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연변대학교수

김호웅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김호웅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금동(琴童) 김동인의 인간적 및 작가적 생애는 1930년 경을 계기로 성격이 완판 다른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풍부한 가산을 등대고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리면서 문단의 왕자로 자처하던 시기를 그 전반기로 본다면 경제적으로 파산된 후 문학창작을 호구지책으로 삼아 근근도생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친 1930년 이후를 그 후반기로 잡을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30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광염쏘나타》는 그의 작가적 생애를 가르는 분수령으로, 그의 문학적 세계를 열 수 있는 열쇠로 된다.

 

1

 

1900년 10월 2일 김동인은 평양의 부유한 지주가문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호화로운 가정생활은 김동인으로 하여금 자아독존식으로 자라게 하였고 향락주의에 깊이 빠지게 하였다. 어리시절 에피소드의 한 토막인데 김동인이 낟알을 흩뜨려서 집안식구들의 꾸중을 받고 우는 것을 본 그의 부친은 일부러 방안에 낟알을 가득 쏟아놓고 제멋대로 가지고 놀게 하였다. “나는 열다섯까지 소년시기를 평양에서 지냈지만 친구가 없는 사람이다”고 김동인 자신도 말한 바 있지만 동경에 갔을 때 숭덕학교시절의 후배였던 주요한이 한걸음 먼저 가서 선배로 된 것을 꼴사납게 생각하고 명치학원을 버리고 동경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남에게 절대로 굽히는 일이 없었고 평양을 다녀올 때도 할인을 해주는 3등석이 아니라 꼭 2등석에 앉았다. 그는 남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신발을 신기마저 꺼렸다고  한다.
그의 형 김동원의 말마따나 “글줄이나 쓴답시고” 막대한 가산을 탕진하면서 술과 녀인으로 엮어진 김동인의 인생드라마는 20세 좌우로부터 시작된다.
“…정오쯤은 요리집에 출근하여 제1차, 제2차, 제3차 어떤 때는 제4차까지 끝난 뒤에 네시쯤 돌아와서 한잠 자고는 정오쯤에 다시 요리집으로 출근하고 이러한 광폭한 생활은 다시 시작되였다. 가정은 다만 수면을 위한 것일 뿐 나의 요리집과 요리배에서 광폭성을 발휘하는 것이였다.”

이처럼 김동인은 1921년 봄부터 1923년 2월까지 명월관에서 만난 기생 김옥엽과 함께 서울, 진남포, 경주 등지를 유람하면서 동거생활을 했고 그 사이에도 16세의 어린 기생 황경옥을 만나 페밀리호텔에서 동거생활을 하다가 옥엽이 다시 나타나는 바람에 갈라진 일도 있었다. 그 후에도 평양의 일본요리집에서 세미미루라는 일본기생을 만나 그 미모에 반한 나머지 경건한 마음으로 사귄 바 있으며 또 23세부터는 김산월, 월산월, 김연화 등 기생들 속에 묻혀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세번째로 동거한 녀인은 1925년 여름부터 1926년 초봄까지 사귄 로산홍이라는 기생이였다.
김동인은 술과 녀인뿐만 아니라 려행과 낚시질, 경마와 마작을 즐겼고 레코드, 의복, 유기그릇 등 수집과 화초재배, 촬영 등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화초는 그 개화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무릇 꽃이 피는 화초라면 닥치는대로 사들였고 촬영재간 역시 인화, 현상까지 할만큼 프로급이였다. 그 무렵 김동인의 생활을 두고 그의 오랜벗이였던 주요한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소시민적 소심성이 없던 그가 화류계사회를 알고부터는 랑비벽이 더욱 심해졌다. 사치, 도락을 즐겨서 백금시계에 백금시계줄을 차고 음식을 사먹되 최고급이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는가 하면 또 경마에도 손을 뻗쳐 한때는 경마를 사서 붙이기도 했다.”

