 노랗기도 한 교환교수들이 힘을 합세해 온다. 그들은 은근히 나의 고심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기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부치건만 한 부치 쯤은 들어서 내 비닐주머니에 넣어 준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어 준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마음과 마음이 주고 받는 이심전심. 나는 이들이 고마와 술을 대접하기도 했다. 그러면 이들도 나한테 술을 낸다. 우리는 술을 마실 때마다 식당의 여러 요리들을 기숙사방으로 가득 가지고 왔다. 그 다음 내가 총지휘가 되여 분류 포장. 포장이 끝나면 우리는 거저 땅콩 몇 알로 축하의 다마토리 술 마시기. 그럴 때마다 우리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핀다.

  나는 여위어 갔다. 조선에 갓 왔을 때보다 몇 십 키로는 잘 줄었다. 하루는 그 예쁜 접대원 아가씨 말을 걸어온다. 우선생님, 많이 축 갔습니다. 식사를 잘 해야 됩니다. 나는 눈을 찔끔 윙크하며 많이 먹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식탁에 앉자마자 정말 많이 열심히 먹는 흉내를 냈다.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먹고 일어나는데 그 예쁜 접대원 아가씨 은근히 비닐봉지 하나 챙겨준다. 눈여겨보니 거기에는 고기튀김이며 육부치들이 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들 가운데서 먹을만한 것을 골라 챙겨 주는 것이었다. 고마울시구. 예쁜 처녀야. 니 꼭 시집 잘 갈 꺼야!

  어느새 1년 간의 교환교수 생활도 끝나 나는 귀국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여위었단다. 어려운 조선에 가서 못 먹어서 그렇단다. 그러면 나는 천만의 말씀, 살깍기 하느라고 그렇게 된걸 하고 웃어 넘긴다.  

 

28. 지하공작


  내가 조선으로 간다니 물건 전달 부탁을 해 오는 사람이 많았다.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지라 자기네들 친지들이나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좀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적 동정이 앞서 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조선에 가보니 실로 물건 전하기가 조련치 않았다. 외국사람이 아무데나 마음대로 다니거나 특히 어느 개인 집에 들락나락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너무 이해되지 않고 답답하여 왜서 하고 물어 보면 항상 한다는 대답이 우리는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통일하고 우리가 다니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 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가 마치 남조선 특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조선에서 외국사람이 내국인을 만나자면 반드시 관련 외사지도일군들을 통해야 한다. 그런데 만날 사람이 많을 때 일일이 그들을 통한다는 것도 대단히 시끄러운 일이다. 일일이 연고관계를 설명해서 동의를 얻어야지 그리고 그들이 연계하고 어쩌고 하는 일정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물론 만나게 되는 경우에도 적어도 두 외사일군이 따라 붙기에 그 어색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겠다고 자꾸 제기하면 외사일군들도 슬그머니 신경질을 써기 삽하고 또 일반 내국인이 친척관계가 없는 외국인과 자주 만나는 것은 눈에 나는 것으로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나려는 조선사람들은 대개 이전에도 여러 도경을 통해 물건을 많이 전달받은 사람인지라 그들을 만나는 데는 아무래도 눈에 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래서 나는 지하공작을 벌리도록 작심했다. 실습교원(교환교수) 신분에 시간이 많은데다 「지하공작」이라는 아짜아짜함이 나를 자극하고 흡인하기에 족했다. 나는 먼저 주소에 따라 집 위치 확인에 나섰다. 평양시는 워낙 규격적으로 잘 계획되고 아파트 출입구 마다에 무슨 동 몇 인민반 같은 표시가 나붙어 있어 집주소 확인은 쉬웠다. 평양시는 대개 일반 공공건물에는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데 반해 주민들의 주소는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 편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아파트 출입구  마다에 조그만 집을 지어 놓고 아줌마 혹은 할머니가 앉아 딱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낯 선 사람은 물론 외국사람 같게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 신경을 써며 따질 것 같았다. 나는 워낙 살이 져 뚱뚱한 편인지라 이른바 너무도 외국사람 같았다. 적어도 조선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들어 갈 엄두를 못냈다. 이 궁리 저 궁리 굴리던 끝에 나는 저녁 어스럼을 이용하여 살짝 들어 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것도 포기하고 말았다. 가령 내가 요행 물건 전달할 집을 찾아 들어  갔다 해도 그 사람은 나를 잘 안 믿을 것이고 믿어서 물건을 받는다 해도 이런 방식의 전달에는 두렵고 당황함을 금할 수 없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리고 나오는 도중에 그 경비서는 아줌마나 할머니한테 띠우는 날에는 시끄럽게 번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다른 방식을 취하도록 했다. 

