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자 문학평론가

엄정자(厳貞子),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원,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대표 겸 회장, 연변작가협회 회원,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 「화산 우에서 사는 사람들」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필 『감나무에 담긴 정』 제1회 同胞文學 安民賞 수필부문 우수상.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연변인민출판사, 2014년).
엄정자(厳貞子),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원,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대표 겸 회장, 연변작가협회 회원,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 「화산 우에서 사는 사람들」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필 『감나무에 담긴 정』 제1회 同胞文學 安民賞 수필부문 우수상.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연변인민출판사, 2014년).

김화숙 시인은 이미 시집 3권을 출판한 중견 시인이다. 그는 2014년 한국 월간 『문학세계』로 등단하고 짧디짧은 6년 사이에 시집 『아름다운 착각』, 『빛이 오는 방식』,『날개는 꿈이 아니다』를 펴냈는데 그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제1 시집 『아름다운 착각』에서는 쉬운 말로 쉽게 풀어 쓰면서도 그윽하고 심오한 깊이를 잃지 않는 작품을 내놓음으로써 “삶의 철학을 시로 승화시킨 대형신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2 시집 『빛이 오는 방식』의 “가장 큰 특점은 소박하면서도 사색적이어서 사람들에게 삶의 본질을 깨우쳐준다는 점일 것이다. 김화숙은 사색의 달인답게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광원을 발견해내고 그로부터 사색의 빛줄기를 뽑아내서 사람들에게 보내주고 있다.”

제3 시집 『날개는 꿈이 아니다』는 “시인이 인생과 시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삶의 본질을 투시하고 그런 삶의 본질을 투영한 주옥같은 시를 묶어냈다.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기 때문에 시에 대한 투철한 비판 의식이 생겼고 그로부터 어떤 시를 쓰는 시인이 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결과 한층 업그레이드한 시들이 탄생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시단을 縱橫無盡종횡무진 하던 시인은 올해에 들어서도 이미 40 여수의 시를 중국과 한국의 여러 문학지에 발표하였다.
이 새로운 시들은 이미 발표된 시들보다 心想심상이 한층 더 깊어졌고 예술적으로도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이번 『동포문학』 10호에 보낸 6수의 시만 보아도 이런 특징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 6수의 시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김화숙 시인의 깊어진 心想(심상)이 어떻게 예술적 상상을 통하여 문학적 心象(심상)으로 승화하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김화숙 시인은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웠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한다. 인생에 대해서도 자연에 대해서도 현상으로부터 본질에 접근하고 그런 본질적인 것을 시적 형상으로 승화시킨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한 6수의 시에서 시인은 객관적인 사물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3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모든 슬픔은 가슴 안에 있다
모든 불안과 상실과 괴로움도
가슴 안에 고이고 자란다
아침 해 뜨는 그곳까지
저녁 해 지는 곳 그 너머까지
눈앞에 펼쳐진 삼라만상과
꿈이 데려가는 그 끝까지 가슴이다
이렇게 큰 가슴을 가지고도
자주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나는 가슴 밖에서 사는가 보다

―「가슴앓이」의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마음을 보고 있다.
유학 경전인『禮記예기』, 「禮運예운」편에서는 인간의 여러 감정들을 기쁨(희,喜), 노여움(노,怒), 슬픔(애,哀), 두려움(구,懼), 사랑(애,愛), 싫어함(오,惡), 바람(욕, 欲)의 七情칠정으로 나누었다. 이 감정들을 어떻게 잘 다스리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성 인격이 결정된다.