서양 탐미주의 문학의 거두―보들레르나 와일드에 짝지지 않게 술과 녀인, 온갖 향락을 즐기던 김동인은 문득 정신이 들어 가산을 정리해 보게 되였다.
“1926년 정월에 계산한 바에 의하면 나의 전 재산이 동산, 부동산을 합하여 1만 5천원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상세한 모든 일은 이 뒤의 나의 생활기록으로써 다시 쓸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수리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천성 위에 교양과 경우로써 더욱 오만한 성질이 증장된 어떤 때에 조사 나온 관리의 무례를 책망하여 돌려보낸 것이 원인으로 사업도 실패했다. …이듬해 여름에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 때는 정리 후에 남은 2, 3천이라는 현금과 두 소생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김동인에게 더욱 큰 충격을 준것은 안해 김혜인의 탈가였다. 김동인이 며칠간 낚시질에 몰두해 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안해는 마지막에 남은 수천 원의 돈을 몽땅 가지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김동인의 아들 김일환은 그 당시 풍비박산이 된 가정생활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머니는 나의 녀동생을 데리고 서울 친척집에 잠시 들렸다가 일본에서 녀의대(女醫大)를 다니던 6촌벌의 박모라는 녀인을 찾아 동경으로 건너가 버렸다. 부상(富商)의 딸, 부농의 안해는 집안이 졸지에 망하자 큰 충격을 받은것이다.” 김일환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 녀동생만은 찾아왔으나 그의 어머니는 영영 행방을 감춰버렸다고 한다.  안해에게서마저 “배반”을 당한 김동인은 그후 일년간 “타락하려는 품성과 파산하려는 성격을 억제하기에 힘을 썼다. 재산도 잃었다. 처도 잃었다. 그러나 그 고귀한 혼과 통일된 품성과 오만한 성격만을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간디의 말대로 “빈곤은 도덕적 타락을 부른다.” 경제적 파산은 정신적 파산을 규정하였으나 순수문학을 고창하던 김동인의 도고한 작가정신은 찌들고 병들기 시작하였다. 1929년 여름 김경애와의 재혼을 앞둔 김동인은 경제문제의 해결책으로 《동아일보》에 신문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후일 김동인은 그 당시의 막부득이한 사정을 회고하면서 “아직껏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던지간에 나는 내 갈길만 닦아나아간다던 그 주장은 꺽이고 대중소설에 손을 댄 나의 첫 훼절이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여러 신문잡지에 장편력사소설을 쓰다가 야담, 사담류(史譚類)까지 썼으나 생계는 조금도 펴이지 않았고 중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아편에 중독되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김동인은 집필조건으로 선불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든가, 똑같은 작품을 이중으로 계약한다든가, 심지어는 출판사 측에 무리한 요구를 들이댄다든가 하여 거지처럼 백안시당했고 가끔 “상갓집 개”라는 험한 소리까지 듣게 되였다.

만약 “아직껏 청초하고 고결함을 자랑”하던 조선문단의 총아--김동인이 몇 푼 안되는 원고료를 받고저 입때껏 거절해오던 신문소설을 집필한 것을 그의 첫 훼절이라고  한다면 1940년대에 와서 아즈마 부미히로(東文仁)라고 창씨개명까지 하면서 발표한 수필들은 그의 두번째 훼절—민족적 훼절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조선에서 ‘내선일체’의 부르짖음이 높이 울리고 내선일체의 대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다시 대동아전이 반발하자 이젠 ‘내선일체’도 문제거리가 안되였다. 한 천황전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苦)를 함께 할 백성일뿐이다. ‘내지’와 ‘조선’의 구별적 존재를 허락치 않는 한 민족일 뿐이다. 력사적으로 종족을 캐자면 다를지 모르나 일본인과 조선인은 합체된 단일민족이다.”