  나는 조선사람을 내세워 나 대신 물건을 전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래서 조선사람을 물색했다. 조선사람들은 워낙 없는 지라 선물공세에 약하다. 나는 부침성이 좋고 좀 담대해 보이는 우리 유학생기숙사에서 일보는 중년의 사나이를 하나 꼬셨다. 담배, 술에 여러 가지 선물을 듬뿍 안겨 주었다. 그는 나와 단번에 매우 친해졌다. 나에게 이런 저런 물건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외국사람한테 물건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 금물인데도 말이다. 그는 나한테 꼬리가 잡은 셈이다. 그래서 나는 공격을 들이대었다. 나의 용무를 직통배기로 말했다. 처음 그는 아주 당황해 하더니 일을 잘 해 주면 섭섭하지 않게 대해 줄 것이라는 나의 감언이설에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그는 우선 물건 전해 받을 사람들와의 접선에 나섰다. 접선에 트러불이 생긴다. 물건 전해 받을 사람들이 그를 잘 믿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확실히 믿을 수 있다는 나의 위촉장이며 물건 확인서같은 것을 써 주기도 했다. 나의 이런 위촉장이며 확인서들이 효력을 발생했는지 물건 전달이 순리롭게 되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물건을 잘 받았다는 인수증같은 것도 척척 잘 받아 냈다. 이로서 나의 지하공작도 성과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진작 해 보니 그렇게 어렵고 신비롭게만 느껴지던 지하공작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29. 걸어가면서 책보는 사람들

 

                      
  나는 조선을 자꾸 우리 중국의 악명높은 문화대혁명에 비겨섰다. 적어도 내가 조선에 와보기 전까지 그렇게 느꼈었다. 그런데 한 1년 간 와 있으면서 직접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가지만은 달랐다. 조선사람들 책을 잘 본다는 것이었다. 걸어가면서 책을 보는 사람들이 바로 조선사람들이다. 제일 인상적이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말 그대로 문화의 목을 따는 혁명이었다. 그러니 문맹이 통판치고 야만이 장훈을 칠밖에. 문화대혁명시기 인테리는 쿠리내 나는 아홉째였다. 사회인간을 아홉 계층으로 나누었을 때 제일 말등이었던 것이다. 쿠린내가 나니 모두들 코를 싸쥐고 피할 수밖에. 그러니 인테리는 모두 심심 산골짜기로 쫓겨가 노동개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도시에는 무지랭이들만 남았다. 인테리에 대한 매몰은 자연적으로 지식과 책에 대한 반동으로 이어졌다. 누가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반동이고 누가 책을 많이 보면 볼수록 반동이었다. 그래서 이 반대의 론리가 통용되어 무식쟁이들이 제 살판을 만났다고 기고만장해졌다. 머리가 간단하고 사지가 발달한 군발이들이 제일 존경을 받았다. 전반 사회적으로는 독서무용론이 회오리쳤다. 학생들도 이른 바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는 모택동의 최고지시를 받들고 반란을 하며 학업을 전폐했다. 붉은 책으로 받들어진 모택동선집외 다른 일체 책의 출판은 거의 두절되었다. 개혁개방 후 중국에서는 학구열이 높아지면서 이때의 대학생들을 무식쟁이로 취급해 그리 잘 써주지 않았던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조선은 노동당기발에 노동자를 상징하는 망치, 농민을 상징하는 낫과 함께 인테리를 상징하는 붓을 동시에 새겨 넣었다. 그것도 망치와 낫이 가새표를 해서 옆으로 눕혀진 그 중간에 수직으로 꼿꼿이 세워놓았다. 붓을 축으로 하여 망치와 낫이 대칭을 이루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인테리를 중심으로 사회주체 계급들인 노동자, 농민이 뭉쳐있는 감을 준다. 이것은 1945년 10월 10일, 30대초반의 홍안의 젊은 장군-김일성장군이 조선노동당을 창립할 때 친히 잡아준 노동당상징도안이었다. 당시 젊은 장군의 말을 빌면 그 어느 나라의 당기에도 없는 조선의 당기에만 있는 독특한 상징도안이었다. 말 그대로 우리 식이었다. 패기 있고 선견지명이 있는 젊은 장군이었다. 실로 나는 아직 붓대가 당기도안의 중심에 놓여있는 당기를 보지 못했다. 우리 중국공산당 당기도안만 놓고 보아도 거저 망치와 낫만 댕그르니 엇갈려 있을 뿐이다. 좀 서운하다. 무엇 좀 모자라는 감이 든다. 과학을 제일생산력으로 보고 인테리를 노동자, 농민에 못지  않는 당당한 하나의 사회계급으로 쳐주고 있는 오늘 중국에서 공산당 당기도안에도 그 상징마크가 새겨졌으면 한다. 붓, 망치, 낫의 삼위일체를 이룬 조선노동당기발도안은 현재 평양시문수거리중심에 대형조각으로 세상에 보란듯이 우뚝 솟아 있다. 실로 평양의 명물의 하나였다. 작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창건55돐을 맞아 김일성광장에서 대형기념행사를 할 때 인테리들의 대열이 노동자대열, 농민대열과 더불어 보무당당히 주석대 앞을 지나가는 그 모습 참 보기 좋았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 인테리들이 노동자, 농민 같은 선진계급의 주위에는 그 어방에도 못 가 붙던 역사의 비극과는 너무도 대조를 이루었다. 