이런 감정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데 그 마음은 가슴 안에 있고 가슴은 그 사람 몸의 일부분이다. 물리적으로 볼 때 가슴은 한 아름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니 거기에 들어있는 마음의 공간도 작을 것이다. 하지만 김화숙은 이 작은 공간에 인간의 모든 감정을 포괄한 七情칠정을 담았고 “아침해 뜨는 그곳”에서 “저녁 해 지는 곳 그 너머까지” 전 우주를 담았으며 “눈앞에 펼쳐진 삼라만상” ―현실에서 “꿈이 데려가는 그 끝” 즉 미래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았다. 그렇게 시인은 ‘가슴’을 무한대로 이미지 확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크나큰 가슴으로 확장하고도 시인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그러면 시인은 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가?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란 저서에서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라고 하였다. 신이 없기에 인간은 태어날 때 ‘無(무)의 상태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 되며,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 되기에, 이로부터 인간은 ‘주체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주체성에는 책임이 따르게 되는데, 따라서 이런 책임을 실행할 때 인간은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개인의 선택은 단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영향 미치는데, 그래서 인간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나의 선택이 옳은지,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시인이 이 시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이런 실존의 불안인 것 같다.
시인은 자기의 인생에서 많은 선택을 해왔을 것이다. 진학, 취직, 결혼 출산, … . 이런 선택은 물론 일정하게 사회에도 영향을 주겠지만 그것은 주로 그 자신의 인생, 가정, 주위환경에 구속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시’를 쓰는 ‘시인’이 되는 길을 선택을 했을 때 그것은 그의 시 쓰기가 개인의 행위이면서도 인류 전체에 앙가제(engager: 참가, 구속 등으로 어떤 집단이나 규제에 스스로를 얽매는 것) 하는 것이 됨을 말한다. 즉 ‘나’의 시는 나 개인의 행위이지만 이는 나의 시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지는 행위가 되는 것이 된다.
그 때문에 시인은 인간의 7정을 담았고 우주를 담았고 현재와 미래라는 모든 시공간을 담은 “이렇게 큰 가슴을 가지고도/ 자주 가슴앓이를 하는” 불안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시인은 그 원인을 “나는 가슴 밖에서 사는가 보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인정하고 나의 선택, 앙가쥬망(engagement)이 곧 인류 전체를 향한 앙가제가 되며 그래서 내가 자신이 선택한 ‘시인’이라는 이미지의 자신을 창조해 나갈 때 나는 ‘나’를 선택하고 인류를 선택한다는 책임감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가슴앓이’ 즉 ‘불안’은 시인의 인생에 대한 방해가 아닌, 문학사에 오를 시인으로 성장해가는 행동의 조건 자체를 이루게 된다.
이같이 불안을 느끼면서도 깊은 사색과 성찰로서 그 불안을 해소해 가는 과정이 곧 그의 시 창작 과정이 되고 있다. 그러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관조적인 시선이 필요했다. 또한, 그런 관조적인 시선은 시인의 성찰이 개인의 범주를 넘어서서 일반화에 이르게 하였는데 이로써 그의 시가 많은 사람의 마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게 하였다.

 
나를 지탱해주던
많은 꿈들이
꽃이 꺾이며 시들듯
빛을 잃어 갔다
녹차 진하게 우려
한 모금씩 마셨다
어둡던 내장에
위에서 아래 순서로
녹색등 밝혀졌으리라
마음의 정원에
꽃들이 다시 피고
향기 한 움큼
내 몸에도 피기를.