이는 1942년 1월 23일 《매일신보》에 발표된 김동인의 수필 《감격과 긴장》의 첫 단락이다. 우리가 이 수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일제에 보여주는 막부득이한 굴복의 뜻이 아니라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의 앞잡이가 되겠다는 김동인 자신의 결의와 결단이다. 더욱기 “이미 자란 아이들은 할 수 없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에게는 ‘일본과 조선’이 별개 존재라는 것을 애당초부터 모르게 하려 한다”는 구절이야말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아부, 동조한 김동인의 변절과 타락을 적라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950년 김동인은 마약중독에 뇌막염까지 겹친 나머지 반신불수가 되여 서울성동구 홍익동의 허술한 집에 누워있었다. 이듬해 1월 5일 서울이 다시금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자 김동인의 처자들은 이미 페인이 된 그의 요밑에 돈 10만 환을 넣어놓고 피난을 갔다. 김동인은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불우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최서해의 말마따나 “한국에 독립불기(獨立不羈)의 괴물이 있으니 그 이름은 김동인이라” 고 뛰여난 문학적 천부와 풍부한 가산을 등대고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리면서 자존과 오만의 성을 쌓아오던 작가 김동인, 하지만 1930년 경의 풍파는 김동인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니 그는 권태와 허무, 타락과 훼절의 낭떠러지로 걷잡을 수 없이 굴러떨어졌다. 과연 한 작가의 인격과 신조라는것이 이처럼 허무하고 보잘것 없는 것이란 말인가? 전후가 모순된 김동인의 작가적 생애와 그의 비극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있는가?

 

2

 

작가들의 창적 동기(動機)는 어떤 심리적 토대 위에서 생기는가? 인간의 활동에는 풍부성동기와 결핍성동기가 있다. 풍부성동기란 그 어떤 자극과 성취를 얻으려는 인간의 심리적 욕구를 가리킨다. 례컨대 유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격렬한 자극과 모험을 갈망하며 개인적 리익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간고한 사업에 뛰여든다. 이러한 풍부성동기는 단순한 생존의 욕구를 넘어 탐구와 창조 및 자아실현의 욕구로 표현된다. 풍부성동기와는 달리 인간의 결핍성동기는 물질적 및 정신적 평형을 상실한 인간이 다시금 그러한 평형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구, 반발로 나타난다.

1930년 《광염쏘나타》이전의 창작활동은 이른바 김동인의 풍부성동기에 의해 진행되였다고 할 수 있다. 풍부한 가산을 등대고 문단에 오른 김동인은 개인과 사회의 대립, 그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원동력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였다. 그는 문학에 대한 사랑, 젊음의 패기와 명예욕으로 문학의 문을 두드렸고 또 그러한 자아실현의 욕구가 그의 20년대 문학을 좌우지했다. 첫 순문학지 《창조》의 경비를 몽땅 자부담한 김동인, 그는 계몽주의와 교훈주의를 내세운 이광수의 문학에 반기를 들었고 그 자신의 말마따나 “전작의 임의의 일행을 읽고라도 이는 동인의 작이며 동인만의 작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 만한 강렬한 동인미가 있는 독특한 문체와 표현방식의 발명”에 고심하였으며 정치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문학만을 하자고 부르짖으면서 “인재가 결핍한 이 땅에 소설도(道)가 생긴지 30년, 나와 동렬까지 이른 사람은 혹 있겠지만 나를 앞도하고 올라선 사람은 아직 기억이 없다” 라고 스스로 문단의 제1인자로 자부했던 것이다.

1920년대 김동인의 문학을 풍부성동기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1930년경의 작품은 결핍성동기의 산물이라고 할수있다.
“저것(즉 김동인을 가리킴-필자 주)이 넉넉한데서 자라서 지금 재정에 몰리어 쩔쩔매며 돌아가는 것이 도리여 민망하신 모양이였다. 이 중년의 아들을 간간 어린애 몰래 즐겨하는 과일 같은 것을 사다 주시는 것을 받을 때마다 도리여 콱 울고 싶었다. 십년 미만에 십여 만의 재산과 그 재산에 나는 수입까지 탕진하였으니 상당히 질탕히 놀았다.”
이는 모친의 생평을 다룬 김동인의 소설 《가신 님》중의 한 단락인데 파산과 배반을 당한 그 당시의 쓸쓸한 심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들레르나 와일드에 못지 않게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돈을 물쓰듯 하던 문단의 왕자 김동인은 일조에 각박한 원고료에 매달려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깨여진 야심, 꺽기운 자존심, 배반당한 설음과 분노--아무튼 그가 겪은 심리적 갈등과 상처는 너무나 험하고 심각했다. 하지만 오만스러운 왕자 김동인은 꺾기운 날개를 보면서 우드커니 서있는 자신을 용인할 수 없었으며 자기의 “고귀한 혼과 통일된 품성과 오만한 성격만은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갈등과 분노의 배설구를 역시 문학에서 찾았으니 1930년 한해 동안에 탐미주의 소설 《광염쏘나타》를 비롯하여 10여 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김동인은 《창조》시대에 벌써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서방 탐미주의문학에 심취했는데 후일 《문단회고》라는 글에서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고 있다.
“창조에는 평론가가 없었다. …이리하여 얻어낸 것이 임노월이였다. …노월은 당시에는 한 개의 악마주의 신도 오스카 와일드의 숭배자로서 한 순절 학구(學究)였다. 등은 평론이 부족한 《창조》지상에 오스카 와일드의 학설을 소개하기 위하여 노월을 끌어들인 것이였다.” 