    조선은 노동당당기도안뿐만 아니라 실제로 인테리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주며 물질적 대우를 잘 해주고 있다. 물심양면으로 돌보고 있다. 김일성주석이 내놓은 전 사회의 인테리화!,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조선에 있어서 이것은 한낱 멋진 구호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시정방침으로 되여 있고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그렇게 흐르고 있다. 인재등용에서의 철저한 인테리화, 전문가화!, 인테리들의 임금이 절로 높아진다. 그리고 박사, 교수, 예술가, 과학가 등 고급인테리들에 대해서는 특별 대우를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월등히 높은 월급은 물론 예술인아파트, 과학가아파트 해서 국가에서 아파트를 무료로 선물한다. 나는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녀보았지만 이것도 듣다 처음이다. 귀맛이 솔깃해나는 소리다. 조선은 현재 어려운 고난의 강행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테리들에 대한 이런 예우와 대우에는 추호의 변화도 없다. 조선은 현재 완전 무료교육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전반 11년제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있다. 그래서 문맹자가 없다. 실로 동방예의지국임에 손색없다. 

   한마디로 인테리에 대한 존중은 사회의 학구열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사회매체들의 각종 강좌조직, 잠간 쉴 참에 진행되는 독서회… 이런 것은 조선에서 쉽게 눈에 띠게 되는 풍경이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여 책보기, 조선사람의 책에 대한 집착이 이 정도다. 그래서 걸어가면서 책보는 사람들이 나타난가 보다. 걸어가면서 책보는 사람들, 조선의 최고학부 김일성종학대학 캠퍼스 내에서는 물론 조선의 아무 길거리에서나 쉽게 눈에 띠는 또 하나의 평양명물. 빠른 걸음으로 제 갈 길은 다 가면서 볼 책은 다 보는 걸어가면서 책보는 조선사람들. 너무 신비감을 느꼈던 나머지 한번은 내가 일부러 걸어오면서 책을 보는 사람 하나를 곧 바로 맞받아 나가 보았다. 부딪칠가하는 아슬한 순간에 그 사람은 살짝 몸을 비키며 나에게 길을 내준다. 참, 묘했다. 아예 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걸어가면서 책을 보다가 다른 사람들 혹은 전주대 같은 데나 부딪치면 어쩌나 하는 나의 우려가 공연한 노파심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조선, 중국, 일본하면 단연 일본사람이 책을 가장 많이 보는 것으로 꼽는다. 그러나 나는 중국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사람가운데서도 걸어가면서 책보는 사람들은 아직 보지 못했다. 중국, 일본에서 걸어가면서 책을 보면 정신병자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당상이다. 조선사람들은 걸어가면서 책볼 정도로 책을 많이 열심히 본다. 새책이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한 권 책을 돌려가며 열심히 본다. 그래서 조선의 책들은 대개 너들너들하다. 종이사정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때문에 조선에서는 현재 책을 많이 찍지 못한다. 그래서 책을 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책이 그 만큼 귀하다는 말이 되겠다. 책이 그만큼 귀한 만큼 일단 책이 손에 들어오면 어떻게 해서나 짬을 내서 한 글자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보게 하는 독서증이 생기게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걸어가면서 책을 보는 책보는 지혜도 개발되게 했으리라!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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