―「향기 한 움큼」의 전문

이 시에서도 시인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존재로서 사람은 자기를 그 뭔가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사람은 꿈을 꾼다. 물론 그 꿈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겠지만 뭔가 하고 싶고 뭔가 되고 싶은, 그런 꿈이 있어서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시인의 인생에도 많은 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인생길에서 이루지 못하고 깨져버린 꿈들도 많을 것이다.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서 그런 자신을 돌이켜보며 시인은 “나를 지탱해주던/ 많은 꿈들이/ 꽃이 꺾이며 시들 듯/ 빛을 잃어 갔다” 하고 한탄하고 있다. 어딘가 人生無常인생무상의 허무주의적인 분위기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현실에 주저하지 않고 다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갈 무엇을 찾고 있다. 그것이 곧 ‘녹차’이다. 녹차는 푸른색을 띤다. 푸른색은 앞으로 나아가라는 신호등의 색깔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시인은 많은 좌절로 “빛을 잃은” 자신의 인생길을 어두운 ‘내장’에 은유하였다. ‘내장’을 ‘길’에 비유하니 ‘녹차’는 전진을 의미하는 신호등의 “녹색등”이 되었다. 녹차가 내장을 흘러내리는 칙칙한 영상에 어두운 길을 달리는 차 앞에 녹색등이 연이어 켜지는 영상이 덧씌운다. 삽시에 실상이 시적 형상으로 승화되었다. “어둡던 내장에/ 위에서 아래 순서로/ 녹색등 밝혀졌으리라”, 독특하면서도 기발한 상상임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는 ‘녹차’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시’를 말하고 있을 것이다. 50대에 들어서며 시를 시작한 김화숙은 그녀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가장 자기답고 가장 되고 싶었던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시는 그녀의 인생의 ‘녹색등’이었고 ‘녹차’가 어두운 내장을 씻어 내려가며 밝혀주듯이 그녀의 인생을 밝혀주고 빛나게 해주었다.
그래서 시인은 “마음의 정원에/ 꽃들이 다시 피고/ 향기 한 움큼/ 내 몸에도 피기를.” 하고 쓰고 있다. “많은 꿈들이/ 꽃이 꺾이며 시들 듯/ 빛을 잃어 갔다”던 그녀의 인생에 ‘시’는 또다시 삶의 꽃을 피워주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독자들의 눈을 이끄는 것은 시인이 “향기 한 움큼/ 내 몸에도 피기를” 하는 부분이다. ‘꽃’은 만질 수 있는 물건이지만 ‘향기’는 만질 수 없는 無形態무형태적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꽃을 쥘 때 쓰는 ‘움큼’이란 단위명사를 ‘향기’에다 씀으로써 無形態무형태의 향기를 다시 꽃으로 승화시켜 ‘피다’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마음의 정원’에 핀 꽃이고 그 꽃으로 인해 생긴 ‘향기’는 온몸에 퍼지며 ‘나’는 꽃처럼 화사하고 온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다. 온몸에 꽃이 핀 사람이라면 이상할 뻔했는데 온몸에 향기가 나는 사람으로 그려서 아름다워지었다.

본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자신이 구상하고 원하는 대로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시인 자신을 그가 구상하고 원하던 이미지-꽃, 향기, 시가 同一體동일체를 이룬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꽃 진 자리 위에
열매 동글하게 들어앉는다
엉덩이 크게 넓히며
열매 둥글게 무르익는다
열매는 죽은 꽃의 봉분
우린 그 봉분을 먹는다
살아생전 향기롭던 꽃
죽어서도 달콤하고 그윽하다
향기롭게 살 일이다.

―「향기 있는 삶」의 전문

꽃을 피웠고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된 시인은 인생에서도 열매를 맺는 시기에 들어섰다. 꽃이 피는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그 열매를 맺기 위해서 꽃은 예쁜 자태와 아름다운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불러다 수분해서 열매를 품는다. 그렇게 꽃은 자기 자리를 열매에게 내어주고 죽는다. 그래서 시인은 열매를 ‘꽃의 봉분’이라고 하였다. 삶과 죽음의 연속극이다.