따라서 김동인의 탐미주의경향은 1922년에 발표된 그의 출세작 《배따라기》에서 편단(片段)적으로, 랑만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유아독존과 예술적 야심으로 불타고 있던 20대의 청년 김동인은 무절제한 인격을 최대한도로 만족시킬 수 있는, 수천만 인간의 희생을 대가로 바쳐야 하는 향락의 유토피아를 미의 왕국으로 보고 있으며 “인생의 향락자”이며 폭군인 진시왕을 미의 창조자로, “력사이후의 가장 큰 위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악마적 탐미주의 경향은 파산과 배신을 당한 후에 발표한 단편 《광염쏘나타》와 《광화사》에 와서 보다 더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광화사》의 주인공은 화공 솔거이다. 그는 어리시절의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자애로운 어머님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는 눈먼 소녀를 모델로 삼는다. 그는 소녀에게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화폭에 담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두 눈이 먼 이상 어머니에게서와 같은 자애로운 “꿈과 신비”만은 찾을 길 없다. 어머님의 아름다움을 재생시키려 했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솔거는 그만 미쳐버린다. 그는 불쌍한 맹인 소녀의 목을 조른다. 나중에 축 늘어진 소녀를 떨어뜨리는 순간 벼루돌이 엎어지면서 먹물이 튕겨 화폭에 눈동자가 박히고 작품은 최후로 완성된다. 아름다운 맹인소녀의 죽음이 작품을 완성시켰다는 것은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예술의 탄생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설은 예술과 생명, 예술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가 어느것이 더 귀중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느 쪽을 선택, 긍정하고 있는가? 그 답을 우리는 《광염쏘나타》에서 찾을 수 있다.
《광염쏘나타》는 백성수라는 천재적인 청년 작곡가가 방화, 살인 등 범죄적 행동에서 예술적 충동과 령감을 얻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백성수는 평화로운 마을에 불을 지르고 훨훨 타오는 불길--미친듯한 화염에서 음악적 충동과 령감을 얻는다. 그후 그의 병태적인 예술심리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보다 몸서리치는 자극을 추구한다. 그는 거리낌없이 사체를 학대하고 사간(死姦)을 저지르고 살인을 감행한다. 이처럼 백성수는 지극히 반도덕적인 패륜행위와 범죄행위를 통하여 이른바 예술적 충동과 령감을 얻고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음악평론가 K씨의 입을 빌어 자신의 립장과 관점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힘있는 예술, 선이 굵은 예술, 야성으로 충일된 예술--우리는 이것을 기다린지 오랬습니다. 그럴 때에 백성수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말이지 백성수의 그의 예술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문화를 영구히 빛낼 보물입니다. 우리의 문화의 기념탑입니다. 방화? 살인? 변변치 않은 집 개, 변변치 않은 사람 개는 그의 예술의 하나가 산출되는데 희생하라면 결코 아깝지가 않습니다…”

백성수라는 주인공의 광란적이고 악마적인 탐미주의적 경향을 극구 변호, 긍정한 K씨의 말은 작가의 탐미주의 또는 예술 지상주의의 본질을 일목료연하게 보여주었다. 작가가 볼 바에는 예술적 미와 도덕적 선(善)은 궁극적으로 모순, 대립되고 있으며 그 량자가 모순될 때 선택권은 응당 예술적인 미에 부여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귀한 예술을 낳기 위해서는 도덕과 륜리를 저버려도 무방하며 “천년에 한번, 만년에 한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천재”에게는 방화, 살인을 포함한 그 어떤 패륜과 범죄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존귀한 예술궁전을 세울 절대적인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로 로마를 불바다로 만든 네로나 수천만 인부들의 피와 눈물로 호화로운 아방궁을 지은 진시왕을 찬양한 것이나 다름없는 작가의 이러한 탐미주의 관점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모독이며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인간학--문학의 본질에 배치되는 언어도단임에 틀림없다.
다음으로 작가는 “귀기(鬼氣)가 사람을 엄습하는듯한 그 힘과 방분스러운 표현과 야성”--이러한 특질을 가진 “기념비”적인 예술작품은 병태적인 천재의 광란적인 령감에 의해서만 산생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미친듯안 령감은 예술적 창조과정의 조건으로, 표징으로 되고 있다는 사실은 고대그리스의 플라톤으로부터 오늘날의 많은 문예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언급하고 긍정하였던 바이다. 례컨대 플라톤은 “령감을 얻지 못하고 정상적인 리지를 잃은 미친듯한 상태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창조할수 없으며 시를 짓거나 신령을 대신하여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고금의 걸출한 예술가들의 창작과정 역시 미친듯한 령감의 폭발과정이였다. 그런 예술가들 속에는 간혹 스웨리예  표현주의연극의 대가 스트린베르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집권자들의 압제와 몇 차례 애정생활의 파탄으로 말미암아 후반생을 거의 반미치광이 상태에서 살았는데 환각과 정신착란으로 하여 점차 렵기적이고 기괴망측한 예술세계에 빠져들어갔다. 김동인의 대표작 《광염쏘나타》 역시 그런 반미치광이 상태에서 쓴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환자의 광란적인 심리와 예술가의 변태적인 심리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더우기 정신병환자와 천재적인 예술가 사이에는 필연적인 련계가 없다. 물론 정상적인 인간도 환각, 착각 등 변태적 심리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러한 변태적인 심리상태를 억제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지와 리성의 힘으로 자신의 심리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환자의 경우는 자신을 현실과 완전히 갈라놓으며 환각과 착란--백일몽의 세계속에 영원히 빠져있게 된다. 더우기 정신병환자는 정상적인 인간에 비해 그 지력상수가 현저히 낮다는 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심리학자 칸그린은 《변태심리학원리》라는 저서에서 “만약 광증을 천재의 주요한 표징이라고 한다면 정신병원이야말로 철학, 문학과 예술을 낳는 요람으로 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김동인의 병태적인 탐미의식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풍자로 된다.

 

3

 

모험, 살인, 방화, 동성애… 등 악마적 행동에서 예술적 충동을 받고 미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포우, 보들레르, 와일드 등 시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하여, 또한 일본 다이쇼(大正)시기의 작가 준이찌로와 류노스께의 탐미주의 소설 《문신(刺靑)》이나 《지옥변》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문신》의 주인공--문신사 세이지쯔는 문신하러 오는 사람들의 몸에 바늘을 찌를 때 그들의 신음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미묘한 쾌감을 느낀다. 실로 5, 6백군데나 바늘에 찔려 방울방울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상대자를 랭혹한 미소로 내려다보는 세이지쯔야말로 평화로이 잠든 마을에 불을 싸지르고 그 광경에 도취되여 있는 백성수와 얼마나 흡사한가? 《지옥변》의 주인공인 화가 요시히데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제자를 묶어놓고 뱀을 풀어놓는다든가, 사나운 부엉이를 추겨 붙인다든가 아무튼 벼라별 괴벽하고 혹독한 짓을 다한다. 그는 《지옥변》이라는 그림을 그리고저 꽃다운 궁녀가 앉은 호화로운 꽃수레에 불을 질러 허궁 거꾸로 떨어뜨릴 것을 요구한다. 그런즉 요시히데 역시 아릿다운 녀인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사체에 거리낌없이 사간을 저지르는 백성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광염쏘나타》나 《광화사》에 표현된 김동인의 탐미주의는 그 자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만약 준이찌로와 류노스께의 탐미주의는 미에 대한 원초적인 동경과 욕구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김동인의 탐미주의는 배반당한 설음, 불붙는 복수심에서 나왔으며 맹수의 부르짖음과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하는 무서운 감정의 발현으로 되고 있다. 《문신》의 주인공 세이지쯔는 빛나는 미녀의 육체를 찾아 거기에 자신의 혼을 찔러넣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있다. 몇년 만에 자신의 심미적 요구에 맞는 미녀를 만나게 되자 세이지쯔는 자신의 온갖 지혜와 정성을 몰부으면서 그 미를 가꾸는 “비료”로 되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에게서는 미에 대한 집요한 추구, 미적 창조과정의 미묘한 흥분과 쾌감, 예술가의 숙명적인 헌신성이 강조되여 있다.