죽음은 원래 어둠이고 악취이다. 그러나 꽃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열매는 “달콤하고 그윽하다”. 그것은 꽃이 살아생전에 향기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향기’가 있는 인생을 산 자만이 그가 죽은 후에도 세상에 그 향기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인생을 잘 살아야 그의 죽음도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다는 도리이다. 그래서 시인은 꽃 지듯 내가 스러진 뒤에도 아름다운 기억이 되려면 “향기롭게 살 일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위의 분석이 일반 사람들의 인생으로부터 분석한 뜻이라면 김화숙에게 있어서 꽃, 향기, 열매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한마디로 ‘시’이다. 시를 쓰는 과정이 꽃을 피우는 것이고 그 시가 사람들에게 읽힐 때 향기가 전해지는 것이고 그 시들이 ‘시집’으로 묶어질 때 그것은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인생으로 해석해도 그녀의 시집이 이 세상에 남겨질 때 그녀는 사람들에게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열매가 맺히는 과정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시인은 “꽃 진 자리 위에/ 열매 동글하게 들어앉는다/ 엉덩이 크게 넓히며/ 열매 둥글게 무르익는다”라고 열매가 자리 잡고 커지는 모습을 의인화하여 사람의 움직임 같이 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인생의 리치를 형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시적 상상이다.

위의 시들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사색이 시인의 마음에 집중되었다면 아래의 시들에서는 시인의 사색이 세상 밖으로 확장되고 있다.

사르트르는 “나에 대한 어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이처럼 내가 타인을 거쳐야만 합니다. 타인은 나의 실존에 필수적이며, 내가 나에 대해 갖게 되는 앎에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입니다.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나의 내면의 발견은 곧 나와 마주 놓인 그 어떤 자유로서의 타인 또한 발견하도록 해 줍니다. 즉 나를 생각하는 타인, 나를 위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나와 맞서는 경우에만 원하는 그런 타인 또한 발견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상호주체성으로 부르고자 하는 세계를 곧바로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가 무엇인지, 타인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 속에서입니다.” (66페이지)

시인이 아무리 시에 묻혀 살고 시가 일상이라고 해도 그는 세상과 완전히 격리될 수는 없다. 시인도 세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다르다면 김화숙 시인은 직접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냥이’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는 점이다.

창가를 스치듯 날아가는 새가
자신의 그림자를
나의 공간에 던지고 간다
나무를 차지하고 우는 새는
소리를 음표처럼 쓰고
화분처럼 고요한 냥이는
새의 그림자와 음표 소리가
바닥에 닿기 바쁘게
자신 안으로 끌어 담는다
냥이 눈과 마주하고 앉아있으면
내 마음이 채워지는 건
냥이의 시선 안쪽에
새의 삶과 노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눈빛으로 채우다」의 전문

시인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는 창밖에 나무가 서 있고 그 나뭇가지 위에는 새가 있다. 베란다에는 화분이 놓여있고 방안에 앉은 시인의 옆에는 고양이가 있다. 고요함 속에서 날아가는 새가 그림자를 남기고 가끔 새 울음소리가 창문을 넘어 들려온다.

시인이 그리고 있는 이 고즈넉한 풍경 속의 ‘나무’. ‘새’는 세상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으며 새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소리를 상징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세상을 ‘고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화분처럼 고요한 냥이는/ 새의 그림자와 음표 소리가/ 바닥에 닿기 바쁘게/ 자신 안으로 끌어 담는다”

그러면 시인은 왜 ‘고양이’를 통해서 세상을 받아들이는가?
우선 시인의 일상 자체가 시에서 그려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방안에서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집 근처를 산책하며 사색을 하는 그런 조용한 생활 패턴을 가졌다.
거기에다가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두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이뤄지면서 많은 사람이 인터넷이나 전화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냥이’는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냥이의 시선 안쪽에/ 새의 삶과 노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냥이 눈과 마주하고 앉아있으면/ 내 마음이 채워지는” 것이다.
지인이나 가족 친구들에게서 오는 한마디의 메시지, 한편의 메일, 한통의 전화, 이를 통해 시인은 세상과 이어지고 위안을 받고 있다.
이 시는 예술성이 아주 뛰어난 시이다. 시의 표면에 그려져 있는 표상과 시의 내면에 그려지고 있는 실존적인 현실, 두 장의 그림이 겹쳐서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인의 心想심상이 예술적인 心象심상으로 승화될 수 있었고 그래서 시로서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이 시의 분위기는 극도로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이런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 시인은 “나무를 차지하고 우는 새는/ 소리를 음표처럼 쓰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원래 새 울음소리는 소리로 전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그대로 묘사했다면 시의 분위기는 깨져 버릴 것이다. 새가 소리를 ‘음표’로 적어 악보를 만든다면 소리가 없어도 거기에는 새 울음소리가 있을 것이다. 실존하는 새소리를 부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조용한 분위기와 정서를 깨지 않고도 새의 존재를 나타냈으며 이는 뒤에 고양이가 “자신 안으로 끌어 담는다”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전제를 깔아준 것이기도 하다. 無形態무형태의 소리는 주워 담을 수 없으나 그것이 악보라면 얼마든지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냈다.

시인의 세상 속에는 어머니도 있다.

비 맞고 떨던 수탉처럼
늦가을 붉게 우는 단풍나무
찬비 맞고 축 처져 떨고 있다
창밖의 단풍나무를 내다보며
따뜻한 방 안에 있으면서도
오싹해져 몇 번이고 옷깃을 여민다
오래전 아버지를 보내놓고
아들딸 넷 손자 넷을 잘 지키셨지만
아득한 세월 홀로남아
추억만 남은 고향집 지키며
외로움에 무거워진 외투 걸치고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엄마는 엄만 잘 있어
이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엄마의 마른 몸 젖은 옷.

―「엄마 옷」의 전문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날, 시인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단풍나무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파랗고 싱싱하던 나무가 어느새 붉게 단풍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니 나무는 빗물에 젖어 “축 처져” 있고 빗방울에 맞아 “떨고 있다”.

차갑고 축축하고 무거운 가을날의 풍경은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센티멘털한 분위기를 깔아주었다. 분위기에 젖은 시인은 저도 모르게 처연한 나무의 모습에 자연히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본다.

‘어머니’란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오래전 아버지를 보내놓고/ 아들딸 넷 손자 넷을 잘 지키셨지만” 이제는 “추억만 남은 고향집 지키며” 외롭게 지내시는 어머니, 자식들에게는 “엄마는 잘 있어.” 라고 말하면서도 그림움에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 대한 동정 애틋함이 진하게 전해지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말라가는 어머니의 ‘몸’, 그 몸 위에 외로움은 ‘무거워진 외투’같이 걸쳐졌는데 차가운 가을비에 나무가 무거워지듯 비에 젖은 외투는 더 무거워진다.
이 시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외로움을 ‘옷’에 비유하였다. 그것도 ‘무거운 외투’라고, 그렇게 비유함으로써 외로움의 무게가 실감이 나게 느껴지게 하였고 마지막의 ‘젖은 옷’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였다. 만약 시인이 ‘옷-외투’라는 비유를 쓰지 않았다면 외로움의 무게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마른 몸’에서 ‘마른’은 ‘마르다’의 연체형으로 쓰이었는데 “살이 없이 몹시 수척하다”라는 뜻과 “물기가 없이 바짝 메마르다”라는 뜻을 겹쳐서 쓰고 있다. 세월의 흐름과 외로움에 말라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두 번째 의미로 ‘젖다’라는 단어의 의미와 대조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세월에 마르는 몸과 외로움에 젖어 무거워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대조를 통해서 선명하게 부각할 수 있었다.