《지옥변》의 주인공 요시히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니 그의 괴벽한 성미, 랭혹한 기질은 역시 “천하의 제1화가”로서의 자부와 집념, 천하를 경악케 하는 명작을 내놓고 말리라는 예술가의 원초적인 충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백성수와 솔거의 경우에는 그들의 상처 입고 배반당한 감정, 무절제한 저주와 복수의 욕망이 강조되여 있다. 백성수는 광포한 음악가의 사생아로 태여나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무서운 고생을 겪으면서 자라났다. 문득 어머니가 몹쓸병에 걸려 들어눕자 백성수는 의사를 청할 수 있는 돈을 구하려고 무작정  남의 담배가게에 뛰여든다. 하여 그는 반년간 무서운 옥고를 치르게 된다.
“반년 뒤에 광명한 세상에 나와서 자기의 오막살이를 찾아가니 거기는 벌써 다른 사람이 들어 있었으며 어머니는 반년전에 아들을 찾으며 길에까지 기여나와 죽었다 합니다. 공동묘지에 가보았으나 분묘조차 발견할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날 백성수는 평화로운 마을에 불을 지르고 그의 첫 번째 야성적인 명곡 《광염쏘나타》를 작곡한다.
한편 솔거는 “소위 추한 얼굴을 형용하는 온갖 형용사를 한 얼굴에 지닌 흉한 얼굴의 주인”인데 밖에 나갈 때는 방립을 쓰고 얼굴을 베로 가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여 솔거는 두 번이나 사랑하는 녀인의 배반을 받는다. 또 그 까닭에 세상에 대한 원한과 인생에 대한 저주와 복수의 감정은 날따라 비등해진다.
“세상은 자기에게 안해를 주지 않는다. 보면 한 마리의 곤충, 한 마리의 날 짐승도 각기 짝을 찾아 즐기고 짝을 찾아 좋아하거늘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짝없이 오십년을 보냈다 하는데 대한 불만이 일어났다… 세상이 주지 않는 안해를 자기의 붓끝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비웃어 주리라. 이 세상에 존재한 가장 아름다운 계집보다도 더 아름다운 계집을 자기 붓끝으로 그리어서 못나고도 아름다운 체 하는 세상 계집들을 웃어 주리라. 덜 난 계집을 안해로 맞아 가지고 천하의 절색이라고 믿고 있는 사내놈들을 깔보아 주리라. 사오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좋다구나 춤추는 헌놈들을 굽어보아 주리라. 미녀!미녀!”