‘수탉’은 의외란 느낌도 들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記標기표의 記意기의를 확장하는 데 필요하였다. 붉은 수탉이라면 그 털 색으로, 하얀 수탉이라면 붉은 볏으로부터 단풍의 붉은 색깔로 이어질 수 있었고 따라서 수탉의 ‘울다(鳴)’로부터 슬픔에 ‘울다(哭’)라는 이미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同音異議語동음이의어를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거기에다가 ‘붉다’와 ‘울다’ 이 두 이미지를 합쳐서 “붉게 우는 단풍나무”라고 묘사함으로써 비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단풍나무의 모습에 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이미지 합성할 수 있었다. 절묘한 조합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어머니의 영상은 시인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가을비’와 ‘단풍’이 만들어내는 센티멘털한 분위기에 취해서 시인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어머니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시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깊어짐에 따라 어머니의 영상은 더 뚜렷해지고 그래서 애틋하고 아픈 감정이 진실하게 독자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물이 깊으면 빠져죽지만
깊다고 모두 죽지는 않는다
생각이 깊다고 빠져죽으랴
사랑이 깊다고 빠져죽으랴
그렇다고 방심은 말자
미움이 너무 깊으면
원한이 너무 사무치면
후회가 뼛속에 남아있으면
빠져죽을 수 있으니
우리 너무 깊지는 말자.

―「너무 깊지는 말자」의 전문

이 시는 어쩌면 시인이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면서 얻은 교훈을 쓴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민심이 흔들리는 난세에 대한 비판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어울려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에서 인간과 어울리는 것이 위험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린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공황에 빠지고 경제가 침체상태에 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안을 느낀 사람들은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늘 옳다”라고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같이 ‘대자’인 인간이 자신을 망각하고 ‘즉자’가 되려고 하는 것을 ‘자기기만’이라고 하였다.

‘나’ ‘우리나라’는 잘하고 있었는데 ‘너’ ‘너희 나라’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피해를 보고 있다. 그러니 ‘너’ ‘너희 나라’가 나쁜 놈이니 당신들이 책임을 져라!
이런 ‘자기기만’은 결국은 자신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이 된다.
감정 동물인 사람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한을 갖는 것은 자기를 살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움’과 ‘원한’이 너무 깊으면 후회할 일을 초래할 것이고 그렇게 “후회가 뼛속에 남아있으면/ 빠져죽을 수 있으니/ 우리 너무 깊지는 말자”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설사 “ 모두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물이 깊으면 빠져 죽”을 확률이 높은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시간에 코로나19를 어떻게 이겨나갈지 그 대책을 연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이 ‘물’에다가 ‘마음’을 비유한 것은 절묘한 한 수이다. “후회가 뼛속에 남아있으면/ 빠져죽을 수 있으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깊이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첫 구절에 “물이 깊으면 빠져 죽…는다”는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이치를 전제로 깔아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기만’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시인의 자기 마음에 대한 깊은 성찰은 전 사회적 문제로 확장되었고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김화숙의 시 6수를 분석하면서 올해에 들어서서 그의 시풍이 많이 변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출간한 3권의 시집들도 각기 자기의 특징이 있고 발전해가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근래 새롭게 창작하는 시들은 김화숙 시인 고유의 사색적인 특징을 보유하면서도 인간의 실존적 의미에 대한 보다 깊은 사색을 보이고 있다. 또한, 그런 깊은 사색의 결과를 시적 형상화 함에 있어서 다양한 예술적 기법을 능숙하게 適地適用적지적용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은유의 수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 ‘가슴앓이’로 인간 실존의 ‘불안’을, ‘젖은 옷’으로 외로움을, ‘꽃’ ‘향기’ ‘열매’로 인생과 시를 은유하고 있으며 同音異議語동음이의어와 이미지연접법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이미지 합성을 하고 있다. 하여 記標기표가 내포한 記意기의를 최대한 확장하여서 짧은 글에 많은 내용과 깊은 사상을 담을 수 있었다.

또한, 에술성이 높아짐에 따라 깊어진 心想심상을 보다 상상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시적 心象으로 승화시켰다.

시인으로 데뷔한 年數연수에 비하면 多作다작으로 이미 일반 시인들을 초월한 김화숙 시인이 시적 형상화 면에서도 높은 伎倆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시인의 마음이 깊어지면서 시도 깊어지고 있다. 해외동포작가로서의 그가 어떻게 우리 문학사에 오를지 기대가 된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