작품속의 이러한 장면과 서정토로에는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를 막론하고 작자 김동인의 복잡한 심경이 투영되여 있다. 1930년 경에 경제적 파산과 안해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정신적 불안과 절망, 허무와 권태, 저주와 분노--한때 맘껏 영화를 누렸던 문단의 총아 김동인의 내적 울분과 갈등은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게다가 불면증과 아편중독까지 겹쳐 그야말로 심신이 만신창이 된 김동인은 참으로 백성수처럼 불을 지르고 솔거처럼 사람이라도 죽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단의 제1인자로서의 체면과 독존, 명예욕으로 하여 실패와 좌절을 승인할 수 없었으며 무너진 “동인정신”의 페허 우에 아무것이나 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지만 무너져버린 지난날의 영화는 다시 찾을 길 없고 막상 허세를 부린다 해도 그의 권위를 인정해 줄 사람도, 그의 자고자대를 받아줄 사람도 없었다. 하여 김우종의 말마따나 “허무한 령토 우에서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은 그 죽음의 혼에서 다시 피기 시작한 독버섯이였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노래한 <악의꽃>과도 같은 것이였다. …그에게는 악마만이 그의 최선(最善)이요, 그의 공허를 메울 수 있는 전부의 재산이였다. 그의 마지막 파멸을 준비하기 위한 만찬회처럼 달콤하고 슬픈 것이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그의 마지막 파멸에 쾌감을 주는 아편과 같은 것이였다.”

다음으로 김동인의《광염쏘나타》에서는 와일드의 작품에서와 같은 신사적인 멋과 기지, 풍부한 환상의 힘을 볼 수 없으며 또 류노스께의 경우와 같은 “가는 금속선과 같은 밝고 섬세한 문체의 미” 를 볼 수 없다. “화염!화염!빈곤, 주림, 야성적인 힘, 기괴한 강금당한 감정!” –이야말로 《광염쏘나타》의 기본적인 음조이며 색채이다. 실로 일조에 들이닥친 경제적 파산과 정신적 충격 앞에서 김동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참회보다도 까닭모를 저주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상처입은 맹수처럼 집안구석에 처박혀 년로한 모친이 애들 몰래 사다주는 과일을 받을 때, 출판업자들이나 동료들에게서까지 백안시 당할 때 동인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었고 미칠 것만 같았으며 자신의 청고함과 억울함을 두고 소리소리 웨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념두에 둔다면 상술한 두 작품은 그 당시 김동인의 처지와 심리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채훈의 말 그대로 두 “주인공의 언동(言動)은 작가 자신의 처절한 절규이며 김동인 정신의 최후의 작렬이다.”  더욱이 두 작품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천년에 한번, 만년에 한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하여 버린다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광염쏘나타》)
“늙은 화공이여, 그대의 쓸쓸한 인생을 여는 조상하노라.”(《광화사》)
김동인은 자기를 이른바 천재적인 음악가 백성수나 천재적인 화가 솔거에 비유하고 있으니 상술한 구절들은 단순히 주인공을 조상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통곡하는 말같이 들린다.
마지막으로 《광염쏘나타》는 반성과 참회보다는 저주와 분노에 치우친 까닭에 인물성격의 형성, 발전 및 심리의 움직임에 랭철하고 섬세한 묘사를 가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탐미주의 작가 와일드의 경우와는 달리 작가의 주관적인 인간해석에 따라 미리 재단해 놓은 인간형의 연역적인 서술에만 급급해하고 그 구체적인 환경에서의 심리의 미묘한 흐름과 변화에는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그럼 와일드의 장편 《도리언그레이의 화상》의 한 장면과 비교해 보자.
“점점 하얀 손가락이 카텐을 헤치고 기여들어 떠는듯이 보인다. 까맣고 괴상한 모양으로, 묵직한 그림자가 실내 구석으로 살그머니 들어와 그곳에 움추린다.”
보다싶이 “하얀 손가락이 카텐을 헤치고 기여들어 떠는듯이…”라든가, “까맣고…움추린다”라든가 하는 묘사에는 탐미주의 작가다운 섬세하고 예민한 신경적 감각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김동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날 밤 혼자 몰래 그 여자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칠팔 시간전에 묻어놓은 그의 무덤의 흙을 다시 파서 그의 시체를 꺼내놓았습니다. 푸르른 달빛아래 누워있는 아름다운 그의 모양은 과연 선녀와 같았습니다. 가볍게 눈을 닫고 있는 창백한 얼굴, 곧은 코날, 풀어헤친 검은 머리- 아무 표정도 없는 고요한 얼굴은 더욱 처염함을 도왔습니다.”
보다시피 이는 기괴하면서도 처절한 장면이다. 그러나 그 기괴함과 처절함은 개괄적인 륜곽으로 전달될 뿐이다. 감각적이며 정서적인 분위기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다. 더우기 “푸르른 달빛아래…아름다운 그의 모양…”이라든가, “창백한 얼굴…풀어헤친 검은 머리…”라든가 하는 이 정경묘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단어와 구절들은 너무도 상식적이고 설명적이다.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인의 화상》에 나오는 세 중심인물에 언급하면서 “배질 홀워드는 나의 마음속에 있는 내 자신의 형상이고 헨리 작사는 세인들이 본 나의 형상이며 도리언은 내가 되고 싶어하는 형상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광염쏘나타》에서도 작가 김동인은 작곡가 배성수와 음악평론가 K씨로 분화되여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두 인물의 관계는 마치 법정에 나선 피고인과 변호인의 관계를 방불케 한다. 방화, 살인 등 온갖 범죄적행위를 다 저지른 백성수는 음악평론가 K씨에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K씨는 백성수의 무죄와 정당함을, 예술의 지고무상함을 역설한다. 물론 백성수의 변명이나 K씨의 변호가 전대미문의 언어도단임은 더 말할 나위 없고 더욱이 억지공사로 늘어놓은 K씨의 장광설은 김교선의 말 그대로 “한편의 론설문을 방불케 한다”.

요컨대 상처입은 “맹수의 부르짖음”으로 특징지어지는 김동인의 탐미주의는 그 이념을 고취하고 그 이념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했을 뿐이지, 그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이였다. 이는 현대문학의 초창기에 세기말적인 문예사조로서의 탐미주의를 급급히 수용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동서방 탐미주의에 관한 비교연구는 후일의 과제로 남기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4

 

보들레르, 와일드, 류노스께를 비릇한 동서방 탐미주의 작가들의 후반생은 거개 불우하고 비참하였다. 특히 뛰여난 미모에 귀신이라도 울릴만한 글재간과 웅변술로 대서양 량안의 절찬과 숭배를 한 몸에 지녔던 시대의 교아 와일드, 치사스러운 동성애로 인한 법놀음에 모든 명예와 영화를 일조에 말아먹고 무서운 옥고를 치르다가 객사한 와일드의 후반생은 쓸쓸한 것이였다. 그에 못지 않게 조선의 와일드--김동인의 후반생 역시 쓸쓸하고 비참했다. 도대체 김동인의 비극은 어디에 있는가?
“그 무지개를 잡아다 뜰안에 갖다놓으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울것인가?…
아 무지개! 그것은 마침내 사람의 손으로 잡지 못할 것인가!…
아직도 그와 같은 길을 걸을 수만의 소년들이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이 손년은 또한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그 야망을 마침내 단념하기로 결심한다.
그때는 이상타. 아직껏 검었던 머리는 하얗게 되고 그의 얼굴에는 전면에 주름살이 잡혔다.”

이는 자신의 일생을 예술적으로 총화한 김동인의 수필 《무지개》중의 몇 구절이다. 김동인은 사회교화의 도구 격인 이광수의 문학에 반기를 들고 “구어체에 의한 새시대의 인간과 사상을 재현할 수 있는 합리적인 소설양식”--한국 현대소설을 정립한 선구자의 한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문학의 진, 선, 미를 기계적으로 갈라놓고 극단적인 자아의 표현으로 일관된 문학을 초래하였고 사회현실적 감각을 외면한 탐미의식, 예술지상주의에 도취되게 하였다. 참다운 작가는 그 시대의 생존문제, 민족과 국민의 지향과 정서를 대변하고 그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데 진력해야 한다. 하지만 김동인의 심리적 갈등과 예술적 지향은 일제의 식민통치 밑에서 신음하고 항거하는 그 당시 대중들의 현실적 요구와 감정세계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였다. 그러므로 그가 허황한 탐미의식의 무지개를 쫓아가면 갈수록,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으면서 예술지상주의 상아탑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와 현실과의 락차는 커만 갔고 닥쳐올 파멸의 운명은 결정적인 것이였다. 바로 여기에 김동인의 비극이 있었다.

                   -《아리랑》 제52기,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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